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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주일설교 갈라디아서2:11-16(게바의 넘어짐)
본문: 갈라디아서2:11-16
제목: 게바의 넘어짐
오늘은 갈라디아서2:11-16의 말씀을 가지고
“게바의 넘어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게바의 넘어짐”
우리가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곳을 보다가 앞에 장애물이 있는 줄 모르고
가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잘 보고 가지만 남이 숨겨 놓은
함정에 빠져 넘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의도적으로 다리를 걸어서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육체적 넘어짐도 있지만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넘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꼬임이 빠져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일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떤 일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의 넘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경에 그러한 사실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위대한 사도였던 게바 입니다.
게바가 누구입니까?
게바와 베드로는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뒤로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붙여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바는 아람어입니다.
당시 아람어는 성경을 기록할 당시
민중들이 사용되었던 언어였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헬라어였습니다.
헬라어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 곧 게바의 참 수치스러운
개인적인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성경은 이런 기록을 남겨 놓았을까요?
1.안디옥에서
오늘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안디옥입니다.
안디옥은 이방 땅에서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곳입니다.
이방 땅으로 선교를 하는 선교기지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으로 별명이 붙은 곳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받은
바나바가 그 교회를 목회하였습니다.
바나바가 그곳엣 사역을 하다가 너무 일이 많아 버거워서
사도바울을 불러다가 동역을 하였고
나중에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안디옥 교회는 교회사에
예루살렘 교회만큼 중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게바가 안디옥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자리였을 것입니다.
놀라운 신앙 간증과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 분위기 그 상황이 따뜻하고 기쁨이 넘치고
얼마나 좋고 아름답고 멋졌을까요?
그런데 식사 중에 손님이 왔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목회하는 담임목사였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자들은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게바가 식사를 하다가 멈추고
그 자리를 떠나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다른 유대인들도
바나바도 함께 떠나가 버렸습니다.
오직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남아 있었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황당하였고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같이 그렇게 맛있고 흥겹게, 기쁘게 식사하던 자들이
한 순간에 뭐라 말도 없이 싹 뼈져나갔습니다.
식사를 다 해서 나간 것이 아니고
단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유대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떠나버렸습니다.
바울이 그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게바의 그러한 행동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게바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게바를 만나 책망을 하였습니다.
책망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성경에 기록까지 해 놓았습니다.
게바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요 대 사도였습니다.
게바에 비하면 바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도 아니었고
도리어 교회를 핍박한 자였다가 한참 후에
안디옥 교회를 통해 파송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한 자라고 소개할 정도로
게바에 비하면 참 보잘 것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대 선배이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게바에게 야단을 치고 있습니다.
마치 초 신자가 장로님에게 야단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럴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용납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용하게 은밀하게 해야지 그렇게 공개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2.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바울이 자기의 의를 자랑하기 위함입니까?
게바에게 엄청 불편했을 것을 왜 기록하였을까요?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것만 해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메시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천지개벽할 일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 믿는 사람은 1%에 불과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방인들도 그런 구원의 은혜가
펼쳐진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적이고 혈통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 민족이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곧 할례를 받았기에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정한 능력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자들이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수제자요 대사도인
게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유대인이었기 그것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다가 황홀경에 빠집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큰 보자기 같고 네 귀에 매여 땅에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베드로야 잡아 먹어라”
하지만 베드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이 금하는
짐승들을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 고기는 먹었지만
돼지나 토끼나 낙타등의 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잡아먹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래도 베드로는 머뭇거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늘의 음성이 들리게 되었고
그 황홀경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밖에서 사람이 찾아 왔는데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데려 오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같이 식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말이고
한 지체라는 말이고 한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벨료의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고 해도
사도인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 가 같이
한 식탁에 앉았다는 것은 참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에
베드로는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에서 비난하는 그들에게
자초지정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이런 변명이나 설명을 해야 했습니까?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규정 곧 율법을 지켜야만 완성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말하고 다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야고보가 보내서 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야고보는 그러한 것을 시킨 적이 없는데 야고보를
팔아 그들은 구원은 예수만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도 지켜야 완성된다고 가르치고 다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을 괴롭히고
마음을 혼란케 하는 자들이라고
사도행전15:24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바는 그런 자들에게 자신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방인과 식사가 잘못이 아닌 것을
게바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들켜 그들로부터 비난을 당하여
왈가왈부하기 싫었습니다.
그들로부터 그렇게 비난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싫고 두려웠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고넬료와 만난 사건 이후 계속 그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에게서 보냈다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시비와 괴롭힘이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두려움 때문에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그들에게 이방인과 식사하는 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행동은
그만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까까이서 만나고 경험하였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진리 안에 행하여야 하는데
두렵다고 아닌 척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바나바가 따라서 했고
다른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했습니다.
그것을 본 바울은 몹시도 화가 났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비겁함을 넘어서
엄청난 영향력을 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게바의 그런 행동은 다른 그리스도들에게
그것이 진리인양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두려움으로 행하는, 피하기 위해서 했던
비겁하고 두려움에 빠져 행한 일이
진리가 되는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바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게바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복음의 진리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 식탁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게바의 신앙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안디옥에서 이방 성도들과 식사를 하다가
그 자리를 떠났던 그의 행동은
그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찾아온 유대 그리스도인을 보고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를 아닌 척
보여주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진리가 주는 자유로부터
스스로를 얽어매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어떤 위기를 맞게 했습니까?
그러한 행동을 본 전 공동체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위기를 맞게 했습니다.
심각한 것은 함께 공동체라고 여겼던
이방인들이 상심하고 넘어지는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공개적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책망하여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5:20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그렇습니다. 게바의 그러한 행동은 범죄였습니다.
자신이 넘어진 것이며 남을
넘어지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잘못하면 초대교회가 둘로 나누어질 형편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믿는 예수님과 이방인이 믿는
예수님으로 나뉠 뻔 하였습니다.
그런 엄정하고 위험한 순간이었기에
바울은 게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때 게바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드로후서3:15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된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이 편지는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이후에 써진 것입니다.
이 사건 후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게바는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라고 합니다.
앙금이 없습니다.
책망을 게바가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받아 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책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올바른 책망을 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서로 원수가 되고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실제로 게바와 바울은 비교대상이 아니었지만
게바는 바울의 그러한 책망을 인정하고 받아 들였습니다.
3.게바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게바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잘못인 줄 알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렇게 했을까요?
어떻게 사도인 그가 그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을까요?
사람은 두려울 때 외식을 합니다.
외식이라고 하는 것은 가면을 쓰고
연극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은 자유와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복음을 게바가 믿으면서 자유롭지 못했고
진리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행동은 복음을 가리고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왜 그렇게 외식하게 된 것입니까?
왜 그렇게 가면을 쓰고 행동하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였기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갈라디아서 3:28은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나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누구일지라도 나눌 수 없습니다.
선민인지 이방인인지 종인지 자유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히브리 남자들의 3가지 감사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방인이 아닌 것이고
둘째는 종이 아닌 것이고
셋째는 여자가 아닌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이방인과 종 여자 등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 모든 것을 넘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그 누구라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장애인을 차별해서도 안 되고,
소수자나 약자들을 차별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상황이 어떻든지
구원받은 성도로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이 있다고 해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부자만 다니는 교회가 있을 수 없고
어디 지역 출신만 다니는 교회가 있을 수 없고
지식인만 다시는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게바가 그렇게 했던 것은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가 이방인을 무시해서도 아니고
사람을 두려워하며 사람을 의식하는 행동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할 것은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화평입니다.
옳고 그름보다는 화평이 우선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행동은 옳고
어떤 행동은 옳지 않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양복을 입지 않고 설교를 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양복을 입지 않아서 축도를
할 수 없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사가 가운을 입지 않고 성례식을 인도한다고
불편해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불편해 하시는 분이 있으니
입을 수 있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화평을 위해서 용납할 수도 있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하지만 화평보다 우선은 진리입니다.
화평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화평이 좀 유보되더라도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화평이 우상이 되어 진리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행동입니다.
진리를 포기하고 얻은 평화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불편할까봐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 게바의 행동은 엄중한 사태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생활 속에 많이 일어납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부분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거울삼아 우리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 사도인 베드로의 치명적인 잘못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할까요?
베드로만 그런 잘못을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쉽게 범할 수 있는 잘못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보다 사람에 집중하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
베드로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분란을 좋아할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하기를
좋아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리라면
그 진리를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만 보다보면 화평만 생각하다 보면
좋은 것이 좋다고 행하면
이런 넘어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동해야 하고
화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행동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