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면과 송지면 일대는 고대사회 해상세력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이들 해상세력은 현산면과 화산면으로 이어지는 백포만을 중심으로 한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 및 일본과 해상교역활동을 펼쳤고 송지 군곡리에 자신들의 항구도시를 세웠다. 송지 군곡리 국제항구도시는 700년 간 유지되었고 현산 백포마을과 화산면 관동마을 바닷가에 위치했던 백포항은 고려시대까지 중국과 국제무역이 이뤄졌다. 본지에서는 백포만 세력과 해상교역을 했던 경남 김해와 남해, 전남 고흥지역을 비롯한 서남해안 고대 바닷길을 찾아 해상 무역로를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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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간척지로 변한 현산면 신방리 앞 백포만은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국제항 역할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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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면 군곡마을 뒷편에 위치한 조개무지 잔등은 고대사회때 국제항구도시가 자리했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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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밝혀진 군곡리 역사
1986년, 철기시대 국제 항구도시였던 백포만의 면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목포대 박물관이 송지면 군곡리에서 세 차례에 걸쳐 3년간 발굴 조사한 결과 기원 전후 군곡리는 중국과 일본, 가야 문명권과 바닷길을 통해 해상무역을 했고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원전 3세기에 생성되기 시작한 이 항구도시는 이후 700년간 존속했고 철기시대인 1세기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거점항구도시로서 역할을 왕성히 해냈다.
이곳에서는 1세기 중국의 화천(돈)과 복골(점 치는 도구), 다량의 철기류와 일본의 토기류 및 복골 등이 수습되었다. 또 가야지역의 삼천포 늑도 패총지에서 발견된 토기류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국제적인 항구 도시였던 이 도시가 송지면 군곡리에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송지면 군곡리는 백포만에 속한 지역이다. 백포만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뱃길이다.
또한 백포만은 서해에서 남해로 꺾이는 꼭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백포만은 한중일 문물교류의 주요 거점 포구였고 군곡리는 포구 사람들이 거주했던 국제도시였다.
또한 백포만은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에 세웠던 낙랑과 대방군이 일본과 교류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포구이기도 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서해를 거쳐 백포만을 경유한 후 금관가야였던 김해를 통해 일본의 대마도로 들어갔다.
이같은 사실은 중국의 화천이 군곡리와 제주도, 고흥 거문도, 창원, 김해 등지에서 동일하게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군곡리에 세워진 국제 항구도시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포구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변남주 교사는 침미다례라고 말한다.
군곡세력 백제 근초고왕 때 멸망
송지면 군곡리에 침미다례라는 소국이 들어서 있을 때, 영산강 유역에는 신미제국이라는 고대국가가 들어서 있었다. 영산강 일대에 들어선 신미제국은 독자적인 국가로 옹관고분(항아리 무덤) 이라는 독특한 묘제 양식을 남긴다. 송지 군곡리 일대에서도 대형 합구옹관묘가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일대 세력은 영산강 유역의 신미제국과 관련이 있는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군곡리 국제 포구도시가 4세기 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4세기 들어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을 맺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다. 3세기까지 동북아 해상교역은 낙랑과 대방군이 주도하고 있었다. 낙랑과 대방군을 추출한 백제와 고구려는 이제 동북아 연안항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다.
이때 백제에는 위대한 군왕인 근초고왕이 있었다. 근초고왕은 평양성에서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연안항로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그리고 송지 군곡리에 있던 침미다례를 도륙한다. 역사서에 도륙이라고 표기한 것은 아마 침미다례 세력들이 백제에 필사적인 저항을 했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서 군곡리 포구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현산 고현세력 등장
군곡리에 들어선 침미다례라는 국제 포구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근초고왕은 그렇다고 백포만이 가지고 있던 국제적인 해상로로서의 위치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반대한 군곡세력을 철저히 파괴한 대신 현산면 고현리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군곡리의 역할을 대신하게끔 한다.
그러나 백제의 동북아 해상교역의 주도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근초고왕 때에 성장했던 고현리 일대 유물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현산초등학교에 소장된 토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백제계 토기가 아닌 가야계 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 때문이다. 이는 백제의 통제가 약화되자 고현세력은 독자적으로 가야와 해상교류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도시 고현에서 월송으로
백제의 힘이 약화되자 백포만의 해상세력의 거점은 고현에서 현산면 월송리로 이동한다. 이때 백제에 눌려있던 일본의 홀로서기가 시작된다. 일본은 중국 남조에 접근하면서 한반도에 또 다른 세력들과 연대를 구축한다.
그 세력이 바로 해남 월송 세력과 영산강 유역 세력이다. 물론 일본의 부상에 대해 영산강 유역 신미제국을 주도했던 시종면과 반남면의 중심세력들은 이에 응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해남의 월송세력은 백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가야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했고 영산강 유역의 변두리 세력이었던 광주와 함평, 영광 등지의 세력들도 일본과 강화를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현산 월송을 비롯한 이 지역에서는 일본식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게 된다. 현산 월송리 조산마을에는 대형 고분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 무덤의 형태가 일본 무덤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6세기 고현이 다시 국제도시로
6세기 들어 상황은 다시 급변한다. 무령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백제의 성왕은 수도를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동북아 해상교역을 회복시킨다. 백제는 영산강유역의 신미제국을 점령하고 일본과 해남 월송세력을 아우르는 동북아 해상교역의 네트워크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해양거점 도시로 확보한 현산 고현을 다시 부활시켜 새금현을 설치한다. 이와 함께 백제는 백포만 일대 산 정상에 산성을 중첩적으로 축조해 이를 요새화 한다.
고려시대 해남지명 첫 등장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백포만은 중요한 국제 포구였다. 이때도 백포만의 중심 포구도시는 현산 고현이었다. 고려는 고현에 있던 새금현을 해남현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해남이라는 지명은 이때 탄생되었다.
백포만 일대에 있는 현산 신방리 백방산에는 중국 송나라와 교류했던 설화와 지명이 많이 전하고 있다. 고려에 왔다 돌아가는 송나라 사신을 애타게 기다렸던 첩이 백방산에서 기다리다 굳어져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과 이제나 저제나 임이 올까 기다리며 건넸다는 탄식천 등이 그것이다.
국제 포구였던 백포만은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쇠퇴하고 만다.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고려정부가 섬과 해안지역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거시키는 공도정책(섬을 비우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로서 현산면 고현에 있던 치소도 내륙인 현산면 구시리에서 삼산면 계동으로 그리고 조선 세종 대에 이르러 해남읍으로 이동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