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적 배경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반도는 격동의 시대였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는 남쪽으로 나폴리 왕국과 여러 소규모 공국, 북쪽에는 스포르차 가문이 통치하던 밀라노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자리 잡고 있었고 중부에는 교황령과 메디치 가문이 이끌던 피렌체 공화국이 있었다.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는 자기들끼리 정치적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 이탈리아 반도를 두고 주변 열강들의 경쟁도 치열하여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샤를마뉴 대제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이탈리아 반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던 신성로마제국과 호시탐탐 이탈리아 반도를 노리고 있던 프랑스, 이 두 열강 사이에서 교황은 가톨릭의 지배자로서 외세로부터 이탈리아를 지켜내고자 했다. 이런 첨예한 대립과 긴장 속에서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 알렉산데르 6세로 교황 자리에 올랐다.
2. 보르자 가문 사람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후세의 사람들이 ‘가장 세속적인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타락한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최고의 권모술수가였다.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분열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할 웅대한 계획을 꿈꾸고 있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 때, 교회의 권위는 추락했고 이탈리아 국내외의 열강들에게 이용당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열강들은 콘클라베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람을 내세우려 음모를 꾸몄고, 이 틈새를 비집고 등장한 것이 로드리고 보르자였던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 출신이라는 약점을 돈으로 메꾸었고, 결국 알렉산데르 6세로 교황에 즉위한 것이다.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바로 알렉산데르 6세의 딸이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여러 정부를 두었다. 그중 가장 총애했던 여인이 반노차 카타네이였고, 그녀는 교황의 네 아이를 낳아 길렀다. 그 첫째가 바로 마키아벨리「군주론」의 모델이었던 체사레 보르자였고,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셋째로 태어났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의 아들이라는 지위 자체로만으로 이단아였다. 그는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라면 동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거할 만큼 냉정한 군주였다. 그는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와 함께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꿈꿨고, 그것을 실행할만한 배짱과 능력을 갖추기도 한 남자였다. 그는 동생 루크레치아도 자신의 야망의 도구로 여겼다.

체사레 보르자
격동의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대담한 여걸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사벨라 데스테나 카테리나 스포르차 등 남성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여성들이었다. 교황의 딸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이들에 비하면 오히려 평범한 여인이었다. 오빠인 체사레 보르자와 아버지의 야망과 욕심 아래, 그들에게 이용당할 만큼 아름다운 미모만을 가졌을 뿐, 아무런 욕심도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는 루크레치아의 결혼을 이용해 여러 열강들과 정치적 제휴를 맺었고, 그녀는 제 의사를 한번도 표명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이끌려 다녔다.
3. 세 번의 결혼
그녀의 결혼은 모두 아버지와 오빠에 의한 정략결혼이었다. 첫 번째 결혼은 루크레치아가 성인이 되기도 전인 12세에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상대는 페사로의 백작 조반니 스포르차였다. 그는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의 사촌이었다. 스포르차 가문과 밀라노 세력은 교황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교황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주목한 것이 루크레치아였다. 그러나 루크레치아의 결혼 후 교황은 아들 체사레를 비롯해서 자파의 13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오히려 밀라노 세력은 추기경 회의에서도 머릿수에 밀리게 되었다. 이후 밀라노 세력은 거듭 쇠퇴해갔고, 교황은 페사로 백작이 성불구라는 이유로 루크레치아의 첫 번째 결혼을 무효화해 버린다. 교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던 밀라노 세력 추기경들은 아무도 페사로 백작을 도와주지 않았다. 페사로 백작은 바티칸에서 자신이 성불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루크레치아는 나폴리의 비셸리에 공작 알폰소 다라곤과 두 번째 결혼을 올린다. 이 결혼은 체사레의 계획 아래 이루어졌고, 그의 왕국 창업이라는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단초였다. 그는 나폴리 왕국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그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고, 자신도 나폴리의 아라곤 왕녀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체사레는 나폴리 대신 프랑스와 손을 잡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다. 그는 추기경의 법의를 벗어버리고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사촌누이와 결혼식을 올린다. 프랑스와 교회의 제휴는 나폴리에게 더할 수 없는 먹구름이었다. 나폴리에 등진 체사레에게 비셸리에 공작은 정치적으로 쓸모가 없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공작이 암살자들에게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전모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루크레치아는 혼신을 다해 남편을 간호했다. 두 사람은 매우 사랑했고, 로드리고라는 아들도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바티칸으로 옮겼고, 믿을 수 있는 심복만 배치하여 경호하게 했으며 방 안에 들여놓은 야전용 화덕에서 직접 식사를 만들었다. 온몸으로 남편을 지켰지만 남편의 죽음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루크레치아는 남편을 살해한 오빠에게 단 한 마디의 반항도 하지 못했고 다시 그 상황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이 12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체사레는 교회군을 강화하고 자신의 꿈을 착착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프랑스와의 우호를 유지하면서 이탈리아의 다른 나라들을 자파로 끌어들이는 것이 시급했다. 베네치아, 만토바, 피렌체 등은 이미 체사레와 표면적으로 우호를 표방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페라라 공국이었다. 루크레치아의 세 번째 결혼상대로 페라라의 영주의 후계자인 알폰소 데스테가 낙점되었다. 그녀의 결혼은 항상 보르자 가문 남자들의 야망에 의해 비극으로 치달았지만 세 번째 결혼은 18년간 지속된다. 보르자 가문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전역을 덮친 말라리아에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가 앓아누운 것이다. 노쇠한 교황은 고열을 이기지 못했고, 보르자 가문의 숙적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율리우스 2세로 교황에 즉위했다. 체사레는 병마에서 벗어났지만 프랑스와 다른 이탈리아 나라들의 배신과 정적들로 인해 감금되고 말았다. 루크레치아는 체사레의 석방을 위해 여러 차례 탄원을 하고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루크레치아의 위치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황인 아버지의 배경 때문에 시집온 루크레치아를, 페라라의 시댁에서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 또한 보르자 가문의 몰락으로 루크레치아는 내쳐질 마당이었다. 이 상황에서 루크레치아를 지켜준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 알폰소였다. 그는 아무도 아내의 지위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남편의 보호 아래 15년간 평온하게 살았다. 1519년, 그녀는 열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당시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은 교황청과 거듭 불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아이를 낳고 계속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녀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남편과 아이들을 부탁하는 서신을 남기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추문과 비극으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은 이렇게 마감했다. 그로부터 2년 후, 교황은 페라라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녀가 죽기 직전 간절하게 부탁했던 남편과 아이들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녀의 서신은 또다시 헛수고로 끝난 셈이다.
4. 보르자 가문의 딸로 살아야 했던 여인
핀투리키오-시스니타 성당 벽화 중 루크레치아 보르자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는 배신과 음모, 권모술수로 얼룩진 격동의 시대였다. 루크레치아는 그 격동의 한가운데인 교회의 중심부에서 태어났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의 야망과 영광 사이에서 그들의 명령대로 순종했고 거기에 따랐다. 가장 빛나는 최고의 권좌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자리에 앉지 못했고, 아버지와 오빠가 야망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의 삶은 보르자라는 이름에 얽혀 비극적인 실타래가 되었다. 보르자 가문의 영광 아래 루크레치아는 비극적인 결혼생활을 거듭해야 했고, 두 오빠 사이에서 근친상간의 추문에 시달려야 했다.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평범했던 그녀의 인생은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너무도 평범했던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는 너무도 비범했고 이것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교황의 사생아라는 출생부터가 불행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는 불명예스러웠다. 알렉산데르 6세, 체사레 보르자와 더불어 그녀의 이름은 팜므 파탈의 요부로 오르내렸다. 하지만 거대한 야욕으로 얼룩진 격동의 시대에서 그녀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가혹하다고 여겨진다. 그녀는 권모술수의 제물이었고, 정쟁의 희생양이었다. 어찌되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사료들은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당대 최고의 미인이며 보르자 가문의 영양이라고 전하고 있다.
자료 출처 : 시오노 나나미 著 「르네상스의 여인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김정미 著「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