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딱 4년 전인 1999년 3월말 어느날, 서울 태평로에 있는 S스포츠신문사 편집국. 아침
일찍 ‘도리구찌’(새 부리처럼 앞이 뾰죽하게 나온 모자)를 눌러쓴 30대 남자 한 사람이 어리벙벙하게 들어섰다.
그를 안내해 온 듯한 다른 중년남자가 곧바로 편집국 한가운데
자리잡은 편집국장 자리로 그를 이끌어 갔다. 두 사람이 편집국장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한 사람은 ‘만화가 강주배’, 다른 한 사람은 ‘I만화잡지
편집부장 K모’. 신문에 새로 연재할 만화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이날 두 사람은 편집국장을 찾아간 터였다.
강씨가 곧 넓적한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주섬주섬 그림 몇 편을 꺼냈다. 스포츠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토막 형식의 만화였다. 제목은 ‘용하다 용해’였고 주인공은 작은 키에 커다란 머리, 불룩 튀어나온 두꺼운 입술의 추남(醜男)
‘무대리’였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편집국장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아쉬워 거기 찾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문사쪽에서 먼저 그 선배를 통해 ‘어디 참신한
작가 좀 없을까’하고 급하게 사람을 찾고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전날 K씨가 나를 탁 생각해낸 모양이에요.
나는 처음에는 딱 잘라 거절했어요. ‘그렇게 마감에 쫓겨 가면서
그리는 것은 못 한다’고 하는 데도 막무가내로 ‘네가 해야 한다’고 우기는 거라. 친한 사이에 막 그러는 거 있잖아요. 그러니 어쩌. 해봐야 안
되겠지만 시도는 해 보자, 그렇게 된 거죠.”
더더욱 황당했던
것은 “내일 아침까지 작품을 신문사에 보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씨는 저녁 무렵에야 꿈지럭꿈지럭 연필을
잡았다.
“막상 연필을 들고 책상 앞에 앉으니 확 고민이 되데요.
모질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 후회도 되고 말이죠. 어쨌든 약속을 하기는 했으니 그려내야 될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좋다, 그러면 샐러리맨 만화를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죠.”
물론 그 이전까지 자신이 주로 그리던
몇몇 캐릭터가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 대신 전혀 다른 캐릭터들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일이 되려고 그랬을까. 만화가들로서는 가장
어려운 작업이 바로 캐릭터를 창조해 내는 것이라는데, 그날 그는 불과 두세 시간 만에 새로운 캐릭터들을 쓱쓱 그려냈다.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무대리와 그 주변인물들’이다. 별다른
특기도 재주도 없는 주인공 무용해 대리를 비롯해 그의 직속상사인 마순신 영업1부장, 동료 2명과 부인 소00과 두 아이였다.
강씨는 “무슨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아주 편안하고 쉽게
그려냈다”고 그때를 기억한다.말하자면 ‘예술적 영감’쯤 될 것이다. 그리고는 몇 가지 스토리를 엮어 작품을 만들고는 앞서 본 것처럼 이튿날
K씨와 함께 신문사를 찾아간 것이었다.
“작품을 넘기고 나오니
무슨 숙제를 다 한 것처럼 후련하데요. 선배가 그래요. ‘1주일 안으로 신문사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무조건 잘린 것이니 그냥 그런 줄 알아라’는
거였죠.
저야 그때까지도 뭐 밑져야 본전인 셈이고 되든 안 되든
그런 데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날 넘긴 작품이 딱 두 차례인가 세 차례인가, 신문에 게재되고 나서 ‘띠리리’ 신문사에서 전화가
온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뚝딱 해서 낸 것이 될 리 있나.’
지레 짐작하고는 속 편하게 전화를 받았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대뜸 “아, 강선생? 이거 예감 좋은데요. 지금 이
만화 이거 난리 났어요”라는 목소리가 건너왔다. “사람들이 이거 재미있다고 말이죠. 긴 말 할 것 없이 당장 이리로 좀 건너오쇼”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날로 정식 계약이 맺어졌고 이후 ‘용하다 용해’가
연재되면서 강씨는 S스포츠지의 간판작가로, 또 여자로 치면 그야말로 ‘만데렐라’(만화가의 신데렐라)로 하루아침에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거였어요. 한 달 만에
신문부수가 확확 늘어나 종전 두어 배를 쳤다는 얘기가 들리고, 또 일반 신문과 달리 스포츠지는 가판(街販) 부수가 중요하잖아요? 그 부수로
스포츠지 가운데 처음 1위를 차지하게 됐다는 얘기도 들리고 말이죠.
무엇보다 제 주변 사람들한테서도 ‘무대리 재미있다고 다들 난리다’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가 됐어요.
그제서야 ‘아 이게 사람들한테 먹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죠.”
0.03평에 그려온 샐러리맨의 애환 1,200일
그렇게 시작한 것이 벌써 4년. 기자가 그의 이야기를 쓰는 오늘, 그러니까 4월11일까지 강씨는
1,238회를 그려냈다. ‘대중문화’라는 것의 속성이 일정 기간 유행처럼 확 인기를 끌다 얼마 안 가 사그라드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4년, 1,200여 회를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무대리’의 인기는 조금도 시든 기색 없이 상종가다. 인터넷에 고정 팬클럽이 생긴 것은 물론 무대리 만화를 보기 위해 스포츠신문을 정기구독하는
사람도 갈수록 늘어난다는 전언이다. 강씨 자신도 이렇게까지 오래 무대리를 끌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0.03평에 그려온 샐러리맨 애환 1,200일’이라는 그럴듯한 가제(假題)를 생각하면서 기자가 서울
방학동 신동아아파트 근처, 월 40만원씩 세를 낸다는 그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맨 처음 꺼낸 말이 바로 “아따, 4년까지 끌 줄은
나도 몰랐응께”였다. 0.03평은 S스포츠지를 펴놓고 강씨의 만화 크기를 실제로 자로 재고 계산한 면적이다.
그는 1961년생이고, 기자는 1963년생. 무슨 직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범용(汎用)한
‘선생’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뭐했다. 해서 기자는 첫 만남에 대놓고 그에게 ‘성님’ 했다. 그는 전남 완도가 고향으로 서울과 호남 억양을 편한
대로 번갈아 썼다. 그런만큼 그에게는 형님보다 성님이 더 가깝게 들릴 것이다. 군살이 전혀 없는 가파른 얼굴에 가죽으로 만든 예의 도리구찌를
쓰고 있었다.
― 아무래도 ‘성님’이라고 하는 것이 제가
편하겠습니다. 괜찮죠?
“야 이거 화끈허네. 처음 보자마자 ‘성님’이오?
나도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 게 참 듣고 부르기는 좋기는 헌데 어째 좀 미안허네요.”
― 사람들이 ‘무대리’는 다 알아도 ‘강주배’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어쨌든 오늘 직접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만화쟁이가 유명해 뭐 하게? 만화 주인공이
유명해져야 신도 나고 돈도 나죠.”
― 만화 작품이 4년이나,
그것도 변함없는 인기를 끌면서 롱런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무대리’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작 그만뒀어야 하는데 여기까지, 한 4년 와 부렀네요. 초장에 한 6개월 하고 그만둘라고, 진짜루
그만둘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자기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드만요.”
― 아니 남들은 잘 나간다, 그러면 계속해서 천
년만 년 마르고 닳도록 해 나가려고 용들을 쓰는 판인데 왜 그만둘 생각을 합니까.
“그게 사정이 있어요. 당장 그때도 돈보담은 매일매일 마감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렇지 그게 무슨
그림만 툭툭 그려내면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슨 장편처럼 어떤 일정한 긴 스토리가 있어서 그것 따라 죽 그리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날마다 새로운 소재, 새로운 스토리로 그것도 팍팍 재미가
튀게 그려내야 하는 아이디어 싸움이니 보통 고역이 아니었죠. 게다가 그것도 매일 날밤 작업으로 마감 시간에 대야 하니까 이래저래
괴롭더라고.”
― 스토리를 쓰는 분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내가 생각하고 쓰고 하지만 그때, 신문 연재 시작할
때는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만화잡지 기자 K씨가 그걸 맡아줬어요. 그런데 그 양반도 한 6개월 하더니 힘들어 못 해묵겄다,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 스토리가 당장 힘들어 하는 판에 난들 힘이 안 빠지겠어요? 그래서 에라, 이 참에 그만둬야겠다, 작정했던
거죠.”
― 샐러리맨 생활이라는 게 무슨 특별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글쎄
말이오. 매일매일 단순한 생활의 반복이라는 것이 샐러리맨인데, 거기서 끊임없이 새로운 얘기를 찾아내 스토리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하는 일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죠.
게다가 내가 샐러리맨 생활이나 좀
해봤으면 모르겠는데, 머리털 나고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그게 아무리 가벼운 형식의 만화라고는 하지만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두 아이를 둔 직장인 가장이 샐러리맨으로서의 생활을 꾸려가는 것인데 경험도 없이 그것을 추스려 나간다는 게 영 자신
없더라고.”
― 어쨌든 지금까지
왔네요.
“사람이 공적(公的)으로 알려지고 숱한 사람들이 내 만화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예전 같으면 하기 싫으면 휙 내던져 버리는 것이 내 스타일인데 그때는 그렇게 안 되드만.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독자분들
고마운 힘에 밀려 그 덕분에 오늘까지 왔다고 하면 제일 정확할 겁니다.”
‘무대리 덕분에 돈을 많이 벌게 된 것도 지금까지 계속하게 된 이유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꺼내려다
앞에서 말한 그의 뜻을 훼손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목구멍에서 탁 막았다. 그 질문을 건너뛰고 그가 과연 ‘무대리’를 통해 얼마나 벌었을까
물어봤다.
― 세상 사람들은 성님이 떼돈 번 것으로들 생각합니다.
먼저 무대리 같은 만화를 연재하면 신문사에서 얼마나 받을까, 그걸 저보고 다들 물어보라고 하던데요?
‘무용한 무대리’ 덕분에 이뤄진
‘인생역전’
img2R“처음 계약할 때는 월 700만원에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돈 얘기는 밝히지 말라고들 하는데
나는 뭐 밝히든 안 밝히든 그런 거 별 의미를 두지 않으니깐. 능력이 되면 받고 안 되면 못 받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세월이 몇 년 가도 신문사에서 이걸 그냥 그대로
가져가는 거라. 안 올려줘. 돈 얘기 하는 거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만화가 아무리 인기를 끌고 해도, 또 그래서 신문 부수에 기여했다 뭐
그런 말을 들어도 모른 척했어요.
그런데도 3년 다 됐는데
신문사쪽에서 아무 말이 없어요. 주변에서 자꾸 ‘울어야 젖 주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마디 했어요. 그랬더니 요새 좀
올려주더라고.”
털털함으로 봐야 하나? 그는 “그건 그냥
고정수입이고 그것 말고 신문 바깥 수입이 사실은 더 크다”고 자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단행본 냈잖아요? 다섯 권. 지금까지 한 거 묶으면 한 30권 되는데 그거 다 묶을 정신은 없고
해서 일단 그것만 내놨어요. 앞으로 계속 묶어 내놔야 하겠지만…. 그게 또 꽤 팔린다고 하드만요. 그런 것이 있고 외부 홍보물 그려주는 것도
있고. 제일 크게 돈이 되는 건 역시 광고드만. 몇 개 했는데 그게 한몫씩 돼요.”
기자 역시 그가 그린 가전제품 등 광고 애니메이션을 여러 편 본 기억이 난다.
정작 만화 주인공 무대리는 여전히 과장 승진도 못 하고 부대끼는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작가 강씨는 그 ‘무용한 무대리’ 덕분에 이른바 요즘 유행어가 된 ‘인생역전’이 이뤄졌다.
그는 신문만화를 연재한 지 2년 만인 2001년 전에 살던 23평짜리 아파트에서 36평짜리로 옮겼다.
그리고 2002년에는 다시 49평짜리로 늘렸다. 물론 차도 바꿨다.
기자가 “성님, 저도 자유직 가진 사람들한테는 돈 얘기 안 물어보는데 ‘무대리’ 경우는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탁 털어놓고 그동안 벌어들인 수입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들이대자 이 대목에서는 그도 멋적은지 “마누라 통장으로 죄 들어가니까 나는
정말 눈곱만큼도 몰라” 했다.
img3L그리고는 “그냥 내가 술값으로 해서 다달이 마누라한테 150만원 정도 용돈을 타 쓰고 있다”며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을 굳히면서 “아니, 인터뷰가 아니라 오늘 세무조사 나온겨? 그렇게 꼬치꼬치 돈 얘기를 하게?” 했다. 기자가
“아, 배가 아파 그러죠” 하고 응수했다 (둘 다 크게 웃음).
‘도대체 샐러리맨 생활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샐러리맨들을 휘어잡는 만화를 그려낼 수 있느냐’는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샐러리맨 생활을 해본 적 없는’그의 지난 날들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들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만화를 업(業)삼아 시작한
것은 스무살 때, 고교 졸업 직후였다.
“그림 연습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했죠.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은 좌우지간 열나게 그렸으니까. 또 중학교 때부터 만화 습작이라는 것을 많이 하고
말이죠.”
1961년 전남 완도군 군외면 신흥리 출생. 국어교사를
거쳐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부친(강치호 ·79)과 모친(황신심·78) 사이 7남매 중 막내다. 부친의 부임지를 따라 광주로 건너와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광주에서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대성초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백운초등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숭일중을 거쳐 1980년 금호고를 나왔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이 만화가였고 소질도 있었던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저렇게 내 식대로 얘기를 꾸며보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나가는 데 재미를
붙였어요. 집안이야 엄했지만 그래도 7남매 중 막내이니 누가 뭐라고 그러겄어요? 사랑만 받고 살았지.
그러니까 태어나기는 잘 태어난 거죠. 막내둥이라서 사랑도 많이 받고 아주 자유분방하고 상상력도
풍부하고, 뭐 요즘 말로 그랬을 것 같다 말이죠. 그림 그리는 것이 그렇게 재미 있었고 아예 딱 초년에 그냥 이 다음에 뭔 일이 있어도 만화가가
돼야겄다고 마음먹고 달려들었죠. 그러니까 지금 그 꿈을 이룬 셈입니다.”
고교 재학때 나이 속여 낸 첫
만화책공부는 뒷전이었다.
“만화는 뭐니뭐니 해도 우선 손놀림이고 그림이 돼야 하니까 다른 데는 신경 안 쓰고 그림 연습만 많이
했죠.
집에서 부모나 형들이 무슨 그림이냐고 노상 쥐어박고
그림을 못 그리게 했지만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그림만 팠어요. 중·고등학교 때도 대학 같은 것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으니까.
지금 와서 보면 내가 그래도 생각은 제대로 박힌 놈이죠, 잉?
일찍부터 그런 정성을 들이니 확실히 실력이 붙더라고.”
소질이
있었는지 원체 그림 연습을 많이 해서 실력이 일찌감치 붙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미 중학교 시절 그가 습작한 작품이 서울에서
발간되는 I만화잡지에 연재될 정도였으니 그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된다. 물론 거기에 실린 만화도 “집의 다락이나 헛간에 숨어 그려 보낸
것들”이었다.
심지어 고교 재학때 첫 만화책을 냈다. 출판사를
찾아가 나이를 세 살 위로 속여 말하고는 출판 허가를 받아냈다며 그는 큭큭 웃는다. 야구를 소재로 그려 당시 광주 시내 만화방에 처음 내걸린
그의 만화책 제목은 ‘던져진 목걸이’였다.
“집에는 얘기도 못
꺼냈죠. 어느날 길거리 만화방을 지나치다 내 이름 내걸린 만화책을 아버지가 보신 모양이라. 주배라는 이름이 어디 그리 흔합니까. 한눈에 딱
알아보신 모양이더라고.
교육자인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가뜩이나 예전부터 그림 그리지 말라고 그렇게 혼내고 했는데 이건 아예 만화책을 냈으니 말이죠. 그래도 위에 형과 누나가 층층이
있고 또 막내고 하니까, 거기에다 아버지가 일찍 좀 깨신 분이라서 별 일은 없었어요.
그날 집에 들어오시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보더니 ‘애비하고 술이나 한잔 하자’ 그러시데요.
‘하기로 했으면 열심히 해라’그러시고 말드만요.”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만화를 그리면서 학원 등을 거쳐 이런저런 경로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혹은 어떤 이들은 자기 이름으로 만화책을 내 대중과 직접
승부를 거는 일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강군이 만화계에 첫발을
내디딘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만화가가 되는 길은 한 가지였다. 기존 유명한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거기서 습작기를 거치고
‘유통경로’를 찾고 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유명 만화가들은
으레 자신이 낸 만화책 뒤에 ‘문하생 모집’ 광고와 함께 연락처를 적어놓고는 했다.
주배군 역시 그 길을 따라갔다. 고교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독고탁’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상무 씨 집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얘기를 하면 두 선생님이 싸우실지도 모르겠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때 이선생이 나를
가로챘다, 그런 모양이 됐어요.(웃음) 나는 본래 허영만 선생 그림이 괜찮은 것 같아서 허선생 연락처를 찾았거든.
그런데 그 양반은 만화책에 연락처를 안 써 놨더라고요. 그래서
유명한 만화가들끼리는 서로 다 통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이상무 선생에게 물어보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먼저 그리 간 겁니다.
이러저러해서 허선생 집을 찾는다고 했더니 이선생이 ‘어디 그림
좀 보자’ 하는 거예요. 순순히 보여줬지. 그런데 이 양반이 그림을 보고 나서는 ‘너, 나랑 같이 일해 보자’ 그래요.
허선생을 찾아가도 받아줄지 모르는 판에 낯설고 물선 서울에서
그래도 그 유명한 이선생이 당장 받아주겠다고 하는데 거절할 힘이 있어야지, 그날로 거기 눌러앉게 됐죠.”
1980년 봄이었다. 그때부터 ‘무대리’로 ‘만데렐라’가 되기까지 18년이다. 그 중 군대 갔다 온
1년(방위 근무)을 빼면 17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남는다. 남들 보기에 강씨가 물리적 나이로는 40대 초반에 ‘빠른 성공을 이뤘다’고 하겠지만
그가 들인 시간을 감안하면 그렇게 말할 것만도 아니다. 그는 17년 동안을 무명 아닌 무명 작가로
지냈다.
‘무대리’로 ‘만데렐라’ 되기까지 18년의 무명
생활
이선생 문하에 좀 있다가 독립해서 자작(自作)하기로
하고 광주로 내려왔어요. 지금 부모님들이 계시는 산수동에서 한 3년, 꼴에 문하생을 두고 초보 작가생활을 좀 했죠. 그런데 1980년대 중반에
만화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어요.”
img4R“이현세식 제작 방식의 등장이었다. 이전까지 만화가들은 한 작가가 한 달에 만화책 한 권 이상을
그려내지 않는 것이 불문률로 돼 있었다. 만화도 엄연히 문화상품이며 작품인만큼 한 사람이 그 이상 그려내는 것은 능력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문화상품을 여럿이 달려들어 공장에서 대량제품 찍어내듯 해서도 안 된다는 나름대로의 쟁이 기질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관행을 깨뜨린 것이 이현세 씨였다. 그는
다작(多作)주의였다. 문하생들을 이끌면서 많은 작품을 내놓았고 자연스럽게 과거의 관행은 허물어졌다.
“장기간에 걸쳐 한두 편씩 작품을 내놓아서는 만화가로서의 길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광주
작업실을 걷어치우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이현세 씨의 문하생이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그 양반이 내 이름을 알더라고. 나한테 ‘문하생보다 독자적으로 작가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고 충고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전에 인연을 맺은 이상무 선생의 수유리 집으로 다시 갔어요. 거기서 이선생 사단에 소속돼 작업을
돕고 내 만화도 그리면서 한 7년 동안 생활을 했죠.”
고향 집의
성화로 같은 고향 처녀인 김경란(48) 씨를 소개받아 결혼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상대방도 교육자 집안으로 부친의 중매가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기억한다. 중학 2년생인 딸과 초등학교 5년생인 아들을 둔 지금까지 “별 유명하지 않은 만화가한테 시집와 고생을 많이 시킨 덕분(?)에
마누라한테 꽉 잡혀 살고 있다”며 강씨는 엄살이다.
이상무 씨
그늘을 떠나 실질적으로 처음 독립한 것은 그가 I잡지에 만화를 그리면서부터다. 1992년부터 6년여 동안 강씨는 이 잡지에만 작품을 내면서 작가
활동을 계속했다.
그동안 어린이들과 10대 청소년들로부터 인기를
끈 작품으로는 ‘덤비지 마라’ ‘소년협객 용’ ‘거꾸로 가는 동화’ ‘주먹’ 등이 있다. 그렇게 평범한 만화가로 오랜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앞서
본 것처럼 느닷없이 신문사에 작품을 내게 됐고 거기서 인생이 확 바뀌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런 그인만큼 “아침에 억지로 눈을 떠 막 씻고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출근시간 맞춰 뛰어나가는
샐러리맨 생활은 돈을 주고 하라고 해도 못 한다”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그러니 그런 그가 도대체 어떻게 샐러리맨 생활과 그 속에 숨겨진 애환을
알 수 있는가 말이다.
“사실 나같이 살아온 사람이 샐러리맨들
진짜 속내를 알까 하고 물으면 그건 거짓말이 될 겁니다. 그렇지만 어느 술자리에서나, 또 어떤 월급쟁이를 만나봐도 그들에게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통적인 생각, 공통적인 관심, 공통적인 스트레스, 공통적인 고민이 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잘 귀담아 들으면서 얘깃거리도 찾아내고 아이디어도
얻고 합니다.”
하루하루가 ‘용하다 용해’인 샐러리맨
무대리
그는 또 “진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샐러리맨들의 일상이 아니라 과연 매일 똑같은 것 같은 그 일상에서 그들이 과연 어떤 심정, 어떤 생각으로 생활하는가를 잡아내고 그것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것이야말로 제 작품이 롱런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고 덧붙인다.
“겉으로 보이는 것 말고 뒤로 감춰져 보이지 않는 속내와 이면을 끌어내고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독자들,
특히 샐러리맨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무대리가 마부장에게 정신없이 쥐어박히고 욕을 먹고 할 때의 속마음, 그 좌절과 분노와 반발심 같은
것을 표현해 내면 그것을 보는 샐러리맨들은 무대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무대리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고 동시에 자신이 갖고 있는 직장생활의 불만을 해소하고 스트레스를
대리배설하는 거죠. 동료와 화장실 또는 커피 자판기 옆에서 나누는 대화 역시 회의 때나 웃사람과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 것들을
그야말로 숨김없이 리얼하게 표현해 내려고 애쓰는 편이거든요.”
가정사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집에 들어가면 대개 ‘여우’ 하나, ‘토끼’ 한둘 거느린 가장들이 바로 샐러리맨 아닙니까. 우리
무용해 대리 역시 그런 가장이에요. 회사에서는 거래처 계약 하나 제대로 따오지 못해 구박받고 만년 대리로 (과장) 승진을 못하고 빌빌거려요.
집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마누라에게 소리도 치고 가장으로서 폼을
잡으려고 해보지만 이불 속에서 안 되는데요, 뭘. 대개 한 달에 1~2회, 그것도 단단히 마음먹고 ‘번데기’를 들이대며 달려들지만
‘1라운드(3분)’도 안 돼 ‘시동’이 꺼져 구박받는 그런 남자상이 바로 무대리라는 말이죠.
그런 이불속 사정까지 적나라하게 풀어내 주니까 샐러리맨들이 많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무대리를
보면서 나만 힘들고 구박받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위안을 받는 분들도 꽤 있을 테고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용하다
용해’죠.”
한때 여론으로부터 ‘너무 비참한 남성상을 그려놓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만큼 우리의 주인공 무대리는 ‘참 용하게도’ 하루하루를 끌어간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수많은 독자들을 흡인(吸引)하는
힘이라고 강씨는 거듭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만화가 성공을 거두는
비결은 비단 내용이 주는 공감 말고도 또 있을 것 같다. 바로 재치와 유머 넘치는 표현들이다. 강씨는 ‘용하다 용해’를 통해 “전에 없던
‘무대리적 언어’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냈다”는 말(일간지들 표현)을 들을 만큼 일반인에게 쩍쩍 들어붙는 기발한 의성어와 의태어들을
선보였다.
우리는 일상에서 ‘공식적으로는’ 욕설이나 거친 어투,
비속어 따위를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마음’ 또는 ‘비공식적으로’ 대단히 익숙한 말들을 알고 있다.
강씨는 바로 그처럼 상황에 따라 속마음을 표현해 내는, 그러나
결코 천박스럽지 않고 오히려 유머에 가까운 ‘워딩’(wording)을 구사해 퍼뜨려 왔다. 있는 그대로 옮겨 보면 이런
것들이다.
‘히걱’ 또는 ‘허걱’(놀랐을 때), ‘쿵야’ 또는
‘뚜시궁’(뭔가 비장한 순간), ‘뜨아’(기가 막힐 때) 등이 그렇고 욕설에서도 ‘야, 이 존만아’ ‘닝기리 조또’ ‘에이, 뜨벌’ 등 다른
곳에서는 XX로 표기될 만한 것들을 용하게도,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도록 바꿔 놓은 것이다.
물론 이들 워딩은 10대 청소년과 젊은 샐러리맨들의 유행어 수준을 넘어 아예 일상어로 입술에 달라붙은
지 오래다. 기자가 그런 얘기를 꺼내자 그는 이렇게 점잖게 나왔다.
“적확한 욕설·비속어는 재미의 원천”
“갈수록 그런 표현들을 쓰지 않고도 상황이나 심리를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게 제일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미 퍼져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저
스스로는 그런 표현은 의식적으로 점점 줄이고 있습니다. 재미있다고 해서 썩 바람직하지 않은 언어를 확산시키는 것은 분명히 옳은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우리 대중문화계에 퍼져 있는
욕설문화에 대해 ‘한 소리’ 갖다붙였다.
“영화나 소설 같은 것을 보면
우리 대중작품들이 욕설에 대해 참 둔감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는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욕설을 쓰면 교육상 안 좋다고 해서 거의 욕설을 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욕설이라는 것이 우리 언어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잖아요? 그러니 과거에는 그만큼 대중문화에서 말이 리얼하지 못 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지적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우리, 특히 영화를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이 난무해요.
그냥 얘기해도 될 것을 막 욕설을 갖다 붙이고, 그야말로 욕설의 남발이라 이 말이죠. 전에는 욕설이
너무 없어서 실제감이 떨어지고, 이제는 너무 욕설을 많이 써서 리얼하지 못한 현상이 벌어지더라고.
정말 어떤 대목에서 그런 욕설이나 속어, 은어 같은 것이 탁탁 나와 줘야 하는지 그 부분에 고민들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그 부분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거든요.”
“한 가지만 더 얘기하고 싶은 것은”이라면서 강씨는 “무대리만 보지 말고 다른 캐릭터들도 좀
보아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용하다 용해’에 등장하는 엑스트라들이다.
얼굴이 말처럼 생겨 눈만 뜨면 무대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고 밀어붙이는, 무대리의 천적(天敵)으로 설정돼
있는 ‘마순신’ 부장, 소 같은 이미지의 ‘소대갈’, 정나미 떨어지게 뺀질거리는 ‘정남이’, 알아듣기 힘들 만큼 혀짧은 소리를 해대는
‘장한혀’, 하는 짓마다 엉뚱하고 썰렁한 ‘육갑해’, 남편 무대리에 대한 원망을 하소연할 곳 없이 냉가슴만 앓고 사는 ‘하소연’에, 2003년
4월 입사한 무술 유단자이자 마부장의 대학 후배인 ‘천방축’ 등 만화에 등장하는 엑스트라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과 다양한 역할로 설정돼 있다.
그러면서 무대리를 중심으로 직장과 가정생활의 달고 쓰고 맵고 짠
이면과 속내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제 만화가 갖는 큰 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엑스트라들이 뿜어내는 거예요. 그들이 주인공 무대리의 진정한 친구라기보다 직장동료로 때로는 경쟁자로, 동조자로 ‘자기 위주’의
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정말 제 만화의 큰 힘이에요.
세상사 그대로라고 나는 봐요. ‘무대리’ 혼자 아무리 스토리를 엮어나가 봐야 성공 못 해요. 툭툭 한
마디씩 거드는 조역들이 재미를 팍팍 북돋우니까요. 지금까지 4년 동안 1,000번 넘게 작품을 냈어도 같은 스토리로 겹친 경우가 없다고
자부하는데, 그것도 다 그런 조연들이 존재하는 덕분입니다.
그게
바로 작품 속의 팀워크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만큼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소중하죠.”
인터뷰는 오후 4시부터 술자리를 겸해 이어졌다. 강씨나 기자나 불그레한 얼굴로 화기애애한 문답이
오갔다.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기자가 뜨악한 질문을 던졌다. “왜 만화를 그립니까”였다. 돌아온 대답은 짧고 투박했다.
“만화가 좋으니까 그리지”였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기자가 폼을 잡아보겠다는 듯, 누가 들어도 썰렁하기 짝이 없을 물음을 한 마디 더 꺼냈다.
“대학 가겠다는 생각 해본 적도
없다”
img5L“무대리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 같은 것이 있습니까.”
강씨의 대답은 조금 전보다는 길었다. “역시 기자라서 뭔가 좀 고상한 그런 것을 원하시는 모양이네”
하더니 “보고 느끼고 즐겁고 재미있고 공감하면 그뿐이지, 그것 말고 다른 거 없어요”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대학을 안 가고 일찍부터 한 길을 파는 것이 대학 가는 것보다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랴”라는 기자의 얘기를 들은 그는 약간 정색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아까 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했는데 나는 내가 좀 별나서
그런가, 사회생활 하면서도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대학을 안 나와 뭐 아쉽다거나 한 적이 거짓말 안 보태고 단 한 번도 없어요.
사실 나는 대학 가서 뭘 공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지금의 나보다 더 만화를 잘 그릴 것이라는 생각도 안 해요. 아우님 말한 것이 딱
정답인디―.”
2차로 자리를 옮긴 술자리에서 맥주 한 컵을 쭈욱
‘원샷’하고는,
“나는 이따끔 대학에 애들 보내야 한다고 눈에 불을 켜는
학부모님들 보면 이해가 안 돼요.
나도 내가 살아온 방식이 있고
생각이 있으니까. 나는 누가 뭐라든 내가 좋아하는 일 한 가지를 계속 파고들었고 거기서 내 생활과 기쁨과 보람을 찾았다, 그런 생각이거든요.
사실 나 지금 부러운 거 없어요.
그게 다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내 길을 정하고, 단순히 ‘재미있어서’ 정도가 아니라 그것보다 좀더 치열하게 매달렸거든.”
기자에게 잔을 쭉 내밀며,“뭐, 긴 말 필요 없고 나는 그런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우리 마누라하고 애들한테 딱 그러죠.”
오른손 엄지손가락부터 꼽아 가면서,
“하나, 애들 대학 보내려고 머리 싸맬 필요 없다. 둘,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잘 하는 게
뭔지 살펴보다 그쪽으로 집중해서 길러라. 셋, 가급적 일찍 그렇게 해라. 넷, 시작했으면 완벽하게 할 때까지 그러니까 끝을 봐라.
그겁니다.”
“우리 무대리가 뜬 이후 신용카드를 써본 적이
없다”고 껄껄 웃으며 그는 1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2차를 끝내고 나갈 때도 기분좋게 현찰로 척척 세어 술값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