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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단원 | 국어(상), Ⅲ. 다양한 표현과 이해, Ⅲ-보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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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가〉와 〈단심가〉라는 시조 대결을 통해 나타난 이방원과 정몽주의 대립관계는 이미 ‘선죽교 사건’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은 단순히 뜻이 맞지 않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대립을 넘어서는 정치적 혈투라는 큰 무대 속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들의 대립은 고려 후기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해 세를 확장하였던 신진 사대부 사이의 이념적 갈등의 일환이었다.
고려 후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한 신진 관료층이다. 이들은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더불어 중앙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요동을 정벌하라는 최영의 명령을 무시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실시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의 실세가 된 이후에는, 사실상 고려의 중앙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 내부에서도 이념적으로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주로 고려 왕조의 존립 여부를 두고 벌어진 이념 대립인데, 한 쪽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파였고, 다른 한쪽은 고려 왕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파였다. 온건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길재, 이색, 정몽주 등이 있었으며, 급진파에는 정도전, 조준, 이방원 등이 있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실제 힘의 균형은 군사력을 장악한 이성계의 급진파 쪽으로 기울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무력을 통한 대립 해소는 당시 위태롭던 명과의 관계나 다른 여론의 동향 등을 봤을 때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한 급진파는 온건파의 중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정몽주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비록 고려 왕조의 존속 문제를 놓고 입장이 갈리기는 했지만, 개혁을 요구하는 신진 사류라는 점에서 양 파벌은 사실상 그 근본이 같았고 이들을 끌어안아야 새 왕조 건설의 명분이 더 정당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 나선 것은 급진파 가운데서도 핵심 인물이었던 이방원이었다. 그는 정몽주를 만나 담판을 벌이게 되는데, 후대의 역사학자나 문학가들이 보기에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담판이 정치적 토론과 공방에 앞서 시조를 통한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교과서에 실려 있는 〈하여가〉와 〈단심가〉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고려 왕조에 대한 의리는 잊고 새로운 왕조를 만드는 일에 동참해달라는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 그러나 정몽주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의지를 노래한 〈단심가〉로 답한다.
담판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온건파의 영수격인 정몽주를 끌어들일 수 없다면, 그를 제거함으로써 온건파를 와해시켜 버리겠다는 계산 하에 사람을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던 정몽주를 살해하게 된다. 이 때 정몽주가 살해된 장소가 ‘선죽교’로, 아직까지도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온건파의 와해에 성공한 급진파는 고려 왕조를 폐하고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파의 행동에 실망한 수많은 신진 사대부들은 조선 왕조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산 속으로 숨어들거나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생활을 하게된다.
조선을 건국한 급진파는 강력한 왕도정치1)(王道政治)를 표방하며 왕의 권한을 강화하는 데 힘쓴다. 그러나 조선 건국 과정에서 정계로부터 이탈했던 온건파 계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 온건파 사대부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고, 점차 그 세력이 늘어나 16세기 이후에는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서원 출신 유학자들이 조선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바로 ‘사림파’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로서 조선 선조 대 이후에는 사실상 사림파들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조선 초기 왕권 중심의 체제를 비판하며 왕이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며 관료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선 중기에 재야에 있던 선비들을 중심으로 하여 훈구파와 대립한 정치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사림파는 지방의 중소 지주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관료로서보다는 향촌 지주층으로서의 구실을 중요시하였다. 사림파는 왕조초기의 중앙집권적인 왕정체제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왕과 신하의 상호견제에 의한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였으며 과거제 보다 천거제를 중시하였다. 사림파의 득세로 훈구파가 몰락하자 사림은 학연에 따라 여러 정파로 나뉘었는데 이를 붕당(朋黨)이나 당파라고 한다. 이러한 붕당에 의한 정치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치 현상이 되었다.
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인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이 등장한 학자 출신의 세력을 일컫는다. 이들은 권문세족과는 달리 가문이 미천하거나 재산이 얼마 없는 지방 향리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고려 시대의 향리는 지방에서 중·소규모의 지주로서 존재해 왔는데 이들의 자제들이 고려 후기에 점차 학문적 교양을 쌓으며 과거에 합격해 중앙 정계에 진출해 관리가 되면서부터 그 세력이 탄탄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한 것은 공민왕의 개혁정치때이다.
공민왕 이전에는 신진 사대부들의 정계 진출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었으나 그 정치적 권한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공민왕 즉위 이후 명나라의 세력 확장과 원의 몰락, 공민왕의 개혁정치 지향 등이 맞물려 신진 사대부의 정계 내 권한이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권문세족의 힘은 막강했고 공민왕이 끝내 개혁정치를 다 이루지 못하고 죽자 신진 사대부의 힘도 다시 약해지게 된다.
신진 사대부가 결정적으로 힘을 얻게 된 것은 권문세족 출신인 최영이 이성계에 의해 숙청을 당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정계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되고 성리학의 이념을 내세우며 새로운 정치를 펴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으로 고려 왕조의 존립 여부를 두고 두 파로 갈라진다. 하나는 고려 왕조의 폐해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온건 개혁파였고, 다른 하나는 왕조 자체를 바꾸려는 역성 혁명파였다. 이제현, 이색, 정몽주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 개혁파는 정치 경륜 면에서나 그 지위 면에서,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정도전이나 조준 등의 역성 혁명파를 훨씬 능가하였다.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이 중심이 된 역성 혁명파는 온건 개혁파에 비하여 정치적 지위나 경제력에 있어서 낮은 형편이었지만 그만큼 정치적, 경제적 개혁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맹자의 왕도 정치 사상과 민본 이념, 그리고 주례에 입각하여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조세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주목하였다. 이점에서 이들은 불교에 대해 온건한 편이었고 세제 개혁에 미온적이었던 온건 개혁파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방원이 중심이 된 역성 혁명파에 의해 정몽주 등이 숙청당하고 온건 개혁파 대부분이 정계를 떠남으로써 역성 혁명파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건국이 이루어졌다.
무신정변 이후 정권을 잡았던 가문중심의 고려 지배 계급. 주로 농장을 형성한 대토지 소유자들로서, 관료진출도 과거보다는 음서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문학적·유교적 소양과는 거리가 먼 비문 비유적 성향의 소유자들이었다. 주로 원과 결탁하거나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여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권문세족이 정권의 중심이었던 시기에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이후 신흥사대부와 차별화시키기 위한 개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388년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과 최영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는데 위화도에서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하였다. 이 회군으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하여 이성계 등이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의 명장으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고,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여 고려를 대표하는 장군이 되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원나라에 가서 용맹을 떨쳤고,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이를 물리쳤다. 1361년에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침입해 개성을 함락시켰으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고, 이후 공민왕을 시해하려한 흥왕사의 변을 평정했다. 한 때 신돈의 참소로 귀양길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신돈이 처형되자 다시 복귀되었고, 노구를 이끌고 왜구 등을 크게 물리쳐 그 명성을 사해에 떨쳤다.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였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도성을 지키지 못하고 이성계에게 잡혔다. 이성계는 그를 고봉현으로 유배한 후 참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 후기 신진 사대부의 갈등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12.15, 청서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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