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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툴롱6 - 해양박물관에서 군함을 보면서 트라팔가등 근대해전을 생각하다!
5월 21일 툴롱 기차역 옆 버스터미널 Gare Routiere 로 갔더니 생트로페 St. Tropez 는
첫 버스가 12시 30분이라기에, 항구 인근에 해군본부 Prefecture Maritime 를 지나
해양박물관 Museo de la Marina 에 입장해 배와 기구며 항구 모습과 옛날 해전도
에서 갤리선이 주축이었던 고대 해전 과 범선이 주축을 이루었던 중세 해전 을 돌아봅니다.
유럽은 절대 왕정 시기를 거쳐 국가의 전쟁수행 체계가 정비되어 간 16세기 이후
해전의 수가 크게 늘어나니 해상 항로의 보호 유지와 확대 즉 제해권 이
국가의 세력 팽창과 경제 발달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조직적인 해군 을 육성하고 경쟁하게 됩니다.
그런 중에 발생한 최초의 근대 해전 은 1781년 9월 5일 벌어진 체사피크만 해전
(Battle of the Chesapeake) 인데, 미국의 동부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연안에 걸쳐있는 넓은 체사피크만에서 미국 독립전쟁 중에 대륙 독립군을
지원하는 프랑스 해군 과 독립을 막으려는 영국 해군 간에 해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프랑스의 제독 그라드 백작 이 지휘하는 24척의 전열함과 영국의 제독 그레이브스 남작 이
지휘하는 전열함 19척이 맞붙었는데.... 프랑스 함대는 2척이 침몰한 반면에
영국 함대는 무려 6척이나 침몰했으니 아주 드물게도 프랑스 해군이 승리한 해전 입니다!
영국 해군 은 미국 동부 요크타운 요새 에 고립된 콘월리스의 영국 육군 을 구원하지
못하고 해군의 패배로 끝났는데, 1588년에 스페인 무적 함대를 물리치고
제2차 세계대전 까지 400여년중에 가장 심각한 패배 였으니, 요크타운 에
갇힌 영국 육군은 보급품과 증원 병력이 끊긴지라..... 더 싸울수가 없었습니다.
프랑스 함대의 승리 로 버지니아 요크타운에 주둔하고 있던 찰스 콘월리스 장군 의
부대에 증원군을 보내려던 영국 해군의 임무는 무위로 돌아갔으며,
워싱턴 군 이 뉴욕에서 체사피크 만을 통해서 군대와 보급 물자를 운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으니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항복 하고 "미국은 독립" 을 이룹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라! 프랑스 는 캐나다와 이집트, 인도와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늘 영국에 패배 하다가 미국에서는 모처럼 이겼지만 엄청난 전비로 재정이 파탄 상태
에 이르자 루이 16세 는 새로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 3부회 를 소집했다가 이때 생긴
국민회의 를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다 대혁명이 발생해 망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립니다.
명나라 가 국력이 쇠퇴하면서 부정부패로 몽고족 보바이의난 전쟁중일때 발생한 조선의
임진왜란 에 황제국 체면 때문에 7년간 25만의 대병 을 파견했다가 재정이 파탄나서
세금폭징 으로 농민 반란 이 거세지고 여진족 통제에 소홀히 하다가 망했으니....
조선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에 대군을 주둔만 시킨채 여진족을 통제하면서 세금
폭징을 피했으면 100만에 불과한 여진족에게 그리 허무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1급 전열함 이 다수 동원된 대규모 해전에서는 순수 화력만으로 배를 박살내는 경우도
있었으니 대표적인 해전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트라팔가 해전 으로...
나폴레옹과 전쟁 중에 영국은 해전에 몰두 했으니 전통적으로 해군이 더 강했기 때문
인데 반면에 프랑스 해군은 대혁명으로 우수한 지휘관이 사라지자 부실한 상태 였습니다.
육군과는 달리 해군은 쓸 만한 해군병사를 양성하는데는 6개월 이 소요 되고
기술 병사나 지휘관을 양성하는데는 4년 이 걸렸기 때문인데....
우세한 해군력을 가진 영국은 프랑스 해안을 봉쇄 함으로써 프랑스 무역의
숨통을 옥죄어, 프랑스 함대로 하여금 항구를 나와 해전에 뛰어들도록 유도 합니다.
그런한 영국함대의 항만 봉쇄 결과 뛰쳐나온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1794년 부터 1805년
사이에 영국 해군은 여섯차례 큰 승리 를 거두었으니.... 200년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최대의 승리였는데 군함을 기술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없으나.... 영국 해군은 전보다 훨씬 효과적인 전술 을 터득 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영국해군은 알기 쉬운 신호체계 를 도입하여 지휘관의 통제하에 일사불란하게
해상 전술 을 펼칠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고 둘째, 영국 해군에는
뛰어난 지휘관 들이 많았는데1794년 6월 1일 영국군은 대서양 먼 곳 에서
항해하던 프랑스 해군을 발견하고는 즉각 공격함으로써 최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영국 함대는 처음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확보한 다음에 사선진 대형 으로 프랑스함대를
덮쳐 전열을 절단하고는 바람을 안고 접근전을 벌였으니 적이 바람을 타고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니 해전술 발전에 하나의 획을 그은 하루였는데 그때까지 일반적인
해전술은 마주보고 나란히 서서 각 선박이 차례로 질서 있게 포를 쏘아대는 것이었습니다.
신사적(?)으로 포격을 하다 보니 어느 쪽도 뚜렷한 큰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니 이때
지휘관들은 적을 격파하기 보다는 엄격한 정렬을 유지하는데 골몰했기
때문인데, 영국군의 신전술 은 1797년 세인트 빈센트 곶 해역에서 영국 제독
존 저비스 경과 넬슨 제독 이 스페인 함대를 무찌를 때 다시 그 위력을 입증 합니다.
넬슨 은 접근전에서 용맹한 행동으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저비스는 적 전열을 절단한 다음
합쳐지기 전 뱃머리를 돌려 다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영국 전열 뒤쪽에 위치한
넬슨은 영국군 선두가 시간내에 뱃머리를 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신속하게 적 전열로
뛰어들었으니 순간을 포착하고 명령없이 대열을 이탈해 독자적으로 취한 행동 이었습니다.
자신의 배 1척에 74문의 대포 를 장착한 넬슨은 무려 적선 7척과 교전 했으며....
그동안 영국 함대가 돌아와 합류 함으로써 영국군은 대승을 거두는데
다음해인 1798년 나일 해전 이 벌어지니, 넬슨은 나폴레옹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건너가자 추격 했는데 풍랑 때문에 따라 잡지는 못합니다.
열흘후 넬슨 함대가 이집트에 나타났으나 석양무렵이라 프랑스 함대는 안전 하다고
판단하고 닻을 내리자... 어두워질 때를 기다렸다가 넬슨은 프랑스
함대 뒤쪽으로 접근하여 기습공격 을 가했으니 프랑스 함대는 혼란에
빠졌고 13척 군함중 2척만이 탈출했으니..... 이집트는 영국 손 에 떨어지게 됩니다.
육전에서 무적인 나폴레옹 은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를 노렸으니
과학자, 교육가, 기술 공학자와 측량가도 포함됐다는 점에서 문화적인 면도 있었으며
동행한 지식인들은 적해와 홍해 사이 운하를 둘로 나눌 수 있는 가능성를 토론 했습니다.
넬슨의 14척 영국 함대 가 8월 1일 도착했을때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만에
닻을 내리고 있었으며 8미터가 채 안되는 모래톱 근처 얕은 물위에
떠 있었으니... 함대의 우현 측이 북동쪽과 열린 바다를 마주볼 때
모래톱의 남서부는 함대의 좌현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황 이었습니다.
15척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는 브루이 제독 은 성 빈센트곶 전투등 넬슨의 전술 을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해서 제독은 영국 전함이 프랑스 함대 대열을
둘로 잘라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닻을 내린채 전투대형 을 연결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브루이는 전투가 다음 날 아침에 시작될 것 으로 믿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수심이 얕으며 잘 모르는 곳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야간 공격 을 가해올 것
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 준비는 여유만만 이었으니..... 프랑스 함대는
밤을 틈타서 도주할 가능성도 준비했는데 넬슨 제독은 프랑스 함대가 얕은 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정박해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자신의 함대를 둘로 나누도록 명령 합니다.
첫번째 대열은 프랑스 전열과 모래톱 사이를 통과하고 두번째 대열은 수심이 깊은
쪽에서 접근 하도록 지시했으므로 프랑스 함대는 양쪽에서 포격 을 받게
되었으니.... 영국 전함 컬로든 호가 좌초되었으나 나머지 전함들은
해상에서 움직이며 프랑스 함대를 1척, 1척씩 따로 떨어뜨려 놓기 시작 합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프랑스 전함들이 동료를 도우러 오는걸 불가능 하게 했으며
넬슨은 여러척의 전함을 한번에 목표물로 집중 시킴으로써 작전을 완벽하게 실행할수
있었으니 프랑스 기함 오리엥 은 영국 전함 벨러로폰으로 부터 집중 포격을 받고
돛대를 잃은채 표류 하기 시작했으며 알렉산더와 스위프트슈어가 오리엥을 공격합니다.
21시경 오리엥에 불이 붙었고 전투를 중단한채 전함들은 얼마후 일어날 폭발에 대비하여
오리엥으로 부터 멀리 떨어졌으니 22시경 불이 화약고에 옮겨 붙었고 프랑스 기함이
폭발 하면서 타오르는 파편들과 선원들이 공중으로 수백미터 가량 날아올랐으며
천명 승무원 중에 오직 백명 만이 불타는 전함에서 헤엄처 나옴으로써 목숨을 건집니다.
대열의 끝에 위치했던 두척의 프랑스 전함 제네뤽과 기욤 텔만이 겨우 탈출에 성공
하고 나머지 프랑스 전함들은 8월 2일 아침에 불타거나 나포되었으니
프랑스 측은 1,700명이 전사하고 3,000명이 포로 로 잡힌 반면에.....
영국측은 218명이 전사하고 677명이 부상 당했으니 영국의 일방적인 대승리 였습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 다리 에서 만나다고.... 에드워드 베리가 지휘하는 리앤더호 는
넬슨의 승전소식을 급보 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던 중 나일 해전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전함 제네뤽과 마주쳐서 처절한 전투 끝에 나포 되었으며
이런 사정 때문에 승전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기 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해전으로 영국 해군은 프랑스혁명 전쟁기간 절대적인 제해권 을 확립 할수 있었으며
넬슨제독의 명성 에 공헌했는데 나일해전 은 문학 을 통해서도 묘사되었으니 펠리시아
헤먼 의 시 '카사비앙카' 의 첫 구절에 나오는 "불타는 갑판 위에 서 있던 소년" 은
전투중 폭발한 프랑스함 오리엥에서 전사한 해군 장교 카사비앙카의 아들 이라고 하네요?
나폴레옹에게 영국 해군은 두려운 존재 였으니 영국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도
해군력 열세 때문에 포기했지만 브레스트 와 툴롱 두 항구에 대한
해상봉쇄를 돌파하기 위한 작전을 시도하는데.... 1805년 여기
툴롱 에서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해군의 해상봉쇄를 돌파하는데 성공 하게 됩니다.
그러자 넬슨은 프랑스군을 대양으로 끌어내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여 10월 21일 트라팔가르
에서 교전하는데 넬슨은 이 해전에서 영국군의 전형적인 전술을 적용해 적의 전열을
끊은 다음 뱃머리를 돌려 접근전 을 벌였으니 적선 30척 가운데 18척 을 나포하거나
침몰시켰으나 넬슨은 치열한 접근전을 벌이던 중 적탄을 맞고는 쓰러져 눈을 감았습니다.
넬슨 은 해전사상 매우 독창적이고 지적인 용맹한 제독 이었으며 탁월한 지휘관이었으니
범선 시대 최후의 해전인 트라팔가르 해전 에서 영국은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제해권 을 완전히 장악한 넬슨은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지상 작전에만 한정시키도록 하여 결국에는 몰락의 길 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19세기 내내 세계의 바다를 장악 함으로써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
'팍스 브리타니카' 를 건설했는데.... 산업혁명후 철갑선 이 출현하고
범선이 쇠퇴하는 근대 전투에서는 해병이 다른 배로 건너가 전투를 벌이는
해전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순수 함포와 전술로 전투의 승패가 갈리는 시대가 열립니다.
산업혁명으로 철갑선 이 등장해 원거리에서 함포와 전술로 치르는 근대 최초의 해전 은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함대에 박살난 1904년 쓰시마 해전 인데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배상금 외에 중국의 영토인 요동반도와 타이완 을 차지하고 조선 까지
취했는데 러시아 와 프랑스, 독일 3국이 간섭해 요동반도를 토해놓는 치욕 을 당합니다.
이후 일본은 피눈물을 흘리며 절치부심 군비를 확충하고 영일동맹 을 맺고는 미국의 지원
까지 얻은후인 1,904년 러시아를 공격 하는데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여순을
기습하여 군항을 봉쇄 하고는 이어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격침 시키고 5월에는
요동반도 상륙 을 시작하였고 조선에서 북진한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진입 합니다.
일본군은 9월에는 랴오양을 점령하고 노기 대장 이 지휘한 일본군은 기관총 십자포화 를
뚫고 고지를 향해 돌격해 천신만고 끝에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 시킵니다!
3월에 일본군 25만은 러시아군 37만에 전투에서는 승리하나 보급선 이 엄청
길어지다 보니 탄약이 떨어져 백병전으로 7만명이 전사 하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일본군 전비가 예상의 두배인 9억엔이 소요되자 전비조달 도 어렵고 보급선 이
너무 길어지니 탄약과 무기 및 식량부족 에 허덕이는데 이토 히로부미 는
혜안 이 있었으니.... 전쟁전에 이런 사태가 올 것으로 미리 예상 하고
법부 대신을 지낸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가네코 겐타로 를 미국에 보냈습니다.
가네코는 하버드 동문이자 친구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에게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
책을 선물하는데... 무사도에 감명을 받은 루스벨트 는 1905년 5월 27일 사쓰마 출신
도고 헤이하찌로 일본함대 사령관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돌아 중국해를 거쳐온 러시아
함대를 격파 하자 중재에 나서 러시아 대표를 미국에 불러 일본의 승리를 확정시켜 줍니다.
러시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를 출발해 발트해를 거쳐 대서양을 지나
지중해 로 들어가려 했으나 일본과 동맹인 영국 해군의 방해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긴 항해를 했으며, 인도양을 돌아 중국 해안을 지날 때 석탄과 식수며 식량 보급 과
휴식을 위해 육지에 상륙하는 것을 영국 해군으로 부터 방해 를 받아 기진맥진 했습니다.
반면에 일본 함대는 휴식을 충분히 취했고 본국과 조선의 진해 에서 정비를 받은 함정에
승선해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도고 제독은 이 러시아 함대만 격퇴할 수 있다면
꽤 심각한 피해도 감수할 생각이었으니 적선을 발견했다는 정보 를 접하자 말자
5월 27일 새벽 5시에 한반도 남부 진해항에 대기중이던 일본 연합함대가 출항 합니다.
러시아 함대 는 불과 4척의 신형 보로디노급 전함과 그외 많은 구식 모델 함정을 보유한
채 반년에 걸친 오랜 항해 와 정비 부족 으로 배 밑바닥에 해초가 심하게 들러붙어
속도도 상당히 줄어들 수 밖에 없었는데 비해, 일본 함정들이 속도에서 거의 2배나
빨랐으니 도고 제독은 함대의 월등한 기동력 을 활용해 “T자 전법”을 두차례 구사합니다.
러시아 함대는 전함 8대, 순양함 8대, 구축함 9대 모두 25척 인데 비해 일본은 전함 4대,
순양함 8대, 구축함 21대등 33척 에 소형인 어뢰정 60대로 이루어졌는데
러시아 함선 보다는 신식 이었으니, 11시 발트 함대에서 발포로 포격이
벌어진 가운데 일본 연합함대의 일부가 발트함대 앞을 가로지르기를 하며 도발 합니다.
러시아 함대는 대열이 3열종대 로 바뀌게 되는데 13시 39분 까지 일본군은 연합함대 모든
함대가 집결하자 1,2 전대가 발트함대를 좌현 남쪽에서 확인해 전투개시를 명령하니
13시 55분 도고는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에서 Z기 를 기양했으니 Z기는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노력하라." 는 의미를 가진 신호기라네요!
14시 2분 침로를 남서로 정한 연합함대와 북동으로 정한 발트 함대는 14시 10분 양측 함대
의 거리가 8,000m 가 되자 도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였고 선두에 있던 기함 미카사 는 크게 좌현으로 돌기 시작했으니 러시아군
앞에서 대반전하는 일명“정자전법”혹은“도고 턴”이 시작되면서 포격전 이 시작됩니다.
러시아 기함 스보로프호 를 비롯해 전함 네척이 침몰했고 일본의 소형 어뢰정은 남은 배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전투 결과 러시아 해군은 1만명이 사망 했으며 전함 6척을 포함한
16척이 격침되고 5척이 자침 했으며 6척이 나포되고 6척이 중립국으로 도피 하였는데
무사히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건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 으로 총3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해군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포함한 6000명 이상이 포로 로 잡혔는데...
반면에 일본 측의 피해는 고작 소형인 어뢰정 3대와 군인1천명 에 불과했습니다.
대규모 해전에서 보기힘든 일방적인 대승리 인데..... "이날 일본은 함대 내 모든
장교와 사병이 용기와 기력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1905년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의 패배는 일본이 세계열강으로 부상 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주선한 미국의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을수 있었고 또한 러시아의 군사적 무능력을
드러내고 러시아의 위신을 실추시켜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 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세계 최고 해군은 영국 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미국과 일본 두 나라
가 영국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으니.... 일본은 처음에는 야마모토함 등
“거함 거포”를 위주로 했으나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사령관 아래에서 새로운
개념인 “항공기 전투” 를 위주로 “항공모함” 을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크게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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