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하며 복음을 전하여 이방 지역에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세우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영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장로들은 바울을 반가이 맞이했고, 바울의 사역 보고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17절~20절),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들이 수만 명이 있었는데, 모두들 율법에 열성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20절). 이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할례도 받지 않고 율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반감(反感)을 가지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이방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면서 할례도 행할 필요가 없고, 율법이나 관습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는 오해 속에 바울을 응징하려고 했습니다(21절). 21절에 나오는 관습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테신”(ἔθεσιν)인데, 전통적인 관습을 일컫는 “에토스”(ἔθος)의 복수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하거나, 율법이나 관습을 지키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믿더라도 굳이 할례를 행하거나 불필요한 관습들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디모데 등에게도 할례를 받게 하고, 자신도 나실인의 서약을 마무리하게 되었을 때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는 등 유대인의 관습을 지켜왔습니다.
아마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바울을 적대하기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잘못되거나 과장된 정보를 전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27절에 보면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마도 주로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이나 가르쳤기에 바울에 대한 적대감이 컸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장로인 야고보(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성도 중에 서원한 사람 네 명이 결례를 행할 때 그들을 데리고 결례를 행하고 그 결례를 위한 비용을 내라고 권면합니다(22절~24절). 결례(潔禮, ἁγνίζω, Purification)는 정결하게 하는 의식(儀式), 즉 정결례(淨潔禮)를 의미하는데, 아마도 이 네 사람은 나실인의 서약을 했었던 것으로 보이고, 나실인의 서약을 마무리하면서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리고 머리를 깎는 결례를 행하려는 자들로 보입니다, 이들의 결례를 돕고, 그 비용을 대면 바울이 율법이나 관습을 무시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을 향한 반감이나 오해를 불식(拂拭)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기꺼이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이레 동안 결례를 함께 행하여 마무리까지 하게 됩니다(26절).
그런데 결례를 마치고 성전에서 나온 바울이 성전에 있는 것을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보고 주변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이 헬라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다고 외칩니다(27절, 28절). 아마 바울은 성전에서 결례를 마치고 이방인의 뜰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뜰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전 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여인의 뜰인데, 그 여인의 뜰 밖에 위치한 곳이 이방인의 뜰이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보면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Τρόφιμος, Trophimus)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즉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있던 곳은 성전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뜰도 종종 성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기에 27절에는 성전에서 바울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규정하였고, 혹시 이방인이 성전 안에 들어가면 성전을 더럽힌 것으로 보아 처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와 함게 있는 것을 보고 충동질하여 바울을 끌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30절).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폭행을 가했습니다(31절).
그런데 이렇게 소란스러운 소동의 소식을 들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갑니다. 천부장이 있던 곳은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였을 것입니다. 이곳은 빌라도의 관저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안토니아 요새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도 목격할 수 있었기에 이렇게 신속하게 천부장이 출동한 것입니다.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나갔다고 했으니 최소한 두 명 이상의 백부장이 출동되었다면, 출동된 병사는 적어도 200명이 넘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과 천부장까지 출동했으니 바울을 치던 유대인들은 깜짝 놀라 하던 행동을 멈추었습니다(32절). 그리고 천부장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물었고,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말로 바울의 죄를 외쳤지만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외치는 소리에 제대로 진상을 파악할 수 없었던 천부장은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하여 안토니아 요새로 끌고 가게 됩니다(33절, 34절). 바울을 향한 유대인들의 계속된 폭행으로 인해 안토니아 요새로 올라가는 층계에 다다랐을 때 바울은 병사들에게 들려 올라갈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도 그러했듯이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계속 소리 지르며 따라왔습니다(36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 맞게,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에게 맞게 대처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0, 21을 보면 바울은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즉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거나 할례를 행하지 말라거나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을 적대시하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지도 않았던 말이나 가르침을 거짓으로 말하며 바울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로 인해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로 향하게 되었고,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핍박과 환난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담대히 예루살렘을 갔고,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을 했지만, 결국 죄인처럼 결박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저항하고, 질시하며, 어떻게 해서든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고통과 방해를 감수하더라도 복음을 전할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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