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정확한 시간에 방문해서 자신의 모든 문제를 상담하고 꼼꼼히 체크해서 서류에 기입하고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복지 공무원에게 노인은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을 주변을 늘상 돌아다니다가 가끔씩 다가와 재롱을 떠는 도둑 고양이 새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노인의 눈매는 따스해진다.
하루 종일 노인은 할 일이 없다. 가끔씩 찾아와주던 자식들 조차도 복지공무원 처럼 낯설기만 하다.”
유럽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죠?
2년전 이맘 때 쯤일겁니다. 심상정이 정태인을 대동하고 스웨덴을 한번 방문하고 나더니, 스웨덴 사민주의가 마치 천국인양 떠들어대기 시작하고, 그리고 이곳 진보신당에서도 많은 당원 여러분들께서 최병천이 주축이 되었던 복지국가 소사이어티인가 하는 단체에 가입을 하고 게시판에서 논쟁이 붙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진보 좌파라는 곳에서의 사민주의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실현 가능한 영원한 대안처럼 생각되어질 것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자본주의를 사회진화론으로 이해한 맑스도 문제지만, 인류 역사의 음모인 자본주의를 노동자의 사회참여로서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있다고 한, 스웨덴 사민주의 이론적 원조 칼레비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30대 초반에 요절한 천재라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그 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이론을 보강했죠.
그러나, 어린 칼레비는 자본주의 형성과정을 공부하지 못햇거나 애써 외면한 겁니다.
그가 어떤 과정에서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게 된 지는 모르겠지만, 노름에 빠져서 돈에 대해 지독한 연민에 빠져 있던 가난한 맑스와 오버랩 되는군요.
자본주의 형성 과정은 같은 인류에 대한 동종에 대학 학살과 착취로서 일단은 반인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윤을 위해서 다시 모든 생물들이 살고 있는 지구를 파괴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 후손들에 대한 배반으로 이야기 됩니다.
뿐만아니라, 자본주의는 극한의 경쟁으로 인한 사회의 제반 문제를 만들어냅니다.(스웨덴 극우주의자의 학살은 지독한 경쟁사회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 사회문제의 원인은 경쟁과 착취입니다.
자본주의는 같은 인류에 대한 착취, 후손에 대한 착취, 다른 종들에 대한 착취를 넘어서, 같은 사회의 노동자, 여성(노동, 임신, 양육, 가정 살림등), 이주민, 농민, 청소년, 아동, 가정, 자신의 육체(일 중독), 시간 (자신의 누려야 할 시간)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과 진정으로 우리가 누려할 가치들에 대해서 착취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지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담론이 탄생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여성, 생태, 평화, 교육, 아동, 임신,육아, 이주민 등등.....
1,2 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간의 세력싸움이었죠.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제국주의가 아니었다고 반문하는 좌파들이 계실 것이라고 믿고 추가 설명을 드리죠.
물론,산업국가 후발주자이자 해군력이 약했던 소련이 제 3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완성하고 생산 수단을 국가가 독점하고 공업화에 총력을 쏟습니다.
그 사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인민들은 국가의 노예로 전락하고, 결국은 사회주의 가치는 사라지고 국가독점 자본주의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상으로 어쩔 수 없이 제 3 세계 국가를 침략 할 수 밖에 없는 경제적 동기가 탄생된 겁니다. 따라서, 소련 역시 태생적으로는 제국주의가 아니었지만, 결론으로 말하자면 제국주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19세기에 걸쳐 20세기 초반까지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들의 자본주의를 위하여 침략했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들 중 하나였던 거죠.
혹자는, 그것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이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주주의 체제 때문이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를 봐서도 전혀 아니죠. 그 이유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즉, 더이상 식민지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그들의 속셈을 차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식민지로 가지고 있는 것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손해라고 판단한 때문입니다. 거기에 소련이 끼여들어 우리나라는 분단이 된겁니다.
제 3 세계 착취를 통한 세계무역이 완성된겁니다. 오히려, 더 이상 제 3 세계 인민들을 착취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으로 봐서도 손해라고 판단한 겁니다.
실제로, 그후 미국이 주도가 된 세계경제는 제 3 세계 각국은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을 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단지 생산 수단과 시장의 소유 여부만으로 따지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자율성과 타율성일겁니다. 20세기 어떤 종류의 국가에서든, 권력(제도, 법, 세금, 정책, 교육, 복지)이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했습니다.
이제, 아무리 저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수탈에 대한 이야기는 소용도 없는 거 같습니다.
과거야 어쨌든 현재만 잘 살면 되지 않는냐에 대한 이야기, 남의 나라야 어쨌든 우리만 잘 살면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에 잠시 동조하면서 또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제가 처음 올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노인의 이야기는 스웨덴 노인네들의 일상입니다.
스웨덴 공원에 가보면, 그런 노인 뿐 아니라 유모차를 몰고 다니는 중년 남성들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광경이지요. 특히, 고생하는 이 땅의 여성들이 보면 감동 할만한 장면입니다.
이 땅의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자기 한 몸을 바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우리의 호프 심상정 의원의 눈에는 더욱 그리 할 것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지배와 확장을 위해 타율성을 인류 역사상 유래없이 확장을 했고, 이제 그나마 남아 있던 자율성의 가반 마저도 상품화시키려 하고 타율성으로 편입시키려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 대안으로 떠오른 사회주의도 타율성의 지배에서 한걸음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산업사회가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를 자본주의로부터 그대로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사기업에서 국가로 바뀌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그래서 같은 의미입니다. 개인에서나 단체에서나 자율적인 생산 소비 교환의 가능성이 파괴되면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뿌리까지 뽑혀집니다. (우리나라는 박정희 산업화시대 60년대가 시작이었습니다)
그것의 가장 현실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우리들의 눈 앞에 있는 스웨덴 복지국가인 것을 약삭 빠른 심상정도 몰랐다는 겁니다.
문제는, 타율성의 지배로 인한 풍요와 평등이 아니라, 자율성의 확대인 것입니다.
타율성의 지배에서는 틀림없이 제도적인 평등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와 복지국가들이 어느 정도 보여주었습다.
자율성의 확대는, 몬드라곤 협동조합과 부탄이라는 나라가 현재 진행형입니다.
남편은 자가용 타고 회사에 가서 투표로 회장을 뽑고, 아내는 남편이 벌어 온 돈으로 대형 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는 것이 진정한 복지사회인가?
주주나 재벌 회장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가 더 많은 자가용을 팔고 선박을 파는 것을 고민하고 누구에게나 아파트 입주권이 돌아가는 사회가 진정한 복지사회인가?
이제는, 진보 좌파 뿐만아니라, 짝퉁 진보 민주당 그리고 박근혜 마저도 고민하는 복지사회가 과연 우리의 대안사회인가?
어쩌면 박정희 산업사회의 폐단을 그의 딸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래서 유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아버지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동아시아 자랑스런 유교국가 대한민국의 효녀일 뿐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대통령인 것이다.
(위 단락을 오해 마시라. 우리 한글의 위대한 수사 반어법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혹시나 해서 독해력 떨어진 무식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로서 괄호안으로 대신한다. 과거의 어떤 자들은 이런 글을 발췌해서 공격하기도 하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