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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7일 [연중 제14주일]
마르코 6,1-6
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안 변한 사람이 몇 달 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어떤 판사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려다가 미수에 그친
남자를 가벼운 벌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바로 여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심판받아 죽고 수많은 죄인이 뻔뻔하게도 의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판사들은 같은 판례를 가지고도 아침과 오후가 판단이 달랐다고 합니다.
판결이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 판사들의 기분에 좌지우지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려 목숨까지 바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조건 계속
물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신고하려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이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이 쓰는 단어인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에요!’ 라고 대답하는 게 옳으냐?”라고 되묻습니다.
그건 사과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함이라는 뜻이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의미를 알고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이런 일로 겸손해지면 좋겠지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고 자신들은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교육하는 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무리 중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다,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신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니체가 받아들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듯이, 소크라테스도 죽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초인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신이 아니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독한 자요, 젊은이를 올바르지 못한 길로 빠뜨리는 사람으로 모함하여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그들이 믿는 신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진화론이 그렇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신들이 아는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받으신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들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면 내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어야 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비행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만들어보라거나 고쳐보라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부모를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로 인정받으십니다.
미국의 락 토마스라는 사람도 처음엔 루저였다가,
“나는 핸섬하고 터프한 사람이다.”란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려고 하는 이들만이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런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창조자의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7일 [연중 제14주일]
복음: 마르 6,1-6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이방인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정과 신앙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고도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을 해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나름 일인다역을 하고 있고, 몸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오늘만 해도 제 삶을 돌아보니, 제가 생각해도 웃겼습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감자를 깎다가, 부랴부랴 올라가서 강의하고, 초스피드로 내려와서 매운탕 펄펄 끓이고, 또 올라와서 미사 준비하고, 촛불켜고, 입장하고...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와 비교하니 저는 포크레인 앞의 삽 한자리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살아생전 따라다니던 애칭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백개의 팔을 지닌 사나이’였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전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랴, 틈틈이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랴, 여기 저기 공동체 건설하랴, 지도자 양성하랴...
바오로 사도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인 삶, 안락한 삶, 편안한 삶과는 영영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펄펄 끓는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로 활활 타오르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무 추진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는 건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불림 받지 않았더라면 잘 나가던 검투사를 했어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말못할 평생 지병이 하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고질병을 지칭하는 ‘가시’가 과연 무엇인가, 오랜 세월 두고두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그 병명을 밝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추측만 할 수 밖에요.
어떤 학자들은 그 가시를 안질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이미 눈에 큰 충격을 입어 사흘간이나 실명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그 후유증이 상당하리라는 추측입니다.
다양한 가설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봤을 때 질병이라기보다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같은 성격, 순식간이 끓어오르는 분노, 그래서 이웃들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그런 실수를 말하는 것을 아닐까요?
그도 아니라면 나와 맞지 않는, 끊임없이 나를 곤경으로 몰고 가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약점이랄까 취약점, 감추고 싶은 상처를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바오로 사도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밝히는 것을 넘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참된 사도요 스승이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어떡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취부,부끄러운 과거를 한사코 감추려고 기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쟁력, 수상경력, 업적만을 과대 포장해서 자랑스럽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솔직하게 밝힙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지난 과오들, 자신의 약점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부끄러운 과거들조차 아낌없이 다 밝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랑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이 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할 가시는 무엇입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일 강론>
(2024. 7. 7.)(마르 6,1-6)
<믿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1)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을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반응’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권위를, 즉 ‘하느님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이 놀란 것은, 목수 일을 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예언자처럼, 또는 랍비처럼 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이라는 것은 알아들었는데,
그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가르치셨던 것과는 다르게 가르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들이 ‘말씀’에는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에 대해서도 두 고을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본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라는 반응을 보였는데(마르 1,27),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3절).
그것은,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예언자 행세를 하는가?” 라는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2) 5절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그래도 몇몇 병자는 예수님을 믿어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병자들 외에는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간청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총’을 주실 기회 자체가 없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놀라셨다.’는 ‘안타까워 하셨다.’입니다.
<청하는 사람만이 받게 됩니다(마태 7,7).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즉 청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청하지 않아서 못 받게 됩니다.>
3) 예루살렘 주민들의 반응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가 메시아일 수는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이 말씀은, “너희는 나를 나자렛의 목수로만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온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4) ‘믿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먼저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깨닫게 되고, 알게 됩니다.
만일에 먼저 알아야만(이해해야만)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앎’을 얻지도 못하고, 점점 더 무지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고, 믿기를 거부하는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무슨 수행이나 수련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종교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깨달음의 은총을 얻는 종교입니다(요한 8,31-32).>
5) 신앙생활은, 먼저 믿고, 그 ‘믿음’에서 시작하여
‘참된 앎’을 향해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는 왜 하는가?
믿음이 먼저라면 공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성경 공부와 교리 공부는 ‘지식’을 쌓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깊은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믿음 없이, 또는 믿기를 거부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교리를 공부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성경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보일 것이고, 교리는 ‘뜬구름 잡는 것 같은’ 허황한 이론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서
‘참된 앎’이 시작됩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교리들은, 인간적인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알고 싶으면 먼저 믿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