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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죽는 것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고, 못난 사람이라도 면할 수 없는 일인데, 사직(社稷)을 위해 죽으면 그래도, 그저 병들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감히 딴 마음을 품은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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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의 독려에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날 사병들을 비밀리에 매복시키고, 그날 저녁 한성부를 점령.
홍윤성과 홍달손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합류한 한명회,
김종서와 황보 인의 집을 습격하여 이들 일파를 제거한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 중에는 다수가 김종서와 황보인의
권력에 반발하여 한명회를 지지하는 여론도 조성되었다.
한명회는 김종서 황보인 일족을 참살 후 군기녹사(軍器錄事)·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 1등관이 되었다.
그 뒤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의금부도사를 거쳐,
수양대군이 영의정부사가 되면서 사복시소윤으로 발탁.
1454년(단종 2년)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한다.
1455년(단종 3년) 경연 참찬관, 겸판사재감사(兼判司宰監事)
지예조사(知禮曹事)를 거쳐, 6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455년(세조 즉위) 6월 세조가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으로 즉위.
한명회는 승정원좌부승지(左副承旨)에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
곧이어 그해 가을에는 승정원우승지(承政院 右承旨)로 승승장구한다.
살생부를 작성하여 정적들을 제거 후
결국,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린.,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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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부란 조정 대신들 중에서
죽일 자와 살릴 자 이름을 기록.
한명회는 무사들에게 지시를 내려
입궐하는 대신들의 목숨을 좌지우지.
오가작통법과 면리제를 창시한.,한명회
면리제(面里制)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뒤에도 유지된 행정제도.
오가작통법은 조선 시대, 범죄자 색출과
세금 징수 및 부역 동원 등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5집을 1통으로 묶던 호적제도.
면리제는 군현 내부를 면리로 세분하는 제도로
중앙권력이 군현단위의 지방행정을 장악하기 위해
하부단위인 촌락에까지 개입하여 직접 운영하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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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조선 태조 때 학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의 아들이다.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기도 한.,한명회.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
한명회(韓明澮)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조선 전기 대표적인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던 점이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의 대표적인 참모이자 지략가.
문종 사후 세자인 홍위가 단종으로 등극하자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가 작성했던.,살생부.
수양대군은 세력과 사람이 없어서 실패할 것을 염려.
'형세가 고단하고, 세력은 미약하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한명회는 당위성을 역설하며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수양대군을 독려.
1453년 10월 단종을 보호하고 있는
좌의정 김종서 집을 야간에 습격하여
철퇴로 살해 후 그와 뜻을 같이하는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모두 죽이고 정권을 탈취한 일.
모두 다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가 앞장서서 한 일이다.
이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총명한 단종이 2~3년 후면 친정을 할 수 있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명분이 없어지므로 서둘러 죽인 것.
1456년(세조 2) 2월에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세조 3부자를 연회장에서 암살하려는 정보를 사전입수.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미 세종대왕으로부터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한명회는, 연회장에 별운검으로 임명된
성승, 유응부, 하위지 등을 의심하고 출입을 차단.
1456년 5월에는 명나라 황제가 태감 윤봉을 보내서
그에게 특별 선물로 그에게 관복(冠服)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사육신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한명회.
6월 1일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하자
운검(雲劒)들이 출입하려 하자 만약의 사태를 대비.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광연루에 사신이 많아서
자리가 좁다는 이유로 세자는 연회에 참석하지 말 것.
세조에게 홍달손과 홍윤성을 시켜 병력을 동원할 것이니
운검의 제장(諸將)들도 입시하지 못하게 하기를 주청한 그.
세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이를 윤허하였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이 운검을 차고 들어오려 하기에
운검은 안 들어와도 된다며 제지하자 거사의 실패를 우려한
운검의 병력들이 그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민첩하게 피했던 그.
1456년 초부터 정창손에게 사위를 설득하게 했던 그.
그해 6월 2일, 세조 3부자 척살에 가담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 가담자들을 사전폭로하여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과 거사 가담자를 체포한 일.
한명회는 이들을 국문한 후 처형하였고,
800여 관련자를 처형, 수천 명을 유배 보내.
사육신의 단종 복위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세조는 왕권의 찬탈과 권력 유지를 위해
친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등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왕위에 오른.,계유정난.
사육신 시신은 성삼문의 사위인
박임경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난신에 관계된 부녀자라 하여
공신들의 종과 노리개, 첩으로 분배되었거나 노비, 관노,
기생 등으로 끌려갔다가 성종때 일부 석방되어 동정의 대상.
'숙종~ 영조' 때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약200년이 훨씬 지나 뒤늦게 복권되었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죽은지 200년이 더 지난 후에야
숙종24년 1698년에 단종과 정순왕후가 복위 되었지만
단종은 영월에 묻혀있고 정순왕후는 남양주에 묻혀있다.
생전에 왕비 신분에서 천민으로 전락한 정순왕후.
낙산 청룡사 정업원에서 65년간 비구니로 살다갔다.
그러므로, 사육신 처자권속들 삶은 더욱 비참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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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조 집권 초반부터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
해안가에도 성곽을 쌓고 병력을 보내 방비를 튼튼히 하고
미구에 있을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
1456년부터 노산군, 금성대군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세조가 듣지 않았다.
1457년(세조 2년) 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한 상당군.
그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
그해 겨울 도원군의 왕세자 책봉을
주청을 위한 세자책봉 주청사가 되어
한명회는 명나라 연경(燕京)에 들어갔다.
세자 책봉을 성사시키고
1458년 봄 귀국 후., 병조판서.
그해 여름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의 3도에 흉년이 들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3도 순찰사(巡察使)에 특별히 임명되어
구호물자를 싣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순시하며 백성들을 구휼.
또한 병조판서 재직 중 평안도와 함경도에 병력을 이끌고 출정.
여진족과 야인 부락을 토벌하고, 북방에 축성을 한후 돌아왔다.
그뒤 황해·평안· 함길· 강원도 도체찰사 등을 역임한후., 숭록대부.
1458년(세조 3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
1459년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승정원과 육조, 왕명 출납권, 인사권, 병권, 감찰권 겸임.
1460년 그의 병권 장악을 경계한 세조는
평안도와 함길도, 강원도의 도체찰사 직은
신숙주에게 넘겨 그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
오지, 북방 파견에 망설임이 없었다.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 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다시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임명되고
판병조사(判兵曹事)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이 되고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 겸임 후, 1463년 의정부좌의정.
1463년 평안도, 강원도, 함길도, 황해도를 순찰하였다.
그가 순행을 갈 때 특별히 세자가 나와 그를 전송하였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그의 빈인 수빈 한씨는 궁궐에 살아도 좋다는
시아버지 세조의 배려를 사양하고 사가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인수대비의 친정과는 10촌도 더 차이가 나는 먼 친척.
인수대비의 집에 자주 방문하며 수빈한씨 야심을 간파한다.
한명회는 인수대비에게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제의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어 권력기반을 더욱 다져나갔다.
그는 우선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훗날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2대에 걸친 왕후를 배출.
권람은 일찍 요절한 그의 동생 한명진의 처남이기도 했다.
한편 자신의 손자 한경침을
사위인 성종의 서녀와 혼인시켜
3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관계를 형성.
인수대비의 차남 자을산군 혈과
자신의 넷째 딸을 혼인시키는데,
후에 예종이 일찍 죽자 한명회는
신숙주, 정창손과 자을산군을 추대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성종으로 올린다.
한명회는 권람, 신숙주 등과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 즉위 후, 치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인척 관계에 의한 요직 장악
인사 폐단을 낳아 조선왕조의 기강을 흐트러 놓았다.
1467년(세조 13년) 함경북도 일대에서 이시애 병란.
한명회와 신숙주가 반란을 모의했다고 모함해 투옥.
그는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 신숙주와 함께 투옥 당한다.
또한 함길도 절제사 강효문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모함.
의금부 투옥, 신문 후 모함이 밝혀졌다.
........이시애(? ~ 1467년)의 난............
조선 초기의 무신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길주 출생인 그는 경흥진 병마절제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판회령부사를 역임한 힘길도 호족.
함길도에 대한 지역차별과 단종 폐위 등에 반발하여
형제 이시합, 매부 이명효, 함길도 지역 유향소 등과 결탁,
함경도 토호, 농민들의 호응에 따라 이시애의 난을 일으켰다.
조선 초 북방민 회유정책으로 중용되어 호군 등을 지낸 호족.
이징옥의 난 이후 세조가 함경도 출신의 관직 부여를 억제하고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 및 왕권을 강화하자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껴 모친상으로 휴직 중 역모를 꾀하였던 것.
그해 양력 5월에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민심을 선동, 세력을 크게 과시하여 함흥까지 함락하였다.
한편 세조에게 거짓 장계 이간책으로 조정 내부를 분열시켰다.
이시애는 길주로부터 단천·북청·홍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파견 관장을 죽이고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자칭하며
함흥 관찰사 신면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을 사로잡았다.
이와 같이 반군의 기세가 거세자
구성군 준의 관군은 철원까지 나갔으나
더 이상 이시애의 반군이 진격하지 못하였다.
그의 군세가 강성하여 도통사 신면이 전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구성군 & 남이 장군 등의 대대적인 토벌 공격에 의해
북청에서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대패, 여진 부락으로 도주하던 중
조정에서 비밀리 급파한 처조카 허유례의 계교로 부하들에게 체포.
곧이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아우 이시합 등과 함께 참수당하고
머리는 각 도(道)를 돌며 효시되었다.
원래 함길도는 조선의 왕실 발상지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여진세력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세조는 중앙집권 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북도 출신 수령을 줄이고 한양에서 관리를 파견.
이러한 세조의 집권책은 북도인의 불만을 샀던 것.
1467년 5월 길주 함길도절도사 강효문을 살해한 이시애
이어 길주목사, 부령부사 등 중앙파견 지방관을 모두 살해.
동시에, 한명회· 신숙주 모반 이간책을 펴면서 의거라고 주장.
한편, 함길도민에게는 이시애가 세조의 뜻을 받들어
반신을 정벌 평정하였다고 속여 그들의 협력을 구했다.
세조는 조정 중신이 관련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이들을
대궐 안에 구금시키는 동시에 반란 정토조를 편성하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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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후 줄곧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문을 믿고 신숙주와 한명회를 옥에 가둔 것.
이시애의 모함이 밝혀지면서 그는 신숙주와 함께 석방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과 함께
공동 원상으로 예종 즉위 초반, 서정(庶政)을 맡아보았다.
이때 그는 승정원에서
숙직하면서 업무를 처결.
1468년 초, 혜성(彗星)이 나타나자
그는 천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
그는 천변이 두렵다며 창덕궁은 성벽이 없고
방비가 허술한 점을 들어 중신(重臣)들로 하여금
군병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호위하게 할 것을 건의.
그해 남이(南怡)가 쓴 시구가 문제가 되어 모역사건으로 몰리자
유자광의 고변을 듣고, 신숙주, 유자광 등과 함께 남이, 강순 등의
사형을 주장해 관철시켰고 남이 등이 처형된 후 유자광, 신숙주 등과
남이, 강순 옥사의 공으로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관 호를 받고
1469년(예종 1년)에 다시 의정부영의정이 되었으나 곧 스스로 사직하였다.
불편한 관계였던 예종이 갑자기 죽자
새 왕의 즉위시까지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결재.
이때도 병권에는 관심이 높아
병조판서 겸임 인사권까지 장악.
이때 그는 의경세자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사위인 '자을산군 혈'을
적극 지지하여 차기 왕으로 즉위시킨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판이조사와 판병조사를 겸했고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그해 춘추관영사로서 최항, 신숙주 등과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
평소 자신이 은퇴하여 갈매기를 벗삼겠노라며
한성부 한복판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나
은퇴할 수 없어 1471년(성종 2년) 춘추관영사 벼슬.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하락하기 시작.
동년, 그는 대궐의 동, 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
자신이 직접 서영대장이 되어 서영(西營) 군사를 거느렸다.
1472년 영춘추관사로서 세조실록을 완성시켰으며,
그해 성종에게 학문을 진작, 장려할 것을 건의하였고,
경사(經史)관계 서적을 많이 구하여 성균관에 기증, 비치.
또한 명륜당(明倫堂) 북쪽에 새 전각을 마련하고
추가로 장서를 마련할 공간을 만들면서 직접 감독.
성종의 폐비윤씨 폐출사건에 참여
후일 한명회 부관참시 원인이 된다.
그는 칠십 고령이라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성종의 만류.
1475년(성종 5년) 영의정부사직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계속 참여하였다.
1480년(성종 10년) 가을 부원군직 사임을 청했으나
성종이 승낙치 아니하고 성종이 어찰을 보내어 만류.
"국가의 공적이 여러 세대에 이르고
재주와 식견은 한 세대를 앞서 갈 만큼 밝으며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나라 근심으로 염려하여
논의하면 반드시 적중하였기에 원로가 조정에 있음은
나라의 영광이며, 언제나 임금에게 힘과 의지가 되는도다.
아무리 오래도록 병에 시달리더라도
약을 내리니 치료하여 내 뜻에 부응하라.
그러면, 경도 노년에 편안함이 있고
나도 허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1483년 경상도에 저수지를 만들어가뭄을 대비하였다.
그는 은퇴를 결심후 한강가에 압구정 정자를 만들었다.
그는 수양대군의 측근이 된후 계속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동
세조~성종조까지 고관요직을 역임,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했다.
세조는 특히 그를 총애하여 "나의 장량(張良)" 이라고까지 하였다.
또한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성장했지만
스스로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차례 공신책록으로 권력과 함께 호부(豪富)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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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계유정난을 주도한 '수양대군 책사' 한명회.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킹 메이커’였을뿐 아니라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낸 조선왕실의 장인.
'세조~ 성종'에 걸쳐 행해진
다섯번의 공신책봉 과정에서
네 번이나 일등공신에 올랐다.
한명회가 세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성종대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시기로는
13세 사위 ‘잘산군을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한 순간.
1469년 예종이 14개월 짧은 왕위를 뒤로 하고 승하하였다.
예종에게는 안순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4세의 아들 제안대군과
요절한 의경세자(세조 장남, 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맏아들 월산대군.
그러나, 왕위는 의경세자 차남인
13세의 잘산군으로 결정되었던 것.
왕이 죽은 그날 바로 다음 왕을 결정하는 파격적인 조치.
그 주인공은 왕실 최고 어른이던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잘산군은 어떻게 이렇게 전격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세조 사후에 예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부터
다음 왕위 계승과 관련해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였다.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은 후
18세 왕세자로 책봉된지 2년 후에 병사.
“세조가 어린 조카를 죽인 죗값을 받은 것”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도 했다.
맏아들이 죽자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이 왕세자.
1457년 형의 죽음으로 8세에 세자로 책봉된 예종.
세조 사후인 1468년 9월, 19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20세가 되지 않아 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
여기에 더해 세조 때 막강한 권력을 형성한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 훈구대신들의 입김.
예종은 14개월 치세 동안 왕권강화를 시도했지만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갖춘 훈구대신들의 장벽 속에서
별다른 왕권을 한번도 행사하지 못한채 병으로 승하했다.
예종이 왕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예종 사후 왕위 계승 결정권은 자연스럽게
대비인 정희왕후와 훈구대신들에게 넘어갔다.
이 상황에서 한명회는 정희왕후를 움직여
자신의 사위 잘산군을 왕으로 올리는데 성공.
당시 성종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형님인 월산대군에 이어 서열 3위였다.
그럼에도 대비인 정희왕후는
제안대군이 네 살로 너무 어리고
월산대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잘산군을 예종의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
정희왕후는 한명회가 훈구대신으로
조정 분위기를 주도하는 상황이기에
한명회의 정치적인 후원을 받음으로서
왕실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을 터.
예종이 왕세자 시절에
한명회는 딸(장순왕후)을
시집보내 장인이 되었지만,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딸이 요절하여 왕의 장인이라는
프리미엄을 누려보지 못했던 한명회.
그러나, 다시 한 번 사위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 정치력을 발휘해
세조 때부터 승승장구한 그의 이력에
왕의 장인이라는 영예가 더하여졌던 것.
그 덕분에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한명회 시대를 열게 되었다.
“모든 형벌과 상을 주는 것이 모두 그의 손에 있었다.
조선왕조 실록 (1461년 9월 26일 자)”에 있는 기록이다.
“권세가 매우 성해 따르는 자가 많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문에 가득했으나,
응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시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이르렀다.”
성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 한명회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1476년(성종 7년) 한강가에 ‘압구정(鴨鷗亭)’정자를 지었다.
압구정이란 정자 이름은 명나라 사신인 예겸이 지어준 것이다.
'송나라 재상' 한기(韓琦)가
은퇴한 후 서재 이름.,압구정.
‘압구’는 갈매기를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보낸다는 뜻.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였지만
압구정은 '권력의 정점' 한명회의 위상을 상징하는 공간.
압구정이 완성되던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시를 지어
그에게 내릴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3세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인이 되자 만만한 군주가 아니었다.
성종에게 있어서 장인 한명회는 최고의 정치 후원자였지만,
훗날, 새 시대로 나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존재.
그러나, 정치는 한명회 및 훈구세력에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한 속마음을 감추고
정치9단에게 정치를 배워왔던.,성종.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젊은 사림파 인재들을 키워왔던 성종.
마침내, 그들이 한명회를 견제하기 시작.
조정의 젊은 관료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압구정 정자 현판에 걸린 성종의 시는 철거.
그것은 한명회가 추락하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당시 한강 주변에는
‘희우정’이나 ‘제천정’ 등
왕실 소유 정자 만 있었다.
한강 주변 최고의 조망을 가진 곳에
신하의 신분으로서 정자를 건립한 것
그당시 한명회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한명회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압구정은 종지부를 찍는 부메랑이 되었다.
1481년(성종 12년) 6월의 일이다.
압구정 명성이 명나라까지 알려지면서
조선을 방문한 사신이 압구정 관람을 청했다.
이에 한명회는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의 뜻을 보였다.
성종은 아무리 장인이지만
왕의 뜻을 거역하자 불쾌했다.
더구나, 한명회가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봉(龍鳳)이 새겨진 천막을 사용하게
해준다면 잔치를 벌이겠다는 말에 격노.
이에 성종은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고,
희우정과 제천정을 제외한 정자는 모두 다
없애겠다는 강경 선언을 하게 된 원인을 초래.
‘성종실록(1481년 6월 25일)’ 기록에 의하면
“강가에 정자를 지은 자가 누구누구인지 모르겠다.
이제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면 반드시 강을 따라
두루 돌아다니면서 놀고야 말 것이고, 뒤에 오는 사신도
이를 본따 유람할 것이니, 그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은 세종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머물다가 비를 만나 이름을 내리고 기문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다.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모두 다 헐어 없애어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 성종 -
왕의 권위를 우습게 보는 한명회에게 확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
그러나 왕보다는 사위라는 인식이 강해서였을까?
한명회는 제천정에서 벌이는 잔치에
‘아내가 아파서 나갈 수 없다’며 불참.
그의 핑계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성종의 의중을 알아차린 승지와 대간들이
연이어 한명회를 비난하자 성종은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고 했지만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어 한명회는 추락했다.
즉위 직후 밀월관계였던 성종과 한명회
그 사이 균열 사건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1476년 성종의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대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에게 친정을 시키겠다는 언문교지를 내렸다.
이 조치에 대해 한명회는 “동방의 백성들을 버리는 것이며,
대궐에 나아가 한잔 술을 편히 마시지 못할 것”이라면서 반대.
정희왕후가 계속 수렴청정을 하여줄 것을 건의한 사건이 있었다.
한명회와 정희왕후 사이가
워낙 각별해서 나온 발언이다.
그러나, 성종 입장에서는 성년이 된 자신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장인에 대해 불만이었다.
한명회는 최고의 권력이었지만, 추락도 한순간.
그를 추락하게 한 주역이
자신이 왕으로 만들어준 성종.
한명회의 마음은 씁쓸했을 것이다.
성종에게 있어서 한명회는
장인이자 자신의 후견인이라는
측면보다 극복해야 할 훈구파의 중심
성종은 신숙주나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 빈자리에
김종직 등 사림파를 등용하여 새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신숙주나 한명회를 국가 원로로서 예우.
사림파와 훈구파
세력 균형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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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년(성종 14년) 세자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니
명 황제가 '충직한 노한이 또 다시 왔다'면서 금전(金錢)과
채단(채색한 비단)을 선물하였고 이후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마련.
유생들에게 한문을 권하였고
1485년(성종 15년)에 병을 이유로
치사를 청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지팡이와 의자를 선물로 하사 받았다.
그러나, 1485년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서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는데 야사에는
유자광의 사주를 받은 언관들에 의한 일이라 전한다.
그는 왕실과 이중으로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큰딸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 아들 윤반과 혼인,
작은딸은 신숙주 맏아들 신주와 혼인.
셋째 딸은 예종의 정비(장순왕후),
막내딸은 성종의 정비(공혜왕후)
이 딸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한.
1487년(성종 17년) 그가 병석에 눕자
성종은 내의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했다.
인수대비는 그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성종에게 그를 각별하게 보살필 것을 당부.
성종은 내시 김처선과 좌승지 한언을 보낸 것.
그해 음력 11월 14일 사망(향년 73세).
단종, 세조, 예종, 성종 4대를 걸친 35년 세월.
왕비가 된 두 딸은 나이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
장남 한보는 아직도 미관밀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두 왕비를 낳은 정경부인 민씨와는 이미 사별.
폐비윤씨가 비극적인 운명을 고한지 이미 5년.
한명회는 죽음을 앞두고 나라일이 걱정되었다.
폐비윤씨의 사사문제가 목의 가시처럼 걸렸다.
분명 그 일로 장차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것까지 해결하고 가는 것이 그의 마지막 바램.
한명회는 김처선의 도움을 받으며 관복을 입었다.
좌승지 한언 등이 이유를 물어도 답을 하지 못했다.
한명회는 관복을 다 입자 북쪽을 향해 4배를 올렸다.
그리고나서, 탈진한듯 옆으로 쓰러졌다.
김처선과 한언이 얼른 그를 부축하였다.
한명회는 한언의 품에 안긴채 왕과 대비들의
만수무강을 비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병세가 악화되자
성종은 좌승지 한언을 보내었고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임종 직전 남긴 유언.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
한명회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관복으로 갈아입고 4배를 올린 후에
왕을 향한 충언이자 고언(苦言)이었다.
묘비문은 동문이자 오랜 친구 서거정이 찬하였다.
생전에 활달하고 호쾌하며 솔직한 성격으로 평가.
그는 관향인 충청북도 청주에 안장되기를 희망하여
처음에는 1476년(성종 6년) 1월 청원군 장명리에 안장.
곧 충청남도 천안군(천안) 수신면 속창리로 이장되었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88년(성종 19년) 속창리산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하급 궁지기에서 계유정난 주역.,일등공신 한명회.
1453년 한명회(39세)는 정8품에서 4품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승정원(비서실)에 들어가면서 정3품으로 올라갔다.
1457년(43세)에는 장관급인 이조판서(정2품),
1462년(48세)에는 부총리급인 우의정(정1품)
1466년(54세)에는 국무총리급인 영의정(정1품).
권력 핵심부에 진입한 1453년(39세)부터
관직에서 물러날 때인 1474년(62세)까지
25년간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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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년에 7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지만
그후 그의 눈이 다시 떠 지는 사건이 발생.
1504년(연산 10) 4월 갑자사화로 인해
故 한명회는 연산군 재위 때.,부관참시.
연산이 생모 윤씨 사약 내막을 알고 분노.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와 엄씨(嚴氏)의 모함.
생모가 폐비가 되고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이다.
연산은 자기 손으로 두 후궁(작은어머니)을 칼로 베어
산야(山野)에 방치시킨데 이어 관련자들에게 복수한 것.
할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창경궁 병상에서 연산을 꾸짖다가,
머리로 들이받혀 향년 68세에 숨진다.
연산의 분노가 계속 폭발하면서
생모 윤씨의 폐비결정에 찬성했던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되고,
한명회 등 유골까지 토막난 대참사로 확대.
유순, 허침, 박숭질, 이계동, 김수동.
김감 등이 조심스럽게 연산에게 진언.
“정창손, 심회, 한명회 등은
처음에는 간하였다가 후에 따랐으니,
그 죄가 윤필상에 비하여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산의 태도는 싸늘.
“3인이 처음에 정지(停止)해달라고
간한 건 사실이나 대신이 큰일을 접하면
시종 고집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
저들이 죽은지 벌써 오래 되어 다 썩은 뼈를
베는 것이 도움 될 것은 없지만,부관참시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나라에 불충하면 죽은 후라도
베임을 면치 못한다는 걸 알려야 하니,징계가 마땅.”
한달 뒤인 5월 11일
의금부에서 보고한다.
.
“의금부 낭청(5∼6품 문관)이 청주로 내려가
한명회의 관을 쪼개어 머리를 베어 왔습니다."
“그의 죄명을 써서 저자거리에 효수하라.”- 연산-.
생전에 '날아다니던 새도 떨어트린다.'는
한명회가 묘에 묻힌지 17년 만에 변고였다.
시신은 토막나고 목이 잘라 한양 네거리에 효수.
그의 부관참시 하던 날,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비가 왔는데,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자 병사들이 그의 부관참시 집행을 주저.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 이후 신원되어 복관되고,
1507년(중종 1년) 10월 예관을 보내 재장사한뒤 세조 묘정에
다시 배향하였고 충청남도 천안군의 충성사(忠誠祠) 등에 제향.
정실 부인 민씨와 여러 첩이 있었으나,
첩실의 존재는 네 명이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정종화(鄭宗和)의 딸 연일 정씨와
전주 이씨는 세조가 특별히 정경부인에 봉작.
그리하여, 이후 정식 부인으로 대우하게 되었다.
그의 처 황려부부인 민씨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종이모.
장인 민대생은 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이었고,
정희왕후의 친척이자 정현왕후의 증조부인 윤곤이 그의 고모부였다.
사육신의 한사람.,성삼문
그의 당숙모의 조카였다.
장남 : 낭성군 한보(韓堡, 1447년 ~ 1522년)
장녀 : '신숙주의 장남' 봉례랑 신주(申澍)의 처.
차녀 :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장남' 윤반(鈴川君 尹磻)의 처.
삼녀 :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년 ~ 1461년) : 예종의 정비(正妃)
사녀 :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년 ~ 1474년) : 성종의 정비(正妃).
측실 : 연일 정씨, 정종화(鄭宗和)의 딸,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
차남 : 한복(韓福)
자부 : 흥덕장씨.
삼남 : 한임(韓林)
자부 : 전주이씨, 이한기(李漢奇)의 딸
사남 : 한수(韓壽)
자부 : 안동권씨.
측실 : 전주 이씨, 선천 공조의 딸
오남 : 한목(韓睦)
육남 : 한석(韓碩)
칠남 : 한서(韓恕)
팔남 : 한우(韓佑)
구남 : 한온(韓瘟)
사녀 : 한씨(韓氏)
사위 : 강희건(姜希蹇)
오녀 : 한씨(韓氏)
사위 : 신승손(申承孫)
육녀 : 한씨(韓氏)
사위: 홍갑생(洪甲生)
첩 : 연일 정씨, 정종성(鄭宗誠)의 서녀,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
측실, 첩의 자녀들도 많았고
그의 외가 가문도 쟁쟁하였다.
장인 : 민대생(閔大生, 1372 ~ 1467)
단종비 정순왕후 외조부 민소생의 형.
장모 : 양천허씨, 찬성(贊成) 허선의 딸.
외할아버지 : 이적(李逖, 본관은 여주)
칠삭동이로 알려진 한명회는
기골이 장대하고 훤칠한 외모.
그의 딸들은 모두 미모의 소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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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말기부터 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등용한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사림파들이 세조 이후 정치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그는 '간신'으로 격하되었으며, 가장 '위대했던 간신'으로 평가.
성종때 이후 사림의 정계진출 이후 도학적인 분위기가 조성.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 주도한 그의 행적이 비판과 질타의 대상.
왕도정치 세조의 뜻에 반해 공신정치로 왕권을 제약했다는 비판.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오래도록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 그의 전기, 전설, 작품 등이 나오기 시작.
그뒤 1990년대에 와서 그에 대한 재평가, 재조명 여론이 거론되었다.
한명회는 당대에 간신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세조가 ‘나의 장자방’이라 할만큼 탁월한 참모.
장자방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공신.
그는 생전에 6명의 임금을 모시고
2명의 임금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며
생전에 영의정을 3번이나 지냈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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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세월 동안에
오늘날까지 천재로 알려진 인물들.
정도전, 신숙주, 김시습, 한명회, 조광조,
이퇴계, 이율곡, 추사 김정희 등이 손꼽힌다.
그들 중에서 김시습, 한명회 신숙주는
동 시대를 함께 살아 간 천재들이었다.
생육신으로 더 널리 알려진 김시습.
그는 5세 신동으로 조선 최고의 천재.
세종대왕이 그를 인정하고 총애하였다.
동 시대를 살면서도
서로의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조선 전기의 천재들인 한명회와 김시습.
조선전기 수양대군의 단종 폐위에 임하여
약관 21세 나이에 학문과 벼슬을 모두 버리고
초야에 묻혀 평생을 방랑자 삶을 살았던.,김시습.
반면, 한명회는 '계유정란'과 '세조반정'을 주도.
'세조 ~ 성종'시대까지 권력을 누리고 살다가 갔다.
특히, 세조 재위 때 조선 정국은 그의 손안에 있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도마.,부연정.
한명회의 후손으로 순조때 무주에서 이사온
춘정 한일택, 한유택 두 형제가 수양하던 곳.
'한일택 증손자' 한진석이 1955년 건립
김종가(金種嘉)가 부연정 기문을 지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부연정(釜淵亭) 지명은
두류산 맥이 현해탄 건너 일본으로 들어가기에
큰 가마솥을 던져넣고 그 기세를 누르려 한데서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