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표 손맛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는 늘 바쁘다. 새벽 첫차를 타는 나를 보내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아이들까지 차례차례 밥 먹여서 학교에 보낸 다음에야 급하게 사무실로 출근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그 수고는 늘 같아서 항상 제일 나중에 자신을 위한 잠자리에 든다. 그런 아내의 일상 때문에 우리 집 반찬은 처갓집에서 가져다 먹는 일이 많다.
올해도 어김없이 갑작스레 영하의 기온으로 뚝 떨어지면서 누구네 집 할 것 없이 김장소식이 들려온다. 시장에는 김장용 배추들이 산처럼 높아져가고, 광고 전단지에는 절임배추를 판다는 내용이 유난히 넘쳐난다. 시절이 좋아 상품용으로 나오는 김치들을 사계절 아무 때나 손쉽게 사먹으면 편하겠으나, 아무래도 찬바람이 부는 이때가 되도록 겨울 김장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이 주부들의 마음인가 보다.
나의 처갓집도 여느 해와 같이 가족들과 함께 김장 하자며 날 받아 둔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동안 처갓집 김장 담는 일에는 작년에 딱 한 번만 갔었다. 그것도 금요일 퇴근하는 길에 처가에 들러 무채만 달랑 썰어주고는 다음날 산으로 줄행랑 놓은 것이 전부였다. 이런 내가 올해도 잔꾀를 피우며 피신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지 아내는 슬며시 엄포를 먼저 놓았다. ‘당신! 올해는 어디 안갈거지?’ 올 해 만큼은 형제들이 함께 김장 담그는데 손을 보태주길 바라는 무언의 압력이기도 했다. ‘그게 이번 주였어?’ 이미 주말 산행계획이 잡힌 터여서 얼렁뚱땅 모르는 척 되물었지만 올 해 만큼은 몸을 빼기에 미안함이 앞서 선약해 두었던 산행을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평소에 김치를 어떻게 담그는지 배워 보고 싶은 마음도 가지고 있었던 탓도 있다.
아침 일찍 처갓집으로 출발해서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김치를 담그는 손길들로 분주했다. 소금에 절여진 배추와 빨갛게 버무려 놓은 김장소는 이미 처남과 동서가 밤새 준비 해 둔 탓에 머쓱하게 되어버렸다. 대신 배추를 무치는 것은 집집마다 알아서 담그라는 우스개 명령에 따라 팔을 걷어 부치고 빨간 고무장갑을 끼었다. 우선 옆에서 하는 모습을 대충 흉내 내었더니 금방 요령이 생겼다. 먼저 절임배추를 없어 놓고 겹겹의 배춧잎을 결 따라 양념으로 문지른 다음 다시 뒤집어 같은 방법으로 무치되, 적당량의 김장소를 배춧잎 사이사이에 조금씩 가두어 단정하게 말아 김치통에 담으니 곧장 잘한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기왕에 배추 절이는 것부터 김장소를 만드는 방법까지 다 배워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단 하루 만에 모두 배우기엔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 아쉬움이었다. 이게 뭐가 그리 어렵냐며 장담하고 시작했지만 처음 해 본 탓일까? 시간이 갈수록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딱딱하게 굳어져 결국 중간에 그만두고 아내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렇게 다 버무리고 보니 정작 장모님이 드실 김장이 모자란다며 배추를 더 절여야 한다고 한다. 옳구나! 잘됐다 싶어 이번에는 배추 절이는 것을 배우기로 했다. 먼저 짭짤한 소금물을 준비하고, 배추는 밑둥에서 네등분으로 칼집을 낸 다음 다시 2등분하여 배추의 반을 손으로 쫙 갈랐다. 그리고 소금물에 한 번 담그었다 건져 새 고무다라에 옮긴 다음 굵은 소금을 휘휘 뿌려 하루정도 재우면 잘 절여진다고 장모님이 일러 주셨다. 이만하면 배추 절이는 방법과 김장 속 버무림은 배웠고, 내년에는 김장소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많은 량은 아니지만 김장 속에 생태를 넣어서 함께 삭이는 김장도 만들고, 특별한 깍두기로 변신하게 될 두툼하게 썰은 무 토막을 김치 사이사이에 한 두개씩 박아 두는 걸로 끝내고 나니 올 겨울에 내내 먹게 될 김치 맛에 입속에 침이 고였다.
그나마 많이 간소화된 김장 담그기도 이렇게 힘든데, 예전에는 이 일이 얼마나 더 고단했을까 싶다. 지금 생각하면 내 어릴 적에 어머니의 겨울 김장을 담는 일은 정말 큰일이었던 것 같다. 4대가 월동하는 대가족의 집안에 김장은 며칠 전부터 큰 김장독 세 개를 깨끗이 씻어 소독한 다음 미리 파둔 땅에 잘 묻는 걸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각 김칫독에는 빨간 김치와 물김치를 각각 한 독씩 담그고, 마지막으로 이듬해 설이 지난 후에까지 먹을 반 건조된 배추와 무로 만든 곤짠지를 담으면 그 해의 김장월동 준비가 비로소 끝났다.
나를 양육해주시던 어머니의 김장 손맛은 보지 못한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무심한 세월 따라 장모님표 손맛도 자식들 곁에 오래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다. 올해로 일흔을 훌쩍 더 넘기셨고 유난히 고단함에 더 수척해 더 보이는 장모님께서도 이제 얼마나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실지... 뚝 떨어진 겨울 기온에 꽁꽁 여민 장모님의 세타 옷고름 사이로 세월의 무상함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한평생을 지아비와 자식들만 위한 수고로움을 잊으시고 아직도 마다하시지 않고 헌신하시는 손길이 점점 둔해지는 것 같아 애처롭기만 하다.
영원히 함께하는 것은 없는 세월의 법칙대로 장모님마저 떠나버리시면 그 손맛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세월이 제 아무리 풍요롭고 살기 좋아 사해진미가 넘처난들 어머님의 손맛만한 것은 또 어디 있는가? 내년에는 김장 첫날부터 배추를 손질하고, 절이고, 김장소를 만들어 버무림까지 장모님표 손맛을 제대로 전수 받아 볼 생각을 해 본다. 밤새 만든 김장을 바리바리 자식들의 차에다 실어주시고 어여 가라며 손을 흔드는 장모님께 ‘언젠가 김치만큼은 내 손으로 당신의 손맛을 아이들에게 전하겠습니다.’ 라며 마음속으로 약속해 본다.
첫댓글 가족이 모두모여 김장을 맛깔 나게 담는 전경이 그려집니다.산행 하시는것 잠시 뒤로 하시고 가족과함께 동참하시어 김장 담그는일에 참석하시길 잘 하셨네요.사위들 까지 모였으니 장모님도 즐거우셨으리라 생각되네요.
가족이 모여 주고받는 사랑도 느끼고 맛깔 스럽게 김장하시는 모습에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갑니다. 선생님의 배운다는 진념어린 손길이 아주 맛깔스런 장모님표 김장을 생산하셨습니다.가족적인 사랑을 담은 김장만 보아도 배가부릅니다.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와!! 상당히 세련되신 분이셨습니다 선생님. 김장 담그는일이 원래 큰일 이라서 남자분들께서 돕는것은 잘 하시는일이십니다. 올해 김치맛은 더욱 맛있으리라 믿습니다?
투박한 남정네의 손으로 김치 담그는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화목한 가정의 웃음 소리가 묻어나는는 글 잘앍었읍니다.
김장 담그는 글을 읽고 어렸을 때 보았던 풍경을 그려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 사는 모습인데..... 편하게 살면 놓치는 것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 이구나 란 생각을 해봅니다.
세월이 많이 변했죠? 장모님의 손맛을 전수하시겠다는 선생님 너무 근사하거 아세요. 협력하는 가정이 평화로운 가정이아닐련지요.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상 잘 했습니다 장모님표 손맛 너무 맛있을것 같네요,
금년도 김치맛은 색다르겠습니다. 군침이 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