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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운(?)아 법성포초교 101주년 51기수들
마지막 행운아 51기수들이라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51기수까지 우리나라 대통령들 모두와 같은 시대를 산 행운아들이다
첫 번째 1948~1960년대에 초대부터 3대동안 재직했던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시절 우리는 엄마 젖을 먹고 있을 때이다
나는 그 시절 나왔던 분유랑 같이 먹었다고 들었다
왜냐고 내 위로 딸만 다섯이었으니까
엄마 손잡고 다니고 사탕 사주라고 안사주면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던
여섯 살까지는 윤보선 4대 대통령과 같이 살았던 시대이다
두 번째는 1960~1962년 윤보선 대통령은 박정희 5.16군사쿠데타로 물러났다
나는 그때 법성포 한복판 법성지서 앞에 구 중앙식당 자리에서 살았다
우리의 유치원시절 고무신 신고 다닐줄 알때부터
초등학교때 월요일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아침조회를
시작하고 3학년때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집에 보내준다고 미련한 머리로
얼마나 외웠는지
중학교때는 선생들한테 주먹으로 몽둥이로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항의할수 없이 숨죽이고 사는 것이 이 나라 학교법이었고
고등학교때 교련시간에 목총으로 총검술로 단련되지 않으면
안되였던 시절
가지도 못할 대학교에 원없이 예비고사나 한번 보기나 해보자고
광주 따라가서 밤에 충장로에서 놀고 다음날 시험 보고 왔던 시절
졸업하고 이래저래 먹고 살기 힘들 때 군대나 가자고 해군에 지원하고
제대 3개월 보름 남겨 놓은 1979년 10월 26일 민주의 이름으로 가까운
부하에게 총살 당했던 박정희 죽음으로 비상사태 선포되어 제대를
못 할줄 알았던 21살 예비역 병장
제대해 집에오니 22살 구정를 3일 남겨놓고 있었다
그 세 번째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경북 구미 출신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시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합군
팔로군을 만주국군 장교로 일본군과 합동으로 공격했던 매국 친일파로서
1963~1979년 5대부터 9대까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비밀조직으로
일본 군관학교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대한민국 국민을 자신이 늙어
죽을때까지 일본인처럼 식민 독재하려다 총살 당했다
일제 강점기때 박정희는 대한민국 독립군을 잡기 위해 경북 문경에서
선생으로 있다가 만주국 군관학교에 일본계 만주계중 일본인 자격으로
지원했으나 두 번이나 떨어지고 세 번째 지원해서 합격했다
첫 번째 떨어지고 두 번째 지원 할 때는 서류에 박정희가 쓴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까지 썻다는 내용이 담긴 신문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 기사의 사본을 찾아서 공개했다
1939년3월31일자 민주신문 기사내용
기사에서는 제목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
“박 전대통령이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여 1939년 다시 응모했다“
응모서류에는 혈서와 편지내용을 동봉했다
혈서...“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
편지내용...“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 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그래서 다음해 1940년 4월 일본 신경군관학교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
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으로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였고 졸업한 후에는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에 편입됨과 동시에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일본군 소위 예비역은 언제든지 일본이 동원할수 있는 일본군 장교로서
소위 자격은 판사와 맞먹는 등급인 고등관으로 매년 1명꼴로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고 보면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대한민국은 제2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과 만주국
일제시대 일본의 관동군은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거한 뒤 1932년 3월 1일 자신들의 괴뢰국인 만주국 수립을 선언하고,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푸이를 황제로 하고 수도는 신경(장춘)으로 삼았습니다.
중국은 장개석과 마오쩌둥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만주국은 패망한 청나라를 잇는다는 것인데 실권은 일본의 관동군사령관이
쥐고있었고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일본의 관동군이 괴멸하자
곳곳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나 푸이가 포로로 중국에 넘겨지고
만주국 역시 일본과 함께 패망하고 영토는 중국에 넘어갔습니다.
중국과 만주국은 물론 다른 나라 였습니다.
네 번째 대통령은 박정희 사망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다가 취임한
5공 군사세력의 허수아비 10대 최규하 대통령은 강원도 원주가 고향이다
1979~1980년 대한민국 최단임 대통령으로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나 전두환의 1979..12.12 군사 쿠데타로
실권이 없이 1980년 5.1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대통령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1980년 8월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하므로서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나는 포항 항공단 기지전대에서 군대 생활을 하다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김재규에게 총살당하고 비상사태선포되어
제대를 못하는 줄 알았다가 나중에 해제되어 경남 진해에서 제대한 후
귀향후 1주일동안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광주 조대부고에서
농협시험을 치루고 강명룡 영광군지부장에게 면접을 보고
1달만에 홍농농협으로 1980년 3월 24일자로 정식 발령받아
첫봉급 156,000받고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다섯 번째 경남 합천이 고향인 전두환 대통령은 1961.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요직을 두루거치면서
승승장구하다가 1979.12.12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있으면서
상관인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여 권력을 잡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간선으로 11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1981년 1월 민정당을 창당하고 2월 새헌법을 개정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간선으로 제 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박정희와 같은 방법으로
간선제로 영구 집권하려다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전 국민들의 민주화 항쟁에 굴복하고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를 실시하였다
이기간에 나는 홍농농협에서 법성농협으로 법성농협에서 백수농협으로
백수농협에서 다시 법성농협으로 2년마다 이동해야 하는 농협중앙회
영광군지부 정기 인사발령으로 이동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후부터 농협도 중앙회 인사제도에서 조합장선거가 직선제로 바뀌면서
조합장들이 자기 지역 출신 직원들을 함부로 타지역에 이동시키지 않으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기 인사제도는 없어지고 조합장들이 군지부장과
협의하여 필요한 경우에만 인사 이동하였다
여섯 번째 1988~1993년 재직한 13대 노태우 대통령은 대구가 고향으로
1979.12.12 군사쿠데타 주역으로 육사11기 같은 동기인 전두환
부하로 있다가 정치에 입문 전두환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서 김대중 김영삼의 야권 후보단일화가 실패하면서
노태우가 제 13대 직선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기간은 법성농협도 큰 변화를 했지만 나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법성농협내에서는 부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사적으로는 광주대학교 4년제 야간 금융학과 93학번으로 입학하였다
그리고 법성농협이 기존 농협을 지소로 두고 법성농협 본소가 농장과
독바우 중간쯤에 새청사를 2층으로 크게 짓고 이사를 하였다
일곱 번째 1993~1998에 14대 거산 김영삼 대통령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대통령후보시절 김대중과 함께 1985년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을 맡다가 김영삼은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고문직으로
있던 김대중과 대통령선거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같은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김대중과 함께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두후보 모두 떨어지면서 분열하기 시작해 2009년 8월 김대중
전대통령이 병원에 있을때 서거 직전 병문안 하면서 나홀로 앙금을 풀었다
이후 김영삼은 1990년 5공 군사독재정권이자 5.18광주학살, 12.12의 쿠데타
주역인 민주정의당 노태우와 박정희 오른팔 신민주공화당 김종필과
민주화운동 단식투쟁했던 김영삼은 군사정권과 야합하여 3당을 합당하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3당 합당후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1991년 신민당총재가 된
김대중후보를 이기고 14대 대통령이 되면서 군부와 합당한 절반의 당을
32년만에 문민정부을 출범시켰다며 자화자찬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기간은 나에게도 중요한 4년이 있었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시기였다
승진시험 공부는 애초에 포기하고 대학 4년을 줄기차게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어떻게든 졸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자가용도 없이 그렇게 다녔는지 이해가 안가지만
나이를 계산해 보면 그때 나이 36살이였으니 가능했는지 모른다
여덟 번째 전남 신안 하의도가 고향인 15대 후광 김대중 대통령은
1998~2003 재임한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
국민의 정부이다
행동하는 양심을 행동으로 보여준 대통령으로 아이엠에프를 극복하고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 50인중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내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대통령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있기까지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험난한 인생역경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첫 번째 죽을 고비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서 잡혀
죽기 직전에 목포 형무소에서 극적으로 탈출했을때이고
두 번째 고비는 8대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를 하다가 전남 무안에서
1971년5월24일 벌어진 의문의 교통사고이다
이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긴 했지만 지팡이에 의존하여
평생을 왼쪽다리 고관절 장애로 살다 가셨다
이사고가 나기 한달전 김대중은 1971년 4월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나서서 5대 6대 대통령을 하고 있던 박정희에게 95만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낙선했다 당시의 선거 상황은 모든 정보원들을 총동원하여
군인들표와 부재자표는 군부 정권하에서 누가 어떻게 투개표하는지는
알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95만표 차이라는 것은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나왔다
이렇게 평생 독재의 꿈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에게 김대중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이런 선거 결과로 김대중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박정희 불평 불만은 직속 부하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의문의 교통사고 범인은 잡지도 못하고 잡을수도 없었다
세 번째 네번째는 1973년 일본 동경 호텔에서 박정희정권 중앙정보부
소속 직원들이 호텔에서 김대중을 살해하다 미수에 그치자 다시 시도
김대중을 납치하여 배에 태우고 현해탄 한 가운데에서 수장시키기 직전
미국의 압력으로 극적으로 살아났다
박정희정권이래 김대중은 5년반 감옥, 3년 망명, 6년반 가택연금으로
신체의 자유도 없던 것은 물론 1980년 5.18일 광주민주항쟁을
주도했다면서 반란죄목을 씌운 전두환 신군부에게 사형 선고 받은 것이
다섯 번째 죽을 고비였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이라고 주장한
이 시대 진정한 민주주의 구심점 김대중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43분에 흡인성 폐렴으로 서거하셨다
이 시절은 나에게도 운명을 바꾼 시기였다
20년 넘은 농협이라는 직장을 스스로 그만 두어 내 길을 가고 있으며
법성농협장 선거에 출마해서 낙선하고 법성농협 감사를 했으며
후반기 인생의 중요한 사업 전자상거래 공부하면서 컴퓨터를 배웠고
굴비가게를 개업했으며 태국 일본 중국이란 나라도 가 보았다
아홉 번째 16대 노무현대통령은 2003~2008년 5년 대통령직을
성실하게 수행한 경남 김해출신 노무현은 부산상고를 나와 17회
사법고시에 네 번째 도전 끝에 합격하여 대전지법판사 그리고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권유로
정치에 입문 13대 국회의원 부산 동구 선거에 당선된다
1990년 통일민주당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고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고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고 2002년초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 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당시 국민통합21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하고
국민여론 조사를 거쳐 야권 대통령 단일후보가 되었다
2002년11월18일 단일후보가 된 노무현은 한나라당 이회창에게
57만표 차이로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3년 2월 25일
참여정부가 탄생한다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의 모태인 새천년민주당
의원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새천년민주당을 분열시키는 배신
행위을 자행하면서 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여
나가 버린다
이때부터 노무현 자살은 예고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노무현 자살전 이명박정권에 의해 노무현 측근비리로 인한 언론과
검찰에게 몰매를 맞고 소환조사까지 당했던 노무현을 지역적
연고도 확실하지 않은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자신의 대통령임기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 백년당이라며 창당한 열린우리당이
2007년 8월20일 산산이 분열되어 통합민주당으로 다시
흡수 합병돼 버렸기 때문에 노무현을 방패막이 할수 있는 당이
없는데다가 노무현에 대한 전라도민의 민심은 분당은 분당으로
망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검찰조사를 지켜만
볼 뿐이었고 경상도민의 민심도 싸늘했다
또한 새천년민주당을 분열시키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가담했던
국회의원 어느 누구도 노무현을 대변하지 안했고 바람막이도
하지 않고 숨어서 여론의 눈치만 살피다가
결국 노무현을 자살로 몰았다
2004년 초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유로 선거중립의무 위반등
국법질서 문란 노무현 측근비리등으로 도덕적 법적 정당성 상실
국민경제 국정파탄으로 국민들에게 불행과 고통을 준다는 사유로
야당이 대통령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노무현이 이를 거절하자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을 국회에서 2004년 3월12일
찬성193대 반대2로 대통령탄핵 소추안을 국민의 여론은 무시하고
국회에서 가결시키자 그해 4월15일 치러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들은 열린우리당에게 과반이 넘는 152석을 몰아서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주었다
그리고 다음달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을
기각하므로서 노무현은 두달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한다
지역주의 권위주의 청산 대미외교에서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2007년 10월4일 분단후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남북 10.4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재임시 기록물 복사본 가지고 귀향한 것을 국가기록물을
무단유출 했다는 혐의를 시작으로 박연차 정관계 로비의혹으로
측근 친형 부인 아들 딸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면서 연일
언론에 장기간에 걸쳐 정보유출하면서 노무현의 청렴한 이미지와
도덕성 상실만 부각시키고 이명박정권의 실정 정책 독선을
감추는 희생양으로 2009년 4월30일 전직대통령으로서 세 번째로
검찰에서 소환하여 조사하고 소환조사가 노무현 개인에 그치지
않고 식구들까지 양파 껍질 벗기듯 조사할려는 현 정권에게
결국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노무현은 나로 말미암아
여러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유서를 남기고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 생가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했다
2009년 11월 8일
(위 내용은 인터넷 검색으로 사실을 근거로 작성하였으며
일부 제 개인의 주관적인 내용도 포함되었음을 밝힘니다)
첫댓글 3학년때 국민교육헌장???///51회 기수 기준이겠지?
그당시 구구단 외우는것은 확실한거 같은데~~계산해 봐라 국민교육헌장 찾아보니까 1968년 12월 5일 대통령이 발표했단다~~그러면 우리가 4학년~~5학년때나 되냐~~
잘읽었네!
잘 읽었다는 꼬리글 한마디도 내가 고생해서 작성한 보람을 느끼네~~~ 그냥 우리도 살면서 몰랐던 부분들을 요약해서 알기 쉽게 작성하여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네
글을 조리 있게 잘 쓸려고 해도 다시 보면 빠진것이 많네~~알아서들 주석하고 해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