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기야 세상이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기저기 비행기 사고가 잇고 있습니다. 하늘을 맘대로 날 수 있다는 사실에 환희로 덮였던 때가 한 세기 정도 지났는가요? 그런데 하늘에서 사고를 당하면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편하고 빨라서 좋기는 한데 그만한 위험을 안고 있다는 사실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지구 밖으로까지 나가고 있는데 아무튼 이 땅에서 발을 떼는 순간은 위험이 시작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적이고 다시 아침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언제 떠날지 알 수 없고 정해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냥 살다 가는 거죠. ㅎㅎ
글을 보았습니다.
‘나이엔 졸업이 없고
즐거움엔 정년이 없으며
행복엔 노쇠가 없고
건강엔 브레이크가 없다.‘
없어서 좋기는 한데, 사실 몰라서 좋은 것이지요. 이거 다 알고 산다면 살맛을 잃기 쉽습니다. 모르기에 희망도 생깁니다. 그냥 기다려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가 나의 때보다 좀 더 빨리 오기를 기대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보다 나은 내일.
어느덧 새 달입니다. 연중 가장 짧은 달, 그러니 또 빨리 가겠지요. 다시 좀 추워진다는데 건강하게 신나게 새 달을 달려가기 바랍니다. ^)^
2025년 2월 1일 김종우 목사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로마서 12 : 15 - 16)
<리얼 페인>
여행의 목적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줄 압니다. 먹거리 여행도 있고 역사탐방도 있고 단순히 관광지 여행도 있습니다. 오래 전 베트남 패키지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몇 번 해외여행을 한 중에 유독 베트남 여행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것은 유별난 관광지 여행도 좋았지만 현지 안내자를 잘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관광지보다 오히려 안내자의 방문지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의 선입관도 바꿀 수 있었고 모르고 있던 사실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배웠던 것입니다. 낯선 곳을 무작정 여행한다는 것이 더구나 해외일 경우 안전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그럴 때 몇 사람이 모여 패키지 여행을 하면 한결 부담이 덜어집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여행 안내자가 따릅니다. 그리고 그의 사전설명이 여행에 매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건성으로 풍경에 탄성만 지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유익한 정보를 얻게 되며 보는 대상에 대한 지식도 얻게 됩니다. 단순 구경이 아니라 교양도 쌓게 됩니다. 관광도 하고 지식도 얻습니다. 일석이조지요. 그 때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여행 안내자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참으로 비용이 아깝지 않도록 매우 유익한 여행이었음을 기억합니다. 물론 안내해주는 사람도 각양각색인 줄 압니다. 그만한 현지 지식을 갖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단순히 길 안내 정도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안내자는 풍경에 역사를 담아줍니다.
폴란드, 잘 아는 대로 2차세계대전 때 초기부터 고난을 당했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습니다. 소위 홀로코스트의 현장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처형을 당했던 곳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고 그곳까지 끌려들 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을 마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얼마나 기막혔을까요? 그 탄식과 고통의 소리들이 벽마다 새겨져 있을 듯합니다. 더구나 쌓여있는 신발들이 여전히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야 깨끗이 정돈해두었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어수선했을까 싶습니다. 그곳을 관광한다고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죄스럽습니다.
그래서 ‘벤지’는 생각합니다. 그 때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미안해 합니다. 너무 불공평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어쩌면 감성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일행들의 마음을 불편하게도 합니다. 안내자의 역할이 대단합니다. 불편한 분위기를 빨리 정리해줍니다. 벤지의 마음도 읽어주면서 일행들의 마음도 품어줍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경우 감정도 여러 가지로 생깁니다. 그것을 일일이 상대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안내자는 일단 그 모임을 이끌어가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며칠의 동행하는 여행이지만 모두가 시간과 돈을 투자한 일입니다. 불쾌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분 좋은 여행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데이비드’와 벤지는 동갑내기 사촌지간입니다. 어려서부터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니 자랄 때와 달라집니다. 각자의 삶과 인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족이 달리게 되면 또 달라지지요. 직업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그래서 만나는 시간도 드물어집니다. 만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일도 있고 가족도 있고 그래서 자연히 좀 멀어지기도 합니다. 마음은 있다 해도 마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남겨놓은 고향방문 경비로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의 유언이기도 하니 지켜야지요. 어렵게 두 사촌이 시간을 만들어 함께 할머니 사시던 곳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아마도 경비절감을 위해서 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패키지 여행으로 몇 사람의 일행이 있습니다. 흔히 하듯 폴란드 공항에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노부부와 중년의 이혼녀, 휴식기간의 여행자 그리고 안내자가 있습니다. 물론 데이비드와 벤지는 중간에 할머니 댁으로 가야 하니 일행에서 빠지기로 하였습니다. 사전 모임이 있던 것도 아니고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한데 어울리게 된 것입니다. 모여서 잠간의 소개도 있었지만 아직 모두가 서먹합니다. 그 일행의 목적은 하나, 여행입니다. 소형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가까이 앉아 이야기도 나눕니다. 말이나 행동들이 때로는 서로 거슬릴 수도 있습니다. 안내자는 그런 것도 조절해야 합니다.
데이비드와 벤지, 친구처럼 자란 사촌지간입니다. 어른이 되어 뜸하기는 했어도 그 친분은 여전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아주 딴판입니다. 벤지는 소위 다혈질 기질인 모양입니다. 중구난방에 말도 나오는 대로 쏟아붓습니다. 꺼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반면 데이비드는 비교적 소심하고 다른 사람을 챙겨주며 조용한 편입니다. 데이비드는 결혼하여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벤지는 뚜렷하게 직업도 없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둘이 만나기 반년 전에 벤지가 자살까지 기도했었다니 의아합니다. 왜? 겉은 활달한 듯하지만 숨겨진 아픔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람의 속은 모르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그 상처를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두 사람의 짧은 여행기입니다. 영화 ‘리얼 페인’(A REAL PAIN)을 보았습니다.
쪽팔립니까?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두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날개 하나가 상처가 생겨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면 날기 힘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 두 날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 두 날개가 제대로 움직여야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느 한 쪽의 날개가 잘못되어도 날기는 힘듭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두 날개가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 어느 한쪽만 강조한다는 것은 한 쪽 날개로 날아라, 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날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장로교는 유난히 말씀을 강조하고 그런가 하면 어느 교회는 유난히 기도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치우치면 날기 힘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쪽 날개는 1m나 되고 다른 한쪽 날개는 50cm밖에 안된다면 제대로 날 수 있을까요? 보기만 해도 기이합니다. 자동차 한쪽은 트랙터의 바퀴를 달고 다른 한쪽은 용달차 뒷바퀴를 달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제대로 가겠습니까?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오니 뭐가 보였습니까? 마 21 : 12절 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성전 안에서 누구를 보셨습니까?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 곧 환전상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열 받으셨습니다. 성전은 누구 집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이 있는 목적이 무엇이지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장소입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성전(聖殿, 거룩한 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당신의 아버지 집이 지금 무엇이 되어 있는 겁니까? 장사하는 곳이 되어있더란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사장들이나 장로들, 성전을 돌보는 사람들은 어찌 그런 꼴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둘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기는 합니다. 이제 역사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무엇이 필요하지요? 그야 당연히 제물이 필요합니다. 소나 양 같은 짐승이 필요합니다. 누가 가져옵니까? 제사 드리려 하는 사람이 가져와야지요. 문제는 가까이 있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자기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 짐승 하나 끌고 오는 것도 큰일입니다. 우리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남자는 1년에 무조건 몇 번을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까? 보겠습니다. 신 16 : 16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이 3대 절기에는 무조건 성전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공수로 오지 말래요. 그러니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가까이 사는 사람이야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은 이것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제 이런 경우 하나님이 살펴주신 일이 무엇인가 보겠습니다. 신 14 : 24 - 25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이해가 됩니까? 돈으로 가지고 가서 성전 근처에서 사가지고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을 배려하여 생각해주신 방법입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사람들 속에서 발생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사려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따라서 무엇이 생깁니까? 그것을 파는 장사군들이 나오지요. 너도나도 장사하려고 할 것입니다. 인생들이 얼마나 간악한지 짐작합니까? 하나님 백성이라고 다릅니까? 너도나도 장사하려니 경쟁이 됩니다.
자 여기 장사할 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갈 물건입니다. 그러면 또 누구를 끼고 장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성전 책임자지요. 하나님이 제물을 아무거나 받으십니까? 제물의 첫째 조건이 무엇입니까? 레 1 :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첫째 조건이 무엇이라고요? ‘흠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판별해줍니까?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잘 보여야 제물이 통과됩니까? 당연히 제사장이지요. 제사장이 이 제물은 안 돼! 하면 다른 것으로 바꾸어 와야 합니다. 그렇게 딱지 맞으면 다시 사와야 합니다. 번거롭기도 하고 돈이 더 들어갑니다. 그러니 제사장이 인정해주는 장사꾼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공짜로 인정해줍니까? 아니지요. 당연히 뇌물이 들어갑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본래 성전 밖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리싸움까지 생깁니다. 조금씩, 조금씩 좋은 자리로, 가까운 자리로 옮겨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어디까지 들어옵니까? 성전 안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자릿값이 꽤나 비싸졌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알아서 짐승을 가져오면 제사장이 받아줍니까, 안 받아줍니까? 안 받아주겠지요. 그런데 제사장이 지정한 업주에게서 사온 짐승은 받아줍니까, 안 받아줍니까? 받아줍니다. 그 대신 제사장은 무엇을 받는다고요? 업주에게서 상납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뭐 합니까? 이해가 되지요?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성전에 또 웬 환전상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돈이라면 성전에서만 사용되는 돈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용하는 단위와 성전에서 사용하는 단위가 다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성전에 헌금하려면 환전을 해야 하는 겁니다. 당연히 또 환전세를 받아야 하겠지요. 그 장사도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또 뇌물이 오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팔아서 장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질타하신 겁니다. 마 21 :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도적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때로는 성도의 가정이나 일터에 심방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심방 요청을 받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그 동안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감사의 헌물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혀 성도의 믿음의 반응이지 어디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심방을 가는 목자는 전혀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혹 주면 감사한 일이고 안 준다고 해서 성도의 가정에 축복기도를 해주지 않는다든지 인상을 쓴다든지 하는 일은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언젠가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를 옮기려는 어떤 성도의 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조그만 가게를 열어서 담당 교구 목사님 모시고 개업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망설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렵게 사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축복이라도 받고 싶어서 교구 목사님 모시고 기도 받고 싶은데 그 교회는 정해진 것이 있답니다. 개인가정 심방에는 얼마, 개업심방에는 얼마 등등 이것이 정해져 있답니다. 그게 부담이 되어 심방을 받기 힘들어 고민하고 있다는 겁니다. 와 - 그런 교회도 있습니까? 그게 교회서 정할 일입니까?
감사의 표현 그것은 전적으로 성도의 믿음의 표현이지 누가 사전에 정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목자에 대한 사례에 대해서도 물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6 :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는 자는 성도요, 가르치는 자는 목자입니다.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도 비슷한 내용을 전한 것이 있습니다. 고전 9 :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그러나 사도 바울은 행여 믿음이 연약한 성도의 마음을 다칠까 이것을 가능하면 피하였습니다. 12절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누구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수고한 바울입니다. 누구보다도 대접을 받아야 마땅했던 사도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아직 믿음이 약한 성도가 상처 입을까 염려하여 결코 성도들에게서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물론 은밀하게 후원해주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러니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지요. 빌 4 :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그런데 이것을 바울이 정하여 요구하였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그곳 성도들의 믿음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것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당신도 백성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성막을 지을 때에도 그러셨습니다. 출 25 : 1 -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았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강도의 굴혈’ 즉 도적의 소굴이라고 표현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집, 성도가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거룩한 처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지도자들의 장터가 된 것입니다.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은 자칫 목회자 개인의 명예의 전당이고 권위의 상징이요, 성공목회의 표상이 될 수 있습니다. 노회나 총회 가보면 금방 티 납니다. 누가 목소리 높고 누가 권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교회의 크기, 성도의 수가 바로 목회자의 권력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어떤 남다른 고난의 길을 이겨냈기에 그만큼 성장하고 부흥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고 권력이 된다면 세상에서의 성공이지 하나님께 영광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목회자 당사자보다 그 주위의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팥고물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교회도 세상 안에 있습니다.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단의 표적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성전 안에 들어오셔서도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들어온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런 광경을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마 21 :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분하여” 왜 분할까요? 꼴같잖은 젊은 녀석이 옳은 말하는 것이 듣기 싫고, 더구나 아이들의 찬송을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겁니다. 누가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엉뚱하게 같잖은 녀석이 들어와서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 영 자존심 상한다, 그겁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16절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어린아이들까지 호산나를 외치며 돌아다니니 신경질이 나는 것입니다. 짜증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입니다. 시 8 :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당시 영적 지도자들이라 하는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인 장로들이 특히 예수를 싫어하고 미워하였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자신들보다 더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뭐라 하면 말씀으로 콕콕 찌르는 데 할 말이 없지요. 방금도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을 너희들이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잘했냐? 이놈들아! 할 말 있습니까? 아무도 제사장을 대적하여 그런 옳은 말을 해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게 더 신경질 난다 이거지요. 그렇다고 예수님을 대적할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속만 탑니다. 도무지 참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네 불의를 감추기 위해서는 의를 없애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 용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현상이 세상에서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의가 의를 쫓아내고 득세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이름을 대며 은혜로 하자고 합니다. 아닙니다.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겁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달리 해석하셨습니다. 시 8 : 2 다시 봅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21 :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차이를 볼 수 있습니까?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을 세우는 것인데 그것은 곧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온전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서는 것은 바로 원수 마귀가 꼼짝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현재 마귀가 쥐고 있는 이 세상이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는 때가 옵니다. 계 11 :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그렇지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때가 옵니다. 우리가 바로 그 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리고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나라가 하늘에 있는 겁니까, 땅에 있는 겁니까? 우리는 여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갈 것만 기대하고 신앙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무엇을 기대하며 신앙해야 하겠습니까?
참 이상합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로 권능을 세우신다고 했습니다. 원수와 보수자들이 잠잠해지지요. 꼼짝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로 인하여 세상을 쥐고 있는 마귀가 꼼짝 못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사용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오히려 연약한 자, 없는 자들을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고전 1 : 27 - 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만약 자기가 실력이 좋다면 자기 능력으로 한 줄 알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세상에서 연약한 자를 불러 쓰십니다. 교만 떨지 못하도록 말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금방 이해합니다. 당시 쟁쟁한 사람들을 불러서 제자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하다고 실망할 것도 없고 능력이 없다고 낙심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래서 감사하지요.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내 잘난 멋에 살고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자라서 부르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 많은 고난을 이겨내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이라고 합니다. 고후 11 :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약하기에 하나님을 더 알기를 힘쓰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고 싶어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시고 그것을 어떻게 행하시는지 알아야 내가 믿고 따라갈 것입니다. 하나님 또한 우리가 당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자식 된 우리가 원만하게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진 당신의 종을 택하여 그와 함께 하셔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마다 선지자를 택하여 일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셨고 다른 한편 하실 일을 약속 곧 예언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주신 말씀대로 일했고 그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니 백성이 본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 별볼일없는 가난한 집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가 메시야로 나타나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 내노라하는 제사장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듣겠습니까? 속된 말로 쪽팔리죠? 동방박사들도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어디로 찾아갔습니까? 왕이 사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만나러 가시겠습니까?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십니다. 육으로 오십니까. 영으로 오십니까? 영으로 오십니다. 그러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어떻게 만나시렵니까? 도무지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다시 오시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도 없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안 오셨는데 설마 내 시대에 오시려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기대하지 않고 산다는 뜻입니다. 과연 믿고 사는 것인지, 믿음이 있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영이시니 이 땅에 함께 하실 목자를 세워 그와 함께 하셔서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루실 마지막 역사 계시록을 이루시고 증거하실 것입니다. 그 목자는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나와야 합니까? 최소한 박사학위는 한두 개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유명한 교회를 목회하고 있어야 합니까?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누구에게 임하셔서 일하실까요? 초림 때처럼 아마도 특히 목자들을 쪽팔리게 하지 않으실까 모르겠습니다.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