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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역법'과 '귀납법'
'연역법'(펼 연, 풀 역)이란 대전제로부터 소전제를 매개로 하여 대전제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이끌어 내는 방법입니다.
'연역법'에 의해서 얻어진 결론은 대전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
모든 사람은 죽는다.-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결론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결론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대전제에서 끌어낸 결론이므로 대전제의 일부일 뿐이지, 새로운 지식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연역법'은 '대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대전제가 그릇'되었을 경우 여기에서 얻어지는 '결론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
모든 꽃은 열매를 맺는다.-대전제
봉숭아는 꽃이다.-소전제
그러므로 봉숭아도 열매를 맺는다.-결론
이 예 역시 '연역법'에 의한 추리입니다.
그러나 이 연역에서 대전제의 내용이 그릇된 것이므로, 여기에서 얻어진 결론도 옳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역법'의 경우 대전제가 진리일 경우에는 결론도 항상 진리이지만, 대전제가 그릇된 경우에는 결론도 항상 그릇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귀납법' (돌아갈 귀, 들일 납)은 많은 사실들을 관찰하여 보편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방법입니다.
예)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공자도 죽었다. 석가도 죽었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이처럼 부분적인 관찰 사실로부터 얻은 결론을 일반적인 진리로 여기는 것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례를 완전히 조사, 관찰한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례를 확인하여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결론을 얻어냈으나, 나중에 오스트레일리아에 '검은 백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결론의 잘못을 인정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귀납법'은 진리일 가능성이 높을 뿐이지 확실한 진리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필연적인 지식이 아니라고 해서 '귀납법'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얻어진 과학적 지식들은 이 '귀납법'에 의해 얻어진 지식으로서, 그것은 거의가 진리일 가능성이 높은 경험적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연역법이 두괄식이고, 귀납법이 미괄식이지요.
연역법은 하고 싶은 말(요지)을 먼저 하고, 사례나 근거를 나중에 제시하는 겁니다.
귀납법은 그 반대가 되겠지요.
연역법은 보통 이론 중심적이죠. 가설을 먼저 세우고 그걸 순전히 말의 논리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고,
귀납법은 경험적입니다. 구체적 자료와 경험적 통계를 바탕으로 현실에 근거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아요.
변증법이란, (변증법이란 하나의 사실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여 가장 완벽한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물론 완벽은 없겠지만 가장 가깝게 다가가자는 것이지요.)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대화술 ·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홀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 ·반(反) ·합(合)(정립 ·반정립 ·종합, 또는 卽自 ·對自 ·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마르크스, F.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예)
사형은 큰 범죄를 막을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사형은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수단이된다.
따라서 사형제도를 우린 좀더 신중히생각해야 된다.
인식론 : 철학의 일부문이며 인식·지식의 기원·구조·범위·방법 등을 탐구하는 학문. 물론 인식의 철학적 고찰은 고대나 중세에서도 신의 인식으로서 행하여지기는 했으나 인간 주체의 인식 문제로서 철학의 중심부문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근세에 이르러서이다.
반증주의 : 어떤 문제나 이론을 정의하거나 증명할 때 그 반대의 현상이나 이론을 통하려는 경향.
귀납법 : 개개의 사례를 관찰함으로써 이러한 사례들이 포함되는 일반 명제를 확립시키기 위한 추리 방법. 귀납은 완전귀납과 불완전귀납으로 나누어진다. 완전귀납은 기지(旣知)의 사실을 전부 열거하는 데 그치기 때문에 일종의 연역적 논증이라 할 수 있다. 불완전귀납은 사례의 전부를 열거할 수 없으므로 결론을 위해서는, 어느 경우에는 비약이 따르기 때문에 이에 맞는 새로운 법칙이 나오게 된다. 영국의 J.S.밀은 후자를 참다운 귀납이라고 하였다.
귀납적 비약은 자연운행의 공간적 ·시간적인 제일성(齊一性)을 전제로 한다. 이를테면, ‘모든 A는 B이다’라는 결론이 수적(數的)으로나 시공적(時空的)으로 한정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적용될 경우, 이 일반명제를 자연법칙으로 삼는다.
귀납법은 소크라테스의 개념 구성방법에서 비롯되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이어 F.베이컨이 근대적인 발전의 길을 열었으며, 밀에 와서 그 발전을 보았다. 실험적 탐구에 관한 밀의 일치법(一致法) ·차이법(差異法) ·일치 차이 병용법 ·잉여법(剩餘法) ·공변법(共變法)의 공리(公理)는 특히 유명하다. 또한 수학적 귀납법은 명제(命題) P(n)이 모든 자연수 n 에 대하여 성립하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연역법 : 몇 개의 명제가 옳다는 가정 아래 다른 명제도 옳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방법.
'사람은 죽는다’ ‘A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A는 죽는다’ 이런 식으로 일반법칙을 전제로 해서 개별적인 명제를 성립시키는 논증을 귀납(歸納)과 대비하여 연역이라 할 때가 많이 있지만 협의로는 1개 또는 2개의 명제를 전제로 한 다음 다른 명제를 성립시키는 논리적인 방법을 말한다.
본질 : 사물이 일정한 사물이기 위해서 다른 사물과는 달리 그 사물을 성립시키고 그 사물에만 내재하는 고유한 존재. 본질이 사물의 본원적 구성요소라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본질은 사물의 ‘본성(本性:自然性, 그리스어의 physis, 라틴어의 natura)’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원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써 제기되는 것을 사물의 ‘본질(ti estin)’이라 하고 또 이것이 그 사물의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로 이것을 사물의 ‘실체(實體)’라고 불렀다.
실존 : 철학, 특히 실존주의철학 용어. 가능적 존재로서의 본질(essence)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현대 실존주의에서는 특히 인간의 주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실존이라는 말은 근대철학에서 매우 다양하게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원래 중세철학에서 실존(existential)이란 ‘(로부터)나가다’, 또는 ‘나와서 현재 있다’를 의미하였고, 이에 대응하는 본질(essential)은 영원불변의 것을 가리켰다. 근대철학은 이 영원불변한 본질을 구하였고 G.W.F.헤겔은 그 완성자였다.
한편 인간 개인의 존재(실존)는 소멸되고 말았다. 헤겔의 이성(理性) ·이념 ·절대정신이라고 하는 완성된 인간존재에 대하여 파멸과 죄를 안고 있는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인간실존을 강조한 것은 S.A.키르케고르이다. 따라서 실존의 밀바닥에 무(無)를 인정한 것은 F.W.니체이며, 20세기에 들어서 K.야스퍼스, M.하이데거, J.P.사르트르 등이 실존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존재 : 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원래는 일반적인 유(類)로서의 ‘존재자’를 뜻한다. 존재자는 실재자(實在者)뿐 아니라 비실재자도 포함한다. 비실재자, 예를 들면 천마(天馬)도 그것이 ‘천마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고(思考)되는 한에서는 ‘일종의 존재하는 것(가상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비존재자)’도 어떤 뜻에서는 존재자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 상태에서 사고되며,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자는 일체의 것을 총괄하는 유(類)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체의 것에 관한 하나의 지혜로서의 철학을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원리 ·원인의 지식’이라고 규정하였다. ⑵ 보다 엄밀한 뜻으로는 존재는 존재자에서의 ‘존재의 작용’.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무엇’이며 ‘그 무엇’인 한에서 우리들에게 알려진다. 존재자에서의 이 ‘그 무엇’은 각 존재자에게 고유한 것이며 존재자가 속하는 유(類)와 종(種)에 따라 특수화된다. 이 ‘그 무엇’의 특수성에 의하여 존재자는 그것과는 상이한 다른 존재자와 구별된다(인간에서는 인간, 쇠에서는 쇠가 그 무엇이 된다). ‘무엇’은 그것의 ‘무엇인가’를 한정하는 것, 그것의 ‘존재본질(存在本質)’이다.
이에 반해서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있다’라는 술어는 모든 존재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공통적인 것이다. 모든 존재본질이 어느 일정한 유안에 한정되는 데에 대하여 ‘있다’는 술어는 유의 한정을 초월한다. 따라서 이것은 엄밀한 뜻에서의 유가 아니라 유를 초월하는 것, 즉 ‘초월자’이다. 모든 존재자에 공통된 ‘있다’는 말이 뜻하는 ‘존재의 작용’이 ‘존재’이다. 모든 존재자는 특수한 존재본질과 공통된 존재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존재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각 존재자에 대해서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우선 특수한 존재본질에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에서 우리들의 지식은 특수화되고 특수과학의 지식이 생기게 된다. 존재자가 존재자인 한에서 갖는 공통된 ‘존재’는 은폐되고 ‘존재’에의 물음은 잊혀 진다. 특수한 존재자에의 물음에서 잊혀 진 이 존재의 공통된 뿌리로서의 존재, 그 자체에의 물음으로서 철학의 물음이 생긴다.
귀납법은 여러 개의 사실로부터 하나의 법칙을 만들어 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볼께요.
한국의 백조는 흰색이다.
중국의 백조도 흰색이다.
영국의 백조도 흰색이다.
음.... 미국의 백조도 흰색이다.
문> 연역법과 귀납법 중 하나의 법칙을 정해서 다음 주제에 대해 논술하라.
주제 : 인간은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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