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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가톨릭교수회보 연중 제29주일 제200호 2010. 10. 17. (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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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말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각자의 십자가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십자가를 내려놓으며 그분의 도움을 절실히 애원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과부의 모습은 이런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무언가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재판관을 찾아가 줄곧 애원한다. 과부의 애원은 ‘올바른 판결’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끈질긴 애원이 불의한 재판관을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정의로운 재판관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정의로운 판결’에 있다. 과부는 자신에게 이로운,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원한 게 아니었다. 자신과 적대자 사이에 객관적이고 합당한 올바른 판결을 원했다. 예수님 앞에서 기도하는 이는 어떤 경우에든 정의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져야 한다. 정의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정의로우신 분 앞에서 나만의 이익이나 바람만을 애원하면서 너와 우리의 이로움과 올바름을 잊어버린다면 우린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넋두리를 고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우리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것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선택된 이’들의 목소리 때문이다. 선택된 이들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이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제 삶 안에 구현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모습에서 불의는 찾아볼 수는 없을 테고, 오히려 불의에 맞서는 처절한 아픔과 희생이 가득할 것이다. 하느님은 늘 준비하고 계신다. 정의를 외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자 늘 준비하고 계신다. 다만 불의를 보고서도 눈감아 버리는 우리의 게으름 탓에 하느님의 판결은 늘 더디게만 느껴질 뿐이다.(대구교구 월간 빛)
묵상해봅시다
기도는 주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중간에 단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대화가 단절된다면, 그 대화는 결국 서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기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주님께 자신의 청원을 드린다면, 자비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셔서, 지체 없이 당신의 사랑으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루카 18,7)
알아봅시다
1. 가톨릭 교회 교리서(13)
제3장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1533~1690항) 성품성사와 혼인성사, 이 두 성사는 교회 안에서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고, 하느님 백성의 형성에 이바지하며 특별한 은총을 베풉니다. 이 두 성사는 특별히 교회적 친교와 타인의 구원에 이바지합니다.
성품성사 1536항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위임하신 임무는 성품성사를 통하여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 안에서 계속 수행된다. 그러므로 이 성사는 사도직의 성사이다. 이 성사에는 주교품, 사제품, 부제품의 세 가지 등급이 있다.
성품성사란 무엇인가
성품(聖品)성사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승하여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교회 안에 주교, 신부, 부제를 세우는 성사입니다. 이 성사를 통하여 서품된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봉사에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거룩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주므로 성품성사라고 부릅니다. 교회 전례는 구약 시대 아론의 사제직, 레위인들의 성전 봉사, 칠십 인의 장로 임명을 신약의 성품성사를 예표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약 사제직의 모든 예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1티모2,5)’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참사제이시며, 신약의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분의 사제직을 수행합니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와 견진을 받은 모든 신자의 ‘보편 사제직’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품성사를 받은 이들의 ‘직무 사제직’입니다. 직무 사제직은 하느님 백성의 보편 사제직을 위해 봉사하고, 신자들이 세례 소명을 완수하도록 보살핌으로써 실현됩니다.
성품성사의 세 계층
성품성사는 교회의 유기적 구조에 필수 불가결한 세 가지 품계, 곧 주교, 사제, 부제로 구성됩니다. 주교들은 바로 사도들의 계승자입니다. “공의회는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를 교회의 전례 관습과 교부들은 분명히 대사제직, 곧 거룩한 봉사 직무의 정점이라고 하였습니다(교회헌장 21).” 각 주교는 주교 서품으로 주교단(主敎團)에 들고, 흔히 ‘교구’라고 부르는 지역 교회의 으뜸이 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지역 교회의 사목을 책임집니다. 또한 주교단의 모든 형제 주교들과 더불어 교회 전체에 대해서도 공동 관심을 가집니다. 사제는 주교의 협력자로서 서품됩니다. “주교들의 봉사 임무는 그 아래 사제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이로써 사제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사도적 사명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하여 주교품의 협력자들이 됩니다(사제생활교령 2).” 사제들은 주교를 중심으로 사제단(司祭團)을 형성하는데, 사제단은 주교와 더불어 지역 교회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사제들은 주교로부터 한정된 지역 교회인 ‘본당’에서 사목하는 직무를 맡아 수행합니다. 부제는 사제 직무가 아닌 오로지 봉사 직무를 위하여 서품됩니다. 우리말 ‘부제(副祭)’는 사제 바로 아래 품계라는 점만 드러내지만, 원래 부제(diaconus)라는 칭호는 봉사(diaconia)를 위한 직무를 드러냅니다. 그들의 임무는 하느님 신비의 거행, 특히 성찬례 거행 때에 주교와 사제를 보좌하고, 성체를 분배하고, 혼인을 주례하여 축복해 주고, 복음을 선포하고, 강론을 하며, 장례식을 거행하고, 여러 가지 자선 사업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교의 사목적 권위 아래서 이 임무를 수행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종신 부제직’이 부활되었는데, 이는 기혼 남성에게도 줄 수 있는 성품이며, 사제가 되기 위한 바로 아래 단계가 아니라 평생 부제로 사는 성품 직무입니다.
성품성사의 은총
성품성사는 이 성사를 받는 이가 성령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그분의 도구가 되도록 합니다. 서품을 통하여 그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서’ 교리를 가르치고, 전례를 거행하며, 양 떼를 돌보는 세 가지 직분을 수행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성품성사도 세례와 견진의 경우처럼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받아 하느님의 사람으로 확증됩니다. 따라서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으며 한시적으로 줄 수도 없습니다.
혼인성사
1641항 혼인성사의 고유한 은총은 부부의 사랑을 완전하게 하고, 해소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일치를 강화한다. 이 은총으로 그들은 부부 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준다.
혼인성사란 무엇인가
혼인성사는 성인이 된 그리스도인 남녀의 자유로운 결합을 축복해 주는 성사입니다. 따라서 이 성사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삶의 기초를 하느님께 두겠다는 결의를 하느님과 교회와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표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야기(창세1-2장)로 시작하여 어린양의 혼인 잔치 이야기(묵시19,9)로 끝맺습니다.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인과 그 신비, 혼인의 제정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의미, 그 기원과 목적, 구원의 역사를 통한 혼인의 다양한 실현, 죄로 생긴 혼인의 어려움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혼인의 새로운 의미에 대하여 말합니다.
부부애의 선익과 요구
부부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 그리고 자녀 출산을 받아들이는 것은 혼인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단일성은 그 누구도 배제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말합니다. 한 남자만을 남편으로 사랑하고, 한 여자만을 아내로 사랑하는 혼인의 단일성은 꼭 지켜 내야 할 부부의 지고한 소명입니다. 불가해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맺어 주셨으므로 혼인에 의한 남녀의 결합은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단 한 번의 합의로 일생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는 혼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에서 인간의 성실하고도 변함없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녀 출산을 거부하는 것은 혼인으로 얻는 가장 훌륭한 선물인 자녀로부터 부부생활을 이탈시킵니다.
가정 교회
혼인제도 자체와 부부의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에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지향합니다. 이로써 혼인은 그 정점에 이르며 월계관을 쓰는 셈이 됩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마태19,4)’ 하느님께서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창세1,28).’하시며 부부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나자렛 성가정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기도와 하느님의 진리, 사랑과 섬김, 자유와 책임 등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한 기본을 배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신앙생활의 첫 번째 학교,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학교입니다. 그것은 진정 ‘가정 교회’입니다. ‘가정 교회’인 가정과 ‘큰 가정’인 교회는 어려운 가정, 무너진 가정, 가정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활짝 문을 열어 온 인류 가족의 행복을 이루어 내야 할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밖의 전례 거행
준성사
교회에는 일곱 성사 외에 준성사들이 있습니다. 성사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준성사(準聖事)’의 대표적인 예는 ‘축복’과 ‘축성’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는 것을 축복이라 하며, 특히 하느님께 바쳐 거룩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축성이라 합니다. 하느님께 봉헌되거나 전례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면, 그 축성은 지속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 역시 준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셨으며(마르1,25-26), 교회는 주님께 마귀를 쫓아낼 권능과 임무를 받았습니다(마르3,15 등). 사제는 공적인 권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며, 악마의 세력에서 보호하여 주시도록 청합니다.
대중 신심
그리스도인 대중의 신앙심은 언제나 유해 공경, 성당 방문, 순례, 행렬, 십자가의 길, 종교 무용, 묵주 기도, 메달 등과 같은 신심 행위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이런 신심 행위들은 자연스럽게 전례로 인도되고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대중 신심이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애덕 실천에 있어 중요한 원동력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 장례
우리의 죽음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죽은 이를 아버지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당신 은총의 자녀를 바쳐 드리고,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날 희망으로 그를 땅에 묻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은 작별의 슬픔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희망의 표현입니다. 장례식은 미사성제로 충만하게 거행되며, 그 전후에 베풀어지는 축복들은 준성사입니다.(서웋교구소공동체)
2. 묵주기도성월 10월은 교회가 정한 묵주기도 성월이다. 10월 한 달 동안 신자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장 아름답고 보편적 기도인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묵상하고,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살 것을 다짐한다.
# 묵주기도란 묵주알을 만지며 암송하는 묵주기도는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 등을 포함하는 신앙고백인 동시에 환희ㆍ빛ㆍ고통ㆍ영광의 신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 협조자인 성모 마리아가 인류 구원 역사에서 이룩한 놀라운 사건들을 묵상하게 해주는 심오한 기도다. 묵주기도는 '로사리오(rosario)' 또는 '매괴신공'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각각 라틴어와 중국어에서 나온 것으로, '장미 꽃다발'을 의미한다. 현재는 주교회의 용어위원회 결정에 따라 '묵주기도'로 통일했다.
# 묵주기도 기원과 발전 묵주기도 유래는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자들은 이교도들 영향을 받아 기도 대신 장미 꽃다발을 바치기도 했다. 신자들은 순교자들 시신을 몰래 거두면서 순교자들에게 쓰인 장미관을 한데 모아놓고, 꽃송이마다 기도를 바쳤다고 전한다. 한편 이집트 은수자(隱修者)나 독수자(獨修者)들은 곡식 낱알이나 작은 돌멩이 등을 머리에 쓰는 관처럼 둥글게 엮어 하나씩 굴리면서 기도 횟수를 셌는데, 이러한 관습은 묵주기도가 생겨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대체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묵주기도가 등장한 시기는 15세기다. 기도 횟수를 세는 방법으로 이용되던 묵주기도는 1464년 도미니코회 알랭 드 로슈 수사가 환희ㆍ고통ㆍ영광의 신비를 각각 그리스도의 강생ㆍ수난ㆍ부활에 적용시킴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자리 잡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정녀 마리아의 로사리오'라는 서한(2002년)에서 기존 묵주기도에 공생활에 관한 신비를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활을 통해 자신을 빛으로 드러냈던 것에 착안, 이 새로운 신비를 '빛의 신비'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환희ㆍ빛ㆍ고통ㆍ영광의 신비를 다섯 단씩 묶어 기도하는 일반적 5단 묵주 외에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70번씩 바치는 '7단 묵주'를 바치기도 하는데, 이 묵주기도는 널리 확산되지 못했다. 묵주기도가 급속히 확산된 것은 1830년 이후 세계 각처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면서부터다. 성모 마리아는 1830년 파리, 1846년 라 살레트, 1858년 루르드, 1917년 파티마 등에서 발현할 때마다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도록 간곡히 요청했다
# 성모 발현과 묵주기도 묵주기도는 19세기 이후 성모 마리아가 발현해 이 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호소하면서 급격하게 확산됐다. 1858년 루르드에 발현한 성모 마리아는 묵주를 가지고 나타나 베르나데트에게 직접 묵주기도를 가르쳐줬으며, 1917년에는 파티마에서 6번이나 발현해 매일 묵주기도를 15단씩 바치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죄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세 번째 발현 때에는 각 단을 바친 후 '구원을 비는 기도'를 할 것을 권고하고, 마지막 발현에서는 자신을 '묵주기도의 어머니'라고 선언했다.
# 묵주기도에 관한 교황의 가르침 1883년 교황 레오 13세는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정하고, 세계 평화와 죄인들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했다. 또 교황 비오 10세는 "묵주기도만큼 아름답고 은총을 많이 내리는 기도는 없다"면서 이 기도를 사랑하고, 매일 정성스럽게 바치라는 유언을 남겼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4년 발표한 교황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묵주기도는 복음서 전체 요약이자 구원 강생에 집중하는 기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끝없는 찬미"라고 강조했다.
# 묵주기도 성월을 보내는 신자들의 생활 신자들은 묵주기도 성월을 영적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10월 한 달은 전 세계가 하느님 사랑과 구원 신비로 무장해 죄와 악의 세력과 투쟁하는 영적 무장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불의와 싸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을 변혁시키는 선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묵주기도 성월은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라는 인사말로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찬미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찬미는 입으로만이 아니라 내적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정이 성화되도록 특별히 노력해야 한다.
# 올바른 묵주기도 자세
묵주기도는 묵주만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바칠 수 있는 쉽고 편리한 기도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해 끝을 맺으려면 적어도 몇십 분은 소요되고, 같은 내용의 성모송을 반복하기 때문에 분심없이 바치기란 쉽지 않다. 성 루도비코는 다음과 같이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권하고 있다. △기도를 바치는 동안 온통 분심과 싸워야 할지라도 중단하지 않기 △기도를 바치기 전에 항상 먼저 은혜를 청하기 △우물거리며 빨리 끝내려 하지 말고 또박또박 암송하기 등이다. 분심이 든다고 해서 바치던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 도우심을 청하며 자연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교회에서 정한 묵상주제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지향을 두고 다양하게 신비를 묵상하는 것도 좋은 묵주기도가 될 수 있다. 어떤 지향을 가지고 기도하더라도 중요한 점은 입으로만 기도문을 외울 것이 아니라 그 신비를 가슴 깊이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평화신문)
손석준엘리야 전남대학교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http://love.chonnam.ac.kr/~sohns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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