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벽 / 이태수
침묵의 틈으로 앵초꽃 몇 송이
조심조심 얼굴을 내민다
그 옆에는 반란이라도 하듯
빨간 튤립들이 일제히 꽃잎을 터뜨린다
가까이 다가서듯 솟아 있는
성당 종탑에는
발을 오그린 햇살들이 뛰어내린다
한 중년남자가 저만큼 간다
헐렁한 모자에 얼굴 깊숙이 파묻은 채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걸어간다
나는 잃어버린 말, 새 말들을 더듬으며
유리창 너머 풍경들을 끌어당긴다
침묵은 이내 제 길로 되돌아가고
봄 아침은 또 어김없이
그 닫힌 문 앞에서 말을 잃게 한다
빗장은 요지부동, 안으로 굳게 걸려
문을 두드릴수록 목이 마르다
새 말, 잃어버린 말들은 여전히
침묵의 벽 속에 가부좌 틀고 앉아 있다
연잎의 물방울 / 이태수
연못 한 모퉁이 연잎에
물방울들이 글썽이며 맺혀 있다
아침 햇살은 모데라토로 내리고
그보다 조금 느리게
헤엄치는 떡개구리 두어 마리
포물선을 그리듯 말듯
멧새들이 가세해 고요를 흔든다
그 광경이 가관이라는 듯이
연잎 그늘에 엎드린 두꺼비 한 마리
느리게, 아주 느리게 눈을 껌뻑인다
나는 안간힘으로
물방울 속에 들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럴 수는 없지, 라고 말하듯
물방울들이 굴러 떨어진다
그 사이 햇살이 꽤 두터워졌는가 보다
연꽃들이 환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본다
신성한 숲 / 이태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만 같다
신성한 숲은
이따금 조금씩 몸을 흔들 따름이다
아마도 모든 일들을 안으로 깊숙이
끌어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에서는 이미 일어났던 일들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
곧 일어날 일들까지
오직 하나로만 아우러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바깥에서 바라보고,
그 안에서는 침묵이 나를 본다
저 신성한 숲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품어
너그럽고 부드럽게 보듬고 있을 것이다
서녘 하늘 / 이태수
해가 키 큰 굴거리나무 뒤로 미끄러진다
서녘 하늘은 어김없이
내 하루치의 말과 침묵을 깊숙이 그러안는다
남은 햇살을 끌어당기며 불콰한 얼굴로
그 둘은 본디 하나라고,
말은 침묵 위에 떠 있는 구름일 뿐이라고,
침묵으로 말하듯이 나를 내려다본다
내 말은 소음에서 일어나 다시 소음 속으로
사라질 따름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말과 침묵이 하나가 되지 못해
내 말이 풍선처럼 허공에 떴다가 스러지는
그런 말이 돼서는 안 된다는
그 공허를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나는 또 나를 향해 낮게 비집고 들어야 한다
오늘 하루치의 내 말들이
키 큰 굴거리나무 아래 뒹굴다 사라지듯이
나는 저녁 어스름 속에 마냥 가라앉으면서도
저 불콰한 얼굴의 서녘 하늘이 이르는 말을,
침묵과 하나가 되어 새로이 태어날 말들을,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
내가 깨뜨려버린 침묵과
다시 들어가야 할 침묵 사이를 서성이며
이토록 붉게 애를 태워야만 한다
소음교향곡 / 이태수
장엄한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이 다 빠져나갔다
조명등이 일제히 꺼지고
연주홀은 어느새 정적 쌓인 동굴 같다
검은 커튼 틈새로 기어드는 햇살,
벽면의 음향판들은 누가 그리다 만 벽화 같다
조금 전의 그 깊고 신비스러운 선율들은
귓전과 가슴 언저리에 맴돈다
빈 연주홀에 홀로 앉아 눈을 감으면
차츰차츰 크게 들리는 내 맥박소리,
마치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 같다
컴컴한 동굴 속의 내가 모든 동작을 멈춘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어깨를 두드린다
별 수 없이 연주홀 밖으로 밀려난다
사람과 자동차들이 북적거리는 도회거리는
영락없는 소음교향곡 공연장 같다
야상곡(夜想曲) / 이태수
깊은 밤, 이름 모를 새들이
창 너머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귄다
귀를 가까이 가져가보면 그 소리는
낮에 못다 부른 노래의 후렴 같다
어둠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워
따스한 이불 한 채를 지어보려는
주문 외는 소리 같다
박자를 맞추기라도 하듯
바람은 나지막이 창유리를 두드린다
어두운 하늘에는 잔별들이 총총,
달빛 실오라기들도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속살 비비대는 나뭇잎들은 저희끼리
무언가 연신 속살거리고 있다
눈 감고 가만히 귀를 모으면
바로 아랫집에서인지, 위층에서인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낮고 깊은 선율, 눈앞에 어른거리는
저 성스러운 빛과 소리의 무늬들,
바람도 새들의 지저귐도
오로지 그 언저리에서 맴도는 것만 같다
말 없는 말들 / 이태수
그에겐 말 없는 말을 듣는 귀가 있다
그런 귀가 없는 나는
그 깊고 높은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건
그가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기 때문,
내가 입을 다물게 되는 것도
그가 말 없는 말을
소리 없이 하기 때문이다
그의 품에서만 높고 깊은 말로 바뀌는
저 말 없는 말들은
그만 누리는 아득하고 신성한 말의 성찬일까
나의 헐벗은 이 기도는
말 없는 말로 되돌아가는,
그 안 보이는 길 위에서 목마르게 서성이는,
말 없는 말들을
찾아 나서는 안간힘일 뿐,
나의 말은 기도 속에서 그 환한 말의
언저리 어디쯤에서 가까스로 맴돌기도 하지만
이내 그 말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정적(靜寂) / 이태수
나무들이 서로 어깨 비비대고 껴안는다
밤이 깊어갈수록 발을 깊이 뻗는다
가장 낮은 데까지의 그 무엇들을
죄다 들어 올려 정적(靜寂)에 넘겨주려 한다
밤이면 스스로에게, 늘 서 있는 자리마저도
왜 낯설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다
정적은 언제나 들어 올린 것들을 다 녹여서
더욱 낮게 가라앉게 할 것이므로,
낮에는 늘 낯익었던 그 제자리로
아무도 몰래 옮겨다 놓을 것이므로,
밤은 이 지상 구석구석에 정적을 부려놓지만
그도 잠시 한때,
동이 트자 모든 정적은 허공 속으로 빨려든다
불현듯 항아리 깨지는 소리, 요란하다
계수나무 / 이태수
정원사들이 잎들 돋아나는 계수나무 둥치에
사닥다리를 놓고 가지치기를 한다
요란한 전기톱 소리,
새들도 지저귀다 숨을 고르며 날아간다
하지만 잘린 가지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쌓인다
연초록 잎사귀들이 햇빛을 받으며 반짝인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간밤 꿈속의 두 장면이 뇌리를 스친다
어린 시절 누나가 즐겨 부르던 동요 속의
계수나무와 옥도끼와 토끼들,
절두산 성지와 그 절벽 아래
굽이 돌아나가는 강줄기,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봄이면 어김없이 도지는 몸살 때문일까
내가 저 잘려 나뒹구는 계수나무 가지쯤이라도
된 것 같아서 그런 것일까
때마침 시샘 많은 바람이 소맷자락 흔들고,
잔가지들이 잘려 버린 계수나무는
머리 잘린 먼 산을 향해 절을 하는 것 같다
산딸나무 / 이태수
집을 나설 때마다 마주치는 산딸나무,
계절 따라 몇 차례 몸을 바꿔도
느낌은 언제나 그대로다
사람의 아들 예수와 산딸나무 십자가,
그 기막힌 골고타 언덕의 사연 때문일까
귀가 때도 어김없이 나를 굽어보는 산딸나무
늦봄에 흰 십자가 꽃잎턱에 맺히던 열매는
어느덧 영글어 검붉은 핏빛,
잎사귀들도 남김없이 붉게 물들었다
산딸나무 꽃은 왜 꽃이 아니고
열매를 받치는 십자가 모양의 꽃잎턱일까
잎도 열매도 때 되면 성혈처럼 붉어지는 걸까
꽃피우기보다 오직 열매를 받치기 위한
꽃잎, 그 받들어진 열매 빛깔 따라
붉게 타오르다 지고야 마는 잎들
집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마다
나보다 먼저 나를 굽어보는 산딸나무,
단풍도 열매도 이젠 다 비워내려 하고 있다
귀목나무 / 이태수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이
말들을 침묵 속에 다져온 것일까
마을 어귀의 저 귀목나무는,
잎사귀들은 마치 그런 말에서 돋아난
침묵의 결과 그 무늬들 같다
신성한 말들만 파랑치고 있다
아주 오래된 저 귀목나무는
까마득히 오래된 침묵의 한가운데서
느리게 솟아오른 광휘 같다
오로지 말 없는 말에만 귀 열어
깊이깊이 안으로만 쟁이고 되새김질해
그윽한 빛을 뿜어내는 것 같다
그 그늘에 낮게 깃들인 나는
작아지고 작아지기만 하는,
끝내 허물도 벗지 못하는 애벌레 같다
은목서(銀木犀)에 홀리다 / 이태수
시월 하루, 날 저물 무렵
은목서 곁에서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해
멍하니, 마냥, 흔들리고 있네
온 길도 갈 길도 다 내려놓고
가는 시간도 붙들어 앉히고 싶어지네
초록 넓은 잎사귀들 사이에 숨듯 말 듯
환하게 피어오른 은목서의 은빛 꽃잎들,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온몸 감싸 안아 앉아 있게 하네
- 홀린 듯 그윽한 이 황홀
눈 지그시 감고 나를 들여다보면
그 향기 비단옷자락 펄럭이며 날아가네
산 넘고 강을 건너 꿈결인 듯 아득히,
날개도 없이, 날아오르고 있네
눈을 뜨면 어김없는 그 자리인데도
넋이 나간 듯, 넋을 부르듯,
그 향기에 빠져 흔들거리고 있네
갈 길도 온 길도 다 잊어버린 채
저문 날 은목서 곁에 그대로 묶여 있네
이태수 시인
1974년 현대문학 등단
대구시 문학상, 동서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수상
시집
『그림자의 그늘』
『물속의 푸른 방』
『안동시편』
『침묵의 푸른 이랑』외
카페 게시글
┌………┃추☆천☆시┃
침묵의 벽 외 / 이태수
섬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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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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