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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린 여행4 - 강을 건너서 오코넬 스트리트에서 The Spire 와 중앙우체국을 보다!
2022년 4월 25일 더불린시 남부에 위치한 호텔을 나와 서북쪽으로 걸어 성 패트릭 성당 St. Patrick's
Cathedral 과 크라이스트 교회 Christchurch Cathedral 를 보고는 다시 걸어서 Dam Street
큰 도로에서 더불린시 의회 Council 를 지나 더불린 캐슬 Dublin Castle 을 찾아 왕궁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동쪽으로 걸어서 붉은색 건물들이 늘어선 이른바 템플바 Temple Bar 에
도착하는데 먼저 킁 통나무 맥주통들이 보이니 여긴 아일랜드의 펍 Pub 으로
22개의 술집이 밀집해 있는 지역인데 오후 4시부터 밤 12시 너머까지 영업한다고 합니다.
동쪽으로 걸어 더불린 시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오코넬 스트리트 O'Connell Street 를 만나 좌회전해
도로를 따라 더불린 시내를 동서로 가르는 리피강 Liffy River 에 놓인 오코넬 다리 O'conell Bridge
를 건너서 북쪽에 이르니 도로 한 가운데는 보행자 전용 거리로 The Spire 와 동상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북쪽 광장에 하늘 높이 솟은 The Spire 는 1966년 공화주의자가 영국 해군제독 넬슨 동상을 파괴한
자리에 2003년에 밀레니엄 기념물로 세운 120m 높이 뾰족한 탑으로 아란 스웨터
뜨개질 바늘을 상징하는데 밤에는 불빛이 반짝거리며 밑변은 3m 이나 위는 15cm로 가늘어 집니다.
여기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 오코넬 동상 Daniel O'connell 이 서 있는 북쪽광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붐비는데, 대니얼 오코넬(Daniel O'Connell, 아일랜드어: Dónall Ó Conaill 도날 오 코날
1775년 8월 6일 ~ 1847년 5월 15일)은 19세기 초 아일랜드의 정치지도자로 가톨릭교도 해방령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아일랜드와 영국을 합방시킨 1800년 연합법의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여기 오코넬 광장에는 특히 관광객 외에도 젊은이 들이 많이 눈에 띄는게 인상적인데 왼쪽편에
고풍스러운 큰 건물이 있으니 1916년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부활절 봉기의 중심 건물인 그 유명한 중앙우체국 The General Post Office 입니다.
부활절 봉기는 1916년 4월 24일 부터 4월 30일 까지 일주일 정도 진행됐으며.... 압도적으로
우세한 영국의 화력에 의하여 결국 분쇄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아일랜드의 무장
독립투쟁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 의 끈질긴 항쟁
끝에 1923년에 독립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부활절 봉기는 아일랜드 독립의 도화선이었습니다.
12세기 무렵 부터 끊임없이 영국의 침략을 받았던 아일랜드는 1800년 영국의 일부로 합방
되었으며 이후 아일랜드 대기근과 같은 사태를 거치면서 아일랜드 내의 반영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갔고 독립을 위한 움직임도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니 독립
(자치권) 운동의 방향은 폭력을 수반하느냐 안하느냐는 점에 따라 두 노선으로 갈립니다.
하나는 '청년 아일랜드 운동' 이라는 명칭이 붙은 노선으로 대체적으로는 비폭력을 택하고 의회로
진출하여 정치세력을 확보한 이후 독립(자치)을 획득하자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무장
투쟁 노선으로 이 세력을 주도한 것은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혹은 신 페인 등의 단체입니다.
청년 아일랜드 운동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자유당과 연합을 통해 영국 의회로 진출하는데 성공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이 되면 무시할수 없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니 수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역시 아일랜드에게 우호적이었던 입장이었기에 1886년 자치법을 상정하지만 하원에서 부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청년 아일랜드 운동은 포기하지 않고 1893년 한번 더 자치법을 상정하고 이번
에는 통과되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상원이 거부해 버립니다. 하지만 의지와
끈기의 아일랜드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1912년에 마침내 자치법을 통과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동북쪽 얼스터 지역에 거주하던 성공회 신자들은 또 자기들 나름대로
'우리는 대영제국의 충실한 신하‘ 를 표방하며 자치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 세력을 조직
했고 또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을 비롯 무장 투쟁 세력은 '자치 따위론 만족 못한다.
독립할때 까지!' 라는 완전히 영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립 에이레 공화국을 세우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자치권의 시행은 전쟁 종료 후로 연기됐고, 무장투쟁
세력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말 그대로 절호의 찬스였으니 1916년 4월 24일 1,600여명의 독립군
들이 GPO(중앙우체국) 을 비롯한 더블린 시내의 주요 거점을 습격하면서 부활절 봉기가 시작됩니다.
봉기 당일에 더블린 내의 주요 거점들을 거의 장악하고,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가 시민들 앞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언하면서 뭔가 되는가 싶었는데... 이후에 벌어질 더블린 시민 학살을
막기위해 그리고 압도적으로 열세이고 포위된 추종자들을 구출할 희망아래 임시정부원들은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며 도시와 카운티에 있는 사령관들이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사전에 약속됐던 독일 제국의 무기를 싣고 오던 선박이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무산된데다가...
봉기에 참여한 각종 정파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명령이 뒤죽박죽이어서 안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더 엉망으로 운용되엇으며 덕분에 봉기세력은 더블린을 장악하기에 급급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영국군은 이미 1차대전이 2년 진행되던 상황인만큼 병력 운용이 원활했고 결정적
으로 더블린 시민들 역시 봉기 세력에 냉담한 태도를 보여주었으니 봉기세력에게 온갖
욕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영국군이 진압을 시작한 이후 봉기 세력은 무너지기 시작해
4월 30일 더블린 중앙 우체국이 영국군 포병대에게 맹폭당하는 것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납니다.
진압 이후 영국군은 아일랜드의 무장투쟁 세력을 아예 뿌리채 뽑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니 패트릭
피어스를 비롯한 독립군의 주요 지휘자들은 총살됐고, 수천명의 단순 가담자와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무고한 시민들도 투옥되었으며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제임스 코널리는
다리에 부상을 입어 제대로 설 수도 없자.... 영국군은 코널리를 의자에 묶어서 총살시켰습니다.
무자비한 대응은 주동자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프랜시스 쉬이 스케핑턴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봉기 기간중 영국군에게 학살된뒤 암매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는 걷잡을수
없게 되었으니 이후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세력은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며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 의석의 대부분을 신 페인이 가져갔고 독립선언 후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절 봉기의 전장인 GPO(더블린 중앙 우체국)는 전투로 인해 붕괴되었지만 복원 후 1929년에
아일랜드 우체국(An post)의 본사로서 재개장했으며 신페인은 봉기 당시 단순 참가
세력에 불과했는데, 이들을 봉기의 주도세력이라고 오해한 영국측에 의해 아일랜드 민중
사이에서 이름이 크게 퍼져나갔고, 마침내 독립 운동을 이끄는 핵심 세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에이먼 데 벌레라와 마이클 콜린스도 봉기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지만 데 발레라는 미국 시민권자여서 죽여
버리면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고 콜린스는 이 때 당시에는 그냥 단순가담자라 영국이 투옥
하는 정도로 끝내버렸고, 출옥 이후 이들은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을 이끄는 두 거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중에 로저 캐즈먼트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은 벨기에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는데 매우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당시 인권조사에 대한 공로로 영국정부
로 부터 기사 작위와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으나, 아일랜드 독립운동으로 인해 취소됩니다.
1916년 부활절 봉기후 영국-아일랜드 전쟁을 거쳐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아일랜드 32개 주 가운데 남부 26개 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했는데 아일랜드
전부가 독립되기를 원했던 강경파들로 인해 1년후 아일랜드 내전이 일어났으며 1949
년에 이르러 아일랜드는 영연방에서 탈퇴한 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하게 독립하게 됩니다.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의 32개 주 중에서 26개 주의 자치를 보장하고 아일랜드
자체 군대와 경찰을 인정한 정도이니 많은 독립주의자는 독립된 공화국을 바랐지만
조약에서 아일랜드 자유국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마찬가지로 영국 군주를 수장
으로 섬기는 대영제국의 일원이었으며 또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은 충성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나는... 법에 의해 세워진 아일랜드 자유 주의 의회에 충성할 것을 진정한 신의로써 엄숙히
맹세한다. 또한 나는 대영제국과 함께하는 공통의 시민권과 영연방 구성국들과의
유대를 위해, 법에 의해 국왕 조지 5세 전하와 그 상속자와 계승자에게 충성할 것이다.”
하지만 1919년 부터 3년간의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에 대항해 싸웠던 IRA 대원의
70% 가 충성 서약을 할수 없다며 조약을 반대했고 이들은 영국과 아일랜드간의
공식적인 법적 관계를 완전히 끊고 완전한 아일랜드의 독립을 이뤄내야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까짓 말로 하는 충성서약 선서가 무엇이건대 절대로 할수 없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느냐 하면....
기독교국가에서 선서(맹세)는 성경에 손을 얹고 하는 것이니 후일 이를 어긴다면 설사 마음에
없는걸 억지로 했다손 치더래도 하나님을 어기는 것이니 신앙을 저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북아일랜드의 6개 카운티(주)가 아일랜드 자유국 영토에 속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에도 반대
했으니 조약반대파는 또한 빈부격차 문제보다는 영국에 대한 민족의 독립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영국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민족적인 상공인과도 연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약 지지 세력은 조약을 미래에 있을 완전 독립의 발판으로 삼아야 된다고 주장
했으니 이들은 가난한 농민,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고 영국과는 타협적인 입장에
있었던지라 양진영간에 내전이 일어났고 내전의 절정은 바로 이곳 더블린의 오코넬
거리에서 벌어진 더블린 전투였는데... 전쟁은 결국 강경파인 IRA 의 궤멸로 끝이 났습니다.
*** 경찰차량의 이름이 Police가 아니고 아일랜드어인 Garda 이다 ***
이 내전은 아일랜드 사회를 분열시켰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이후 IRA는 과격한
소수의 테러조직 형태로 운영되고 여러 가지 폭탄 테러를 일으켰는데 영국으로 남은
북아일랜드 6개주 지역 아일랜드인 중에는 종교적으로 아일랜드 성공회 신도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켄 로치 감독에 의해 제작된 영국으로 부터의 아일랜드 독립
운동과 강경파와 온건퍼 간의 내전을 다룬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은
2006년에 개봉되어 "프랑스 칸 영화제" 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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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더블린 그립네요
아...... 언제 다녀오셨나 보네요?
더블린의 리피강을보면 파리의 센강이 생각나죠 더블린은 파리만큼은 아니지만 꼭가보고싶은곳이지요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은.....
낭만 그 자체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