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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2 | 조준전(趙浚傳) 조선의 ‘宰相다운 재상’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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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가 늠연(澟然)… 조그만 장점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조선왕조실록) ⊙ “성품이 강명정대(剛明正大)하고 과감하여 큰일을 결단할 때 의심하지 아니하며, 비록 대내(大內·임금)에서 지휘를 내릴지라도 옳지 못함이 있으면, 문득 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리지 아니하여도, 동렬들이 숙연하여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조선왕조실록) ⊙ 충렬왕 때 역관 조인규의 증손 ⊙ 우왕 말기 은둔하다가 위화도 회군 후 정계 등장… 토지개혁 주도 ⊙ 태종 이방원에게 제왕학 책인 《대학연의》 선물하며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
만일 조선 정승학(政丞學)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진다면 그 첫머리는 논란의 여지없이 조준(趙浚·1346~1405년)이 차지할 것이다.
조준은 평양(平壤) 사람으로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우재(吁齋), 송당(松堂)이다. 먼 조상은 한미했다. 조준 집안은 증조부 인규(仁規·1237~1308년) 때에 이르러 신분이 급상승한다. 조인규는 몽골어 역관이었는데 성실하게 몽골어와 한어(漢語)를 익혀 실력을 인정받았다. 《고려사》 열전에 ‘조인규전’이 있는데 세 가지 사항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충렬왕이 원(元)나라 중서성(中書省)에 보낸 글이다.
“나의 신하인 조인규는 몽골어와 한어를 통달하여 조정에서 보내오는 조서, 칙서 등의 내용을 조금도 틀림없이 번역해 냅니다.”
또 하나는 쿠빌라이 칸(원나라 세조)에게 가서 고려 일을 보고한 적이 있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듣고서는 칸은 이렇게 말했다.
“고려 사람이 몽골어를 이렇게 잘하는데 강수형에게 통역을 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강수형은 고려 포로 출신으로 칸의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다.
세 번째는 원나라 사신이 고려에 악감정을 품고 고려 고유 풍속을 바꿔야 한다고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조인규가 혼자 황제를 알현하고서 잘 설득해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이뤄냈다.
그에 관한 《고려사》 평이다.
“그는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짧은 시일 내에 국가의 중요한 관직을 얻었고 사람됨이 겉으로는 단정, 장중하고 화색(和色)이 있어 왕의 총애를 받아 항상 왕의 침소에까지 출입하였으며 많은 전민(田民)을 긁어모아 부자가 되었다. 게다가 국구(國舅·충선왕 장인)가 되어 그 권세가 한때 가장 유력하였으며 아들들, 사위들이 모두 장군,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어 누구도 감히 그에게 비길 자가 없었다.”
청렴강직했던 아버지
조인규에게는 서(瑞), 련(璉), 후(珝), 위(瑋) 이름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련의 아들이 조준의 아버지 조덕유(德裕·?~?)이다. 조련의 경우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데 반해 조덕유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정적 내용이 없다.
“그는 성품이 청백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영화나 이익을 바라지 아니하여 비록 친척, 친우라 할지라도 국가사업을 하게 된 때부터는 결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판도판서(版圖判書·조선의 호조판서. 현재의 기획재정부 장관 격-편집자 주)에 이르렀고 아들들 이름은 후(煦), 린(璘), 정(靖), 순(恂), 준(浚), 견(狷)이다.”
조준은 조덕유의 다섯째 아들이다. 둘째 형 조린(趙璘)은 공민왕 때 홍건적을 패주시킨 장군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무렵 신돈(辛旽)이 정권을 잡자 모두 그에게 아첨했지만 조린은 ‘늙은 중놈[老和尙]’이라고 욕을 했고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살해되었다.
《고려사》는 “조준은 어려서부터 인품이 호협하고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뜻은 컸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다. 공민왕 말기인 1371년(공민왕 20년) 조준이 책을 끼고 수덕궁을 지나는데 공민왕이 그를 불러보고서 기특하게 여겨 즉석에서 보마배지유(寶馬陪指諭) 관속에 임명했다. 이때 조준의 나이 26세였다. 당시 공민왕이 홍륜 등을 시켜 여러 왕비를 간음하게 하는 등 기행을 일삼자 조준은 이렇게 말했다.
“인도(人道)가 없어졌으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왕의 상벌 결정은 항상 뭇 소인들과 의논하고 군자는 이에 참여하지 못하니 오늘의 형세는 아주 불안하다.”
우왕 말기 4년 동안 두문불출
그 후 조준은 두문불출하며 독서로 소일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오씨(吳氏)가 하루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가갈(呵喝)을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가갈이란 귀한 사람의 행차 때 길을 치우기 위해 “물렀거라!”고 외치는 것이다.
“내 아들이 비록 많으나 한 사람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이에 조준은 갑인년(甲寅年·1374년) 과거(科擧)에 합격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 해는 공민왕이 죽는 해다. 고려 말 대혼란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조준은 겸손한 성품에다 관리로서의 이재(吏才)도 뛰어났기에 빠른 승진을 거듭해 형조판서에 해당하는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그리고 우왕 9년이던 계해년(癸亥年·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됐다. 조선 시대로 치자면 승정원 승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이 된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지켜본 우왕의 무능과 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해 조준은 벼슬을 버리고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며 윤소종(尹紹宗·1345~1393년), 조인옥(趙仁沃·1347~1396년) 등과 교유하면서 세상을 관망했다. 이들은 뒤에 조선 건국에 음으로 양으로 기여를 하게 된다.
토지개혁 선봉에 서다
정몽주 |
조준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사건은 무진년(戊辰年·1388년)에 일어난 이성계(李成桂) 장군의 위화도 회군이었다. 이성계는 회군에 성공해 조정을 장악하고서 쌓인 폐단을 쓸어버리고 모든 정치를 일신(一新)하려고 했다. 이때 조준이 중망(重望)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눈 후 크게 기뻐하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발탁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조준에게 “크고 작은 일 없이 모두 물어서 했다”고 한다. 조준도 감격하여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준은 뜻도 컸지만 일에도 밝았다. 정치와 정책 모두에 능한 인물이었다.
조정으로 돌아온 조준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분야는 토지제도 개혁이었다. 《고려사》 ‘조준전’이다.
“그전부터 토지제도가 대단히 문란해져서 토지를 겸병(兼并)하는 자들은 남의 토지를 강점하여 그 해독이 날로 심하게 되므로 백성들 원망이 자자했다. 우리 태조는 조준·정도전( 鄭道傳)과 함께 사전(私田) 개혁에 대해 의논했으며 조준은 동료들과 함께 신창(辛昌·창왕)에게 글을 올려 이에 대해 역설했다. 명문거족들은 모두 비난 중상하였으나 조준은 더욱더 자기주장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도당(都堂)에서 그 가부를 토의하게 되었을 때 시중 이색(李穡·1328~1396년)은 오랜 법제를 경솔하게 고칠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고집하면서 듣지 않았고,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변안렬(邊安烈), 권근(權近) 등은 이색의 주장을 따랐다. 정도전·윤소종은 조준 주장에 가담했고 정몽주는 이 중간에서 일정한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백관으로 하여금 의논케 한 바 의논에 참가한 사람이 53명이었는데 개혁을 요구하는 자가 10 중에 8~9였으며 요구치 않는 자는 모두 다 명문거족 자제들이었다. 우리 태조는 끝내 조준의 주장을 채용해 전제를 개혁했다.”
조준이 창왕에게 토지개혁을 청하는 소를 올린 때는 1388년 7월, 창왕 즉위 초였다. 이어 1389년 3월에도 소를 올려 마침내 이성계의 도움으로 조선 시대 토지제도의 골격을 이루는 과전법(科田法)을 관철했다. 이로써 이미 새나라 건설을 위한 경제적 기반은 마련된 셈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당시에는 조준이 가장 앞장서서 개혁을 밀고 나가고 정도전이나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뒤를 따르는 형국이었다. 이것은 그만큼 당시 고려 말 상황을 조준이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토지개혁을 관철했지만 여전히 조정은 조민수(曺敏修·?~1390년), 이색 등 온건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조민수는 이인임 도당으로 이성계와의 묵계를 어기고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우고서 수상이 되었다. 이에 조준은 조민수의 탐오함을 들어 탄핵해 조민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온건파를 조정에서 축출했다.
조준은 정몽주 등과 함께 이성계의 뜻에 따라 창왕을 폐하고 이성계의 사돈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1343~1394년)를 공양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애초에 조준은 공양왕을 옹립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재물 모으는 데나 관심이 있지 임금감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5년 6월 27일 자 조준 졸기(卒記)에는 공양왕 초기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때 정몽주가 우상(右相·우정승)으로 있었는데 태상왕(이성계)의 심복(心腹)과 우익(羽翼)을 없애려 하여 비밀리에 공양왕에게 고했다.
“정책(定策)할 때 준(浚)이 다른 의견이 있었습니다.”
공양왕이 이 말을 믿고 준에게 앙심을 품었다.〉
정책(定策)이란 신하들이 왕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이성계의 즉위
조준은 신미년(辛未年·1391년) 문하부 찬성사(贊成事)로서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갔는데 이때 남경으로 가던 도중에 지금의 북경에 있던 연왕(燕王)을 만나보았다. 훗날 조카 혜제(惠帝)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영락제(永樂帝)다. 조준은 당시 연왕을 만나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은 큰 뜻이 있으니 아마도 외번(外蕃)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흥미롭게도 이방원 역시 왕자로 있던 1394년(태조 3년) 정도전을 대신해 명나라에 갔는데 그도 도중에 연왕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연왕은 왕으로 머물러 있을 인물이 아니다.”
임신년(1392년) 한 해는 조준으로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긴 1년이었다. 3월에 정몽주가 태상왕이 말에서 떨어져 위독한 때를 틈타 김진양(金震陽) 등 대간(臺諫)을 시켜 조준과 남은(南誾), 정도전, 윤소종, 남재(南在), 오사충(吳思忠), 조박(趙璞) 등을 탄핵하여, 붕당(朋黨)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지적하여 모두 외방으로 귀양 보냈다가, 이어서 수원부(水原府)로 잡아 올려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4월에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로 하여금 정몽주를 쳐 죽이게 하여, 조준이 죽음을 면하고 찬성사에 복직되었다.
7월 신묘일에 조준이 여러 장상(將相)을 거느리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정도전과의 불화
《대학연의》의 저자 진덕수. |
개국 직후 태조는 계비 강씨의 아들 이방번(李芳蕃)을 세자로 세우기로 마음먹고 좌시중 배극렴(裵克廉), 우시중 조준, 김사형(金士衡), 정도전, 남은 등을 불러 토의했다. 먼저 배극렴이 말했다.
“적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을 통하는 마땅함입니다.”
이에 태조는 불쾌해했다. 조준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
이에 강씨가 울부짖었고 태조는 조준에게 붓과 종이를 주고서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했으나 조준은 땅에 엎드려 끝내 쓰지 않았다. 결국 세자는 방석으로 정해졌다.
같은 해 12월 조준은 배극렴에 이어 조선 두 번째 좌시중(좌의정)에 오른다.
실록은 태조 3년(1394년) 이방원이 명나라를 다녀온 후 어느 날 조준의 집을 방문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조준이 이방원을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매우 삼가며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선물하고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이 책은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것으로 유학 최고의 제왕학(帝王學) 텍스트다. 조준이 이방원에게 이 책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상 거사(擧事)를 준비하라는 암시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세자가 방석(초대 왕세자 의안대군·1382~1398년)으로 정해진 때부터 정도전은 강씨와 손을 잡고 이방석의 후견인 역할을 했고 조준은 이에 맞섰다. 정축년(丁丑年·1397년)에 명나라와 외교문서로 인한 분쟁이 발생했다. 명나라에서는 그 문서를 지은 정도전을 잡아서 명나라로 보내라고 했다. 이때 삼군부판사(三軍府判事)로 있던 정도전은 병(病)을 핑계로 가지 않고 오히려 요동정벌론을 제기했다.
문제는 현실성이었다. 처음에는 정벌론이 힘을 얻었다. 심지어 정도전과 남은은 전하의 명이라며 집에까지 찾아와 “상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했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던 조준은 몸을 일으켜 이성계를 만나 불가의 뜻을 밝혔다. 무엇보다 “지금 천자(天子)가 밝고 선하여 당당(堂堂)한 천조(天朝)를 틈탈 곳이 없거늘 극도로 지친 백성을 이끌고 불의(不義)의 일을 일으키면 패하지 않을 것을 어찌 의심하오리까?”라는 설득에 이성계는 정벌의 뜻을 접었다.
이성계는 묘하게도 정도전을 아꼈으면서도 그를 정승에 앉히지는 않았다. 실록의 한 대목이다.
“도전(道傳)이 또 준(浚)을 대신하여 정승(政丞)이 되려고 하여 남은과 함께 늘 태상왕(이성계)에게 준(浚)의 단점을 말했으나 태상왕이 조준을 대접하기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이성계도 정도전을 정승감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
“체통이 엄하고 기강을 떨쳤다”
조준의 졸기(卒記)다.
〈준(浚)이 수상(首相)이 되어 8년 동안 있었는데, 초창기(草創期)에 정사가 번거롭고 사무가 바쁜데, 우상(右相) 김사형(金士衡·1333~1407년)은 성품이 순근(醇謹) 자수(自守)하여 일을 모두 준에게 결단하게 하였다. 준은 성품이 강명정대(剛明正大)하고 과감(果敢)하여 큰일을 결단할 때 의심하지 아니하며, 비록 대내(大內·임금)에서 지휘(指揮)를 내릴지라도 옳지 못함이 있으면, 문득 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리지 아니하여도, 동렬(同列)들이 숙연(肅然)하여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체통(體統)이 엄하고 기강(紀綱)을 떨쳤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을 독점하고 권세를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조준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오니 바로 1차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1398년 8월은 요동 공략 문제로 정도전과 갈등이 극에 이른 때이기도 했다. 8월 26일 마침내 정안군 이방원이 거사를 감행했다. 이방원 세력은 형세를 장악하자 박포(朴苞)와 민무질(閔無疾)을 좌정승 조준에게 보냈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자다.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 |
〈조준이 망설이면서 점(占)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거취(去就)를 점치게 하고는, 즉시 나오지 않으므로, 또 숙번으로 하여금 그를 재촉하고서, 정안군이 중로(中路)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 조준이 이미 우정승 김사형과 더불어 오는데 갑옷을 입은 반인(伴人)들이 많이 따라왔다.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의 다리에 이르니 보졸(步卒)이 무기(武器)로써 파수(把守)해 막으며 말했다.
“다만 두 정승만 들어가십시오.”
조준과 김사형 등이 말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지나가자 정안군이 말했다.
“경들은 어찌 이씨(李氏)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는가?”
조준과 김사형 등이 몹시 두려워하면서 말 앞에 꿇어앉았다. 이에 정안군이 말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서자(庶子)를 세자로 꼭 세우려고 하여 나의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을 제거하고자 하므로, 내가 이로써 약자(弱者)가 선수(先手)를 쓴 것이다.”
조준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저들이 하는 짓을 우리는 일찍이 알지 못했습니다.”
정안군이 말했다.
“이 같은 큰일은 마땅히 국가에 알려야만 될 것이나, 오늘날의 일은 형세가 급박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였으니, 공(公) 등은 마땅히 빨리 합좌(合坐)해야 될 것이오.”〉
합좌란 거사를 공식적으로 도당에서 추인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훗날의 정종을 내세워 일단 이성계로부터 왕위를 넘겨받는 계책을 낸 장본인도 조준이다.
‘正人君子’
다시 조준의 졸기(卒記)다.
〈애초에 정비(靜妃·태종비 민씨) 동생 무구(無咎)와 무질(無疾)이 좋은 벼슬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준(浚)이 막고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진년(庚辰年·1400년, 정종 2년) 7월에 이들 두 사람이 가만히 대간(臺諫)에게 사주(使嗾)하여 몇 가지 유언(流言)을 가지고 준(浚)을 논(論)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순위부(巡衛府) 옥(獄)에 가두었다. 임금(태종)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일이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줄 알고 노하여 말했다.
“대간은 마땅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직사(職事)에 이바지해야 될 것인데, 세도가(勢道家)에 분주히 다니면서 그들의 뜻에 맞추어 일을 꾸며 충량(忠良)한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해치니, 이는 실로 전조(前朝·고려) 말기의 폐풍(弊風)이다.”
죄를 묻는 위관(委官) 이서(李舒)에게 일러 말했다.
“(준과 같은) 재신(宰臣)은 정인군자(正人君子)이다. 옥사(獄辭·법정에서 피고가 자백한 범죄 내용의 기록)를 꾸며서 사람을 사지(死地)에 넣을 수는 없다.”
그러고 곧바로 상왕(上王·정종)에게 아뢰어서 준(浚)을 풀려나오게 했다.〉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종 2년(1400년) 8월 1일 평양백(平壤伯) 조준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주는 일이 있었다. 배경은 이렇다. 애초에 경상도 감사 조박이 지합주사(知陜州事·합주 지사) 권진에게 말했다.
“계림부윤 이거이(李居易·1348~ 1412년)가 내게 말하기를 ‘내가 조준 말을 믿은 것을 후회한다’라고 했다. ‘무슨 까닭이냐’고 물으니 거이가 말하기를 ‘조준이 사병혁파할 때를 당해 나와 말하기를 ‘왕실을 호위하는 데는 강한 군사만 한 것이 없다’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믿고서 패기(牌記)를 곧 삼군부에 바치지 않았다가 죄를 얻어 오늘에 이르렀다’라고 했다.”
권진이 간의대부로 있으면서 조박 말에다가 사사로이 자기가 더 보태 좌중(坐中)에 고했다. 이에 헌신(憲臣·사헌부 관리) 권근과 간신(諫臣·사간원 관리) 박은 등이 교장(交章)해 상언해서 조준·이거이 등의 죄를 말하니 상이 말했다.
“조준이 어찌 이런 말을 했겠는가?”
권근 등이 다시 글을 올려 대궐에 나와 굳게 청하니 이에 조준을 옥에 가두고, 문하부 참찬사 이서·순군만호 이직·윤저·김승주 등에게 명해 추국하게 하니 조준은 강개(慷慨)한 성품이므로 화가 나서 말했다.
“신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울기만 할 뿐이었다. 지합주사(知陜州事) 전시(田時)는 조준과 이거이가 믿는 사람이었다. 조준 등의 죄를 입증하려고 해 서리(書吏)를 보내 잡아오고, 상(上·정종)이 조준·이거이·조박을 한곳에서 빙문(憑問)하게 하려고 하는데 권근 등은 다른 곳에 두고 국문하기를 청했다. 상이 의심해 화를 내며 말했다.
“어찌 죄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형을 가할 수 있겠는가?”
이방원, “개국 등은 모두 조준의 공”
대간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곧 순군 관리에게 명해 이거이·조박을 잡아왔다. 세자(이방원-편집자 주)가 윤저(尹抵·?~1412년)를 불러 말했다.
“경은 상께서 경을 순군만호로 삼은 뜻을 알고 있는가?”
윤저가 대답했다.
“신은 본래 혼매하고 어리석어 이사(吏事·관리 업무)를 익히지 못했는데 지금 신에게 형관 임무를 명하시니 조처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해 밤낮으로 황공하고 송구합니다.”
세자가 말했다.
“경은 본래 세족(世族·오랜 명문가)이며 작은 절조에 구애하지 않고 세태에 아첨하지 않으며 오직 너그럽고 공평한 것을 힘쓰기에 형관 임무를 명한 것이다.”
대간(臺諫)의 소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태상왕(이성계-편집자 주)께서 개국하신 것과 상(정종-편집자 주)께서 대위를 이으신 것과 불초한 내가 세자가 되어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른 것이 모두 조준의 공이다. 지금 전날 공을 잊고 허실을 가리지 않고, 다만 유사(攸司)의 소장만 믿고 국문한다면 황천 상제(皇天上帝)가 심히 두려울 것이다. 조준이 만일 이 말을 했다면 크게 죄가 있는 것이다. 경은 가서 조심하라.”
윤저가 재배하고 나오는데 정승 민제(閔霽)가 비밀리에 윤저에게 말했다.
“조준 등이 나와 하륜을 해치고 인연을 연결해 세자에게까지 미치려고 한다. 지금 잡혀 갇혔으니 끝까지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성(臺省)이 모두 대궐 뜰에 나와 다시 위관(委官·조사 책임자)을 이거이와 조박이 있는 곳에 보내 조준이 말한 것을 질문하도록 청하니 상이 말했다.
“무릇 질문하는 일은 마땅히 한곳에 두고 빙문해야 할 것이지 어찌 사람을 보내 물을 수 있는가?”
대간이 극력 간쟁하니 상이 일을 보지 못하도록 명해 각각 사제(私第)로 돌려보내고 조박을 순군옥에 가두고 물으니 조박의 말이 대성의 소장 뜻과 같지 않았다. 또 권진을 가두고 물으니 권진의 말도 소장 뜻과는 달랐다. 상이 권진 등을 크게 미워해 이거이를 순군옥에 가두고 조박과 빙문하니 이거이가 말했다.
“나는 조준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조박이 맞대고 질문했다.
“그대가 계림 동헌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이거이가 말했다.
“말한 일이 없다. 그대가 나에게 술 두세 잔을 먹였지만 내 마음은 달랐고 취하지 않았다. 그대가 기묘년에 이천으로 폄출되었다가 경상도 감사로 나간 것은 우리 부자 때문이었다. 내가 조준과의 정사(定社·1차 왕자의 난) 맹세를 바꾸지 않았는데 조준이 비록 그런 말을 했더라도 내가 어찌 그대에게 얘기하겠는가!”
조박이 말했다.
“내 자식 조신언이 회안공 딸에게 장가들 때 조준이 안마(鞍馬)를 주었고 내가 감사로 나갈 때 금대(金帶)를 주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나를 향해 불평이 있었다.”
이거이가 큰소리로 말했다.
“조박의 말은 모두 사사로운 감정이다. 바라건대 제공(諸公)들은 들어보시오.”
조준과 이거이는 석방돼 각각 그 집으로 돌아갔고, 조박은 폄출하고, 권진은 축산도로 유배를 보냈다.
태종, “내가 조준을 아낌을 하륜을 아낌만 못했다”
태종이 마침내 즉위하고 조준은 다시 좌정승에 오른다. 그러나 이미 하륜(河崙)의 세상이었다. 조준 졸기(卒記)다.
〈준(浚)이 다시 정승이 되어 일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번번이 자기와 뜻이 다른 자에게 방해를 받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아니 되어 다시 파(罷)하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죽은 나이가 60이다.〉
뜻이 다른 자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륜이다. 조준이 재상으로 경세(經世)를 펼친 것은 태조 때였고 정작 태종과 호흡을 맞춰 일할 기회는 1, 2차 왕자의 난을 함께했던 하륜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태종은 조준을 한결같이 극진하게 예우했다.
〈준(浚)이 만년(晩年)에 비방을 자주 들었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피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과 대우는 조금도 쇠(衰)하지 아니하여, 임금이 일찍이 공신(功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준에게 이르자, 임금이 수(壽)를 빌고, 그를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죽은 뒤에도 뛰어난 정승[賢相]을 평론(評論)할 적에 풍도(風度)와 기개(氣槪)에서는 반드시 준을 으뜸으로 삼았고, 항상 ‘조 정승(趙政丞)’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한결같았다.〉
國體에 이른 조선 1호 재상
사관의 평이다.
“준(浚)은 국량(局量)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風采)가 늠연(澟然)하였으니,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현재(賢才)를 장려 인도하고, 엄체(淹滯·재주가 있는데도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를 올려 뽑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예위(禮闈·예조)를 세 번이나 맡았는데, 적격자라는 말을 들었다. 이미 귀(貴)하게 되어서도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門)에서 영접하여 관곡(款曲)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布衣)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유소의 《인물지》 유형론에 따르면 조준은 도리가 깊고 견실해 청절가(淸節家)로 손색이 없고 법제를 개혁해 민생을 이롭게 했으니 법가(法家)의 면모 또한 분명한데다가 큰 결단을 의심 없이 내릴 줄 알았으니 술가(術家)의 계책을 갖추고 있어 국체(國體)에 이른 조선 제1호 재상이라 할 것이다.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조대림(大臨·1387~1430년)이다. 태종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했으니 조준과 태종은 사돈이기도 했다.⊙
[출처] 조선 재상 열전 2 | 조준전(趙浚傳)조선의 ‘宰相다운 재상’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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