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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ongdory 원문보기 글쓴이: 아름다운 세상
어제와는 달리 4일 째인 오늘은 약간의 햇살이 보이고 있었다.
사흘 동안 태양을 보기 힘들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듯 거의 매일 흐리거나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태양이 구름사이로 떠오르고 있었으니 마음이 맑아지고 기쁠 수밖에 없었다.
호텔 방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 밖을 내려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어 조깅을 하는 사람, 체조를 하는 사람, 태극권무술을 하는 사람 등 체력 단련에 열성이고 있었다.
나도 밖으로 나가 조깅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순간 들었으나 장시간 승차하여 움직여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관령 만록성호텔에서 4박을 하고 아침 일찍 용궁으로 이동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아이패드에 기록하여 두었던 자료들이 순간 착오로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아찔하고 앞이 캄캄하였으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시행착오로 인한 퇴보보다는 발전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볼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책보다는 희망에 무게중심을 두기로 하였다.
아침 9시에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용궁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더없이 상쾌한 아침의 살가운 햇살은 피부를 간지럽게 하였을 뿐 아니라 기분을 상쾌하게도 하였다.
관령에서 용궁까지는 약 한 시간 거리여서 오늘은 대체로 여유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5시간 30분 거리의 중경까지를 또 가야한다는 말을 듣고 맥이 빠지는 기분을 추스르기가 육신은 괴로워하는 듯 거부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용궁은 귀양 시와는 127km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황과수폭포와는 45km 떨어진 5km 길이의 종유석 수동이었다.
동굴 속을 꿰질러 흐르는 “왕이하”라는 강물은 그 깊이가 22~23m였다.
물이 깊기 때문에 수면이 잔잔하여 은반 위를 걸어가는 듯 침묵 행진을 하는 것도 같았고 관광객이 사방에서 터뜨리는 사진기의 발광 빛은 길을 안내하는 횃불과도 같았다.
주위에 10인승 보트가 많았으나 우리 일행은 거의 모두 승선하고 마지막 남은 4명이서 10인승 보트를 타고 사진을 찍으며 서서히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비록 수동이기는 하였으나 동굴 깊숙이 들어가면서 조명으로 장식된 “천하기관”의 절경을 구경하는 기분은 그만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으며 그 비경에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용궁을 구경하면서 그 느낌이나 아름다움을 중국인들은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삼미, 삼절, 삼최였다.
물속에서 꽃 같은 물고기가 떼를 지어 놀고 있는 모습을 일미라 하였으며, 동굴의 광활한 물결의 울림을 이 미라 하였고, 동굴 속에 있는 동안 느끼는 감각의 쾌감을 삼미라 하였다.
또한 삼절이 있었는데 물의 흐름이 기이하고 신기함을 일절이라 하였으며, 짧은 강으로서 폭포수의 양이 많음을 이절이라 하였고, 동굴 중에서 물을 담고 있는 물의 수량을 삼절이라 하였다.
삼최는 물이 흐르는 길이가 가장 길다는 것이 일 최였고, 동굴 내 폭포가 가장 크다는 것이 이 최였으며 자연 복사열(지상에서 동굴로 전달되는 빛의 양)이 가장 최저라고 하여 삼최라고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위도이다.
과연 비경이면서 절경이라고 감탄하면서도 옥에 티라고 굳이 표현 한다면 수동이라는 것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동굴이라고 할지라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다르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인위적으로 동굴 내부를 손질하였다면 그 아름다움은 훨씬 경감되리라 생각이 들었다.
용궁은 종유석을 모사하여 동굴을 장식하여 놓았기 때문에 자연스런 멋이 감가하리라는 것은 필연적이리라 생각이 들었으나 중국인들의 위장술이 워낙 뛰어나서 마치 종유석들이 실제인양 감탄을 자아나게 하였다.
위장된 모습을 감추고 영구히 동굴 내부를 보존하기 위하여 조명의 양을 훨씬 강하게 하여서 사진을 찍었을 때 반사되는 조명 때문에 인화가 잘 되지 않도록 한 것은 그들의 술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내가 사진을 찍은 것들 중의 대부분은 조명이 물에 반사되어 거의 원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없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인위적으로 동굴 내부의 조명을 강하게 하여 모작을 감추려하였던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용궁을 관람하고 2시간 거리인 귀양으로 이동하였다.
중경까지는 관광버스로 5시간 30분 거리였기 때문에 귀양에서 중식을 마치고 곧바로 중경으로 이동하여야만 하였다.
날씨는 중경에서 귀양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귀양에서 중경으로 갈 때도 흐리거나 가끔씩 비가 내리고 있어서 날씨만 연일 화창하고 교통이 어느 정도 원할하게 소통이 되어진다면 자연의 신기하고 기묘함과 원주민의 전통을 관람하기에는 중국 어느 관광지와도 못지않는 최적의 관광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장시간 관광버스를 이용하여야 한다는 것 때문에 피로감이 가중되었고 중경에 도착할 무렵에는 거의 몸이 녹초가 되다시피 하여서 기대를 하였던 저녁 양쯔 강(장강) 저녁 야경 유람선 관광은 의욕이 좌절되었으며 중국의 문명사와 함께한 역사를 현장을 그냥 지나쳐야 하였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관리인과 함께
중경에서의 저녁 식사는 양고기 샤브샤브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지체되어 식당에 들어섰을 때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샤브샤브 국물에 어떠한 향료를 넣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국물은 매콤하면서 톡 쏘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나라 청량 고추와 같은 매운 맛을 다른 독특한 향료가 중화시키는 듯 느껴졌으며 맵지는 않았으나 은연중에 혀에서 느껴지는 맛의 촉감은 강하면서도 은근하게 미각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맥주 한잔은 금상첨화였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떠들썩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감성온도가 상승한 탓인지 은근히 취기가 발동하여 홍안으로 변해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었다.
원래 관광 여행사와 계약하기를 가이드 및 기사 팁을 계약금에 포함하기로 하고 노 옵션을 계약서에 명기하였다.
그러나 가이드는 중경에 도착하면 양쯔 강(장강) 유람선 야경 관광과 전신 마사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우리 일행은 긴장하여 토론한 끝에 결국 선택 관광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으나 결국은 유종지미를 거두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밤의 야경을 보면서 중경의 이미지를 가슴에 새겨둘 것인가와 전신 마사지를 통하여 이번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해소할 것인가를 두고 우리 일행은 남과 북으로 이산되는 아픔을 겪어야 하였다.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가슴에 안고 있는 중경 시민들의 따뜻한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이국인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일본군의 끈질긴 추적으로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들의 불안한 심경과 다른 지역으로 자주 임시정부청사를 옮겨야 하였던 우리 독립군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가슴에 새겨두고 싶었다.
때문에 맛사지를 포기하고 양쯔 강 유람선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지만 일행은 절반씩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관광버스 기사가 절반으로 나뉜 인원을 유람선 선착장과 마사지장소로 각각 이동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여 줌으로서 나는 유람선 승강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광버스에서 하차하여 유람선 승강장까지 걸어가는 데는 상당히 먼 거리이고 인파가 많아서 스트레스가 여간 심하지 않았다.
유람선은 매 30분 간격으로 양쯔 강을 동서로 왕복하고 있었다.
중경은 양쯔 강과 가릉강이 합류되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상류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중경이 나타나고 오늘날 중경시를 있게 한 조천 문이라고 하는 거점 항구도시가 보였다.
이 조천 문이라고 하는 거점 항구도시는 1927년 개항된 이래 중경의 근현대사를 지켜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중경 양쯔 강(장강)의 밤은 사방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강 건너편으로는 쉐라톤호텔과 IFC 쌍둥이 빌딩이 우뚝 솟아있었으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강남처럼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보였다.
유람선은 장강대교 밑에서 방향을 틀어 회항하더니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말만 들어왔던 양쯔 강(장강)은 황토 빛 색깔의 강물이 넘실거리며 많은 화물선들이 왕래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상류에 댐이 만들어진 탓인지 강물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놓다시피 하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여온 빨간 황토 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는 있었으나 머지않아 강물이 고갈되어 화물선의 운항은 어려우리라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에서만 주절주절 학생들에게 주입시켰던 양쯔 강(장강)의 황토 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고 우리나라 독립군의 활동 근거지라는 것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갔었다.
그러나 양쯔 강(장강)의 야간 유람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나의 가슴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중경의 야경은 거의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연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의 슬픈 사연을 담은 배경사진을 한 장도 남길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밤이 늦어 지친 몸을 이끌고 5일 째 숙박지인 귀교호텔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우리민족의 아픈 상처를 드러 내놓기가 실었는지 아니면 아픈 상처를 의도적으로 감추려하였는지 창밖은 자욱한 안개와 함께 가랑비가 차창을 가리고 있었다.
다음 날 중국시간 09:00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로 이동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우리 민족의 흐트러진 넋을 조금이나마 위무해줄 수 있다면 나는 행운아 일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의 슬픈 역사의 배경을 정리하여 보기로 하였다.
19세기 말 대한민국의 정치는 세도정치의 등장으로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정조의 노력으로 잠시 붕당정치는 주춤하여지고 정국이 안정되어가는 듯 보였으나 노론 벽파와 시파의 과격한 정치적 견해 차이로 왕실 내부에서 어두움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에 정조의 개혁정치에 헌신적으로 공헌하였던 영의정 채제공이 죽고 정조마저 49세의 나이로 승하함에 따라 대한민국의 정치는 알 수 없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런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정치를 공황상태로 빠뜨렸으며 주인을 잃은 채 무주공산이 되어갔다.
정치적 공백을 수습할 수 없었던 조선은 외척세력들을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하였으며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서 세도정치를 낳게 하였다.
왕이 아닌 특정가문이 국가의 왕권을 가로채서 농단하는 세도정치의 등장은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정치형태를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와서 기존의 정치 양상은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도정치는 왕이 나이가 어리다는 구실을 달았지만 아주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여서 국가가 개인이나 특정가문의 사유물로 전락되어가고 말았다.
왕이 아닌 제 3자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국가 권력을 유린하였다고 생각하여볼 때 왕권이 약화되어 정치적 및 사회적 불안은 더욱 심화되어 갔을 것이고 전정, 군정, 환곡 등 3정의 문란은 농민생활의 안정을 더욱 저해해 가고 있었다.
정조 사후 순조, 헌종, 철종 때가 세도정치의 가장 극성기였다.
민란이 발생하고 서양의 선박인 이양선이 가끔 충청도 해안에 출몰하여 민심을 동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박해하여 사회적 불안을 고조시켰으며 정치적 기강이 문란하여 우리나라 정치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15살에 영조의 계비가 된 정순왕후 김 씨는 정조의 아들 순조가 열 한 살의 나이로 왕으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에 나섰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왕대비나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을 떼 외척세력이 자연스럽게 득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열 한 살의 어린 순조에게는 혜경궁홍씨 친할머니도 있었으나 혜경궁홍씨의 시어머니 격인 정순왕후 김 씨가 왕실의 가장 윗대 어르신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순조의 섭정여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순조는 1804년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하였으나 권력의 핵심은 외척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가문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세도정치가 젊은 정조의 죽음으로 잉태된 것이었다.
이러한 세도정치는 순조에 이어서 헌종, 철종 때까지 지속되었으나 안동김씨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던 이하응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치 전면에 등장할 수 있게되었던 것은 풍양 조씨 조대비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도정치를 수습하고 사회전반에 걸쳐 개혁을 시도할 것만 같았던 이하응은 양반의 권위주의를 복원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 강화시켰을 뿐 정치, 경제 및 사회 개혁을 통한 농민생활 안정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국가의 흥망과 외세 침략에 대하여는 괴리된 정책을 이행해 나갔다.
이하응이 안동 김 씨들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대왕대비 조 씨와 손을 잡는 등 정치적 기지를 약간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오로지 그의 정치적 야망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둘째 아들 이재면이 고종으로 즉위할 때까지만 하여도 안동김씨 세도가들은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이 누구인지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을 왕으로 즉위시키는데 성공한 이하응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왕족들을 핍박하였던 안동 김 씨들은 이하응의 정체를 뒤늦게 알고서야 땅을 치며 한탄하였겠지만 이미 세상은 급격히 변해가고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10년 동안 섭정을 하면서 선정과 실정을 동시에 낳게 하였으나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대원군이 내세운 강력한 정책은 그동안 권력을 농단하였던 외척세력들을 정치권에서 숙청하였으며 양반에게도 상민과 마찬가지로 군포를 징수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대전회통과 육전조례를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하기도 하였으며 서원을 혁파하여 붕당정치를 일소하였다.
또한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토지의 재분배를 시도하였으며 적재적소에 맞는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개혁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였다.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던 초기까지만 하여도 세도정치에 대한 불신감이 컸기 때문에 농민생활 안정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많았으나 대원군의 정책을 지켜본 대부분 농민들은 그의 야망이 권력의 집착에 있음을 판단하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군은 안동 김 씨나 풍양 조 씨와 같은 외척세력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아들 고종에게 만큼은 외척이 없는 혈연단신 고아를 왕비로 맞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자신의 부인 민 씨의 먼 친척뻘 되는 민 치록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였으나 이 또한 가문이 아닌 국가의 불행을 잉태하고 있었으니 조선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서양 열강의 함대인 이앙선이 가끔 충청도 해안에 출몰하여 개항을 요구하여오자 오히려 위기의식을 조장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발판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고종이 성장하여 친정하면서 대원군은 권력 권에서 밀려나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하였으나 대원군의 집권욕은 끝이 없었다.
이러한 대원군의 집권 탐욕이 결국 명성황후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관계가 악화된 직접적인 발단은 귀인 이 씨 소생의 완화군 때문이었다.
완화군은 고종과 귀인 이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완화군으로 봉해졌다.
귀인 이 씨는 고종이 즉위하여 입궁한 직후 궁녀 중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연애를 하였던 여성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뒤 입궐하면서부터 명성황후와 귀인 이 씨와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치열한 경쟁관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명성황후와 혼인하기 이전부터 궁녀출신이었던 귀인 이 씨를 총애하였다.
이후 1868년 귀인 이 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이를 사이에 두고 두 여인 간에 보이지 않는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비록 서자였지만 첫 손자였기 때문에 완화군을 총애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낳은 아들 두명이 연이어 요절한데다 두 번째 아기는 항문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나 흥선대원군이 준 인삼을 달여 먹였다가 아이가 신열을 일으키다 갑자기 사망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악더욱 화되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친정으로 권력 권 밖으로 밀려난 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을 은연중에 선동하여 잠깐 동안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도 있었으나 민 씨 정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청나라 천진으로 납치되고 말았다.
명성황후의 친 청 정책은 민 씨 세력의 횡포로 이어졌다.
이것에 불만을 가진 젊은 개화파들은 정변을 통해 민 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베트남문제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조선과의 사이가 느슨하여지는 틈을 타서 임오군란 이후 소원하였던 일본공사가 다시 조선에 접근하여 오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후원을 확인한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속전속결의 방법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1884년 갑신정변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개화파들은 재빨리 지조법을 실시하고 문벌제도 타파와 행정기구의 개편을 시도하는 등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개화파정부를 수립한지 3일 만에 좌절되고 일본 제국주의 조선 진출도 일단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청나라는 서양 열강의 침략 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끈질기게 주장하였으며 일본제국주 세력도 조선침략 야욕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도약이 뒤진 조선은 양국사이에서 언제라도 경제적 침탈과 정치적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895년 미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3국 간섭 이후 소위 '정동파'들은 왕비 민 씨의 세력을 앞세워 친러·친미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다급한 일본 제국주의는 세력만회를 위하여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하였다.
한국정부는 일본군 현역 대위 호리모토가 훈련시키던 별기군을 해산하고 미군장교가 훈련시킨 시위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친러계 인사들을 기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별기군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일본공사 미우라 등은 명성황후 시해 예정일이었던 8월 22일을 앞당겨 8월 20일 새벽에 미우라가 직접 깡패(낭인)들을 이끌고 경복궁을 난입하여 명성황후(당시에는 왕비)를 시해하고 말았다.
왕비를 무참하게 시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으며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를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하였고, 왕비 시해는 아는 바 없다"라는 것이었다.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워 8월 22일 왕비 민 씨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러시아인, 미국인 등 목격자가 상당수 있어서 사건의 은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였고 이에 미국 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와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하였다.
난처해진 일본은 사건관련자를 형식적으로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일본인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로 압송하는 한편, 미우라 대신 고무라를 주한공사로 임명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짓밟은 일제의 만행을 잊어서도 안 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일본은 우리의 약점을 노리고 있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본인들의 속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어 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을 때가 때로는 있었다.
젊은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성적 노리개처럼 농락하고 인간적 모멸감을 안긴 군위안부들에게 아직까지도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는 일본인들을 보라!
과연 그들이 인간인가를!
우리의 국력이 약해지면 언제라도 일본이 침략해 올 수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우리의 국력을 강화하여 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과거 침략의 부당성을 인정하라는 세계 각국의 여론에도 굴하지 않는 일본 정치인들의 행태를 바라볼 때 그들과의 관계가 과연 지속이 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이 들 뿐이다.
중경 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로 들어섰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침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독립운동을 하였던 영령들의 잠을 깨우기가 두려워 한동안 임시정부 청사 뜰을 걸으면서 그들의 어려웠던 독립 운동사를 생각하여 보았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부릅뜬 총칼의 감시 하에서 국내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뛰어들었던 젊은 독립 운동가들을 생각하여 볼 때 힘들고 외로운 밤이 수없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영일 동맹이나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보아서 당시 국제적 상황은 우리나라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또한 일제가 동아시아를 재패하여가는 것을 보고 독립이 어려울 것이라는 여론이 팽배해져가는 가운데 많은 지식인들이 돌발적인 언어구사와 친일적인 행위를 하였던 것도 일부는 있었다.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도 젊은 혈기와 패기만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역만리로 떠나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던 사람들을 생각하여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너무 마음이 뿌듯하였다.
잠깐이면 독립이 가능하리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부모님과 부인 그리고 자식들마저도 고향에 남겨놓은 채 이별하고 돌아서야 하였던 그들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도 하였으며 독립운동이 쉽게 성취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독립운동이라는 대전제를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었으나 지역에 따라서 또는 인물에 따라서 독립운동의 방법을 다르게 생각하였다.
그들의 생각을 하나로 통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운명처럼 그들의 의사를 통합하는데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 하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었던 한성정부는 일제의 탄압으로 존재의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연해주에 본부를 두었던 대한국민의회는 무장투쟁을 선호하였으며 중국 상하이에 있었던 상하이 정부는 좀 더 유연한 방법인 외교력을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홍범도 장군이 주축이 된 독립군은 봉오동전투에서 크게 일본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청산리 전투는 청산리 백운 골짜기에서 2,500명으로 5만 명을 격파하는 등 우리민족의 청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암울한 시기도 있었다.
일제는 간도참변을 일으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데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을 무참히 학살하였으며 만주국의 군벌 장쭤린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간에 미쓰야협정을 체결하여 현상금을 붙여놓고 독립군 사냥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금 사냥으로 독립군의 활동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위축되기까지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독립군이 분열되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는데 위치에 따라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3부로 나뉘기도 ㅎ였다.
우리민족은 슬기롭게 3부를 국민부로 통합하여 위기를 수습하기는 하였으나 늘 분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와중에서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임시정부를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하여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40년 초기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중경 시 외곽 변두리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으나 현재는 중경 시의 도심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층층이 솟아있었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찾아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여도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보잘 것 없는 유물만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들어가는 입구서부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청사 주변에는 휴지조각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며 50m 전방에서 보이는 임시정부 청사는 숲속의 궁전처럼 나무들이 감싸고 있어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아! 감탄하면서 저기가 바로 꿈에서도 그리워하였던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였구나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배치는 1호에서 5호까지 나열되어 있었는데 아주 깨끗하게 잘 단장되어 있었다.
1호 1층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시실이 있었고 2층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 활동 전시실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3호 3층에는 김구주석 판공실(집무실)과 국무위원 회의실이 있었다.
김구주석 판공실로 들어가 주위를 살펴보니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대한민국 독립운동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분위기로 보아서 느낄 수 있었다.
왼손을 올려 입술을 만지면서 집무실을 오락가락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 느껴지기도 하였고 해방 후 민족의 화합을 위하여 38도 선을 넘을 당시 김구주석의 사진이 눈에 떠오르기도 하였다.
김구주석 집무실과 국무위원 실을 돌아보니 해방 직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주석과 국무위원들을 직접 대면하는 것처럼 온기가 느껴지기도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상황을 바라보며 세계 속의 대한민국의 미래를 구상하였을 지도자의 고민을 읽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었다.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이 단합해야할 필요성을 있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연해주에다는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였고 서울에다는 한성정부를 그리고 중국 상하이에다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3.1운동 이후 단일정부로 통합되기를 바라는 열망에 따라 상하이에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구로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내정, 군사, 재정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교육, 언론 홍보활동 등으로 민족의식을 만방에 고취하였다.
또한 적극적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며 전 세계에 대한민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김구와 윤봉길 등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결국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항주), 자싱(가흥), 전장(진강), 창사(장사), 광저우(광주), 류저우(유주), 치장(기강) 등 중국 관내 지역을 이전하며 재기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 중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지키는 노부부가 있어 너무 고맙고 반가웠다.
터키에서 한국공원을 관리하는 사람처럼 이곳 노부부도 긍지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을 들러보고 영사실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현황과 활동사항을 시청한 후 방명록에 서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입장료는 개인당 20원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국사담당 교사였던 관계로 그냥 청사를 나올 수가 없었다.
노부부에게 5만 원 권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어주니 감사하다며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기뿐 마음으로 돌아 설 수가 있었다.
그 노부부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 독립군의 뒷모습을 보는 듯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여 나도 몰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항상 건강하고 웃음이 지워지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아시아나 항공 354기에 몸을 실었다.
첫댓글 이규영님.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