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忠南 禮山 秋史 金正喜遺蹟
金正喜先生 遺蹟 -충청남도기념물 제24호 -禮山郡 新岩面 龍宮里 朝鮮後期學者인 秋史 金正喜(1786∼1856)의 遺蹟으로 秋史古宅과 一帶로, 秋史의 옛집을 비롯하여 和順翁主와 남편인 金漢藎의 合葬墓와 그 옆에 正祖가 내린 烈女旌門, 白松(천연기념물 제106호), 金正喜墓가 있다. 金正喜는 北學派인 朴齊家의 弟子로 中國 淸나라 考證學의 영향을 받아 實事求是에 입각한 學問을 연구했다. 24세때 冬至使 兼 謝恩使의 副使인 父親 金魯敬을 따라 燕行(燕京行)으로 淸나라에 가서 考證學과 金石學· 書體 등을 배웠으며, 純祖 16년(1816) 北漢山 碑峯 眞興王巡狩碑를 밝혀 냈다. 憲宗 6년(1840) 尹尙度獄事事件에 연루되어 濟州島에서 9년간 流配生活하면서 그동안 연구한 秋史體를 완성했다. 流配生活에서 돌아와 父親墓가 있는 果川에서 學問과 藝術에 沒頭하다 生을 마감했다. (*藎: 조개풀 신 *旌: 기 정 *燕: 제비 연)
(01) 禮山 龍宮里 白松 -천연기념물 제106호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 흰빛이 되어 白松 또는 白骨松이라고도 한다. 中國原産地로 朝鮮時代에 中國을 往來하던 使臣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龍宮里 白松은 壽齡 약 200년정도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며,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졌는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貧弱한 모습이다. 이 나무는 秋史 金正喜가 淸나라 燕京을 다녀올 때 種子를 필통에 넣어 가지고와 高祖父 金興慶의 墓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한다. 秋史의 漢陽本家에도 英祖가 下賜한 白松이 있어 白松은 金正喜一家의 象徵처럼 여겨지고 있다. 禮山 龍宮里白松은 稀貴하고 오래된 소나무로 生物學的價値뿐만 아니라, 中國과의 交流關係와 당시사람들이 白松을 귀하게 여기던 風習을 알 수 있는 文化的資料로서 價가 크다.
(02) 金興慶 墓, 사진 왼쪽은 墓碑, 오른쪽은 白松울타리이다. 急流亭 金興慶은 秋史 金正喜의 高祖父로 漢城府右尹을 지냈으며 辛壬士禍에 연루되기도 했으나 여러 官職을 거쳐 領議政에 올랐으며 諡號는 靖獻이다. 墓碑銘은 [議政府 領議政 諡 靖獻 慶州金公墓碑]이다. (*諡: 시호 시 *靖: 편안할 정)
(03) 和順翁主 旌閭 *和順翁主(1720~1758)는 英祖와 靖嬪 李氏 사이의 庶女로 英祖 卽位年(1725) 和順翁主로 冊封되고, 1732년 領議政 金興慶의 아들 月城尉 金漢藎과 결혼했다. 38새때인 英祖 34년(1758) 夫君 金漢藎이 他界하자 그 죽음을 슬퍼하며 穀氣를 끊고, 父王 英祖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決心을 바꾸지 않고 14일만에 他界했다. 朝鮮時代 王室에서 나온 唯一한 烈女로, 正祖가 마을 어귀에 烈女旌門을 세우고 祭祀지내도록 했다. (*翁: 늙은이 옹 *嬪: 궁녀 벼슬 이름 빈 *藎: 조개 풀 신 *穀: 곡식 곡 *旌: 기 정) *旌閭: 朝鮮時代에 三綱五倫의 儒敎的 倫理를 권장하기 위해 忠臣·孝子·烈女에 대해 그들이 사는 마을입구나 大門앞에 붉은 門을 세워 表彰했는데, 넓은 의미로는 忠孝烈을 기리는 旌閣, 旌門, 旌閭, 碑등이 포함된다. (*彰: 드러날 창)
(04) 和順翁主 紅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和順翁主의 貞節을 기리는 烈女門이다. 秋史의 曾祖母이며 英祖의 次女 和順翁主가 夫君 金漢藎이 他界하자 穀氣를 끊고 父王 英祖의 挽留에도 결국 他界했다. 英祖는 翁主의 貞節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烈女門을 내리지 않았으며 그후 正祖가 내렸다. 墓幕터는 53칸의 큰 건물이었으나 燒失되어 주춧돌만 남아있으며, 紅門은 앞면 8칸·옆면 1칸으로 근래에 담장을 설치했다. 墓幕터 正門인 紅門위에 [烈女 綏祿大夫月城尉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 貞孝公金漢藎 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열녀 수록대부월성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 정효공김한신 배화순옹주지문 상지 7년 계묘 1월12일 특명 정려)]라고 板刻했다. (*挽: 당길 만 *綏: 편안할 수 *摠: 다 총 *閭: 마을 려)
(05) 月城尉 金漢藎 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 秋史의 曾祖父인 月城尉 金漢藎과 英祖의 次女인 夫人 和順翁主의 合葬墓이다. 金漢藎은 五衛都摠府 都摠管과 濟用監 提調를 역임했다. 글씨를 잘 쓰고, 詩文에 能해 哀冊文, 諡冊文등을 많이 썼으며, 도장을 새기는데도 뛰어나 印寶(임금의 도장)를 새기기도 했다. 金漢藎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他界하자 和順翁主는 哀悼의 情이 極에 이르러 곧 夫君을 따라 他界했다. 墓碑는 높이 140㎝, 폭 62㎝, 두께 27.4㎝이며, 앞면에는 英祖의 御筆로 앞면에는 [有明朝鮮 綏祿大夫 月城尉 兼 五衛都總府都總管 贈謚貞孝金公之墓 和順翁州祔左望七之年 抆涕以寫 (유명조선 수록대부 월성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 정효김공지묘 화순옹주부좌 망칠지년 문체이사)]라고 刻字했다. (*藎: 조개 풀 신 *祔: 합사할 부) 金正喜先生 古宅[안채. 사랑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朝鮮後期의 대표적인 實學者이며 書藝家인 秋史 金正喜(1786∼1856)가 태어나고 자란 옛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2棟의 건물로, 英祖의 駙馬이며 金正喜의 曾祖父인 金漢藎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東西로 길게 배치되어 있으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있다. (*駙: 곁 마 부)
(06) 金正喜先生古宅 솟을 삼문
(07) 金正喜先生古宅 사랑채 사랑채는 男子主人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生活空間으로, ‘ㄱ字’形 南向이며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이 있고 나머지는 大廳과 마루이다. 各房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通路로 이용했다.
(08) [新安舊家 -阮堂題] 사랑채에 걸려있는 阮堂의 隷書體 글씨이다. 金正喜는 秋史, 阮堂 이외에도 200여개 가까운 雅號를 사용했다고 한다. (*阮: 성씨 완 *雅: 맑을 아)
(09) 石年 ‘石年’이라고 쓴 돌기둥은 秋史 金正喜가 직접 제작한 해時計이다. [石年]이라는 글씨는 秋史의 아들 須山 金商佑가 秋史體로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須: 모름지기 수)
(10) 金正喜先生古宅 안채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四方이 막힌 ‘口字’形의 배치이며,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板壁을 설치했다. ‘口’자모양으로 6칸大廳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의 부엌은 煖房用으로만 쓰이고 料理하는 부엌은 따로 두었는데, 이는 王室住宅構造로 王室의 和順翁主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大廳은 다른 古宅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고 안방과 그 附屬空間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팔작지붕建物이며, 地形이 高低差를 이룬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層지게 처리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 落水물이 제법 세차게 떨어진다.
(11) 안채 大廳의 金正喜 글씨(寫本)(왼쪽-오른쪽)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세상에 으뜸모임은 부부와 자녀·손자들 모임.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세상에 으뜸반찬은 두부·오이·생강·채소. 안채∙사랑채는 물론 古宅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글씨가 들어차 있다. (*烹: 삶을 팽 *腐: 썩을 부 *瓜: 오이 과 *薑: 생강 강 *菜: 나물 채)
(12) 안채 뒤쪽에 있는 秋史影堂 秋史 他界後 아들 金商佑가 세웠으며, [史影室]扁額은 彝齋 權敦仁이 썼는데 原本은 澗松美術館이 所藏하고 있다. (*彝: 떳떳할 이)
(13) 秋史 金正喜 肖像 秋史의 弟子 希園 李漢喆의 작품 寫本이며 原本은 國立中央博物館 所藏.
(14) 秋史 金正喜 墓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 秋史 金正喜의 묘는 果川에 安葬되어 있던 것을 1937년 先祖가 있는 이곳 禮山龍宮里 秋史古宅 사랑채에서 200m 떨어진 곳에 移葬했다. 墓앞에는 床石이, 오른쪽 앞에는 墓碑를 세웠다. 비석은 直四角形의 花崗巖 臺座, 烏石의 碑身, 屋蓋形 螭首로 이루어졌다. 墓碑銘 [阮堂先生 慶州金公 諱 正喜墓]는 後學 宗人 金承烈이 짓고 썼다. (*蓋: 덮을 개 *螭: 교룡 이 *銘: 새길 명 *諱: 숨길 휘)
(15) 秋史 金正喜墓域에 있는 소나무
秋史記念館
(16) [秋史와 印譜], 2008년 草丁 權昌倫 作 -秋史記念館 앞 秋史의 印譜 200顆중에서 12과를 陰∙陽刻으로 篆刻한 視覺的인 아름다움과 ‘史野’文字를 突出시켜 印譜와 文字의 調和를 주었다고 한다. (*譜: 족보 보 *顆: 낟알 과 *篆: 전자 전) *印譜: 各種 印章의 印影, 특히 書家·畵家의 印章을 個人 또는 流派別로 모아 捺印·編輯한 書冊. (*捺: 누를 날) *史野: <論語> [雍也篇]의 '文史野也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문사야야 질승문칙야 문승질칙사 문질빈빈연후군자/文은 史野다. 질박함이 꾸밈보다 많으면 野人이요, 꾸밈이 질박함 보다 많으면 文士다. 꾸밈과 질박함이 적절하게 조화되어야 君子라고 할 수 있다.’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史’는 잘 정리된 것, '野'는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史'와 '野'가 잘 조화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彬: 빛날 빈)
(17) 秋史 金正喜 銅像 -秋史記念館 앞
(18) 秋史 金正喜 銅像의 基壇. -‘고독한 예술혼’, 2008년 姜寬旭 作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래쪽에 [遊天戱海(유천희해)]라고 隸書로 새긴 글씨, ‘孤獨한 藝術魂'이라는 작품은 濟州島 流配時節, ‘옥돌괴’위에서 茫茫大海를 바라보는 藝術家의 孤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茫: 아득할 망) *[遊天戱海]는 秋史의 隸書體 글씨 ‘山崇海深 遊天戱海’의 일부이다.
(19) 秋史記念館 書藝家·金石學의 大家 秋史 金正喜의 生涯와 思想, 作品을 展示하고 있는 記念館은 常設展示場, 企劃展示室, 多目的映像室, 秋史記念品販賣場등으로 구성되었으며 2008년에 건립했다.
(20) 記念館에 展示된 秋史 印譜의 一部 金正喜의 雅號는 秋史·阮堂·禮堂·詩庵·果老·農丈人·果坡·老果·老鬲·覃硏齋·天竺古先生·勝蓮老人등 100個가 넘는 雅號를 사용했다. (*鬲: 막을 격 *覃: 깊을 담 *竺: 나라이름 축)
(21) 秋史 影幀
(22) [茗禪]. 原本은 澗松美術館 所藏 海南 頭輪山 大興寺의 草衣禪師가 손수 만든 茶[茗]를 보내준 데 대한 感謝의 뜻으로 보낸 글씨이다. (*茗: 차 싹 명 *禪: 고요할 선)
(23) 秋史의 流配期와 晩年期 =左上: 유배생활을 한 濟州 大淨邑에 있는 謫居遺墟碑. (*淨: 깨끗할 정 *謫: 귀양갈 적 *墟: 터 허) =上中: 簡札, 秋史가 咸鏡道 北靑으로 流配갈 때 집으로 보낸 편지. =右上: 서울 三成洞 奉恩寺에 있는 [板殿]의 扁額으로 落款에 ‘七十一果病中作’이라고 했는데 71세의 病中에 果川에서 쓰고 3일 후에 타계했다고 전한다. (*落款: 글씨나 그림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號를 쓰고 도장을 찍는 일) =下: [歲寒圖]는 유배중인 濟州島로 弟子 藕船 李尙迪이 中國에 使臣으로 다녀올 때마다 귀한 書籍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준 작품으로 原本은 국보 180호로 국립중앙박물관이 所藏하고 있다. (*藕: 연뿌리 우 *迪: 나아갈 적) *金正喜 筆 歲寒圖 -국보 제180호 -국립중앙박물관 所藏 金正喜의 代表作으로 가로 69.2㎝, 세로 23㎝이다. 秋史가 1844년 濟州島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린 것으로, 그림 끝부분에 직접 쓴 글에서 師弟間의 義理를 잊지 않고 北京으로부터 貴한 책들을 求해다준 弟子 李尙迪의 人品을 松柏에 비유하며 答禮로 그려 준 것이라고 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左右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對稱을 이루고, 주위를 餘白으로 처리해 極度의 節制와 簡略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歲寒圖]라는 제목과 함께 ‘藕船是賞阮堂’이라 적고 도장을 찍었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해 한 채의 집과 古木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淸節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墨의 濃淡, 간결한 構成등은 志操높은 作家의 內面世界를 보여주고 있다. 人爲的技術과 虛飾的인 技巧主義에 반발해 극도의 節制와 省略을 통해 文人畵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朝鮮後期 대표적인 文人畵로 평가되고 있다. (*藕: 연뿌리 우 *巧: 공교할 교 *飾: 꾸밀 식)
(24) [大雄寶殿] -海南 頭輪山 大興寺 大雄寶殿 扁額 -圓嶠 李匡師 글씨. 濟州로 귀양가던 秋史가 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보고 住持 草衣禪師에게 ‘글씨를 망친 圓嶠의 글씨’라고 떼어내라고 했다가 8年餘의 귀양살이하고 돌아와서는 “내가 잘못 보았다”고하면서 다시 걸라고 했다는 逸話가 傳해지는 扁額이다. (*嶠: 산 쭈뼛할 교 *匡: 바를 광) *오랜 귀양살이로 自我省察을 통해 秋史의 眼目과 생각과 마음이 더 成熟된 謙遜의 德을 쌓은 것일까? (*謙: 겸손할 겸)
(25) [无量壽閣] =위: 海南 頭輪山 大興寺(大芚寺) [无量壽閣] 扁額으로 秋史가 草衣에게 圓嶠의 [大雄寶殿] 扁額을 떼어내라고 하면서 [大雄寶殿] 扁額과 初衣禪師와 茶를 나누던 禪房에 걸 [無量壽閣] 扁額글씨로 隸書體로 한껏 멋을 부린 기름진 書體’라고 한다. (*无: 없을 무 *扁: 작을 편 *隸: 종 예)
=아래: 禮山 烏石山 華巖寺 [无量壽閣] 扁額이며, 秋史가 濟州 流配地에서 쓴 글씨로 ‘기름기가 빠지고 素朴한 모습으로 귀양생활로 변화된 글씨와 性情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26)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왼쪽)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세상에 으뜸 반찬은 두부·오이·생강·채소,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세상에 으뜸 모임은 부부와 자녀·손자들 모임. (*烹: 삶을 팽 *腐: 썩을 부 *瓜: 오이 과 *薑: 생강 강 *菜: 나물 채)
(27) 秋史 金正喜 글씨(오른쪽 → 왼쪽) 且好明月成三友(차호명월성삼우)/밝은 달을 불러 세 벗(청풍·명월·작자)을 이루고, 好共梅花住一山(호공매화주일산)/즐겁게 매화와 함께 한 산에 머물다.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만리와 같은 유장함이 있고, 書勢如高松一枝(서세여고송일지)/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且: 또 차 *枝: 가지 지)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