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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4일 [연중 제15주일]
마태오 10,24-33
요즘엔 왜 기적이 적게 일어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받고 파견받습니다.
병의 치유는 하느님만의 능력이고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치유의 기적을 좀처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그냥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예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한 중년 남성이 자전거를 탄 10대 소년이 차에 깔린 것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차를 들어
올렸습니다.
소년은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아저씨, 조금만 더 높이요, 조금만 더 높이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중년 남성은 차를 20센티미터 이상 들어 올렸고
그 소년을 친 운전사가 소년을 빼냈습니다.
그는 “사고 현장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어요.
그 소년에 제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거였죠.”라고 말했습니다.
중년 남성의 이름은 톰 보일이고, 이 일은 2006년 여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뜻밖에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2005년 여름 영국 선더랜드에서 친구와 함께
캠핑하던 23세 카일라 스미스는 차를 나무에 들이박는 사고를 당해 차가 뒤집혔습니다.
신장 165센티미터의 가냘픈 스미스는 자신도 등뼈 두 마디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과 함께 타고 있던 친구를 빼내기 위해 차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무조건 차를 들어 올리지 않으면 친구의 다리는
못 쓰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 팔을 운전석 창문으로 넣어 차 지붕을 밀어 올렸죠.”
스미스는 BBC 등 영국 언론에 나와 자신의 몸무게보다 20배가 더 나가는 무게를 들어 올릴 당시 자신은 차 무게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이런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때의 특징은 ‘사랑’은 있는데 더는 줄 것이 없는 상태라는 데
있습니다.
이를 ‘가난’, 혹은 ‘청빈’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이르셨습니다.
억지 가난이 아닌 다 내어주어 더는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당신 영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지만, 2017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며 후원금을 모은 뒤
수만 명으로부터 12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모아 외제차를 사고 요트 파티를 하는 등 호화 생활을
즐기는 데 쓴 일당이 잡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도 받은 돈 일부를 후원하기는 하였습니다.
사진은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알고 그들에게 기부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병원에 갈 돈 정도는 줄 수 있으면서 그것은 아끼고 주님께 치유의 기도를
하면 들어주실까요? 하느님은 조롱당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에 기적이 없다면 아직은 교회가 신자들이나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황이 교황청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유럽 전역에서 걷은 돈들이 수레에 실려 교황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자랑스럽게 “저것을 보아라.
이제 베드로가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사도 3,6)라고 하던 때는 지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도 “맞습니다.
교황님, 이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라고 하던 때도 지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페루 리마의 성 마르티노 수사는 흑인입니다. 수도회의 재정 사정이 나빠지자 그는 자기를
노예로 팔아 수도회의 재정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줄 때 빵이 무한정 늘어나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이런 분들의 시복·시성 조사 때 꼭 하는 게 기적 심사입니다.
성인의 생전에 일으킨 기적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뒤에 거룩함의 표징으로 일어나는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성인이 더는 줄 것이 없이 되었을 때 분명 그 성인을 통해 당신께서 더 내어주십니다.
이러한 표징들이 많아야 초대 교회처럼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4일 [연중 제15주일]
복음: 마르 6,7-13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여름 캠프 온 아이들을 위한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대형 식자재 마트에 갔습니다.
이것저것 잔뜩 산더미처럼 카트에 싣고 계산대 앞에 서니 근무하시는 자매님께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묻습니다.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그 상황에서 ‘사실 저는 천주교 신부인데요!’ 하기도 거시기 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식당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식당이 아닌 것 같은데...아무튼 더위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십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야 재미있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일이지만, 가족들의 생계가 자신의 어깨에 달려있는 자영업자들,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실까,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는 마트 직원의 질문 앞에 다시 한번 제 신원, 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각별히 총애하셔서 이름을 불러주시고, 선택하시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는데,
그러한 소명에 기쁘게 응답하고 있는지, 마지막까지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 때로 근사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폭군이나 압제자의 잔악한 횡포나 그릇된 지도층 인사들의 타락 앞에서도 그저 숨죽이고 지낼 뿐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 한번 보십시오. 주님으로부터 예언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고관대작들 앞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며, 그의 파렴치한 치부를 아무런 가감없이 고발합니다.
서슬퍼런 예언의 말씀 앞에 왕들조차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평생 한두번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생애는 핍박과 돌팔매질과 추방과 놀림의 연속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신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도망다니기까지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거룩한 주님의 지성소 베텔 땅을 더럽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가서 예언하며 밥 먹고 살아라, 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의 질책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스 7,14-15)
보십시오. 아모스 예언자는 철두철미한 신원의식, 겸손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근본, 본래 처지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본래 양치는 목자요,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농부였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결핍 투성이요 천덕꾸러기였던 원래 나의 허물을 벗고 사목자가 되고 책임자가 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변합니다.
자신의 근본을 잊고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어딜 가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 나를 보필해야 합니다.
슬슬 주님께서 혐오하시는 거짓 목자, 삯꾼으로 전락하는 중입니다.
요즘 저는 일부러 이런저런 힘든 일들을 골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까마득한 시절에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산업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근로자였습니다.
예언자요 사목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는 비결은 나의 근본, 내 결핍 투성이의 보잘것없던 모습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일 강론>
(2024. 7. 14.)(마르 6,7-13)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의 그 마음으로.>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1)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ㄴ-11).”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도 ‘응답’입니다.
따라나선 것만이 응답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7-9ㄱ).”
이 말에서 ‘해로운 것’이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쓰레기’는 ‘가지고 있을 가치가 없는 것’, ‘버려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삶’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가치 없는 것들을 버려야 정말로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또는 버리지 않으면,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아까워하면서 버리지 못한 그것들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지 못하게 막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 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이 당신을 처음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렸던 그 마음 그대로, 또 그 모습 그대로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빵, 여행 보따리, 전대, 돈, 여벌옷 등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런 것들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해로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버렸던 ‘쓰레기들’을 되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선교활동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은, 이미 버린 쓰레기들을 되찾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너무 심한 말이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의 표현이 상당히 강하긴 한데, 그것은 그만큼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재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정말로 신앙생활에 큰 방해가 됩니다.>
또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텐데, 우리는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고 삶이다.’ 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3) “가져가지 마라.”는 “가져오지 마라.”이기도 합니다.
‘빈손’으로 떠난 제자들은 돌아올 때에도 ‘빈손’이어야 합니다.
4)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어디에서나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거든”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여기서 ‘아신다.’는 ‘알고 계시니까 주신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을 먹이실 수도 있지만,
착한 이들을 통해서 먹이시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십니다.
사실 믿는 사람들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고, 그게 걱정이 되니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사람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걱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걱정에 사로잡혀서 걱정만 하다가 믿음이 희미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면 걱정이 희미해집니다.>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숙식을 제공한다면, 그 도움을 주님의 은총으로 믿고 감사히 받아들이라는 뜻인데,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다른 집으로 옮겨 가지 마라.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주는 대로 먹는 것과 민폐를 끼치는 것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민폐를 끼치는 짓을 하는 것은 ‘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