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18 - 서쪽 레팀논에 가서 성채에 올라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회상하다!
여행 7일째인 2024년 4월 29일 크레타섬의 서쪽을 보기로 하고 1821 거리를 걸어 니코스 카잔차키스
Tomb of Kazantzakis 묘지를 구경하고는 성벽을 걸은후 내려와 하니아 게이트
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동쪽에 헤라클리온 종합 버스 터미널에 도착합니다.
크레타섬 서부 레팀논행 버스표를 9유로에 끊어 올라 타네, 11시 30분에 출발한 버스는 13시가 넘어야
도착한다는데.... 버스는 부두 Port 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베네치아 항구와 요새를 지납니다.
일광욕, 스노클링, 해변 산책을 즐기기 좋다는 아무다라 해변(Ammoudara Beach) 과 어촌 분위기
를 지녔음에도 수영과 스노클링에 이상적인 수정 처럼 맑은 바닷물이 있는 아기아 펠라기아
(Agia Pelagia) 를 지나 출발 1시간 반만인 13시에 레티몬 (레팀논) Rethymnon 에 도착합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바닷가인데 파도가 심한지라 석축을 튼튼하게 쌓았으니.... 해변을 따라 걸으니
오른쪽에 거대한 성채가 나타나는데, 중세 시대에 여기 크레타섬은 베네치아가 지배하였습니다.
제 4차 십자군 이후 이 섬을 지배하면서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로 부터 섬을 지키기 위해 헤라크리온과
하니아 그리고 그 중간인 여기 레팀논에 쌓은 성채 Venetian Fortezza Castle 라고 합니다.
해변을 10여분 이상 걸어서 성채의 서쪽으로 가니 도로변에는 차들이 엄청 주차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성채를 보는 사람들이 몰고 온 차들 인 것 같습니다.
한 면은 바다를 끼고 축성된 5각형의 이리클리온 성채처럼 여기 레팀논의 성채도
화포의 공격에도 대비할수 있게 화살촉 모양으로 나온 치성(雉城)이 돋보입니다.
언덕길을 올라 성의 서문에 도착해서는 60세 이상인 시니어는 반값인 3유로 입장료
를 내고 성채 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오르막이고 곧 넓은 평지가 나타납니다.
성의 서쪽 부분에 보니 여긴 델로스섬에서 보았던 것 과 같은 야외 극장인데.... 그리스인들은
도시를 만들면 이런 극장을 만들었으니 밤이면 여기 앉아서 연극을 즐겼나 봅니다?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에 선박과 해군을 제공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후 전리품으로 얻은 크레타섬을 방어
하기 위해 헤라클레이온과 하니아 그리고 레팀논에 견고한 성채를 쌓았는데 이후 1453년에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니 베네치아 성채는 오스만군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가 되었습니다.
1645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령 크레타 섬을 침공하여 25년간이나 전쟁을 하게 되는데.....
오스만 제국이 해상에서 벌인 최후의 대규모 정복 전쟁으로, 이 전쟁으로 오스만은
크레타섬을 정복해 1898년까지 2백여년간 통치을 하게 되니 지중해 동부는 이슬람의 바다가 됩니다.
1644년 9월 28일,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순례하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코스탄티니예로 돌아
오던 오스만 선단이 로도스섬 근해에서 구호기사단(몰타 기사단) 함대에 의해 나포되었습니다.
선단을 턴 몰타섬의 요한 기사단은 순례객들을 대부분 죽이고 남성 350여명과 여성 30여명은
노예로 팔아치우기 위해 생포했는데, 본거지인 몰타로 돌아가는 길에 식수 확보와 구출한
그리스인 노잡이 48명을 풀어주기 위해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 남부의 한적한 마을에 정박합니다.
오스만 제국과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 나가던 베네치아는 20일이 지나서야 알게되었고 기사단 함대를 추방
하는데, 죽은 사람들 중에 오스만 제국 황궁의 전직 흑인 환관장이 있었고, 포로로 잡은 이들 중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술탄의 하렘에 속한 여인과 그녀와 술탄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건을 보고받은 오스만의 술탄 이브라힘은 격노해 톱카프 궁전에 대사들을 모아 항의하며, 베네치아
대사 소란초에게 20일간 기사단 선박들을 눈 감아주고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점은 제국에
대한 배신이라고 맹비난하면서 베네치아 측에서 기사단과 짜고 일을 꾸민 것이 아니냐고 몰아붙입니다.
베네치아는 부정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감시를 소홀히 한 장교를 총살하고 술탄에 용서를 구했지만
무슬림으로서, 남자로서 구겨진 자존심은 회복되지 아니했으니, 크레타를 노리던 조정 신료들
또한 이번 사건을 크레타를 정복하기 위한 좋은 명분으로 보고 술탄을 부추겨 주전론에 불을 지핍니다.
1645년 1월 3일 소란초의 교섭은 재상 세미즈 메흐메트 파샤의 문전박대를 당하며 무산되었고 오스만
조정은 전쟁을 결정했으니, 명목상의 정벌 대상은 몰타였지만 코스탄티니예의 외교관들은 이번
전쟁의 목표가 동지중해에 마지막 남은 '베네치아의 항공모함' 크레타 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니예의 살벌한 기류를 감지한 베네치아령 크레타 총독 안드레아 코르나로는 기존 성채를 시찰,
보수하고 그리스 용병을 각지에 배치하는 등 전쟁준비를 시작했으며 베네치아 본국은 1월 4일
에 식량과 엔지니어 그리고 2천 5백명 군대를 크레타로 보냈고 2월에는 10만 두카트 자금을 보내줍니다.
3월이 지나 출정식 당일 까지도 오스만 투르크 조정의 선전포고 대상은 그대로
몰타였는데.... 4월 30일에 5만 대군을 이동시킬 80척의 갤리선단과 250척의
수송선이 콘스탄티니예 (이스탄불) 의 항구를 떠나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납니다.
에게해를 지나며 오스만 함대는 베네치아령 티노스 섬에 정박하여 물과 식량을 공급받았고,
6월 23일 크레타 북해안에 나타났는데.... 함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쪽의 나바리노 (180여년후 해전에서 대패를 겪는 곳. 현재의 필로스) 에 정박합니다.
나바리노는 몰타로 향하는 항구였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베네치아는 오스만 조정이 진심으로 몰타를 공격
한다고 여기고 희망을 품었지만 터키 함대는 항구를 나오자마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 크레타 방면인
동남쪽으로 향하였고, 3일 후인 6월 23일 섬의 3대 요새 중 하나인 하니아 (Χανιά) 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크레타섬의 서부 하니아(Chania) 는 칸디아(이라클리오, 헤라클레이온) 에 이은 크레타 제2의 도시였고
베네치아는 하니아 항구를 요새화하고 부두의 수만 14개에 이르는 조선소를 세웠는데,
오스만 함대는 '베네치아항' 이라 불리는 하니아 주 항구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합니다.
해안을 방어하던 크레타 민병대는 도주하였고 도시를 향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던 오스만 군대는 하니아를 5km 를 앞두고 행군을 멈추었으니....
썰물 때만 육지와 연결되는 섬에 조성된 산 테오도로 요새가 거슬렸던 것입니다.
간조가 되자 2천명의 오스만 소총 부대는 60명의 수비대가 배치된 작은 요새를 공격
하였는데, 함락이 임박해지자 수비대장 플라시오 줄리아니는
화약고에 불을 붙여 성벽을 기어오르던 5백여명의 오스만 병사들과 함께 자폭합니다.
장애물을 제거한 오스만 군대는 하니아를 포위하였고 56일에 이르는 공성전이 시작되었는데,
나바제로의 1천명 수비대는 주민들의 협력을 얻어 성공적으로 모든 공격을 격퇴해
내었하지만.... 땅굴을 파고 화약을 채워 폭파시키는 전술에 성벽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하니아가 버텨내며 벌어준 2개월 동안 베네치아 당국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영국,
네덜란드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당시는 독일 등지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간에 피로
피를 씯는 30년 종교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 실질적인 도움은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10만 두카트를 보냈고 베네치아 공화국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교황청이 5척에 몰타
기사단, 나폴리 왕국과 토스카나 대공국이 지원 병력과 소수의 전함을 보내주었지만 지원군이 출항
할 즈음인 8월 22일, 식량과 탄약이 고갈된 하니아는 수비대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합니다.
두달간 1만이 넘는 희생을 치렀지만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에 확고한 거점을 얻었는데, 9월에 그리스 서남부
자킨토스(잔테) 섬에 집결한 지원 함대는 폭풍으로 오스만 함대가 흩어진 틈을 타서 하니아를
수복하려고 하였으나 교황의 조카이자 사령관인 니콜로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실패하고 섬에 묶여 버립니다.
10월 1일에 이르러서야 베네치아 해군이 합류하여 90여척이 모인 연합군은 하니아
수복에 나섰으나 지체된 한 달간 준비를 완료한 오스만 측의 방어에
막혀 격퇴되었고, 연합군은 서로를 탓하다가 와해되어 각자의 국가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니아를 함락한 오스만 군대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리스의 해군 기지로 쓰이는
수다의 항구를 손에 넣었는데, 오스만 군대가 다가오자 함대 사령관 카펠로가 절반의
함대와 잔테 섬으로 도주했지만.... 만의 중간에 위치한 섬에 세워진 요새에는 40척의
갤리선과 4척의 갈레아차, 10척의 범선이 건재해 해군이 약한 오스만 제국은 함락하지 못합니다.
이후로도 수다 요새와 섬 동단의 스피나롱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버티게 되는데.....
한편, 여전히 서유럽 측의 지원을 못받은 채로 크레타를 방어하던 베네치아 측은
해가 바뀌어 1646년 초엽이 되자마자 80세의 도제 프란치스코가 사망하는 악재를 맞습니다.
73세로 신임 국가원수가 된 조반니 카펠로가 취임한후 베네치아 수뇌부는 오스만 제국의 보급로를 차단
하여 크레타에 주둔한 3만이 넘는 오스만 군대를 말려죽이기로 하고 1646년 3월 토마스 모로시니
가 이끄는 22척의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의 테네도스섬을 공격해 해협을 봉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5월에 오스만 측의 해군 제독 코자 무사 파샤가 80척의 전함을 이끌고 맞섰으나
패했지만.... 이후 코자 무사 파샤는 풍향이 바뀌길 기다렸고 6월 초에 강한 북풍이 불자
그대로 함대를 돌격시켜 봉쇄를 뚫고 크레타에 보급품과 군대를 내려놓는 데에 성공합니다.
베네치아 도제 카펠로는 8월, 하니아에 정박해 있던 오스만 함대를 공격해 보기도 했으나 격퇴당하였고
여름부터 포위되어 있던 크레타 제3의 도시 레티모(레팀논)를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결국 1646년 10월 20일에 함락되었고 요새화 된 시타델은 한달을 더 버티다가 11월 13일에 항복합니다.
1646년 말 ~ 1647년초 겨울에는 역병이 돌아 양측 모두가 피해를 입었는데, 비슷한 수가 죽었지만
증원이 힘든 베네치아 측에게 더 큰 타격이었으며 게다가 1647년 1월,
베네치아의 해군 제독 토마스 모로시니가 오스만 함대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는 피해도 있었습니다.
전염병으로 기세가 꺾인 오스만 군대는 서두르지 않았으니..... 1647년에는 6월에 수십명 오스만 분견대가
지나가던 베네치아 측 토스카나 용병대 천여명을 격파한 일을 제외하곤 기록될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칸디아(헤라클레아온)를 제외한 베네치아령 요새들은 더디고 출혈이 컸지만 하나하나
함락되었고 1648년 4월에 이르면 칸디아 자체와 섬 몇개를 제외한 모든 크레타 요새
들이 오스만 사령관 가지 휘세인 파샤의 수중에 있었으며..... 1648년에 이르면
전란과 역병으로 크레타 인구의 40% 가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전쟁은 계속 이어집니다.
22년간 이어진 역사상 가장 길었던 칸디아(이리클리오, 헤라클레이온) 공성전에 대해 유명한 말이 있으니
“저건 사람이 싸우고있는 것이 아니다. 25년간 죽은 베네치아인들이 되살아나 유령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
1648년 여름, 4만 대군이 6천 수비대가 지키는 칸디아(이라클리온)를 포위하였는데, 베네치아 측은 술탄
이브라힘 암살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648년 8월 모후 쾨셈 술탄의 쿠데타로 이브라힘은 폐위, 살해
되지만 새 술탄 메흐메트 4세와 실권자 쾨셈 술탄은 전쟁을 중간에 어정쩡하게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측은 달마티아를 통한 베네치아 본국에 대한 육로 공격까지 시도하였으나 그역시 격퇴
되었고 오히려 성 몇개를 빼앗겼으며 그리고 1653년과 1656년의 종전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베네치아 해군은 크레타에 군량 및 지원군을 보내는 오스만 보급 함대와 세 차례 (1651, 55, 56년)
충돌하여 모두 승리하였으나 오스만 주둔군은 스스로 농사를 짓고 원주민들과 잘
지내며 양식을 보급받아 버텨 내고 있었으니, 칸디아를 제외한 섬 대부분은 오스만이 장악했습니다.
1667년, 20년을 끌어온 공성전을 끝내기 위해 5월 ~ 11월간 오스만 군대는 32차례에 걸친 총공격
을 해왔으니 이에 수비군 측은 4천여명, 공격 측은 2만명이 희생되었으며.... 그후 1669년
9월 6일, 베네치아 공화국은 도시를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의 크레타 종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 보니 크레타의 문화는 점차 튀르크화 되었으며,
오늘날 크레타 문화는 그리스 본토 보다는 터키 서부 및 키프로스와 더 비슷해
지게 되었으니 서트라키아와 도데카니사 제도도 터키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곳인데.....
이후 크레타는 1898년 오스만의 자치국인 크레타 자치국이 들어설 때까지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으며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틈타 그리스가
크레타를 합병하고 1913년 발칸 전쟁의 결과 크레타는 그리스의 영토로 확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