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깃새 밭깃새/김정화
이튿날 비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엄마가 참외싹하고 옥수수싹을 열 포기씩 샀다. 엄마는 마을회관 앞에서 내가 오도록 기다리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진갓골에 먼저 갔다. 나는 집으로 갔다가 바로 뒤따라가는데 엄마 꽁지가 안 보인다. 여든 살 할매치고는 빠르다.
숲길로 들어간다. 내가 어릴 적에는 도랑으로 못가로 다니던 숲길인데, 이제는 풀길로 덮인다. 솔밭으로 빙 돌아서 걸어간다. 이쪽은 예전에 아버지가 경운기를 몰던 길이다. 천천히 풀밭길을 걷는 동안 아버지 옛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계시고 오빠하고 함께 작은집으로 살던 예전에는, 여기 논에 마늘을 심었다. 여름이면 마늘을 캐고 볏모를 심고 가을에 다시 마늘을 심느라 바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 그때는 논이 작게 네 뙈기였다. 이 네 뙈기 논을 두 뙈기로 뭉치고 다시 한 뙈기로 이었다. 엄마는 한창 일철이라 바쁜 그 무렵, 누구 하나 밭을 갈아 줄 사람이 없으니 으레 호미 하나를 들고 김을 맸단다.
엄마 혼자 이 땅을 다스리기에는 이제 벅차다. 가만히 있자니 풀밭이 되고 밭을 붙일 사람은 없고 예순 해 동안 흙을 일구다가 뻔히 묵정밭이 되는 꼴을 보자니 못 견디어 호미로 한 달 내내 땅을 일구었단다. 하루에 한 고랑 반쯤이나 두 고랑쯤 김을 맨 셈이다. 논깃새를 넓히고 논둑을 넓혀 모두 밭깃새를 넓혔다. 워낙 땅은 두 마지쯤 조금 넘지만 물이 고인 땅까지 넓혀서 막상 밭은 네 마지기쯤 된다.
혼자서 하기에 벅찬지 들깨를 심고, 가운데 한쪽에는 파를 심어 놨다. 파를 어제 심었다니 아직 누웠다. “엄마, 파가 누웠네. 이렇게 있어도 파가 빳빳하게 일어나나?” “그래.” “근데, 엄마는 파가 일어나는 줄 어떻게 알았어?” “열아홉에 시집와서 너 아부지한테서 배워 알지.” 들일 밭일을 하나도 할 줄 모르던 열아홉에 시집을 왔지만, 호미 한 자루를 쥐고서 다 배우셨단다.
밭 가운데를 넓게 두고 참외를 심는다. 호미로 구멍을 파고 참외싹을 넣어 손으로 꾹꾹 누르고 동이에 물을 담아 붓는다. 흙에 물이 스며들면 내가 뒤따라 마른 흙으로 젖은 흙을 덮는다. 해가 머리에 내리쬐니 흙이 바로 마르지 않게 덮는다. 흙이 덩어리가 졌는데 물을 싹 빨아들인다. 흙은 이내 차분하다. 논흙이라서 거칠어 보여도 보드랍다. “아버지가 있었다면 고랑이나 이랑마다 흙이 참 고왔겠네. 그치, 엄마?”
아버지는 눈만 뜨면 들에 가고 밭에서 살았다. 흙손질을 아주 잘했다. 괭이도 아니고 작은 호미로 지심을 뽑고 흙을 일구었다.
못가 소나무에 흰새가 한 마리 앉았다. 여기서 흰새는 처음 본다. 흰새가 앉은 소나무가 한창 우거진다. 어린 날에는 내 허리쯤 오던 소나무인데 마흔 해를 지나니 그 작던 소나무가 숲으로 우거진다. 넓은잎나무는 아직 여리다. 마디게 자란다. 나무를 모조리 베다 땔감으로 쓰던 자리인데, 땔나무 노릇을 하던 곳이 이제는 숲으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 푸르게 뒤덮는다.
엄마가 잘 다듬은 밭 옆에 납골당 하나가 있다. “엄마, 저것만 아니면 자리가 참할 텐데.” “친척 땅인데 우리한테 안 팔고 밤에 몰래 이웃마을 사람한테 팔아서 저렇게 되었잖아.” “왜 우리한테 안 팔았어?” “우리가 워낙 없이 살다 집이 일어나니깐 배가 아파서 안 팔았지.” 못살던 친척이 잘살면 좋을 텐데 왜 그랬을까. 이래서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나왔을까.
알뜰살뜰 일군 밭이 우리 엄마한테는 보약이다. 엄마가 으레 하는 말처럼 호미를 쥐어야 몸이 튼튼하겠다. 엄마가 오래오래 살자면 밭도 흙도 나무도 호미도 있어야겠다. 골마다 무얼 심을까 헤아리고, 비가 오면 무얼 하면 좋으려나 셈하는 엄마를 지켜본다.
2023.05.05.숲하루
#작은삶
#덧--깃새는 '기슭'이나 '깃'을 뜻하는 의성 사투리입니다.
첫댓글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렇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글이 좋은 글인데 저는 글마다 힘이 잔뜩 들어가서 늘 "오비" 를 냅니다.^^
회장님!!!ㅎ
저도 시골 출신인데 논깃새, 밭깃새라는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귀한 단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지심'도 참
정겹습니다
도시 태생 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듯~
읽는 내내 따뜻한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어요~^^
잡초라 부르기에 넘 미안한 풀
우리가 쌀밥 먹듯
숨탄것들 밥인데
잡초라는 물을 붙이기 싫어서 어린날 부르던 이름으로 썼어요.
고맙습니다.
"그때는 논이 작게 네 뙈기였다. 이 네 뙈기 논을 두 뙈기로 뭉치고 다시 한 뙈기로 이었다."
이 표현이 당시 쌀이 귀하던 시절의 삶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는 장면인데 아마 당시는 천수답 다랭이 논으로 네 뙈기로 개간되어 있었는데, 경운기 같은 기계화 영농에는 엄청 불편하였지요.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두 때기로 합치는 작업을 했는가 봐요. 요즈음은 포크레인으로 하루만 해도 되는 일이지만, 당시는 전부 육체노동으로 논을 합쳤으니 무지 무지하게 힘이 들었지요. 그래서 1차로 두 뙈기로 만들었다가, 다시 한 뙈기로 만들었는 데, 논으로 이용하려면 수평 잡는데 또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야 했으니 그만 포기하고 밭으로 농사 지었던 가 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밭을 논으로 만드는 일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물을 대고 나서 써레질로 높은 곳의 흙을 낮은 곳으로 계속 밀어 넣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써레를 끄는 소도 죽을 고생을 했지요. 잡초 같은 인생이었는데 작가님이 잡초라 부르기 싫다는 말씀이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지심,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뽑아 내버려야 하는 풀이 지심이지요. 그런 지심들이 살아 남아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됩니다
깃새(틈새?)를 넓혀가며 삶을 이어온 부모님 세대의 고단했던 삶이 그대로 전해오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칠갑산"이 떠올랐습니다. 깃새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쓴 것인지 작가님의 주석이 있으면 독자들이 더욱 고마워 할 듯, 저도 추측성으로 답글을 씁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할 때 그 작은 조각을 "깃"이라고 하는 데, 작은 깃들로 조각보를 만들어 가듯이 깃을 넓혀가듯 삶의 오히연을 넓히면서 살아 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합니다 만 맞는가 모르겠네요?^^
깃을 몰래 팔아버리고 멀리 떠난 일가님의 아픈 속사정도 아릿하게 다가 옵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
깃새는
'기슭'이나 '깃'을 뜻하는
의성 사투리입니다.
시골에 살아보지 않으면 느낄수 없는 그런 게 저는 부럽습니다. 밭일이 고되고 힘들겠지만 제게는 꿈같습니다.
남이 안 붙인다 해서 오히려 나은 듯해요
날씨도 알아야지
이 밭을 꾸리려면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이니
우리 엄마가 바빠지거든요.
몸한테 좋아지잖아요. 고마워요.
도시여자처럼 보였는데~ 저 처럼 촌 녀 ㄴ?( 웃어보자고 한 말 입니당~)
ㅎㅎ 어떤 분도 그러시대요.
골짜기에 살다
안동 찍고,
대구 왔으니 출세 했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