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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일
말씀 : 갈1:6-10
제목 : 생명이 흐르는 교회(1)
1. 출생 : 임신 중인 산모가 하혈을 심하게 해서 병원에 갔습니다(당시 산부인과가 없었습니다). 의사가 '아이를 포기해야 어머니가 살 수 있다'고 말했지만 산모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며 목숨을 걸고 출산했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2. 소년기 : 옥상에서 사촌형과 칼싸움을 하다가 떨어졌는데 빨랫줄에 걸리면서 머리부터 떨어졌습니다. 곧바로 당시 부산의 봉생신경외과로 갔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이미 죽은 목숨이라서 병원에서는 해줄 것이 없으니 집에 가서 임종을 맞으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설득과 사정으로 겨우 입원은 했지만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굶어 죽을지도 모르니 포도당을 좀 맞게 해 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처음에 거절하던 의사는 어차피 죽을 건데 부모 뜻대로 해주자고 생각하고 포도당 주사를 놔주었습니다. 그런데 포도당은 맞은 후 제가 한쪽 다리를 끌어당겼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포도당을 계속 맞았고 결국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3. 청년기 : 군 제대하는 날 뇌수막염이 걸려 엄청난 고통 속에 광주 국군통합병원에 2주 간 입원했다가 재 특명을 받아 제대했습니다. 의사에게 '뇌수막염에 걸렸는데 2주 만에 병원에서 걸어서 나간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4. 장년기 : 간경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6개월마다 한 번씩 병원에 가서 간 초음파 및 피 검사를 하고 있는데 20년 동안 약을 먹지 않고도 간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5. 노년기 : 목 부위에 멍울이 생겼는데 충남대학교병원에서는 암이 아니니 그냥 수술하자고 했지만 삼성서울병원으로 가서 다시 조직 검사를 한 결과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고 3개월 동안 치료받았습니다.
이처럼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지금의 저에게는 죄를 짓거나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일 때 ‘네가 이렇게 살도록 지금까지 살려둔 줄 아느냐?’라고 말씀하실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 속에서 오늘까지의 제 인생과 목회를 뒤돌아보니 후회되고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내가 성도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의대생이 복도를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한 의대생이 그 모습을 본 한 의대생이 "저 자세는 류마티스 관절염 때문이야."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다른 의대생이 "아니야. 디스크 때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두 가지의 병명으로 다투고 있던 그들에게 그 남자가 다가와서 매우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너무 급한데 화장실이 어디 있어요?"
목사도 이럴 수 있습니다. 요즘 목사들은 성도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성품이 좋은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품이 좋은 사람이 말을 잘 듣고 순종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그 성도에게 멍에를 얼마나 씌우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무조건 모이라고만 합니다. 모여서 변화 없이 동일하고 빈약한 영적 식사만 지겹도록 먹고 갑니다. 물론 모여야 합니다. 모이는 것을 폐해서는 안 됩니다. 주일에는 반드시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 수요예배, 금요심야예배, 새벽기도, 소모임, 기관모임 등 또한 심하게 강조합니다. 물론 강조해야 합니다. 하지만 토요일이나 평일에 모이는 것이 성도들에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직장과 가정에서 힘들고 지친 상태에서 교회 한 번 오다는 것은 어지간한 헌신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이는 것은 대단한 헌신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교회가 그 모임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활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모임이 곧 신앙의 훈련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훈련을 시키지 못했습니다. 흩어져서 생명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목적을 놓친 것 같아 많이 안타깝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가정교회 리더자들에게 큐티(QT)를 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이나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하라'고만 했을 뿐 효과적인 접근과 적용 방법에 대해 교육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또한 훈련의 당위성에 비해 훈련의 이유, 방법, 방향성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 받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부족함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 중심의 신앙관을 심은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나름대로 굉장히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허점이 많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일이 있거나 일이 잘 풀렸을 때 '집사님, 그렇게 십일조도 잘하시고, 주일 성수도 잘하시고, 충성 봉사하시더니 드디어 복을 받으셨네요.'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을 당해 힘들어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병들어 고생하는 성도에게도 '집사님, 복 받으셨네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설교를 통해 고난 받는 것은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만 가지고도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복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지, 회개할 것이 없는지 물어봅니다. 물론 회개는 중요합니다.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하고 기쁘면 회개 안 해도 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형통할 때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아니면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물론 형통하면서 하나님을 만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우리는 훨씬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복입니까? 영적으로는 고난이 복입니다. 그런데 고난 중에 있는데 복 받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솔직히 말해서 감사하십니까 아니면 시험에 드십니까? 고난의 때는 오히려 삶의 기대가 충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제가 잘못 가르쳤다는 말씀입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제가 이 말씀에 저촉된 설교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가 삶의 우선이고 내가 잘돼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전형적인 인본주의 사상에 우리도 모르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의 말씀을 수없이 읽었고 그것으로 설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설교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는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받은 종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저를 포함한 많은 목사들은 모든 성도를 맡은 바 충성된 종으로 골고루 양육하는 것을 사역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 좋은 성도들은 알아서 성장하고 있으니까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하면서 보살피고 양육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만지심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하려고 하니까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 역할은 기도뿐이구나’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모든 성도가 일꾼이 되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교회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많은 일을 감당하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목사는 마음이 아픕니다. 심지어 그러다가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모든 성도가 다 함께 일꾼으로 양육되기를 고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을 보면 주인이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충성스럽게 열심히 사명을 감당했으니 네 사역을 감해주마. 이제 좀 쉬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7절에서는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즉 더 많은 것을 맡기고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권세를 주겠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많은 일을 맡기신 충성된 종의 복은 더 많은 일을 주님으로부터 부여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영적인 복은 적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는 것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그대로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준 것으로 살지 않고,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주신 것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주인의 권세와 능력을 땅에 묻었으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정말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면서 '이것이 너의 복이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기쁨으로 맡기지 않고 눈치를 보며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것을 땅에 묻고 주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주를 받을 자로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성도들의 생명을 위해서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몸이 좀 안 좋으니까 사명을 내려놓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목사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는데 지금 죽었습니까?’라고 말한다면 시험 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하지 못하는 목사를 가리켜 '삯꾼 목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기쁘시게 해야 할까요?
좋은 성품을 갖고 태어난 것은 복입니다. IQ 150으로 태어난 것도 복입니다. 좋은 성품으로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도 완벽하게 잘합니다. 그런데 일을 잘해서 또 다른 일을 맡기면 안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자기 힘과 성품으로 한 것이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작은 일에 충성한 성도에게 더 큰 일을 맡기는 것이 복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핵심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5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2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1달란트 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몇 달란트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충성된 종들은 동일한 칭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형통함 속에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 인정하는 것은 생명이 흐르는 자들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저에게 왜 암이라는 것이 찾아왔는지 잘 모릅니다. 제가 암에 걸릴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 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7월 9일로 기억합니다) 5분 정도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암을 받아들이고 먼저 집사람과 형님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저는 항암 치료를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소론도라는 약을 끊고 이틀 정도 힘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도솔산도 가고, 자전거도 타고, 밥도 잘 먹었습니다. 병원에서 구토하면 먹으라고 준 약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3차 항암 치료 때 열이 38도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면서 치료 과정에서 일어나는 충돌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9월 29일에 낮잠을 자는데 오한이 찾아와서 체온을 측정해보니 38.6도였습니다. 이전에 없던 오한 증상 때문에 급하게 충남대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자기네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9에 전화해서 응급실이 있는 병원의 번호를 받아서 다 전화했는데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다가 선병원에 받아주겠다고 해서 가서 열을 재니 37.4도였습니다. 안내하는 직원이 38도가 넘어야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 정도면 문제가 없어 보이니까 그냥 가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길래 일단 왔으니까 검사라도 해보자고 응급실에 입원해서 피 검사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염증이 조금 보이는데 이것이 발열의 원인은 아니니 퇴원을 하라고 해서 이틀 치 해열제를 처방 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아침에 일어나 열을 재보니 39도였습니다. 더 심각해지기 전에 삼성서울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도착해서 체온을 측정해보니 37.7도가 나와서 응급실에 입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료대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응급실 입원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 염려했지만 다행히 입원이 가능하다고 해서 일단 피 검사하고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피 검사에서 염증 수치가 엄청나게 높게 나와서 CT를 찍었더니 폐렴 증세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입원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병실이 없었습니다. 3~4일은 지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집사람은 잘 곳 없는 응급실에서 3~4일 동안 의자에 앉아 지내야 하고, 사 먹어야 하는 밥도 혼자 나가서 사와야 합니다. 24시간 불이 켜 있고 마땅히 쉴 곳도 없는 환경에서 집사람이 3~4일을 지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날 바로 입원실이 나왔습니다. 들어가서 보니 롯데월드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아주 좋은 창가 자리였습니다. 의사가 와서는 항암 부작용으로 나타난 폐렴은 빨리 치료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항암 과정에서 부작용이 나타난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에 10시간 항생제를 투여했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저는 항암 치료하면서도 도솔산을 평균 하루에 한 번 정도 다녀왔고, 밥도 한 그릇 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항암 부작용으로 입원한 4박 5일 동안 항암 치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을 다 겪었습니다. 구역질이 나고 속이 메슥거려서 밥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루에 몸무게가 2.9kg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제가 왜 암에 걸렸고 왜 항암 부작용으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암을 치료하는 과정 속에서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욥의 고백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4박 5일의 입원 기간 동안 신앙이 흔들릴 틈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주시고 그것을 이기는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군대에서 뇌수막염으로 입원한 것 말고는 지금까지 입원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회에서의 첫 입원이었습니다. 4박 5일 동안 제 가슴을 파고드는 말씀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말씀이 가슴속을 맴도는데 어떻게 원망이 입 밖으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같은 병실에 폐렴으로 한 달째 입원 중인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숨을 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삼성병원 응급실로 가기 위해 119에 전화를 했는데 119로부터 삼성병원에서 이 분을 받을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129 구급차를 타고 삼성병원에 와서 2시간 동안 싸운 후 겨우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저는 그냥 싸우지 않고 집에 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폐렴 증세가 악화하여 패혈증이라도 발생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응급실에서 바로 입원실로 왔고, 가장 좋은 자리로 배치되어 4박 5일 일정을 잘 마치고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만일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항암 치료 받는 성도들에게 "크게 힘들지 않으니까 견뎌내세요. 나 같은 사람도 문제없이 항암 치료 다 받았는데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치료 과정에서 밥도 못 먹고, 메슥거리고, 구토하는 고통을 알게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형통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나 방법이 아니라 내 안에 진리가 살아있고 생명이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분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교회는 생명이 흘러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인본주의 사상이 가득 차서 생명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축복을 놓친 채 저주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 주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