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국 천하 (酒國 天下)
(메 밀 밭)
메밀꽃을 만난 달빛이 소금을 창조하였다.
밤이 이슥하도록 시간이 잠자는 듯한 원두막이다.
달빛은 은은하고 메밀밭은 바다가 되었으니 어찌 소금이 탄생하지 않을 수 있으랴.
소금을 안주삼아 한바탕 취해보자.
자욱한 물안개-
소금을 밟고 선 당나귀-
새벽 같기도 하고 저녁 같기도 한 여울목-
여기가 제6회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메밀꽃의 대명사 강원도 봉평이다.
영동고속도로 장평 나들목에 이르니 오대산에서 부는 바람이 지척에서 느껴진다.
행사기간 중에는 여러모로 복잡할 것 같아서 목도 컬컬한 김에 주말을 이용해 며칠 앞당겨 탐방 길에 올랐으나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많은 데 대해서 놀랐다.
세상사- 비밀이 없고- 오직 이 한수라는 것은 혼자서 챙기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장터인 듯한 읍내를 그냥 지나치면서 먼저 들린 곳은 2002년에 개관한 이효석 문학관이다.
벌써 연도에 메밀밭이 문자 그대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효석의 두꺼운 안경테 속으로 또 다른 문학세계가 전개된다.
1감으로 오늘은 뭐 좀 챙길 것이 있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효석문학관은 마치 날아갈 듯한 현대판 궁전이다.
생가(生家) 터 뒤편 언덕이 가히 하늘을 배경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박하면서도 뚜렷한 기품이 있다.
인간의 생체리듬에 가장 좋은 높이는 고기압과 저기압이 만나는 해발 700m지점이라고 한다.
이름 하여 HAPPY 700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평창군은 총면적의 65%가 여기에 해당하는 좋은 기후조건에 위치해 있다.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1907~1942)은 결핵성 뇌막염으로 35세에 요절한 강원도 평창이 낳은 현대문학의 대가이다.
알다시피 ‘메밀꽃 필 무렵’은 단편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저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을 두고 어찌 홀로 떠날 수 있었을까?
문학의 힘이란 크다.
-이효석-이한사람이 오늘에 이르러 봉평주민들의 의식주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소금을 뿌린듯한....>
이 한마디 말로서 봉평은 이제 관광 메밀마을로 확고하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문학관에서 소설속의 물레방앗간으로 가는 산책로가 꾸불꾸불한 산길을 따라 옷소매를 이끈다.
물레방아 맞은편이 해마다 효석문화제가 열리는 수 만평 메밀꽃축제의 현장이다.
손님 맞을 준비로 군데군데 원두막 설치공사가 한창이다.
섶나무로 엮은 징검다리 옆 새로 건설된 흥정천의 시멘트다리를 지나면 가산공원이 있고 장터와 어울려 소설속의 충주집이 등장한다.
네거리 코너-읍내의 중심이다.
(그러나 그 옛날의 충주 집이 있던 장소는 표지석만 남아있고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변모되어 약국 등이 개점하여 있다.)
** 표지석 글귀 **
-충주 집을 생각만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잠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시대배경은- 꿈은 있으나 희망이 없는 그러나 한줄기 빛은 있을 듯한 암울한 시골 장터다.
예나 지금이나 착한 사람은 당하기만 하고 살았던 모양이다.
작중인물 중에서 동이 어머니로 추정되는 성씨처녀는 순종형의 여인이었고 충주 댁은 앙칼진 여인으로 생활고를 이겨낸다.
친구이며 동업자인 조선달은 서로 간에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이면서도 알맞은 간격을 유지한다.
현실에 잘 적응하며 품성이 착한 동이를 작가는 미래인간형으로 내세웠고 이들 사이에서 강원도를 휘 젖고 다니는 왼손잡이 방랑자 허생원의 걸음걸이가 순수하게 돋보인다.
여기가 세기의 로맨스가 이루어진 곳이다.
그런데 갑자기 물레방앗간-모텔로 머릿속에 입력되는 건 왜 그럴까?
(객고가 좀 과했나?)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걸 보니 ‘어서 옵쇼’ 다.
여기서 허생원과 성씨처녀의 하룻밤이 무르익는다.
바로 보이는 대문 저 안이다.
물레방아 도는 소리가 무드-음악이었으리라.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획기적인 변화가 시도되는 동안 대문을 저렇게 열어놓았는지 아니면 닫았는지가 의문이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문을 닫을 마음의 여유는 없었을 것 같기도 하고... (-일촌의 광음도 불가경이었을 터-)
또 어찌 보면 상대는 처녀인데 범절을 갖추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달밤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닫으면 뭐가 보여야 일이 될 것 아닌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자면) 문을 약간 찌그리 놓고 진행하는 방법도 있긴 하나 그 역시... 바람에 덜컹거리기라도 한다면 ...다 된 밥에...
하늘도 축복을 내린듯 꽃다발이 생화로 변하여 지붕위에 피어있다.
아마 이맘때면 메밀꽃과 함께 같이 만발하는 모양이다.
메밀에 달빛이 얹히니 성씨처녀의 마음도 그만 소금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밤에도 물레방아는 도는가.
만일 물레방아가 역회전만 할 수 있다면 물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거뜬히 살린 허생원과 축하주라도 한잔하련만...
마침 봉평 중고등학교 가을 운동회가 열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가산공원(학교 맞은편)에서 자축연을 겸한 노래자랑대회가 제법 규모 있게 진행되었다
폭죽이 터지고 사물놀이가 바람을 타고 메밀밭에 물결을 일으킨다.
가산공원 한 모퉁이에 그 옛날의 충주 집이 재현되어 있다.
전라도 남원의 월매 집 비슷하다.
살평상에 주저앉아 주거니 받거니 주기삼매경에 빠지니 장단을 맞추어 주는 음악이 놀랍도록 제격이다.
마치 전속악단을 데리고 팔도강산을 유람하다가 이곳 봉평에서 메밀밭이 좋아 그만 하룻밤 유(留)하는 분위기다.
어쨌든 흐뭇한 기분에 넉넉한 가슴이다.
만취가 되니 물레방아는 점점 더 커지고 메밀밭은 가물가물 멀어져 간다.
술독에 빠졌는지- 소금에 절였는지- 분간도 못할 경지로 접어들면서 봉평의 하룻밤은 깊어간다.
만일 하느님이 나에게 백만 평의 땅을 준다면-
나는 전부 메밀을 심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