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치유
미래 100년 준비
- 정현채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대통령 이야기',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를 읽고 -
크리스토교 국가 건설을 꿈꾼 이승만
1) 크리스토교와 첫 만남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집안 족보집을 암기하도록 시켰다.
그의 집안은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기 때문에
족보집은 방대하고 복잡했다.
어려운 한문과 복잡한 가계도를 외우기가 어려웠으나 읽고 또 읽는 반복 학습을 했고,
이를 통해 6세 때 천자문을 완전히 익혔고 한문 독해력과 문장 이해력을 쌓게 되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배재학당
그는 학업에 두각을 보였으나 과거시험에서 7번이나 낙방했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출세길은 막혀 버렸다.
그러나 이때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를 맞게 된다.
친구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유교 사상이 강했던 그는 처음에 기독교 학교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가
조선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사상임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아 열심히 공부했다.
6개월 만에 영어를 마스터 했고, 입학 8개월 만에 영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학생단체인 ‘협성회’에 가입하여 신문을 만드는 언론인으로,
만민공동회의 연설가로 활동하게 된다.
2) 크리스토 만남과 CVDIP 발견
1899년, 망해가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 활발히 활동하던 중,
고종폐위운동 혐의를 받아 한성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 한성감옥은 가장 고문이 심한 감옥이었다.
고문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그는 선교사들이 보내준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기독교를 근대 이데올로기로만 생각했을 뿐 개종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읽으며
예수님만 나의 고난을 이해해주리라 생각하고 기도하게 된다.
사형을 앞두고 칼을 쓴 채 ‘오, 나의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
오, 나의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십시오.’
기도하는 순간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마음에는 기쁨과 평안이 깃들었다고 한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한성감옥 시절(맨 좌측)
이후 그는 감옥 안에서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게 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영어공부, 번역, 논설기고, ‘독립정신’ 집필,
감옥 내 학교에서 어린이 죄수 교육, 옥중도서실 운영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전도운동에 열심이었다.
감옥에서 동료 죄수와 간수들을 전도한 결과 40명이 회심했고
훗날 이 40명은 대한민국 건국에 큰 역할을 했다.
3) 지도자 준비기
사형수였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에 보낼 사절단이 필요하여 특별사면이 된 것이었다. 투옥 5년 7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고종황제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날 예정이었으나,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이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지정했음을 알게 됐다
(가쓰라-태프트 조약).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외교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미국에 남아 공부하기로 결심하여,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을 거쳐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프린스턴 대학 졸업 사진
4) 독립운동 기획자
1910년, 대학 졸업 후 귀국했으나 한국은 한일병합조약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전국을 돌며 청년들에게 성경, 서양사, 국제법 등을 가르치며
선교사들과 함께 YMCA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일본이 경계했다.
독립운동가인 기독교인 105명을 잡아 일본 총독 암살 모의사건이라는 누명을 씌워
투옥시켰다(105인 사건).
간신히 체포를 면한 그는 한국인이 많은 하와이로 망명을 가서
그곳을 독립운동 기지로 삼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면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한인기독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하와이 한인기독학교 학생들과 찍은 사진
그러던 중 1918년 윌슨 대통령이 ‘평화를 위한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윌슨의 말에,
이승만은 ‘우리나라가 강력한 독립 의지를 보이면 국제 사회가 도와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독립을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열도록 건의했고,
이것이 3.1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회의 참석자들과 찍은 사진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났고,
이승만은 뒤이어 ‘미국판 3.1운동’으로 불리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회의’를 일으켰다. 3.1운동의 영향으로 곳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이후 상해통합임시정부로 합쳐지면서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5) 조선 독립의 물밑작업
그는 무력으로 독립(무장투쟁론)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다.
일본군에 비해 독립군이 턱없이 부족했고,
일본군을 이길 나라는 미국뿐이라고 생각하여 친미외교를 펼쳤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일본의 전쟁을 예견한 이승만의 책 'Japna Inside Out'
이승만은 ‘언젠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많은 미국인들이 다치게 된다.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하려면 반드시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친일 분위기였던 미국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예견대로 일본은 계속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이승만의 외교업적이 인정받기 시작했다.
1943년 미국, 영국, 중국 정상이 모인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을 자유독립국으로 하자.’는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서신을 루스벨트에게
세 차례나 보낸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후에 이 카이로 선언은 유엔의 대한민국의 합법정부 수립 승인에 결정적 영향을 했다.
2년 후인 1945년, 일본이 전쟁을 그치지 않자
결국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일본은 항복했다.
미국의 승리와 카이로 선언으로 조선은 독립하게 되었다.
6) 남한의 공산화 위기
독립을 했어도 상황은 여전했다.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세워 연합군 4개국(미, 영, 중, 소)이 공동으로 신탁통치를 하려고
했으나,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계속됐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1946년 북한 최고정권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워 공산혁명을 먼저 시작했고,
이로 인해 남북분단은 현실화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남한에서는 미국이 소련과의 관계 때문에 진전이 없었고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의 지도자들은 친공산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승만이 반공을 주장한 이유는
1) 공산주의가 자유를 억압하고 교회를 파괴할 것을 알았고,
2) 모스크바에서 굶어 죽어가는 러시아 국민들을 실제로 보고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전세계는 반공을 외치는 이승만을 비난했고,
공산주의를 따르던 남로당은 이승만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트루먼 독트린 발표
그러나 미국이 결국 소련의 야욕을 깨닫고,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소련과의 냉전을 알리며 이승만의 ‘대한민국의 반공 정권 수립’ 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1948년 5월 10일 한반도에서 최초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의원 198명이 선출되었고, 이들이 최초의 헌법을 제정했다.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직을 맡아 7월 1일 ‘대한민국’이라고 국호를 정했고,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을 공식 선포했다.
7월 20일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으며,
12월 12일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이 유엔 승인은 훗날 6.25 전쟁 때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 대한민국 생존에 큰 역할을 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선포식 연설 중인 이승만 대통령
7) 6.25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남한 내 공산세력을 막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국가 위기를 막았고, ‘유상매입,
유상분배’라는 농지개혁을 통해 경제 문제와 신분차별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의무교육제도,
문맹퇴치운동 등을 시행했다.
그러던 중 주한미군은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9년 한국에서 철수하고,
1950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그러자 곧바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받아 6월 25일 전쟁을 일으켰다.
북한군은 남침 4일 만에 서울을 차지하고, 40일 만에 낙동강까지 내려왔다.
남한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참전 결정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뒤집혔다.
평양을 넘어 두만강, 압록강까지 올라갔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밀려 내려와 38선에서 잠시 휴전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은 미국은 결국 휴전 협정을 결정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자 아이젠하워는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휴전협정 마지막 절차인 포로 교환 절차에서 이승만은 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반공포로 3만 여명을 미국의 손에서 구출해냈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는 다시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승만의 뜻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이승만의 최고업적으로 손꼽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
휴전협정 체결에 대해 이승만은 ‘①한미상호방위조약, ②경제・기술 지원,
③국군의 증강 및 현대화 원조’라는 3가지 약속을 받아냈다.
이로 인해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고, 경제, 군사,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미래 살릴 한 사람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 건설’를 꿈꿨던
이승만은 1948년 제헌국회를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앙 안에서 미래를 멀리 내다보며 강대국의 힘을 이용한 외교정치를 잘했던 이승만처럼, 영적 위기의 시대에 보좌의 능력을 누리는 영적 비밀을 아는 영적서밋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먼저 다메섹을 통해 나의 숨겨진 불신자 상태를 발견해야 한다.
창3장 근본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보좌화(化)’가 확인되어야 한다. 그때 나의 신분, 권세를 알고 확인하여 사용하는 것이 ‘기도’이며,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 ‘전도’이다.
그래서 이 분야를 전문화시키는 도전을 하여 한 분야의 서밋으로 세워져야 한다. 구원받아 변화된 자신을 보며 ‘나의 삶의 방향’인 CVDIP를 발견하고,
나만 할 수 있는 OURS 속에서 WIO(24) 비밀을 누리는 것이다.
이 답을 얻은 한 사람이 그 답을 다음 후대에 전달하여 다가올 미래 재앙을 막는
후대 운동을 계속하게 해야 한다. 언어 교육을 시작으로 단계별 과정을 거쳐
각 전문 분야의 지도자로 세우고,
후대에 증거를 남길 수 있도록 하는 이 전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RUTC운동).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움직인다.
인간의 생사화복뿐만 아니라 나라의 흥망성쇠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먼저 세워야 할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기반의 세상나라’가 아니라
‘오직 복음 기반의 하나님나라’이다.
내 힘이나 노력으로 하는 ‘주의’, ‘사상’에서 벗어나 오늘의 나의 삶과 현장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아 하나님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이자 영적서밋, 기능서밋,
문화서밋으로서 다가올 미래 재앙을 막는 100년의 응답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