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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 : 25. 목숨을 위하여 26. 공중의 새를 보라
5. 의식주에 대하여 ( 6 : 25 – 34. 눅 12: 22-34. )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 : 25. 목숨을 위하여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주께서는 우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음식의 내용, 옷의 종류에 너무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지 말고 더 좋은 옷을 입으려 하지 말고 그런 것들에서 가치와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은 잘 먹고 잘 입어야 오래 살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장수마을은 반드시 부자 동네가 아니다.
주께서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음식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옷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이 사람을 위해 있고 옷이 사람을 위해 있다. 그러므로 옷도 단정하고 편한 옷이면 좋다. 물론 색깔도 밝고 예쁜것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옷이 너무 요란하거나 단정치 못한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피부에 좋고 몸에 편한 옷이 좋은 옷일 것이다.
주께서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염려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염려는 평안이 없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것이며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염려하는 사람은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다. 또 심하면 머리가 아프기도 한다.
염려하는 마음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 평안은 마음의 단순함이다. 거기로부터 마음의 고요함, 조용함이 생기고 마음의 평정과 평온이 있다. 평안한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다. 이런 평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나온다. 그러나 불안과 염려, 걱정과 근심은 우울함, 두려움을 만들고 그런 마음은 사람을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1] 그러므로(*, 디아 투토)
문자적으로는 '이로써'란 뜻으로서 본 절에 언급될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을 버려야 할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음을 가리킨다.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했을 때 발생할 세상 염려에 대한 지침(指針)을 가르친다.
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의 절대적 권위릍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가르치는 바가 세상의 어떤 진리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참 진리임을 시사하고 있다.
3] 목숨을 위하여( , 테 퓌스케 휘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목숨'으로 번역된 '퓌스케'는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육체적 죽음 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말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퓌스케'는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 마 10: 28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물질적인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야 한다.
(1) 무엇을 먹을까?
음식은 생명체의 존속에 필요한 소모품(consumption goods)이다.
음식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먹는 것이 떡이라고 말한다.
① 만나를 의미한다.
* 출 16: 31 -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 민 11: 6-7, 9 –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 계 2: 17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②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 신 8: 3 -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③ 예수님의 몸을 의미한다.
* 요 6: 48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2) 무엇을 마실까?
* 렘 2: 13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 요 4: 10-14 –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 7: 38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요 6: 53-58 –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 계 21: 6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4]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아무 일에나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앞 절에서 시사한 바 있는 세상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염려'(*, 메림나오)란 '분열되다', '나뉘다'는 뜻의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뜻한다.
염려의 늪에 빠지게 된 자는 생(生)에 있어서 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가 고민하여야 할 대상은 물질적인 문제에 앞서 먼저 영적인 문제여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분열되어 영적인 문제를 망각(oblivion)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5]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이따금 생명 그 자체보다는 목숨에 소용되는 음식물에 집착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때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준 이상, 이에 필요한 음식과 옷은 우리에게 당연히 주실 것이다.
음식은 목숨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고 의복은 몸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목숨과 몸은 단순히 음식이나 의복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자도 때때로 병들고 또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사람의 목숨과 몸의 건강은 자신에게나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사람이 염려한다고 목숨이 보존되거나 몸의 건강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염려는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약화한다. 사람의 목숨과 몸의 건강은 주권자 하나님께 달려 있다.
마 6 : 26. 공중의 새를 보라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도 기르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고 말씀하셨다(욥 38: 41).
하나님께서는 새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을 기르신다. 시편 104: 25-29는,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한다.
1] 공중의 새를 보라.
누가의 기록에도 유사한 구절이 있다. 거기서는 '새'라는 말 대신에 '까마귀'로 언급된다.
'공중의 새'란 순수한 히브리 문학적 표현으로서 '하늘을 나는 새',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생명체를 상징한다.
'공중의 새'는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새'를 가리킨 것 같다. 새들은 먹이를 찾고 얻기 위해 부지런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기르신다.
우리는 새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
'보라'(*, 앰브려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눅 12: 24 -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 심지도 않고
새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 거두지도 않고
이 말씀을 오해하면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된다.
새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다 먹이를 떨어뜨려 주시도록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다.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거두지도 않고'란 말은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고민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4]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새들은 내일을 위하여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별도의 보관 시설에 저장하는 일이 없다.
필요로 할 때 취할 뿐이다.
* 시 104: 25-29 – 25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26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27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 욥 38: 41 -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5]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성경적 우주론(宇宙論)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 어떠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질서 있게 경영하고 계시며 자연계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섭리를 볼 수 있다.
6]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모든 자연계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다.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귀하다'(*, 디아페로)란 말의 원뜻은 '다르다', '구분된다.'로서 새와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보다'로 번역된 바로 앞의 혤라어 '말론'(*)은 '심히', '대단히'라는 뜻인 '말라'(*)의 비교급 부사이다. '훨씬 더', '더욱'이라는 강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로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존재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법칙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 이면(裏面)에 담겨있는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뜻까지도 포착(capture)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부지런함을 개미에게서 배우라고 교훈하신 바도 있다.
* 잠 6: 6-11 –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이르리라.
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 마 6: 25-26 )
염려는 세상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로댕의 걸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품이 있다. 그것을 다른 제목으로 표현한다면 '염려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염려는 우리 인간 생활의 매우 깊숙한 곳까지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염려는 대개가 의식주에 관한 것으로 한 번이라도 이 문제로 인해 염려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말하자면 의식주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 눅 21: 34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1) 염려를 금하신 예수
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모두가 진리의 교훈이며 권세있는 말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우리의 '아빠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진리의 핵심이 되는 말씀 중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의 조상의 하나님이신 것만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아버지가 되심은 모르고 있었다.
* 요 8: 39 -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삶을 축복해 주시며 생애를 보호하시고 생활까지 책임져 주신다. 슬하에 있는 자녀들의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부모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의 생활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 벧전 5: 7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그러므로 그의 자녀인 우리는 모든 염려를 아버지께 맡겨야 한다.
* 빌 4: 6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버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한다.
② 성도는 생활을 위한 당연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삶의 자세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것은 생활에 대한 염려를 금하신 것이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책임을 돌리고 태평스레 게으름을 피우라는 것이 아니다.
* 고전 9: 9 -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사람은 자립할 수 없는 어린아이 때에는 모든 것이 부모의 책임이지만 장년이 되어 스스로 독립할 때는 자신의 책임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이 교재하고 교통하는 종교다. 즉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생활을 책임져 주나 우리들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다.
* 살후 3: 10-12 –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자기 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다. 예수님도 요 5: 17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2) 염려(念慮)를 금하신 이유
①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갈라놓는다.
염려라는 단어는 분열, 근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또 마음이 찢어진다는 뜻의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염려하게 되면 그 마음은 분열하여 나누어지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저런 생각이 뒤따르게 되어 우리를 안절부절못하여 불안하게 만든다.
* 고전 7: 32-35 –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한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합당치가 못하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6: 24) 그러므로 염려는 성도의 마음을 갈라놓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면 안 된다.
② 염려는 불신앙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를 금하시면서 염려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방인들이 누구인가? 바로 신앙이 없는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므로 자기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염려와 근심을 해야 한다. 마치 부모가 없는 고아는 자기 일을 돌보아 주고 책임질만한 사람이 없기에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많은 염려와 고민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 눅 8: 14 -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을 축복해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확실히 믿음으로 우리는 염려할 필요한 없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염려와 근심 속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며 그가 나의 아버지 이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③ 염려는 마음의 병을 가져온다.
염려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병들게 한다. 지나친 염려는 우리의 육신을 허약하게 하므로 염려하는 성도는 영혼에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염려를 극복하여 승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 빌 4: 4-7 –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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