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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0. 묵상글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순례 항해航海 여정중의 성가정 공동체
-가장의 리더십-.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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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례 항해航海 여정중의 성가정 공동체
-가장의 리더십-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지난 12월28일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95세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을 위한 특별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을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분은 침묵중에 교회를 떠받쳐 준 분입니다. 그분은 지금 매우 아픕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주님께 그분을 위로해 주십사, 또 끝까지 교회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증거가 지속되게 해 주십사 주님께 청해 주십시오.”
오늘 성가정 축일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오늘 하루 내내 화살기도 노래로 바치며 행복한 성가정 축일을 지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 참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성가정 요셉 수도 성가정 공동체에 몸담고 살고 있음이 참 감사합니다.
아마 이렇게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 사는 12명 대가족의 공동체도 드물 것입니다. 그대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를 모델로 삼아 살아가는 순례 항해 여정중의 우리 성가정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세상이 흡사 순례 항해 중인 바다 같다는 생각에 강론 제목을 “순례 항해 여정중의 성가정 공동체”라 정했습니다.
잠시 성가정 축일의 유래에 대해 살펴 보고자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게도 나자렛 성가정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 모범을 본받도록 성가정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성가정에 대한 신심이 교회내에서 확산된 것은 지난 17세기 무렵으로,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공경이 캐나다 퀘벡의 초대 주교 라발(1623-1708)에 의해 캐나다로 확산되면서 특별 미사가 봉헌되고 기도문이 제정됩니다.
이어 ‘성가회’, ‘성가정 선교 수도회’, ‘성가정 자매회’, ‘베르가모의 성가정 수녀회’등 성가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공동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1893년에는 교황 레오 13세가 모든 가정을 성가정에 봉헌했고, 1921년 10월 26일에는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이 축일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모든 교회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도록 합니다. 마침내 1969년 전례력 개정으로 성가정 축일은 성탄 팔일 축제내의 주일, 즉 예수성탄 대축일 다음의 첫째 주일이지만, 이번처럼 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에 지냅니다.
보금자리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하고 어두워도 반듯한 부모들이 건재하는 한, 자녀들은 잘 양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가정생활의 체험은 평생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저도 초등학교 어렸을 때 귀가하면 우선 찾는 것이 어머니였습니다. 특히 가장의 리더십이 빈약할 때 어머니의 역할은 참으로 결정적입니다.
훌륭한 인물들의 배경에는 십중팔구 현모양처의 어머니들이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가끔 되뇌이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은 아무나 하나?”, “부모는 아무나 되나?” 때로는 부부자격시험. 부모자격시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책임감은 물론 준비가 참으로 부족한 이들이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됨으로 불행을 겪고 있는 자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따뜻한 보금자리 품의 가정 공동체 찾아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대부분 결손 가정들입니다. 힘들고 거친 광야 세상에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가는 가정의 부부들을 보면 저절로 감동하고 고마운 생각까지 듭니다. 문제가 없는 순탄대로의 성가정이 아니라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다하는 부모들이 있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저는 힘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임을 다하며 가정을 이끌어가는 부모들을 보면, 저는 무조건 성인들이라고 격찬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 가정을 잘 이끌어 간다는 것은 거의 순교적 희생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순례 항해 여정중 파선이나 조난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지요! 어제 읽은 기사가 우리 나라에서 얼마나 성가정을 이뤄 살기 어려운지 잘 밝혀 줍니다.
“세계화-신자유주의는 다른 어느 곳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한국처럼 비정규직이 많고(전체 노동자의 37.5%), 66살 이상 노인이 빈곤에 시달리는(노인 상대적 빈곤 40.4%) 나라는 없다. 하도급 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들의 상대적 값싼 노동을 이용하는 한국형 이원적 수출경제 구조는 일면으로 대기업들의 세계적 도약을 가능하게 했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최악의 양극화를 낳았다.
구미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학습경쟁과 경제적 압력 속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세계화 시대 말기의 젊은 한국인들은, 아예 ‘가족’ 형태로 결합해 재생산할 여력 자체를 잃고 말았다. 주민등록 세대중 1인 가구 비율이 40%를 넘고,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0.79명으로 떨어진 대한민국은, 가면 갈수록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경쟁 속에서 스스로의 생존만 도모하느라 여념없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나라가 됐다. 선진국 반열에 들었섰다지만, 행복지수가 선진권의 ‘꼴찌’에 가깝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2022.12.29. 한겨레, 박노자)
너무나 적나라한 비판이지만 사실입니다. 이런 와중에 성가정을 이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지 정말 눈물겹습니다. 혼기를 놓친 30대에서 50대까지 남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설상 결혼했다 해도 이혼은 날로 늘어나고 위태한 가정들 역시 얼마나 많은지요.
제 70년대 교사시절 6학년때 지금은 50대 후반의 제자들, 이때만해도 결혼 못한 이들은 몇 명의 소수였지만 지금의 30-40대는 결혼 못한 이들이 대다수입니다. 결혼한다는 것이 하늘에 별따기 같습니다. 새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아 내 몸담고 있는 가정의 성가정 공동체 건설을 위해 주님의 형제이자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전의와 각오를 새로이 해야 절박한 시대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순례 항해 여정중인 성가정 공동체를 묵상했습니다. 헤로데 임금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갔다가 다시 귀환하게 되는 참 파란만장한 순례 여정중 가장인 요셉의 리더십이 빛납니다. 참으로 주님의 인도따라 순례 여정에 충실했던 기도와 믿음, 지혜와 순종의 사람, 참으로 가장으로서 끝까지 인내하며 책임을 다했던 성가정의 가장 요셉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흡사 요셉의 수호천사처럼 생각됩니다. 세상에 아무리 어려운 가정이라 해도 오늘 복음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상황보다 힘든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또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참으로 가장이 리더십이 부족해도 어머니들이 그 책임을 다할 때 하느님은 기꺼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십니다. 참으로 파선 직전의 가정들이 성녀같은 어머니들 덕분에 성공적 순례 항해 여정중인 성가정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성가정 생활중 구체적 지침을 줍니다. 사실 노부모들 잘 모시는 가정 치고 잘못되는 가정 본 적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어김없이 부모들을 보고 배웁니다. 믿음, 사랑, 희망, 기도, 효도등 보고 배우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야, 네 아버지나 어머니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분들이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날로 늘어나는 노인들에 또 치매환자들도, 본의 아니게 가정을 떠나 요양원 신세를 지는 노인들도 많습니다. 성가정의 개념이 확대되야 함을 봅니다. 혈연血緣 가정을 넘어 명실공히 예수, 마리아, 요셉의 신연神緣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우리 교회공동체,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참으로 진짜 성가정 공동체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맏형으로 모신 말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요 여기에 속한 세상의 성가정들입니다.
우리 성가정 요셉 수도공동체에 잠시 손님으로 머무는 이들, 또 수도원 가까이 살면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는 분들 역시 넓은 의미로 성가정 요셉 수도공동체의 일원이란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넓고 깊고 따뜻한 정주定住 수도 가정 공동체에 걸맞는 환대歡待의 영성입니다.
1인 가구가 날로 늘어나는 외롭고 쓸쓸한 시절에, 교회의 성가정 공동체 역할은 날로 커질 수 뿐이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속한 한 식구 형제자매들로 만들어 줍니다.
“주님, 당신 성가정의 모범으로 우리를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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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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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2,23)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란 대체 어떤 가정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성가정’이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요, ‘말씀’이 성취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인 되게 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말씀의 성취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25)라는 말씀의 성취요, <또 하나>는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2,23)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성취 안에는 모진 고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이 가정은 이집트에서 불려나오기까지, 또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겨다녀야했고, 변방의 거류민으로 살아야 했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고통이 없는 가정이 ‘성가정’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성가정’에는 고통이 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성취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란 고통이 없고 편안하고 안정된 단란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요 공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활동하고 성취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것은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아기 모습으로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으로 묘한 신비입니다. ‘말씀이시면서 말을 못하는’ 이 아기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도 않은 빈자리가 되어 우리네 가정, 우리네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자리’로 계십니다. 마치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로 있는 신부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빈자리’로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끌어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빈자리’, 그곳이 바로 중심임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님’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들여다볼 일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이 우리 안에 작고 낮고 무력하게 말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볼 일입니다. ‘말씀’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항상 작고 낮은 이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보다 작고 나약한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작고 무력한 예수님을 만났는가? 나를 사랑하기에 언제나 나보다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무력하게 낮아져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심지어는 ‘없는 자’, ‘빈지리’가 되어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마태 2,20)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들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살아있고 존중되는 말씀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항상 중심이요 주인이 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서로의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함께 지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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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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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복을 많이 만드시고, 나눠주시고 또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라는 시메온의 당혹스런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습니다.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 있어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요한 사도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 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새서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새3,15.16)하셨는데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이 마음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실천하는 가운데 믿음의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영적 충만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 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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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사도 게시 – 예수님을 모시는 가정 >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JSz/2347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기억해 봅니다. 포드는 대기업을 일으킨 후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그 집은 대기업의 총수가 살기에는 아주 작고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호화롭지 않더라도 생활에 불편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걱정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드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하였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집이지요. 가정이지요.”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 가면,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글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자동차를 만들었고 그의 성공 뒤에는 꿈꾸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함께 이룬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새서3,3,12이하).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렐루야를 노래하실 때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여라.” 하셨는데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이 마음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 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믿고 마리아를 받아들였으며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을 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 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때가 되기까지 나자렛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사랑을 받았고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자렛 가정은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각기 고유한 역할 안에서 한마음 한뜻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요한 사도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우스갯 소리가 있습니다.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랍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아들은 평생 내 아들이래요. 초등학생 때까지는 일촌이지만,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이 되면 벌써 사촌이 되고, 대학을 가면 오촌 아저씨가 됩니다. 장가를 들면 8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사돈의 팔촌이 된답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남이 되어가는 것은 사랑의 끈이 그만큼 느슨해지는 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과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 가정이 되길 기도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내년은‘코로나19’가 종식되고, 평화로이 서로의 만남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사를 자유롭게 봉헌하고, 참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희망의 2021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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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소경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경은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또 다른 기적도 보여 주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에 침을 발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지어서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소경의 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요소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삶의 기쁨입니다. 꽃, 새, 구름, 바다, 나무, 아이,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기쁨입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모니터는 우리를 더 넓은 세상과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잘 지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흡족해 하시면서 그렇다면 가진 것을 보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자청년은 슬퍼하면서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자청년이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행동했다면 우리는 부자청년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도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문득 생각합니다. 보는 것은 주체가 ‘나’입니다. 내가 보는 것이고, 내가 즐거운 것이고,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주체가 ‘남’입니다. 남이 말을 해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은 보는 것으로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합니다. 구약 예언자들도 모두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라고 선포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서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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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0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021년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함께하실 것 같았던 부모님께서 1년 사이에 모두 하늘 나라에 가시니 마음이 먹먹해지고, 잘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늘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부모님 물건을 정리하는데 큰 형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님 재산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다른 사람들 보니까 재산 분할 문제로 싸움도 많이 하던데, 우리는 그럴 일이 없잖아.”
사실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재산은 신앙심과 교육이었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을 늘 강조하셨고, 또 한 가지는 끝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책을 손에 놓지 않으면서 생활합니다.
많은 돈도, 세상의 높은 지위도, 그밖에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는 우리 가족 모임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가 가족들 간에 더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가정을 성가정의 모범으로 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가정이 부자였을까요? 아니면 세상 안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들의 가장인 요셉은 가난한 목수로 알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결 예식 때 바치는 제물도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비둘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고통과 시련이 없었을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가족을 보면,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아기인데도 마구간에서 낳아야 했던 형편이었습니다. 에집트로 피난도 가야 했고, 12살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너무 일찍 하느님 곁으로 가신 것 역시 인간적 관점에서는 커다란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십자가 아래에서 직접 봐야 했던 어머니의 아픔을 떠올리면 고통과 시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성가정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성가정은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서로가 서로를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 성가정은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신앙의 일치를 성가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성가정도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 가정에 있는가를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진짜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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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사람의 특징은 그것이 불행한 것인줄 알면서도 그쪽으로 가는 점에 있다. 우리 앞에는 불행과 행복의 두 갈래길이 언제나 있다. 우리 자신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A.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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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0.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가정>
마태오 2,13-15.19-23 (이집트로 피신하시다,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성가정>
나는 하느님처럼
너를 돌보고
너는 하느님처럼
나를 돌보니
성가정
너를 하느님처럼
나는 섬기고
나를 하느님처럼
너는 섬기니
성가정
나는 너에게
하느님처럼 되어주고
너는 나에게
하느님처럼 되어주니
성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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