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상도(한국연합회 총무부장, 동중한합회장 역임)
* 1956년 당시 재림청년들의 집총거부 및 안식일 준수 신앙
제가 1956년도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만 하여도 군에 징집되어 입대하던
거의 모든 재림청년들은 안식일 준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집총을 거부하여 비무장
전투병으로 주로 의무병으로 근무하는 것이 철칙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대다수의 우리 재림청년들이 각종 기합과 구타, 투옥 등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저는 정익로, 신승욱, 김진규, 김래진 등 진실한 재림청년들과 동시에 논산 훈련소에서 같이
훈련받게 되었는데, 한 중대 내지 한 소대 안에 여러명의 재림청년들이 동거하게 될 때에
여러가지 장점도 있거니와 단점도 있었습니다.
장점이란?
서로 같이 격려하며 같이 기도하고 같이 의논함으로 신앙의 큰 힘을 얻게 되었고,
단점이란?
한 소대 안에 재림청년들이 많이 있게 됨으로 우리들의 요구사항들,
예컨대 안식일 준수라든가? 집총거부 등을 눈감아 주려해도 한두명이 아니므로
교관들의 입장이 난처해 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여 제가 논산 훈련소에 입대할 때까지 아니 그 후에도
10여년간 재림청년들이 마음 속에는 군에 입대할 때에 안식일 준수와 집총거부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확고한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대총회와 지회의 지도자들은 그것이 본 교단의 확고한 전통임을 자주 알려 주었고,
장려해 왔습니다.
1956년에 저는 호남삼육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입대하기 3개월 전에
징집영장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두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아침과 저녁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가도 한두명의 학생을 지명하여 모두 무릎을 끓게 하고
제가 직면한 이 두가지 문제에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논산 훈련소 대기소에 있을 때에 조교가 나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첫번째 질문은
"여기 안식교인 있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부대마다 안식일 교인들을 데려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첫째로 담대히 손을 들었습니다.
어느날 29연대 6중대 2소대에 배치되자 나의 두가지 신앙 문제를 상사에게 이야기하고
도와주도록 간청했습니다. 상사들이 모여서 우리들의 문제를 장시간 의논한 끝에
상상 외로 우리들의 요구를 묵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의논한 것은 재림청년들은 때려도, 영창에 넣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입소하기 얼마전 제가 속한 대대 안에서 한 재림청년이 추운 겨울 알몸으로 찬물이
가득 담긴 드럼통에 넣어진바 되었지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총으로 시작하여 총으로 끝나는 군대에서 비무장 전투병으로 근무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어떤 때는 연대장실에 불려가서 설득과 위협도 당하고,
어떤 때는 조교로부터 구두발로 채이기도 했지요.
또 전체 대대병력이 총 동원되어 큰 연병장에서 훈련을 받을 때에 저는 높은 국기 계양대에
올라가 혼자 무릎을 꿇고 30분 혹은 한시간의 훈련이 끝나기까지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때에 모든 훈련병들이 나를 쳐다보게 되지요.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니면 그 수치심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논산 기초 훈련기간 약 40일간 매일 훈련장소가 달라지는데,
어떤 때는 5리 내지 10리 길을 총대신 전 소대원의 밥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맨 뒤에 서서 구보로 따라가곤 했지요.
약 33명의 소대원의 밥통을 짊어지고 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밥통은 M1 소총보다 훨씬 무거웠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훈련소 과정을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마치고, 당시 총이 없는 육군 본부에 배치되어 통역 사병으로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제대한 다음 날부터 연합회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약28년간 한 건물
안에서 근무하였는데, 해마다 더 많은 재림청년들이 징집되어 군에 입대하여
신앙 문제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 안에 있는 형무소, 즉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논산, 춘천, 안양 등등의
형무소에는 비무장의 신념과 안식일 준수 신앙 때문에 수감된 재림청년들이 없었던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도 연합회에 근무하면서 많은 교도소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양심적인 재림청년들이 수년 간 교도소에 수감되므로 정부에서도 이러한
방식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재림교회 청년들의 신앙적 입장을 이해하는 결정을 마련했습니다.
국방부가 3군의 각 부대에게 보낸 공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교회 군인들이 신조로 주장하는 토요일 안식일 준수와 집총거부에 대해
가급적 그들의 편리를 도모해 주도록 협력하라."
이같은 결정은 여러 해를 걸쳐 내려오면서, 우리 청년들이 생명을 걸고 믿음 위에
둗게 섰던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국법으로
재림청년들은 비무장 전투원으로 종사하도록 법률이 제정되었을 것입니다.
한국 재림교회 비무장 신념의 전통이 흔들리게 된 배경
우리 재림청년들의 비무장 신념이 정부의 인정을 받게 될 무렵에 사단은 전에 없이
맹활동을 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본 교회 한 지도자의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집총을 거부함으로 재판을 받기 위해 논산훈련소 영창에 수감 중에 있었습니다.
이때에 본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한국인 지도자인 그의 아버지가 훈련소 영창으로 아들을
찾아와서 집총하는 것은 죄가 아니므로 재판 받지말고 집총 훈련을 하라고 권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아들의 담당 장교를 만나 내 아들이 집총하기로 하였으니 석방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물론 아들은 석방되어 다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 후에는 집총을 거부하면서 여러모로 고난을 당한 우리 청년들이 계속 일어났으나
징집 연령에 해당되는 아들을 가진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도 앞에서 언급한 교회 원로처럼
한때 가졌던 비무장의 확고한 신념에서 서서히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고난을 두려워하여 망설여 오던 많은 재림청년들도 집총이 본 교회의 신조가 아니라는
말을 반기면서 집총하기로 마음들을 고쳐 먹게 되었지요.
군 당국에서는 재림교단이 집총 문제에 대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채고 훈련소에서 집총을 거부하는
청년들에게 박해의 고삐를 일층 강하게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총을 거부하는 청년들의 수는 급속히 줄어들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에 조금만 더 인내하고, 지도자들의 믿음으로 굳게 오늘에 오늘 재림교회는 얼마나
빛났을까? 하고 회상하며 그 아쉬움을 금치 못합니다.
생명을 희생해 가며 닦아놓은 우리 선배들의 피와 희생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입니다.
그 당시 군봉사부장으로부터 이런 슬픈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나 가슴 아프고 서글픈 소식들이었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할수 없으나 아마 68년이었을 것입니다.
월콕스 목사님께서 연합회장으로 재직하시는 동안 국가의 지시에 의해 동대문 경창서에서는
지역마다 35세까지의 군 예비병으로 구성하는 직장 민방위 부대를 창설하여 집총 훈련을 하도록
명령해 왔습니다.
동대문 지역 내에 본 교단의 기관들이 많이 있으므로 이를 하나로 묶어 한국연합회에 예비군 직장
중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연합회, 시조사, 병원, 학교, 학원 등등에 소속된 예비군들로 하나의 중대를
구성한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우리 모두가 연합회 G.I 홀에 모였는데, 약 70-80명 해당자들이 모여 월콕스 목사님의
지도 하에 당장 발등에 떨어진 집총 문제에 관해 진지하게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국가의 명령은 강력하였습니다.
집총 교육을 받든지? 아니면 처벌을 받든지?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근 3시간 이상 이 문제에 대해 토의할 때에 우리 기관에서 사역하는 한 형제가 앞으로 나와
단상 위에 서더니
"나는 집총하겠습니다. 나는 이런 사소한 문제 가지고 영창에 갈 마음이 없습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일어나더니 "나도 집총하겠습니다.
나도 하겠습니다." 3-4명이 뒤따라 일어나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 나와 같은 교역자들이었습니다.
이로써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사역자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 못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충격을 받았으며, 이 교단이 중심에서부터 무너지는듯 느꼈습니다.
저 자신은 목숨을 걸고 지금까지 집총을 거부해 왔는데, 다른 청년들은 이 문제를 이렇게
소홀히 여기다니...~!
이 소식이 전국에 퍼지면 진실한 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줄까?
본 교단의 핵심부에서 일하고 있는 중견 사역자들이 이렇게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다니..
분위기를 느낄 때에 그 모인 무리들 가운데 약 25%가 집총을 지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25%가 전체 분위기를 장악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때에 월콕스 연합회장님의 단호한 답변을 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 그분의 통역을 제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연합회장으로 우리 청년들이 연합회 구내에서 공식적으로 집총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집총하는 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본 교회 교역자들로 구성된 SDA 연합회 민방위 중대라는 이름으로 집총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으며, 연합회 구내에 집총 훈련을 수용하는 직장 중대를 조직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전적으로 질 것이며, 필요하다면 내가 영창에도 가겠습니다."
그분의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SDA 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온 비무장 전투원의 그 전통을 내가 무너뜨르지 않겠습니다."
이 말씀에 모든 분위기는 다시 바뀌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월콕스 목사님의 위대한 신앙과 담력에 경의를 표하며
우리 교회에 저러한 지도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교회가 신앙공동체로 계속
번영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여러 과정을 통해 우리도 비무장 전투원으로 민방위 훈련을 받게 되었으나
비무장 전투병의 개념은 빠르게 가라앉고 있음을 주변에서 엿볼수 있었습니다.
*********
발췌끌
첫댓글 지금 재림교회는 과거의 SDA정신과 믿음이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