|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14편 1절-3절.
14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3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왜 이런 말이 나올까? 첫째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그러니까 어리석은 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은 시인을 하지 않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느냐? 바람은 눈에 안 보이지만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없는 거냐? 알고 보면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을 얼마든지 발견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어리석기 때문에 발견을 못하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해 주려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만들었다. 즉 눈에 보이는 세상을 가지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세상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분명히 실존하는 것도 상당히 많은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정을 한다면 이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시인할 리가 없다. 이 공간세상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전파가 날아다니고, 테레비의 영상이 날아다니고 있는 거다. 그걸 기계로 잡으면 나타나는 거다. 이런 것을 보여주는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고집을 하고 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도 다 모른다. 그런데 물질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도 워낙 가짓수가 많기 때문에 깊이 알고 보면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신비로운 것이 더 많다. 바다에나 산에서나 동물에나 식물에나 보면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은 더 많고 신비롭다.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이런 것을 다 만들어 놓은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큰 것,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을 한다.
눈에 보이는 물건을 만지는 것보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은 더 신비롭다.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도록 두뇌가 돌아가는 것이 정말 신비롭다. 바람이 분명히 있지만 눈에 안 보이고, 사람의 마음도 있지만 사람의 눈에 안 보인다. 소리가 분명히 귀에 들리지만 그 소리는 눈에 안 보인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는 물질에 속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것이 많이 있다. 세상 물질계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신령한 세계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세상 마지막 때의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무형적이며 신령적인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하나님의 도덕성이나 하나님이 능력성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지를 못한 채 눈에 보이는 세상만 잡으려고 쫓아다닌다. 눈에 보이는 것만 쳐다보며 산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세상 위에 불이 떨어지는 것을 모르고 세상을 붙잡으려고 좇아 뛰어가니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어리석은 자는 눈에 보이는 위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또 두 번째로 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느냐? 죄로 인해서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신령한 것을 못 보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게 된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이 끊어져 버렸다. 영의 눈이 먼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성이 멀어져서 하나님과 끊어지고 단절된 상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성이 끊어진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부모형제 간에, 부부 간에 이것이 다 끊어진다. 왜 그런가 하니 상대의 마음의 움직임을 생각지 못하고 자기 욕심만 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성이 형성이 되어지지를 않는 거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느냐 하면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성공 출세를 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참 많다. 하나님이 없이 자기 힘으로 세상에서 성공 출세를 했으니까 그 힘으로 세상을 산다 그 말이다.
처음에는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보채다가 하나님이 안 들어주거든. 그랬을 때 자기의 노력과 수단으로 어떤 일을 해결하게 되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보다 부자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도 안 믿고 악을 행하면서 더 잘 살고 벌을 받지도 않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게 된다. 하나님이 있으면 왜 저런 사람에게 벌을 안 주고 그대로 놔두느냐 그 말이다. 망해야 될 텐데 더 잘 되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게 되더라.
네 번째는 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느냐? 인간 자기를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게 된다. 인간 자기는 영과 육으로 결합된 인간인데 이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고, 그리고 현실이 교체되는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고, 죽음 저 너머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고, 세상 끝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 자기를 만들어 놓은 목적을 모른다. 환경이 바꾸어지는 목적을 모른다. 세상 끝이 어떻게 되는지 그 목적으로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게 되더라.
다섯 번째는 하나님을 바로 못 배워서 알지를 못해서이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는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어있는 자는 전부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을 하는 사람은 아직 영이 죽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 된다.
방송에 보니까 신비로운 게 뭔가 하니 젖 먹이는 여러 엄마를 세워놓고 말도 못하는 갓 낳은 어린아이를 엄마 하나하나의 가슴에 대주면 다른 엄마 젖은 안 먹고 자기 엄마의 젖 냄새를 맡고 그 젖을 빨더라. 그런데 인간은 영이 죽어놓으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못 부른다. 하나님을 찾을 줄을 모른다.
일곱 번째는 심지어 선악과 따먹은 교인들도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져야 할 텐데 이건 없고 세상과 더 관계성을 가지도록 하는 가르치고 세상을 가지라고 가르치게 되면 이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성이 단절이 되는 것이니 이 자체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다. 이런 신앙정신은 하나님을 열심히 부를지라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다. 왜 그런가 하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하나님을 불러놓고 하나님과 인격성을 가지지 않고 세상과 물질적 관계성을 가지니 그런 거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집에 내버려두고 집을 나가면 그 아이는 고아다. 또 부모가 죽어서 된 고아도 있다. 부모로부터 내버림을 당했건, 자기가 집을 나왔건 자기 혼자 나돌아 다니면 고아다. 고아는 부모와 인격적 관계성을 가지지 않는다. 설령 한 집에 살지라도 부모와 인격적 관계성이 없다면 이는 고아나 마찬가지다. 부모가 있어도 부모가 없는 것과 같다. 이러면 제 마음대로 자라게 된다.
막말로 할 것 같으면 자식이 부모와 인격적 관계성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 안 그러면 뭐하려고 부모 밑에서 부모덕을 보며 사느냐? 부모가 자식에게 옳은 것을 가르쳐 주지 않고, 또 자식은 부모로부터 옳은 것을 못 받아 가진다면 부모와 자식 간에 인격적 관계성은 없고 몸뚱이만 키우는 거냐? 이거는 돼지나 마찬가지다. 인간이란다면 인격적 관계성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내보내야 한다. 자기 혼자 스스로 살아야 한다.
인간이라면 믿고 안 믿고 간에 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반은총을 받고 있다.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이고 간에 해가 뜨면 해의 온기를 다 받는다. 이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혜택이다. 자기가 게으르게 살아도 하루 세 끼 밥이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다. 자기가 언제 농사짓고 쌀을 만들어서 밥을 해 먹는 거냐? 하나님의 일반은총으로 은연중에 다른 사람으로 통해서 자기가 그렇게 사는 거다. 누구든지 자기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기를 코로 마시면서 숨을 쉬며 살고 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부인한다.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고 할지라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른다.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도 굉장히 어리석은 것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는데 이 면은 없고 예수 덕으로 세상을 더 가지려고 하니 이건 인격적 관계성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하나님께 잘못 보이면 하시는 말씀이 ‘네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다 빼앗기리라.’ 일반 자연은총에 속한 것은 다 빼앗아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붙들고 있을 수 있느냐? 없다. 하나님이 한 번 쳐버리면 꼼짝없이 나가 떨어져 버린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어디 있어? 내 주먹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래? 네가 네 주먹에 네가 날아갈 때가 있을 거다.’ 장담하는 사람들 얼마 못 가서 큰 코 다친다. 권투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가 남을 때리려면 자기는 안 얻어맞느냐? 자기도 얻어맞는다. 그래서 시합에서 이겼다고 해도 온 몸이 아프고 쑤신다고 한다. 왜 그렇게 됐느냐? 자기 주먹을 믿고 사느라고 그렇게 된 거다. 자기 주먹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다.
물질은 썩으면 악취를 풍기게 되어있다. 사람이 부패가 된 것을 먹으면 병이 들고 죽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정신적 도덕성적으로 부패가 되면 정신적으로 썩었기 때문에 그 가정이 몰락이 돼버리고, 따라서 사회가 몰락이 되어버린다. 인간 스스로가 인격적으로 망해있으면 육신적으로 망해 들어가는 것은 빤한 거다. 그러니까 사람의 정신이 중요하고 도덕성이 중요하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정신이 늘 자라야 하겠는데 교회 안이 세상정신으로 오염이 되면 교회는 거룩성이 완전히 몰락이 돼버린다. 그런데 교회의 거룩성이 몰락이 되는 이것이 눈에 보이느냐?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정신이 썩은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걸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비진리적 세상성적 종교운동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운동이니 거기서 떠나야 한다. 계:에 보면 얼룩말이 있고, 검은 말이 있고, 붉은 말이 있고, 흰말이 있다. 얼룩말은 혼합운동이다. 사람 눈을 홀리게 하는 거다. 검은 말은 죽는 것. 흉년 사망 죽음. 붉은 말은 전쟁. 죽이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변질. 흰말은 거룩하게 만드는 운동.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운동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흰말운동을 일반 도덕성적 운동으로 보기도 한다. 주석에도 보면 흰말운동을 일반 도덕성의 운동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일반 도덕성 운동은 선악과 따먹은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람을 희게 못 만든다. 그래서 나는 흰말운동을 일반 도덕성 운동이라고 보지 않는다. 나는 생명운동을 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흰말을 탄 분이 화살을 가지고 있고, 이 화살을 사람의 심장을 향해서 쏜다. 머리를 향해서 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심장을 향해서 쏜다. 하나님의 옳은 진리의 말씀은 사람의 활동에 두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심령에 겨누고 말을 하는 거다.
그리고 흰말은 탄 분이 먼저 면류관을 받고 그 다음에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긴다. 이기는 운동은 영운동, 복음운동밖에 없다. 일반 도덕성 운동은 절대로 이기지를 못한다. 그리고 흰말을 헬라어로 보면 현재적으로 그것이 계속 희어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이건 일반 도덕성 운동이 아니라 복음운동이라, 생명운동이라, 영운동이라고 보는 거다.
그리고 복음운동은 이 세상에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네 가지 말 중에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거다. 그러니까 생명운동, 영운동, 복음운동은 이 땅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흰말운동이 이 일을 하는 것이라고 보는 거다. 성경은 일반 도덕성적 운동을 하라고 준 게 아니라 영운동을 하라고 준 거다.
어쨌든 세상적 일반적 도덕성 운동은 복음운동이 아니니만큼 우리는 거기에서 떠나야 한다. 현재 자기와 자기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적마다 더 부패되어 가는 건지, 아니면 부패성이 점점 없어지면서 자기가 정화되어 가는 건지 알아야 한다.
‘소행이 가증하여.’ 책임감이나 부담성을 느끼지 못하고 악한 짓이 점점 더해간다는 뜻이다. 이런 자들은 자기가 비진리적이며 세상적이며 육적인 운동을 앞장서서 해놓고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질 줄 모르고 남에게 전가시키기도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교회를 속화시키는 운동을 목사 자기가 해놓고는 그 원인이 교인들에게 있는 것처럼 교인들에게 ‘믿음이 있다. 없다’ 하면서 자꾸 남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거다.
자기가 완전하고 정확한 것을 가진다면 실수가 별로 없겠는데 세성성적인 가르침을 받게 되면 옳다고 하는 것이 수시로 틀려져 버린다. 그래서 자기는 분명히 옳은 것으로 알고 했는데 지나고 보니 ‘아차, 이게 아니었구나’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알던 모르던 은연중에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마땅히 회개를 해야 한다. 교회에서 배우는 것은 수시로 그 기준이 달라지는 세상성적인 것을 배우면 안 된다. 한 사람에게든, 열 사람에게든, 백 사람에게든, 만 사람에게든, 믿는 사람에게든 안 믿는 사람에게든 정확한 것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옳다.
우리가 실수한 적이 많이 있는데, 청년 때에 하나님을 위해서 죽자 사자 열심히 충성봉사를 했는데 오늘날 와서 깨닫고 보니 ‘아이고, 이거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행동적으로 지은 죄도 있겠지만 나는 옳은 것으로 알고 가르쳤는데 그게 하나님 앞에서 전혀 다른 길일 수도 있다. 이런 면을 생각해 볼 때 정말 통곡스런 일이다.
길을 가던 사람이 나에게 ‘아무 데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됩니까? 어느 버스를 타야 됩니까?’ 하고 물었을 때 나는 확실히 안다고 해서 가르쳐 주었는데 정 반대방향으로 가르쳐 주는 일이 혹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내가 가르쳐준 방향대로 가면서 물었던 물어서 갔지만 자기가 가려는 곳이 나오지를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 정 반대 방향으로 가라고 해서 그대로 가서 그곳을 찾아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나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나는 지금의 부패된 기독교계를 보면서 내 나름대로 청년 때에 가르친다고 한 게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지금의 타락된 교회현실이 그 때 내가 잘못 가르친 영향도 있는 것으로 여기며 그 때의 나를 저주해 버렸다. 그 저주된 증거는 이제는 내가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과거의 그런 방법을 안 쓰는 거다. 목회를 해 오면서 그런 방법을 안 쓰자니 별별 소리를 다 들었고, 많은 고난도 받았다. 그래도 과거에 쓰던 그런 방법은 안 쓴다.
누가 그 옛날 청년 때에 열심히 충성봉사를 하던 나를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때의 그 나는 참 내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를 그 때의 나인 것처럼 생각지 말아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느 누가 과거에 그렇게 하던 나를 생각하면서 현재적으로 이룰구원으로 바로 나가고 있는 나를 헐뜯는다면 너에게는 저주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다윗의 기도 속에도 이런 게 들어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선이라 할 때 하나님 당신은 자체적 선이시고, 우리는 영원 궁극적 최종적 결과적 목적적으로 영능의 실력으로 신령계를 누리는 그 누림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타의 속에 이 신령한 실력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선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인격과 성품을 입히는 것이 선이고, 우리 또한 이 일이 잘 되도록 서로가 동참을 하고 협조를 하고 참여하는 것이 선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이라고 하면 모든 면에서 동참 협조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게 선의 사람이다.
성품적으로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은 영원히 변치 않고 자기에게 영원한 효력성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은 자타에게 좋은 거다. 영원히 좋은 거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일반세상의 선은 시간 따라, 사람 따라, 장소에 따라, 사건에 따라, 환경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자기 기분에 따라 변질이 되고 자꾸 변한다. 선악과 따먹은 선은 자꾸 변한다. 교회에서는 변하는 이 선을 주면 안 된다. 변하는 선을 말을 하면 안 된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할 때의 이 선이 일반적인 선의 개념이냐? 일반적인 선은 시간 따라, 사람 따라, 장소에 따라 자꾸 변질이 돼버린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기준으로 말을 하게 되면 그 교회는 속화된 거다. 이건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몹쓸 짓을 하는 거다.
2절-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선악과 따먹은 세상이나 세상 속화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 얼마나 악한 거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 이런 자는 하나님의 선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으로 살 수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곳에는 그렇다.
세상을 가르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하나님의 선이 있느냐? 세상에서 주장하는 선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선은 없는 거다. 그러니까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성이 이루어지지를 않는 거다. 이치는 그렇게 돌아가는 거다. 이렇게 되니 세상과 짝지어서 돌아가게 된다. 이건 소행이 가증하고 악한 거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그 면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궁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