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고사장에 들여보내고 근처 카페에 들어왔다. 삼삼오오 모여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엄마들이 수다를 한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귀를 타고 들어오는 소리들이 있다.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수험생을 둔 엄마라는 공통분모가 있는데도 말이다. 대학을 보낸다면서 입시생 커뮤니티 하나 없는, 어디서 얻을 정보 하나 없이 온전히 아이의 수고에만 기대온 것이 좀 지나쳤나 싶다. 물론 1년이라는 시간, 특례입시 전문학원의 온라인 수업을 들으며 준비했다.
혹시나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못해준 건 아닌가, 기도라도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나. 그런데 나는 왠일인지 탄탄대로를 주소서, 합격하게 해주소서, 이렇게 기도를 못하겠더라.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발의 등이 되어 하시고, 그 길의 빛이 되어주시길, 기도하는 것 외에.
조카들 입시 때 아침부터 목이 터져라 기도했다. 하루 종일 기도했다. 매 과목 시간 때마다 기도했다. 결과는 나의 기도를 외면했다. 자사고 출신의 조카(언니의 큰아들)는 실력만큼 시험을 치루지 못했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고, 재수를 한 둘째(언니의 작은아들) 조카도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기대할 만했고, 기도도 간절히 했지만 실패를 맛보았다. 마음이 아팠고 아쉬웠다. 그러나 그 녀석들의 지금을 보면, 부모라도 모른다는 것, 그 아이들이 무얼 잘 할 수 있고, 어떤 길로 인도받을 지 알 수 없다는 것, 최대한 알려고 관찰하고 마음 쓰고 지켜보아도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큰 조카는 지금 활력 공급 직장인이 되었고, 둘째 조카는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있다. 아주 즐겁고 뿌듯하게 공부하고 있다. 녀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너는 특수아동 중에 특히 관심이 있는 분야가 어디냐?"
"자폐특수교육이요."
"어머, 자폐면 가장 힘든 영역 아니니?"
"이모, 그럴 수 있는데요, 내가 자폐장애인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하는 것보다 할 만해요"
녀석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라고 기특했다. 비자폐인이 자폐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녀석이 그들을 이해하고자, 이해를 넘어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졌음이다. 자폐인을 나의 세계로 끌어오기를 삼가고, 자신이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힘쓰면 된다고 한다. 녀석의 말이다.
그제야 알았다. 좋은 대학에 붙여 달라고 기도했을 때는 몰랐는데, 원하는 대학에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이 녀석을 가장 잘 알고 계셨다. 가장 합당한 전공으로 이 녀석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게 하시고, 이 녀석의 인생을 소명으로 이끄시는 듯하다. 실제로 지금도 장애인 봉사를 하고 있다. 그들 속에서 인기가 많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오늘은 고사장 기다림용으로 윤상혁님의 <사랑으로 길을 내다>라는 책을 담아왔다. 엄마들의 수다 속에서 외톨이마냥 나 혼자 책을 보고 있다. '새롭게 하소서'란 프로그램에서 그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난독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의학 공부를 하게 된 간증에서부터 북한에서 평양의대 교수가 된 여정, 북한에 대한 소명에 순종하여 온가족이 북한에 거주하며 사역하게 된 여정을 들었다.
간증에는 늘 극적인 면모가 있다. 그러나 극적 전환 보다 더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험난함과 연약함이다. 소명에 순종한 여정이지만 그 길에 늘상 극적 전환만 있는 게 아니다. 아니, 이런 극적 전환은 수없는 시행착오와 스트레스, 괴로움과 난제들을 위한 고투가 선행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은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이 그리 극적이던가? 일상은 우리에게 답을 내라 요구하지 않는다. '살아라'고 등을 도닥일 뿐.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겠다는 생각도, 무슨 큰일을 이루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야겠다는 것뿐이었다"(50p)
"주님이 우리를 어느 곳에 가라고 하실 때는 무엇을 하라는 게 아니다. 그냥 그곳에 있으면 되는 거였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걸 깨달았다"(67p)
"지난날 똑똑하고 싶었고 남들보다 잘나고 인정받고 싶었지만, 세월이 지나 이제 자신이 갖고 싶은 마음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따뜻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프로젝트가 아닌 우리에게 향해 있다"(121p)
'함께 살아야겠다, 그곳에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시선은 프로젝트가 아닌 우리에게 향해 있다', 책에 쓰여진 이런 언어들이 좋다. 물론 극적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감탄할만한 반전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마저 하나님은 인생들과 그 삶에 집중되어 있음을, 사랑하고 계심을, 그 사랑을 알아주기를 바라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자기 죄악을 합법화하는 것이 기독교의 문제라고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진짜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구심이 들곤 한다. 어쩌면 개독교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나치게 조건화 시키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존재에서 지나치는 것은 거룩한 율법마저도 해가 된다.
넙덕이를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인성으로 선발을 하자면 서울대 갈 실력이라며,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을 무마하곤 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기대가 크고, 발전적인 걸 선호하는 기질이다. 그런데 실패를 많이 했다. 이런 이들에게 보상심리가 자리하는 것이다. 큰녀석을 키울 때 내 안의 '보상심리'를 분별하고자 노력했다. 절대 그런 과오는 범하지 않으리라 들여다보고 들여다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저에 이런 심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는 없겠다. 그래서 고백하건데, 자식은 키우는 것이 아니고, 자라나는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안의 헛된 정욕을 직면하고 부인하는 일, 내 욕심이 만들어놓은 포장지를 벗기는 일이었다. 존재로 충분함을 느끼게 해주는 일은 이런 헛된 것들이 벗겨져야 제대로 기능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수학점수 60점을 맞아와서는 지난 달보다 5점이 올랐으므로 잘한 것이다라고 희희덕 거리는 녀석, 자기 단점을 지적질하는 이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상대의 장점을 대단한 양 인정하는 태도, 항상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 탐색하는 태도(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얘기) 등을 보면, 나와 별개로 잘 큰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시험을 앞둔 전 날, 갑자기 열이 올랐을 때도 녀석은 신경이 과민해지기는 커녕 걱정이 한 짐인 나를 안심시켰다
"엄마, 악한 영들이 나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이런 일로 무너질 것은 아니지"
이런 태도를 보일 때, 다시금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키운 것이 아니구나, 세월과 함께, 주님의 돌보심 안에서 자라난 것이구나를 진심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려놓는다. 내 역할이 부족했나 싶은 노파심.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고 말이다. 화까지도 복을 만드시는 주님, 허물과 실수까지도 선함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주님. 화일 것만 같은 시기를 지날 때, 견디는 힘, 답이 보이지 않을 때, 하루를 살아낼 힘이 중요하니까. 하여 나의 기도는 또 다시, 나를 향한다.
"어떤 결과라도 아이의 수고를 진심으로 인정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