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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과 명예를 대하는 불교의 태도
명예를 기릴 가치가 있다고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에게 명예를 수여하는 방식은 요즘 세상에 얼마든지 풍성하게 널려 있다. 노벨상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일 것이고, 그 밖에도 각종 상이나 경칭(敬稱)들이 해마다 또는 수시로 저명인사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학계에서도 축하 출판물이나 기념집의 출간, 명예학위의 수여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학문적 업적을 기려주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대체로 우리는 감사와 경의를 공개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온갖 방안을 강구하느라 편할 날이 없을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드러내놓고 자만심을 부추기는 방법을 쓰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감사와 존경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관례가 되어버려 온갖 대중매체 즉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해 널리 공개되고 있는 형편이므로 이 공개적 기림을 표시하고 또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한 불교의 견해를 잠시 살펴보는 것도 시의적절한 일일 것이다.
빠알리경에서는 명예, 칭송 그리고 존경을 표시하는 말로 라아바(lābha 이득, 얻음), 삿까아라(sakkāra 존숭, 공경), 실로까아(silokā 명성), 뿌우자(pūjā 공양), 완다나(vandana 절, 예배) 같은 용어들을 다양하게 쓰고 있다.
불교에서는 명예를 받아 마땅한지 여부를 따지는 기준으로서 윤리적 및 정신적 자질 여부를 먼저 문제 삼는다. 붓다 , 벽지불, 아라한 그리고 전륜성왕 등이 명예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최상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명예를 지녀 마땅한 분들을 명예롭게 받드는 일을 「대길상경(大吉祥經)」(『숫따니빠따』Ⅱ 4)에서는 크게 복 짓는 일로 꼽고 있다. 『법구경(106, 107게)』에서는 깨달은 성인에게 존경심을 내는 것이 백 년 동안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하였다. 또 다른 게송에서는 존경받아 마땅한 분을 존경하는 사람의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195, 196게).
가정에서는 부모가 대단히 존경받고 칭송받는다. 그분들은 평생 동안 자녀들을 위해 많은 애를 썼기 때문에 자녀들로부터 감사와 존경과 시중을 받아 당연한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서로 예우하고 존경해야 한다. 부모의 이런 훌륭한 성품은 이상적으로 자식을 키울 수 있도록 행복한 가정을 엮어 결합하는 구실을 한다.
『짱끼경』(『중부』Ⅱ권 167쪽)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손님들을 반기고 모시는 것도 또한 바람직한 오래된 전통이다. 연장자들을 존경하는 것도「자고새의 전생담」(『본생경』Ⅰ권 218쪽)의 우화가 그려내듯이 높이 칭송할만한 일이다.
이상으로 우리가 명예와 존경을 기리기에 마땅한 몇 가지 주요 기준으로서 고귀한 정신적 자질, 부모, 연장자의 위치가 인정된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익과 명예를 받는 편의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 쪽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이에 대해서도 부처님이 주신 가르침을 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처님의 직계제자는 승려들인데다 또 종교적 위치 때문에 일상적으로 재가자로부터 공양물과 명예를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만큼, 부처님이 이 주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어디까지나 승려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관심사에 대한 내용일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승려들은 해탈을 추구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부처님의 충고말씀은 자연히 그들의 이러한 처지를 염두에 두고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처지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재가신자들도 승려들에게 준 부처님의 조언을 자신들의 지침으로 삼아 이익과 명예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빠알리경전에서는 다음 세 가지 태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첫째, 자신이 얻은 명성을 열렬히 맛보고 즐기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찾는 태도.
둘째, 자신에게 주어지는 명예를 거부하고 돌아보지 않는 태도.
셋째, 그러한 명예에 대해 무관심하여 초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태도.
이제 위의 세 가지 태도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열렬히 구하는 태도
「고갱이비유대경[心材喩大經]」(『중부』Ⅰ권 192쪽)에서는 이익과 명예를 달가워하는 태도에 대해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승단에 들어온 비구가 자신이 받고 있는 이익과 명성을 즐기고 그것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마치 대들보감을 찾으면서 큰 나무에서 가지치기한 잔가지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과 같다. 그가 찾던 것은 들보감인데 그가 만족하고 있는 것은 단지 가느다란 어린 가지와 잎일 뿐이다.
데와닷따(『본생경』Ⅰ권 186쪽) 같은 사람이야말로 이익과 명성 때문에 완전히 파멸해버린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신통력을 익혀서는 이것을 재가신도들에게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때에 재가신자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으면서 데와닷따에게 빠진 이가 아자따사뚜 왕자였다. 데와닷따는 초인간적인 신통력을 보란 듯이 과시해서 많은 이익과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더욱더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서 부처님을 시해하고 부처님의 지위를 찬탈하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자따사뚜를 꾀어 그의 부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도록 종용하였다. 부처님은 후에, 데와닷따가 그토록 처절히 파멸하고 몰락하게 된 것은 그가 너무 가진 것이 많고 지나친 명성을 지녔던 탓이라면서 이는 마치 파초가 열매를 맺은 탓에 침해당해 망가지는 격이라고 말씀하셨다.(『상응부』Ⅱ권 241쪽)
『법구경』(75게)은 단언한다.
“명리의 길 따로요, 열반의 길 따로이다. 이 점을 분명히 알고 비구는 명리에서 즐거움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ā)』(377쪽)에 의하면, 항해 중인 배가 강한 파도와 천둥, 소용돌이 등을 잘 견뎌내야만 하는 것과 같이 수행승도 이익과 명성, 명예, 존경 등의 지나친 영향력을 잘 이겨내야만 한다. 만약 수행승이 이런 것들에 맛들여 들뜬 자만에 젖게 되면 난파된 배처럼 기우뚱거리다가 가라앉고 말 것이다.
『밀린다왕문경』은 또 다른 비유로 역시 배를 들고 있다. 닻은 아주 깊은 물에서도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단단하게 고정시켜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승도 자신의 미덕에 힘입어 들어오는 이익과 명성에 표류하지 않도록 강인한 기개로써 자신의 목표에 닻을 내리고 버텨내야 한다.
덕 있는 수행자를 존경하고 존중하며 그들에게 필수품을 제공하는 것은 재가신자들의 의무이다. 이에 대해 우쭐거리지 않고 건전하게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수행자 쪽의 책임이다. 불교에서는 정신적 발전이 아직 얕은 사람이 이익과 명예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장로게』1053게).
명리의 영광을 누리고 탐닉하게 되면 정신의 부패라는 큰 위험이 따른다. 들뜬 자만심이 자라나서 부지불식간에 우쭐대는 버릇이 몸에 붙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은 남들에 대해서도, 만약 그 사람의 명예가 신통치 않을 때는 경멸하는 습성을 기르게 된다.
「명리상응(名利相應)」(『상응부』Ⅱ권 17장)』에서는 이런 사람을 똥 묻은 말똥풍뎅이가 다른 말똥풍뎅이를 보고 똥이 덜 묻었다고 경멸한다는 비유로써 풍자하고 있다.
「무예경(無穢經)」(『중부』Ⅰ권 29-30쪽)에 보면 대중에게서 인기와 보시를 얻으려고 계행을 잘 지키고 힘든 고행도 마다하지 않는 한 승려에 대해 역겨운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수행자는 잘 닦아 윤이 나는 새 금속 발우에 뱀이나 개의 시체를 담아두는 사람으로 비유된다. 청정한 삶이라는 발우에 어찌 그러한 부정한 뜻을 담을 수 있겠는가.
승려들은 명리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가장 준엄한 가르침을 받고 있다. 「명리상응」은 이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일련의 매우 자세한 비유를 들고 있다. (『상응부』II권 226-227쪽) 나이든 거북의 충고를 무시한 젊은 거북이는 작살에 명중 당한다. 이 작살에는 줄이 달려있으니 거북이가 포수 손에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여기서 포수는 다름 아닌 마라[魔王]이다. 작살은 이득, 명예, 명성이다. 작살에 달린 줄은 명리에 대한 승려의 집착이다.
또 다른 경에 명리를 미끼로 비유하여, 게걸스런 승려가 이를 꿀꺽 삼키고는 포획자 마라의 손에서 철저하게 파멸당하는 것이 그려져 있다.
둘째- 거부하는 태도
자, 이제 명리를 거부하는 수행승의 태도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마하가섭은 명리를 피했던 대표적인 수행자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만 탁발을 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공덕을 쌓게끔 도와주는 일에서 기쁨을 누렸다. 한번은 천신들이 그에게 좋은 음식을 올리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이를 마다하고 굳이 가난에 찌든 직공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탁발을 하고 있는 것을 부처님께서 보셨다. 그때 부처님은 마하가섭의 속 깊은 검소한 생활을 칭찬하는 말씀을 하셨다(『우다나』11쪽).
한때, 찟따라고 하는 유명한 재가신자는, 큰 법회에서 이시닷따라는 스님이 난해한 교리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찟따 장자는 이시닷따 스님에게 자기가 사는 지역에 머물도록 청하면서 모든 필요한 것을 제공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이시닷따 스님은 기회를 엿보아 찟따 장자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상응부』Ⅳ권 286∼288쪽)
명리의 해로운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취하는 용의주도하면서도 과묵한 처신이 실로 이와 같았다.
셋째-초연한 태도
일반적으로 부처님과 아라한은 이익과 명성을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이익과 명성을 마치 손실과 비난을 대하는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마음으로 대한다. 「마하-고빈다경」(『장부』Ⅱ권 223쪽)에서는 신들이 명리를 대하는 부처님의 태도 때문에 환희에 찬다는 내용이 있다. 부처님은 제왕들이 받고 싶어 할 정도의 이익과 명성을 누렸지만 의기양양하기는커녕 그런 흔적조차 없으며, 오직 기본적인 것만을 지니고 살아가셨다. 신들은 그렇게 그릇이 큰 스승은 일찍이 없었다고 선언하였다.
연꽃은 흙탕물 속에서 피어나지만, 흙탕에 더럽혀지지 않은 채로 물위로 피어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과 아라한은 가문의 명성, 이익, 명예 그리고 존경 등과 같은 세속적 조건에 의해 때가 묻지 않고 그 위로 피어난다.(『밀린다왕문경』375쪽)
“이 비할 데가 없는 분들은 신들과 인간에 의해 존경받는다. 하지만 그분들은 명예에 흥미가 없다. 이것이 제불(諸佛)의 법이다.(『밀린다왕문경』95쪽)”
세상 사람들은 이익과 손실 때문에 우쭐대다가 낙담했다가 하는 데 반해 진정한 수행승은 어떤 경우에도 평온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고 여신도 쭐라수밧다는 말하고 있다.
이익과 명성에 짓눌린 사람들과, 이익과 명성이 없어서 마음이 찌들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육신이 해체될 때 비참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친히 알고, 보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여시어경』74쪽).
인정(認定)과 명성을 바라는 욕망은 매우 교묘한 것이며 평상시에는 아주 꼿꼿하던 사람도 그 앞에서는 굴복하고 마는 수도 있다. 은이나 금, 아름다운 왕비, 부모 자식,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도 거짓말을 않던 사람들이 명예를 얻고 위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창피를 무릅쓰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을 부처님은 타심통으로 보셨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명리의 덫은 악독하기가 치명적이다.
(『상응부』Ⅱ권 234, 243쪽) 최고의 수행경지인 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상응부』Ⅱ권 239쪽)을 이룬 아라한들을 제외하고는, 그 아래의 어떤 단계에 이른 성자들도 이 면에서만은 안심할 수 없다고 한다.
이득과 명예가 바로 마라의 군대의 강력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숫따니빠따』438, 439게) 이것은 축복으로 가장해서 다가오는 재앙임을 정신적 발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알아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