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벽과 대좌
해인사 학인 시절이었다
학인들은
의무적으로 일 년에 두 차례 선방에서 실시하는
일주일 용맹 정진에 몸이 아프거나
꼭 필요한 소임자만 빼고 참석해야 했다.
처음으로 보경당에서 삼천배를 하고
백련암 성철 큰스님께 화두를 타러 가니
' 마삼근(麻三斤)' 이란 화두를 주셨다.
그리고 대단한 각오로
난생처음 선방이란 곳을 갔는데
방이 축구를 해도 될 만큼 커 보였다.
주눅이 들어 자리를 배정하고 앉아보니
상-하판이 서로 마주 보고 앉는 게 아닌가.
그때가지만 해도 참선은
벽을 쳐다보고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하늘 같은 상판 스님들이 앞에서
딱 노려보고 있으니 이렇게 난감할 수가-----.
졸 생각은 꿈도 꾸지 말자고
다짐하며 온 힘을 다해 눈동자에 쏟아 넣고
허리를 있는 대로 꼿꼿이 세우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강원을 졸업하고 송광사 율원을 졸업한 후
해인사 선방에 첫 철 방부를 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식 수좌가 되어 좌복에 앉게 됐다.
그런데 그때는 또 모두 벽을 보고 돌아앉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모든 걸 알게 됐다.
학인 시절 참여했던 일주일 밤낮을 잠자지 않고 정진하는
' 용맹 정진' 기간이었기 떄문에 서로 경책하는라 그렇게 한 것이었다.
당연히 보통 때는
벽을 보고 앉는 것이 정상적인 좌선법이었다.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 이젠 졸리더라도 눈치 안 보고
실컷 졸아도 되겠구나' 하면서 졸릴 때는 막 졸았다.
'용맹 정진때처럼 졸아도 장군죽비로 때리지도 않지.
백여 명이 앉아 정진하던 그때처럼 자리가 좁아 불편하지도 않지.
가야산 호랑이도 알려진 성철 큰스님도 백련암에서 내려오시지 않지' 하면서-----.
처음 얼마간은 참 좋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게 아니었다.
차라리 대좌했을 때
눈치 받으며 조는 것보다 마음이 편치 않기 시작했다.
대좌했을 땐 암만 졸아도 한 가닥
신경만은 앞에 있는 스님이나 장군죽비를 메고
경책 다니는 스님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깊이 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서투른 좌선이지만 화두와 씨름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면벽을 하골 나니 맘 편히 졸 수 있는 반면,
내 공부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순전히 내 몫이었다.
종종 혼침에 빠져 한 시간을 졸다가 족비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면벽' 은 공부는 자율적이나 그만큼 스스로에게 철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대좌' 는 타율적이긴 하나 용맹 정진 떄나 초심자가 공부를 하기에는 더 효과적이었다.
스스로 삻에 책임을 질 줄 아는 ' 면벽' 참선법은 그 공부에 이르기까지
선지식이 간 길을 좇아 철저한 자기 점검을 거치는 ' 대좌' 공부법을 익힌 후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감성이 여려서인지 가끔 산 토굴로 침잠해 들어가길 좋아한다.
그때는 대체로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경우다. 한 경계에 마음이 걸린것이다.
그때는 스스로 그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나 자신과 '면벽' 을 한다.
아직은 내 마음엔 문제와 ' 대좌' 해서 풀겠다는 용기가 없는 것일까.
그렇게 하면 선지식의 할이나 방,
도반들의 탁마로 훨씬 빨리 상처를 치료할 수도 있을 것인데----.
지금 이곳은 마음이 나태해졌을 때 대좌할 사람도 없는 무문관이다.
아니다. 모든 것이 대좌 아닌 것이 없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온갖 유정, 무정이 모두 대좌의 상대이고 ,
무엇보가 중요한 자성불과의 대좌는 나를 가장 경책하는 선지식이다.
면벽과 대좌는 결국 둘이 아닌 것이다.
8.6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