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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면서 - 본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1-1. 시는 ‘맛을 낸다’는 인간본성에서 출발 1-2. 행복과 관련한 시와 개연성의 의미 1-3. 시의 내적 미와 독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크기’의 뜻 1-4.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적인 ‘아름다움’ 2. 칸트의 미학 2-1. 칸트의 미적 감각인 ‘재현과 자유’ 2-2. 예술 중 으뜸 되는 시(詩) 2-3. 칸트가 말하는 시와 철학의 관계 2-4. 칸트가 말하는 시작(詩作, Dichten)의 즐거움 3. 칸트 이후에 ‘미’와 ‘시’와의 상관성 3-1. 낭만주의 시대 3-2. 현대적 관점 4. 미적 감각에 있어서의 ‘시’ 4-1. 격조 있는 미적 감각을 지닌 ‘시인’ 4-2. 형상학적 직관 너머에 있는 예술로서의 '시'의 가치 나가면서 |
- 들어가면서
시는 ‘아름다운 노래’를 글로 만들어내는 시작과 과정이자 그 결과이다. 어떤 글이 시 형태로 되어 있다고 해서 다 시는 아니다. 물론 내용이 좋다고 해도 시적 형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적 운율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칸트가 말하는 ‘미학’을 비교하면서 ‘시의 미학’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개진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적 견해는 비극적인 요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매우 심오한 내용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오해의 소지(素地)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가 말한 ‘쾌’ 즉, ‘매우 기뻐하는 일’이 과연 비극에서 발생할 수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시적 내용에 대해서도 살필 것이다. 그리고 칸트가 미적 감각의 입장에서 시에 대해 주력적으로 말하는 지고한 예술적 자유가 무엇인가를 살피겠다. 필자는 두 인물을 비교하면서 세기의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시적 견해를 예로 들어 ‘참다운 시’가 무엇인지 고찰할 것이다. 기타 여러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조금씩 첨가하여 시가 추구하는 미의 감각을 논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간트가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보려는 필자의 작은 소망의 비평적인 생각으로 결론짓겠다.
- 본론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유(思惟)’에 대해 ‘지(theoria),’ ‘행(praxis),’ ‘제작(製作, poiesis)’으로 구분하였다. 이 제작 가운데 어떤 것은 대상에 대한 ‘모방(imitation)’ 또한 ‘재현(reappearance)’으로 나누어 생각하였으며 이 중심에는 운문, 노래, 춤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시’에 대해서만큼은 그 본질이 규범적이면서 기술적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 예술’을 이해하려면 현존하는 비극의 실제 특징을 기술이나 객관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무엇이 훌륭한 비극을 만드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특별히 이 ‘비극’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만의 참신하고 독특하며 생의 역설(패러독스)이 돋아있음을 볼 수 있다. 곧 그의 ‘니코마크스의 윤리학’에서 인간의 목적인 선을 규정하는 것과 맥락이 같은 것으로 비극이 하나의 ‘고유한 쾌(oikeia hedonē)’가 여타의 ‘모방물’들과 함께 공유한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에서 참으로 묘한 특징은 ‘꽤’라는 것이 어떻게 ‘연민과 공포에게 비롯되는 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청중의 공포와 연민을 강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우리와 닮아야 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물 중에는 그것을 직접 마주대할 때는 고통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재생해 놓았을 때는 쾌를 느끼게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해보면 비극이란 아무리 고통스럽고 연민의 정이 느껴질지라도 인간의 정서의 고통이 쾌를 파괴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곧 흥미롭고 중요한 모방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과 같다.
조금 더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령 어떤 사람을 심히 미워하다가 갑자기 그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해방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수사학』에서는 이를 ‘정상’에로의 ‘회복’이라고 했다. 또한 비극에서 멜로디와 리듬을 즐기게 되는데, 이는 곧 감각활동이나 시를 낭송하는 데 있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처럼, 비극에서도 이와 같은 ‘사유나 관조’에서 발생하는 가능성으로 보았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진정한 시로 이해할 때 독자적인 방법과 정도로 성취될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상 모든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미학(‘시’ 등)을 말했다. 단지 플라톤만이 시는 모방에서 나오는 또 다른 모방이기 때문에 무시하기는 했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는 진정한 미는 예술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 미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시는 철학적 사색과 함께 언어적 ‘제작製作poiesis’이 필수이다. 만일 이를 무시한다면 진정한 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통해서 동류의 아픔과 슬픔을 경험하고 그것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일을 ‘쾌’라고 보았다. 즉 ‘시’로 말하면 시는 곧 사람의 내면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것을 비극적인 출발선에서 본 것이다.
1-1. 시는 ‘맛을 낸다’는 인간본성에서 출발
인간은 재현하는 동물이며 본성적으로 선율과 리듬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기 때문에 시가 태어나게 되었다. 시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담론에서 ‘역사적으로 기술하는 관점’과 ‘철학적으로 추론하는 관점’이 공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대해 연민과 두려움을 재현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어떠한 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극 중에 등장하는 인물이 가지는 연민이나 두려운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특별히 ‘맛을 낸 언어’란 리듬과 선율, 그리고 노래가 있는 언어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맛을 낸다’는 말은 ‘기분 좋은(hèdu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음악에도 적용되며 요리의 맛을 내는 ‘양념’을 가리키기도 하다고 했다. 이 ‘양념’이라는 은유는 사실상 시 언어 이론을 내포한다. 이 말은 곧 군더더기도 장식도 없는 벌거벗은 언어는 기본 재료로서 외연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했다.
1-2. 행복과 관련한 시와 개연성의 의미
시는 행복이라는 주제로 말할 수 있으며 더불어 행복은 윤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윤리학의 주제는 성격(èthos)에 따라 이런저런 성품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특별히 자신의 ‘행위’를 통해 목표(telos)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행위’라는 말은 활동만이 아니라 ‘행복’과도 상응하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 창작면에서 ‘개연성’과 ‘있음직한 것’의 상관의 필연성을 완화된 한 형태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 둘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불어 인생에 기대하지 않았던 경우의 수를 대비하여 개연적인 틀로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1-3. 시의 내적 미와 독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크기’의 뜻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은 시의 창작 기술 안에서 문맥과 유리(有利)되어 나타나는 미(美, ‘kalon’)에 대한 정의를 모호한 개념이라고 했다. 이 모호성은 둘로 나뉘는데 ‘배치와 크기’라고 한다. ‘배치’는 ‘미의 내재적 구성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크기’는 바라보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제한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사물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아름다우냐에 달린 것이기에 그의 『형이상학』에서 이것을 ‘수학적 존재들의 아름다움’에 부여하였다.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개연성과 필연성의 질서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시인이란 운율을 만들어내는 사람보다는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사람(poiètèn tôn metrôn)’이라고 했다. 이 말은 뮈토스를 만들어내는 시인으로서 설득력있는 개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국가』 3권에서 ‘감각적인 것인 시’는 도시에서 추방하고 철학자들에게 금해야 한다고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대립적이었다.
1-4.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적인 ‘아름다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 구성이 복잡하고 매우 주도면밀하여 책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시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종합적인 체계로 쓴 시라야 시로 인정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필자는 동의한다. 더불어 그는 현재에 명확하게 드러는 진부한 문장이나 감각은 떨어진 ‘시’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시란 어떤 시인가? 그는 비극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비극이 안겨주는 연민이나 불안, 두려운 실체를 쾌감으로 바꿀 수 있는 환원 장치가 걸려 있는 ‘시’가 진정한 시라고 했다. 더 설명하자면 현상을 넘어 개연적인 상황을 도출하되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곧 ‘미’로 승화될 때라야 시로써 값어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 미는 또한 행복과 연관되며 인간다운 삶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적인 시를 토대로 하여 시인과 시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특별히 서사시에 대한 그의 설명은 기묘할 정도로 탁월하다. 그의 말은 고급스럽지만 크게 어렵지 않으면서도 뭇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는 언어로 구사하면서 ‘시란 무엇인가’를 설명하였다. 그가 말하는 시란 첫째,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부성을 타고 난다고 했다. 둘째, 명확한 어조와 문맥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을 수 있는 일에 대한 추론을 줄거리(뮈토스)화 하여 내용과 조화 있게 연결해야 한다고 했다. 즉 문장 구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내용이 면밀하게 통일적인 체계로 구성되어야 함을 말했다. 더불어 ‘시의 맛’을 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위적인 시는 배제하고 독자로 하여금 ‘행복을 줄 수 있고,’ ‘치료적 효과를 안질 수 있는 시’라야 좋은 시라고 했다. 그는 이것을 재현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곧 고유한 형상을 복원한다는 의미로 재현(mimoumenon)은 동사로 명확하게 표현되면서 문장의 통사론적 구조로 볼 수 있다.
2. 칸트의 미학
필자는 ‘시와 철학과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여러 글을 써 보았다. 시인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시와 철학이 무슨 관계가 있어?”라고 묻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왜 시는 철학적인가를 밝히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 칸트는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일구어 놓은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미학에서의 시(詩)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본다.
2-1. 칸트의 미적 감각인 ‘재현과 자유’
바움가르텐이 ‘미학(Aesthetica, 아름다움의 본질을 추구하는 공부)’이라는 말을 사용한 후에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미감적 판단의 독특성을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의 결과라고 하였다. 칸트는 “예술적 창조의 정신은 도덕적 이념과 결합하는 데서 최고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장르의 구별에 대해서 재현대상에 따른 무차별적인 재현현상을 말했다면, 칸트는 이에 자유를 덧붙였다. 이는 더 세밀하게 고찰(考察)하자면 이들이 말하는 것은 문체다. 이 문체는 우리가 말하는 ‘스타일(style)’로 꾸며지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대상이나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규정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예술이란 ‘자신의 독특성을 통해 소통 가능한 보편성을 산출하는 한에서 예술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곧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재현(여기서 재현방식은 포함되지 않음)에다 자신이 가지는 특정한 감성형식과 그것에 따른 대중성이다.
2-2. 미의 예술 중 으뜸 되는 시(詩)
칸트는 인간의 지적, 미, 감각, 도덕, 윤리를 통틀어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면, 그 예술 가운데 미감각 이념을 현시하는 능력을 가장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시(poet)에 대해서 단연 최상의 지위를 부여한다. 그는 ‘미적 예술’에서 천재는 자연미를 낳는 규칙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해방된 자유와 함께 자신이 뜻하는 바를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천재란 ‘자연의 총아(寵兒)’라는 말을 사용하여 작가가 자연을 통해서 품어내는 독창성과 원본성이 구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2-3. 칸트가 말하는 시와 철학의 관계
칸트는 서양미학사의 선구자 역할을 한 비움가르텐 이후, 미학 역사에서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에서 성립하는 세계가 바로 서양미학사라고 하였다. 그는 학문으로서의 미학을 발전시켰으며 그 가운데서 ‘시’에 대한 독특한 사랑의 방식으로 철학과의 체계적 연관 속에서 상상력의 자유를 만끽하기 원했다. 칸트가 일구어 놓은 ‘미학과 철학의 만남의 장’ 이후에 미적 예술론의 셀링의 낭만주의 미학의 근간이 되었다. 이제 칸트는 그가 확립한 시와 철학의 만남이 플라톤 이후에서 근현대철학까지 다리 역할뿐 아니라 시적 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비어슬리에 의하면, 그의 미학 이론은 철학체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부분으로 만든 최초의 근세철학자였던 것이다.
2-4. 칸트가 말하는 시작(詩作, Dichten)의 즐거움
칸트는 어떤 예술을 구상하는 힘은 감관에로의 주어진 대상을 포착할 때 객체의 일정한 형식에 속박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 한에 있어서 시작(詩作, Dichten)은 자유로운 유동을 하지 못할 수 있다. 반대로 대상이 된 구상력 그 자신이 자유롭게 방임되어 있다면, 오성의 합법칙성 일반과 조화되도록 만들기라도 할 것 같은 형식일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어려울 수 있으나 목적 없는 합목적성(合目的性)의 개념이 해결을 제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대상에 대해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곧 관조적 현상을 통해서 여유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시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칸트는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말은 주관적인 미적이며 직관적인 판단으로 유희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말은 오성(이성)과 구상력간의 상호 조화를 이루게 하는 확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미적 관점에서는 보편성의 성질을 띠고 그 가치를 하락한다고 보았다. 칸트가 말하는 것은 비확정적(indeterminate) 언사(言辭)를 통해서 절대적인 미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어떤 인식의 행위를 떠나고 상상력의 일반을 넘어 독특한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라야 했다.
3. 칸트 이후의 ‘미’와 ‘시’와의 상관성
3-1. 낭만주의 시대
낭만주의 시대는 시(詩)나 예술 일반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이 미학의 제1원리로 파악하였다. 괴테의 ‘유기체주의Organism’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후기의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Katharsis’는 비극 자체 내에서의 한 관계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하여 “행동의 진행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때 비극은 이 정서들의 평행과 화해의 단계에서 끝맺어야 한다”고 했다.
에드워즈는 “시(詩)는 모든 인식의 숨결이며 섬세한 정신이다. 그것은 모든 학문의 얼굴에 있는 감동된 표정이다”라고 했다(1800년 Preface: Hynes and Hofman, p. 25). 그는 또 “시는 모든 지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슴처럼 불멸이다”라고 했다.
괴테는 예술가에 대해서 ‘신이 기름을 부은 자 God’s anointed’라고 했고, 빅토르 위고는 ‘시인은 사제이다’라고 했다. 셰익스피어는 ‘그는 신의 청동제단이다’라고 했으며, 셸리는 ‘시인은 이해될 수 없는 영감을 가진 신비로운 사제이며, 인정받지 못한 세계입법자’라고 했다. 에머슨(Emerson)은 시인은 ‘명명자’이며, ‘유일하게 진정한 의사’라고 했다(Allen and Clark, pp. 376, 382).
3-2. 현대적 관점
‘사상 자체에로의 Zu den Sachen’라는 훗설의 현상(現象)에 나타난 섬세하고 복잡한 논리탐구 방법 이후에 미학적 예술현상에도 적용되었다. 이는 정신적 현상을 물리적인 상태에서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브렌타노의 경험적 관점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것을 본다고 할 때 비록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그 내용에는 어떤 것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청춘의 샘물이 실제(實際)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생각과 욕망의 지향적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이를 현상학을 연구하는 자들은 청춘의 샘물을 표현하기에는 경험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소박하게 ‘괄호 치는’ 일로 보았다. 또한 어떤 본래의 성질을 직관(直觀)하는 것으로 ‘형상적 직관eidetic Intuition’이라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이 현상학적 미학은 예술작품을 통해 빛을 발하는 인간적 특성들인 따뜻함과 힘, 우아함이나 장대함에 대해 협소한 경험주의적 기술에서는 환영받지 못하였지만, 선입견 없는 개방성은 모든 미적 기술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훗설의 제자인 잉가르텐은 시(詩) 한 편은 그것의 ‘구체화Komkretisationen’라는 말로, 시를 읽는 개별적 경우들에 있어서 하나 하나들이 완전히 구별되는 것으로 어쨌든 하나의 지향해가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문학 작품은 다층적 형성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첫 번째 층은 언어의 소리구조와 성질인 소리층이라고 한다. 둘째 층은 문제의 가벼움, 단순성, 복잡성 등의 성질이며, 셋째 층은 시공간 내의 표현되는 ‘작품의 세계’이다. 이 때 가공된 인물은 확정적인 속성들을 모두 소유하지는 않는다. 넷째 층은 도식화된 양상이라고 한다.
현상학을 기반으로 실존주의의 완성을 꾀했던 하이데거는 그의 『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Kunstwerkes』에서 세계는 대지를 의미의 밝은 빛 속으로 가져가고 대지는 세계를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고 하면서 ‘아름다움은 진리의 자기현시’라고 했다. 예술분야에서 ‘감정이입Einfühlung’은 내성적인 방법으로 심리학적인 용어를 도입한 인물이 로베로트 피셔이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 무생물에 투사된다고 하여 객관적인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후 작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언어의 풍부한 유연성과 다양한 가치를 갖는 용례에 대하여 둔감하다고 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그 단어들은 본래 의도되지 않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법을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말놀이의 유형language game’을 오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난제를 극복해야 한다. 이 난제는 죤 오스틴의 말이 적법할 듯하다.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의 언어적 공감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구분과 연관을 구현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적자생존의 시공간 속에서 대항해왔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일상적이고 실용적 문제들에 있어서는 한나절 안락의자에 앉아 생각해 낼 수 있는 어는 것보다 다양하고 더 견실하며 정교한 것으로써 이것이 가장 호감 받는 방법일 것이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제 아무리 출중한 인물이 태어나서 언어적 감각을 익힌다하더라도 인간의 모든 상황을 다 섭렵(涉獵)하여 언어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인간의 미적 활동과 감각적 사유를 인간의 생각으로 위축시킬지라도 칸트와 플라톤을 자신의 스승으로 주장하였던 쇼펜하우어는 후기낭만주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충족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라는 말로 세계가 나의 표상이라고 했다. 칸트가 선천적 종합판단이라는 말로 ‘몰 자체Ding an Sick’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을 쇼펜하우어는 ‘몰 자체’를 비합리적이고 무제한적인 충동으로 보았으며, 이는 살려고 하는 의지(the Will to Live)로 보았다. 니체는 예술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그 넘쳐흐르는 생명력으로서 세계를 자기 자신의 거울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에게 의미와 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니체는 “대체적으로 나는 여태까지 등장하였던 어떤 철학자보다 예술가를 훨씬 더 좋아한다”고 했다. 낭만 시대 이후에 근현대 문학의 가치가 하락되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대로 현상학적 사유에 형상을 통한 직관(直觀)을 이용한 미적 활동은 제재(制裁)될 수 없었다. 오히려 미적 활동은 더 풍성한 활동과 그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4. 미적 감각에 있어서의 ‘시’
4-1. 격조 있는 미적 감각을 지닌 ‘시인’
수많은 시인들은 드높은 이상을 따라 자신의 감정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하여 노래하였다. 위에서 보았듯이 에드워즈는 ‘시는 모든 지식과 경험에 대한 숨결이며 섬세한 정신의 아름다운 학문이다’라고 했다. 필자는 ‘시인은 아름다운 형상을 언어로 그려내며, 그의 숨결을 내부에서 외부로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 시 한편을 읊기 위해서 고뇌하는 시인의 내면의 숭고함과 그 깊이는 무엇으로 가늠하며, 그 시인이 가진 시적 아름다움의 척도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다름 아닌 시로 표현된 언어이다. 그리고 그 언어로 말미암아 독자로 하여금 “아, 맞아,” “그래, 바로 이거야,” “좋구만, 하하”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일이다. 여기 한 편의 시가 독자로 하여금 내면의 움직임을 조정하며, 심애의 뜻을 ‘어떤 즐거운 현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서, 스스로를 인정하면 매우 존귀한 인격체로 품격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물을 보며 의인화하여 인격체로 환원시켜서 인간의 마음과 동질된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책무를 다한 것이라 여긴다. 그 시인은 자연을 알고, 그 자연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으며, 누구나 사랑으로 감쌀 수 있는 넉넉함이 비춰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들은 시인이 창작한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시인이 자연적 현상을 자기의 의지로 뿌리내릴 수 있는 모습을 통해서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을 던져준다.
4-2. 형상(形像)학적 직관(直觀) 너머에 있는 예술로서의 '시'의 가치
프랑스 낭만파 시인인 빅토르 위고는 '신이 자연을 시적인 예술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을 통해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곧 자연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신적인 미학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서 인간을 도구화하여 빚어낸 시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 뉘라서 감히 시를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필자는 시의 영역이 얼마나 문학적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형상적 직관을 현상(現像)학적 설명으로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시를 좋아하며 사랑하는 자들이 시적 가치를 잘 알고, 뼈가 깍이고 살이 에이는 과정 속에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빚어나기를 바란다. 시는 예술철학 분야에서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써, 수많은 철학자들의 논문과 책, 그들의 ‘아티클’이 뭇 사람들의 내면과 영혼에 울림을 주었다. 그 이유는 시가 미학의 일부이지만, 도리어 언어적인 재현으로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을 철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지고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인 하이데거는 그가 영향을 받았던 현상학의 토대를 놓았던 훗설에게 영향을 받고, 시란 ‘세계의 대상에서 발견한 위대한 발견’이라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재현된 구조물인 시는 그것이 형상적 직관이라는 틀로 파악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너머에 있는 존재자체,’ 즉 그 너머에 있는 존재는 흐트러지고 헝크러진 세계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감각자료(이성과 경험)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개념(논리적 구조로 엮어내는 과정)의 도움이라고 여긴다. 형상적인 그림 언어가 도식화되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인간 삶에 구현될 때 시에 대한 미적 대답은 충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 나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시학은 인류사에 길이 남을 만한 기념비인 비극이라는 주제를 따라 예술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칸트는 분석적 종합판단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현상에까지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도덕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보았다. 이에 미적 분야에서 시가 최고라고 본 것이다. 두 사람의 입장을 고려할 때 ‘시’란 인간이 지닌 언어적 산물이며 예술이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언어는 참으로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8권에서 ‘음악’은 첫째가 유쾌한 것으로써 성격의 취향(윤리적, 실천적 선율, 열정적)이나 성향과 일종의 유사 관계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적 은유가 갖는 중요성은 의학 요법을 참조하여 음악의 쾌락 효과를 설명하였다. 비슷한 맥락은 비극적 산물은 ‘쾌’를 산출한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시도 마찬가지로 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피력했다. 더불어 시인은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했다. 칸트는 그의 미학에서 시(詩)란 아름다움(das Schöne)에 대한 숭고의 미가 철저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했다. 칸트는 시는 재현과 함께 자유의 미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현대 언어는 소쉬르 이후 파괴적 패러다임이 있어 왔다. 그것은 모더니즘과 이것에 상응(相應)한 포스트모더니즘(건축분야에서 제일 먼저 도입했다고 전해짐)이 이입되면서 몇몇 학자들 간에 언어의 쇄신이라는 명목 하에 허무주의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곧 언어는 플라톤의 표현처럼 모두 글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인간의 뜻이 그 안에 다 기입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행위는 언어의 도단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언어는 ‘끊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호흡’이라고 여긴다. 인간이 말로 다 표현 못하고 글로 다 쓸 수 없더라도 인간 안에 있는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미덕과 말을 조리(條理) 있게 할 수 있다면 시적 언어가 창출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면에 기록하여 독자와 청자에게 공유할 수 있게 한다면 시는 그야말로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최상의 문화이자 예술인 것이다.
철학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인물에 대해서 감히 졸자가 무슨 말을 어떻게 덧입히겠는가? 다만 이들도 인간인지라 어딘가에 분명히 한계선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시가 예술로서의 본래적 유용성, 즉 화용론에 대해서는 뒤떨어진 사유를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시의 화용론의 의미는 본래 작가와 청자 간의 소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잉가르텐이나 현상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분야를 의미론적으로 한 차원 뛰어넘어 작가가 상상한 그 세계를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즉 화용론은 단순히 소통으로만 그치지 않고 작가가 느꼈던 그 감정, 기쁨이나 슬픔, 즐거움 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두 사람의 고대와 근대의 철학적 사유의 만남 속에서 재현과 자유를 넘어선 ‘소통’과 ‘유희’라는 관점인 ‘시적 미학’으로 격상시키고자 한다.
참고 문헌
서양근대철학회. 『서양근대미학』. 파주: 창비, 2012.
먼로 C. 비어슬리. 『미학사』. 이성훈, 안원현 옮김. 서울: 이론과 실천, 1999.
L.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 곽강제 옮김. 파주: 서광사, 2012.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로즐린 뒤퐁록. 장 랄로 서문/주해. 김한식 옮김. 서울: 임프린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