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goal.com/en/news/8/main/2010/01/03/1722273/world-cup-2010-top-10-best-players-to-never-play-in-the
10. 카즈요시 미우라 (일본)
'카즈'는 아시아의 첫 슈퍼스타였고, 그의 꿈을 향해 브라질로 떠난 그는 1980년대에 프로가 되었다.
긴 선수생활을 하면서 미우라는 세리에A의 제노아에서 활약했고, 일본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해의 아시아선수 상을 수상했다. 미우라는 J-리그의 초창기 매진을 보장해주는 슈퍼스타였고, 일본 국가대표로도 거의 100경기를 뛰었다.
그는 2000년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고, 이로 인해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한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현재 42세인 그는 J-리그 2부리그의 FC 요코하마에서 여전히 활약중이다.
9. 리암 브래이디 (아일랜드)
그를 앞선 죠니 자일스처럼, 브레이디는 자신의 전성기에 아일랜드가 약체였던 비운을 맛봐야했다.
아스날과 유벤투스에서 맹활약을 한 브래이디였지만, 1989년 서독과의 친선경기에서 잭 찰튼 감독이 하프타임에 그를 교체해버리는 것으로 브래이디의 국대 경력은 끝이났다. 그의 세리에A 경험을 생각하면, 9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상당히 유용한 조커로 활용할 수 있었을텐데.
8. 야리 릿마넨 (핀란드)
핀란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릿마넨은 클럽에서는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핀란드를 위해 120경기나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월드컵 무대를 맛보지는 못했다.
핀란드는 아슬아슬하게 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플레이오프를 놓쳤고, 현재 38세인 릿마넨은 여전히 핀란드 국대에서 활약중이다.
그의 별명이 '메를린' (아서 왕의 전설에서 나오는 마법사: 역주) 인 걸 감안하면, 그가 43세의 나이로 2014년 브라질에서 맹활약을 해도 놀라지는 말기를. 로저 밀라가 기억나지 않는가?
7. 에릭 칸토나 (프랑스)
90년대에 프리미어리그를 뜨겁게 달군 칸토나. 하지만 칸토나는 그의 상관들과 반목하는 일이 잦아, 대형 국제대회에서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전국 방송에서 당시 프랑스 국대 감독 앙리 미쉘을 욕한 사건이 있다.
유로 92에서 프랑스를 위해 뛰었던 것은 건너뛰자; 프랑스가 그 대회에서는 정말 형편업었기 때문이다.
94 미국 월드컵 예선에서 프랑스는 막판에 불가리아에게 덜미를 잡혔고, 98프랑스 월드컵이 올 때 칸토나는 이미 국대 은퇴를 선언한 바였다. 국대에서 신예 플레이메이커 지네딘 지단에게 밀린 칸토나는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6. 발렌티노 마졸라 (이탈리아)
"만약 이랬다면..."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비극적인 케이스. 마졸라는 1940년대 세리에A를 장악한 토리노 구단의 핵심이었다.
이탈리아의 던컨 에드워즈라고 불릴만하다. 마졸라는 30여명과 함께 1949년 있던 수페르가 참사에서 사망했다. 그때까지 그는 국대에서 고작 12번만을 뛰었다.
이 12경기 중, 한 경기에서는 주전 11명 중 10명이 토리노 선수들이었다. 그의 아들 산드로는 1970년 브라질에게 결승에서 패배한 월드컵을 비롯한 3개의 월드컵 본선에서 뛰었다.
5. 베른트 슈스터 (서독)
실력과 논란에 있어서 칸토나 못지않았던 사나이 슈스터. 슈스터는 1980년 유로를 우승한 서독 팀의 일원이었다.
이것이 슈스터의 국대 경력 절정이었다. 그는 독일 축협과의 빈번한 마찰로 인해 24세의 나이로 국대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슈스터가 국대 경기에 불참하면서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사건에 대해 독일 여론은 양분되었고, 이로 인해 슈스터는 결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슈스터가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와중, 서독은 3번 월드컵에 진출했다.
4. 라이언 긱스 (웨일스)
브라질 국대 감독 둥가는 긱스가 브라질인이었다면 국대에 주전 자리는 꿰어차놓은 당상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애석하게도, 긱스는 웨일스 사람이다.
네빌 사우스홀, 마크 휴즈, 그리고 이안 러쉬와 함께 긱스는 테리 요라쓰의 젊은 웨일스 팀을 이끌었다. 분명 94년 월드컵에 진출할만한 팀이었다.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로마니아를 꺾어야했던 웨일스는, 폴 보딘이 페널티를 실축하면서 황금같은 기회를 놓쳤고, 결국 2-1로 패하면서 1958년 이후로 이어져온 본선 진출 실패 기록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3. 조지 웨아 (리베리아)
20세기 아프리카가 배출해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웨아는 2002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1점 차로 놓치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웨아에게는 더더욱 아쉬웠을 것이다. 그는 선수로 뜀과 동시에 감독직을 겸했고, 사비를 털어서 리베리아 국대를 월드컵의 문턱까지 이끌었다.
2002년 인터뷰에서 웨아는 "월드컵에서 뛰고싶었다면 프랑스나 카메룬에서 뛰었으면 됐었겠죠. 그 국가들 대표팀에서 뛰었다면 월드컵 무대는 밟을 수 있었겠죠"라고 말했다.
대단한 애국주의자인 웨아는, 200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2. 조지 베스트 (북아일랜드)
펠레 왈, "이름으로도 최고 (베스트), 실력으로도 최고."
벨파스트의 축구 천재 베스트는 국대에서 고작 37경기만을 뛰었다. 북아일랜드 국대로 뛰면서 유명했던 사건으로는, 윈드저 파크에서 고든 뱅크스를 감쪽같이 속였지만 결국 심판 판정으로 누락된 득점과, 1976년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요한 크루이프를 알까기한 사건 등이 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할 명단에 잠시 고려되었지만, 36세에 알콜로 찌든 몸인 베스트는 결국 합류하지 못했다.
1.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스페인)
세 개의 국가를 대표해도, 다섯 번의 유럽 컵대회 우승컵을 이겨도, 월드컵만은 디 스테파뇨에게 오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1950년과 54년 월드컵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이때, 이미 콜롬비아 국가대표로 뛴 디 스테파뇨는 아르헨티나에서 뛸 수가 없었다. 디 스테파뇨는 1956년 스페인으로 귀화했지만, 1958 월드컵에 스페인은 합격하지 못했다.
1962년 스페인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하면서 디 스테파뇨의 꿈은 이뤄지는가 했지만, 대회 직전 디 스테파뇨는 근육 부상을 당해 명단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었다.
디 스테파뇨가 없는 스페인은 빛의 속도로 탈락했고, 이후 디 스테파뇨는 국대 은퇴를 선언했다.
Patrick Reilly, Goal.com
번역: No.14AlanSmith
첫댓글 국적이 3개 ㄷㄷㄷ
리트마넨 아직도 국대인가 ㅎㄷㄷ
미우라 98월드컵 출전했을텐데?ㅡ.ㅡ;;;;
아아 맞네요;;;; 미우라 못나간게 맞네요;;;; 오카노가 나갔었지 맞다;;;; 90년대 일본의 상징인 미우라 이다보니;;; ㅎㅎㅎ 지적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