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아가 4:6-10)
아 4:6-10=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다 빼앗겼다고 합니다. 무엇이 솔로몬의 마음을 빼앗았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즈음 들어서 연예인들의 자살이 급증합니다. 왜? 자살을 하는가? 정신과 의사들의 진단은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우울증은 결핍에서 와요.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우울하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사랑받고 싶다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아름답게 가꾸는 겁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아름답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눈에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도 솔로몬의 눈엔 술람미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각 사람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움이란 정형화 되어 있지 않고 주관적인 겁니다. 이를 두고 속된 말로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에 TV를 보았습니다. 목욕탕에서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토크를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거기에 개그맨 박휘순이라는 청년이 나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박휘순은 스스로가 추남이라고 말해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 이 시대 미적 기준으로 보면 못 생겼어요. 그래서 못생긴 사람의 캐릭터로 연기를 합니다.
이야기 화제가 사랑 이야기입니다. 못 생긴 사람이 사랑을 받아 보았겠느냐? 라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떤 게스트 분이 박휘순씨는 키스해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이 물음은 당신 같이 못 생긴 사람이 어찌 여자에게 키스를 받아 보았겠느냐? 라는 뉘앙스가 깔린 질문이에요.
그러자 주저함 없이 바로 있다고 대답을 하는 겁니다. 모두가 놀랍니다. 아니! 어떻게 그 얼굴에 여자랑 키스를 할 수 있느냐? 입니다. 전부 궁금해서 그럼 누구랑 했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는 신봉선씨랑 했다고 하는 겁니다.
일제히 시선이 신봉선씨에게로 옮겨 갑니다. 그러자 신봉선씨가 어휴~ 그땐 똥 밟은 기분이라고 합니다. 똥 밟은 기분이란 말은 내가 왜? 저런 못 생긴 사람과 키스를 하여야 했는지 기분이 더럽다는 거예요. 아무리 연기이지만 못생긴 사람하고는 싫다는 겁니다.
이에 박휘순씨도 나도 그래! 라고 합니다. 나도 너 같이 못 생긴 여자랑 왜? 얽혔는지 기분이 찝찝하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가 왜? 저런 못생긴 사람하고 키스를 했는지 억울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이 모두가 박장대소 하는 겁니다. 이는 둘 다 못생긴 캐릭터로 연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이 시대 미적 기준으로 보면 추남이고 추녀에요. 못 생겼어요. 이 시대 미적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토크를 진행하는 분이 박휘순씨에게 TV에서 하는 연기 말고 실제로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받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질문하는 사람은 그 얼굴로는 실제로 여자로부터 프러포즈를 받을 수 없다는 질문이었어요. 어느 여자가 저렇게 못생긴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하겠느냐 에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공감하는 뜻으로 웃었어요.
그런데 의외의 답변을 하는 겁니다. 어떤 고등학교 여자 선생님이 자기가 이상형이라고 적극적으로 프러포즈를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전부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아니 어떻게 고등학교 선생님이 그럴 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고등학교 여자 선생님이 눈이 삐뚤어지지 않고서는 어떻게 당신 같이 못생긴 사람을 사랑한다고 프러포즈를 할 수 있느냐 에요.
그래서 함께한 게스트들이 그럼 얼른 붙잡지 않고 뭣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박휘순이가 하는 말이 압권입니다. 그 여자 선생님은 자기의 이상형이 아니라서 거절 했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모두가 헐~ 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쩍 벌리고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침묵하는 것은 아니 그 얼굴에 감사합니다! 하고 붙잡아야지 뭘 퉁기느냐! 라는 반문인 겁니다.
그러자 이번엔 그 여자 선생님에 대하여 궁금한 겁니다. 아니 고등학교 여 선생님이면 이 시대 신붓감으로 치면 일등인데 어째서 저렇게 못 생긴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하냐는 거지요. 이유는 간단해요.
그 여자 선생님 눈에는 박휘순씨가 이상형이래요. 다 못났다고 하지만 그 여자 선생님의 눈엔 박휘순씨가 멋지게 보인 겁니다. 그러니 이상형이라고 프러포즈를 하지요.
이 세상엔 못난 사람은 없어요.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추남 추녀도 아름답게 보는 임자를 못 만났을 뿐이에요.
옛말에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는 아무리 못 생긴 사람도 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못 생긴 짚신도 다 짝이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실이 맞는 것 같아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보고 너무도 아름다워서 흠이 없다고 합니다. 너무 예뻐서 마음을 다 빼앗겼다고 하잖아요.
아니 누가 보아도 술람미를 추녀에요. 여자로서 아름다움이 없어요. 술람미 본인도 스스로를 게달의 장막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술람미를 최고로 예쁘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예뻤으면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세상에서 너 같이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최고로 예쁘다는 겁니다. 얼마나 사랑 했으면 이런 찬사를 보내겠습니까? 가히 콩깍지가 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이런 고백은 다른 사람들은 공감 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일반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본다면 술람미는 못생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만약 다른 사람에게 내 여자 이쁘지 라고 한다면 수용하지 않을 겁니다. 보편적으로 이쁜 여자들은 예루살렘 여자들이니까요. 술람미는 오직 솔로몬의 눈에만 예쁜 겁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사랑이야기에요. 맞아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인간들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과 죄인의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가(雅歌)서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한 이야기를 말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예수님과 죄인의 사랑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썩어 냄새나고 문드러진 문둥병과 같은 죄인을 사랑하는 것을 솔로몬이라는 왕과 술람미라는 노예를 통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봐라! 예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솔로몬은 예수님의 마음과 눈으로 술람미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니 술람미가 그렇게 예쁜 겁니다. 야~ 넌 어쩜 그렇게도 예쁘니! 난 너를 보면 가슴이 설레고 쿵쾅거린단다! 나는 지금껏 너 같이 예쁜 여자는 본 적이 없단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칭찬을 이끼지 않고 있는 겁니다.
너무 예뻐서 보쌈을 하고 싶었나 보아요. 그래서 내가 몰약 산으로 가서 기다릴 테니 그리로 오라고 하지요. 마치 옛날 처녀총각들이 물레방앗간에서 기다릴 테니 오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실컷 사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에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시면서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 할 테니 거기서 만나자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을 봅시다.
아 4:7-8=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는 말은 하루의 끝이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쉬는 것과 같아요. 이젠 수고를 그치고 쉴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녁은 영적으로 종말이란 말입니다. 세상 수고를 끝내고 안식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것과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 술람미는 수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뭔가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가 있는 곳은 사자굴이고 표범의 굴이라고 합니다. 사나운 맹수들이 우굴거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자와 표범들에게 잡아먹히지 말고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자 굴에서 나와 몰약 산으로 도망치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롯을 소돔 고모라에서 끌어내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잠시 후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니 도망치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이런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도 말씀 하셨어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예루살렘이 우겨쌈을 당하거든 너희는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뒤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군사 70만을 거느리고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습니다. 이 때 산으로 도망한 사람들은 다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유의해 보아야 할 대목이 왕이 궁궐을 버리고 몰약 산으로 간다는 겁니다. 알다시피 왕이 있어야 할 자리는 궁궐이에요. 그런데 궁궐에서 나와 몰약 산으로 간다고 합니다.
이는 곧 왕이 있을 자리는 궁궐이 아니고 몰약 산이란 말입니다. 몰약 산은 죽음에 산이에요.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왕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왕이 죽는 그 자리로 신부를 불러내는 겁니다. 왕의 신부도 화려한 궁에서 살 것이 아니라 몰약 산에서 살아야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궁궐에 있는 신부를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 너도 곧 따라 오라고 합니다.
왜? 신부를 궁궐에서 빼내서 몰약 산으로 데리고 갈까요? 이는 술람미가 있는 곳엔 짐승들이 우굴거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궁궐엔 사자와 표범들이 우굴거리니 그 굴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신약 식으로 풀어 봅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왕이 사는 궁궐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었어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사자와 표범들이 우굴거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을 저주 해 버립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뜨림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나와 갈보리 산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예루살렘은 더 이상 거룩한 곳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곳이에요. 그래서 AD 70년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어요.
왕이 왕궁에서 나왔다는 말은 왕이 없는 왕궁은 저주 받아야 할 곳이란 말입니다. 왕이 궁궐을 나왔다는 말은 그 곳은 더 이상 왕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바벨론에 의해서 솔로몬 성전과 예루살렘 성이 불타버린 것입니다. 왕이 없는 궁궐은 밤처럼 적막강산이에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는 것은 시대의 끝을 말합니다. 이는 곧 세상의 끝이 다다랐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나온 것은 예루살렘의 종말을 고하는 의미에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나와서 갈보리 산으로 가셨어요. 거기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요.
몰약 산은 죽음의 산이에요.
몰약 산과 유향 산은 상징이에요. 몰약이란? 시체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에요. 사람이 죽으면 몰약을 발라서 썩지 않게 했어요.
그러니 몰약 산이란 시체가 있는 산이란 말입니다. 또한 유향 산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유향을 피워서 시체가 썩는 냄새를 나지 않게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유향이란? 부패한 냄새를 제거하는 향이에요. 그래서 몰약 산과 유향 산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몰약 산이란? 죽은 사람이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몰약으로 발라서 부패하지 않게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몰약 산이나 유향 산이란 말은 죄인이 죽어서 더 이상 죄인의 냄새가 나지 않게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몰약 산과 유향 산은 신약적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이 죽는 곳이에요. 그럼에도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썩지 않게 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에게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의인으로 살려 내는 곳이에요. 밖에서 보면 십자가는 죄인이 죽어 있어요. 그러나 십자가 안에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성도들이 살아 있어요.
예수님의 피가 발려져서 죄와 상관없는 자로 있어요. 그러니 십자가는 죽음과 영생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마치 몰약 산과 유향 산이 동일하듯이 십자가는 죽음과 영생이 함께 해요. 이건 비밀이에요.
솔로몬이 간 몰약 산은 궁궐(세상)과 다른 세계입니다. 거긴 인간 냄새가 나지 않는 곳입니다. 죄 용서라는 향긋한 유향의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과 다른 세상입니다. 십자가 안은 천국입니다. 거긴 죄인의 냄새가 나지 않는 곳입니다.
몰약 산은 세상(궁궐)과 다른 곳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이고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공동묘지와 같아요. 송장이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에요. 시기와 질투와 부정과 사욕과 음란과 미움이 난무해요. 이건 썩은 냄새에요.
왜? 인간들의 썩은 냄새가 풍깁니까? 이는 서로가 살겠다고 상대를 물어뜯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곳이 세상이에요. 내 입에 밥을 넣기 위해서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을 빼앗는 곳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세상은 산다는 것 자체가 전쟁이에요.
월드컵을 보세요. 이긴 자는 웃고 진 자는 울어요. 교회를 보세요. 한 쪽에선 교인이 왔다고 웃고 한쪽에선 교인이 나갔다고 울어요.
세상은 내가 살기 위해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입니다. 내가 사랑받기 위해선 남을 미워해야해요. 사랑을 독점해야 해요. 그래서 서로 물고 뜯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내가 항상 인정받아야 해요. 목사의 사랑도 내가 독점해야 해요. 남에게 지고는 못살아요. 잠이 안와요.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이를 뿌득 뿌득 갈아요. 항상 으뜸이 되어야 직성이 풀려요.
탐욕으로 가득 찬 죄인들은 사자처럼 표범처럼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어요. 생명의 냄새가 나지 않고 죽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요. 솔로몬의 궁궐이나!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이나! 이 시대 교회나 더러운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합니다.
교회 안에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짐승의 냄새만 진동하고 있어요. 성도에게서 향기로운 유향이 풍기지 않고 고약한 피 비린내가 풍겨요. 입에선 사랑과 은혜가 나오지 않고 입만 열면 시기와 질투와 광포와 패역함이 나와요. 죽이는 독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짐승 냄새가 없는 몰약 산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술람미도 짐승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오라고 하는 겁니다. 솔로몬이 기다리겠다고 한 몰약 산은 곧 예수님이 기다리는 십자가와 같아요. 십자가는 인간의 정과 욕심을 못 박는 곳입니다.
탐욕으로 가득찬 죄인이 죽는 곳이 십자가에요. 성도가 예수님을 만나는 곳은 십자가에요. 예수님은 십자가 안에서만 만나 주세요. 죄인이 죽어서 장사 된 곳이 바로 몰약 산이에요. 십자가라는 몰약 산엔 인간 냄새가 나지 않아요.
몰약 산과 유향 산이라고 하는 것은 각종 암투가 횡행하는 궁궐과 반대되는 세상 밖을 말해요. 궁궐 속엔 사자와 표범들이 우굴거려요. 거짓 목사와 삯꾼들이 즐비해요. 피 비린내가 나요.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사자와 표범들이 우굴거리는 굴에서 나오라고 하는 겁니다. 사자 굴과 표범의 산이란? 죽음이 지배하는 곳을 상징해요. 술람미에게 적용하면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죽이고자 호시탐탐 노리는 궁궐을 말하고! 이 시대로 적용하면 타락한 교회를 말합니다.
레바논과 헐몬 산은 거룩한 곳이에요. 솔로몬 궁궐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헐몬 산의 나무들로 지었어요. 향긋한 냄새가 나와야 해요. 영적으로 말하면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게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자와 표범들이 우굴거리는 처소가 되고 말았어요.
솔로몬이 사는 궁궐이라면 평화가 넘쳐야 합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뭡니까? “평화” 잖아요. 그럼 솔로몬이 기거하는 궁궐엔 평화가 넘쳐야 하잖아요. 평화의 궁이라고 한다면 미움도 없고 시기도 없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평화는 없고 시기와 질투와 모함과 죽음만 넘치고 있어요. 여인들의 질투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어요. 서로 왕의 사랑을 차지하고자 온갖 권모술수와 중상모략이 난무 했어요. 그러니 사자 굴과 같고 표범의 굴과 같은 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레바논과 헤르몬 산은 교회를 상징해요.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곳이에요. 뜻대로 본다면 용서와 자비가 풍겨 나와야 해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야 합니다. 그런데 강도의 굴혈이 되었어요. 서로 물고 뜯어요.
인간의 조건으로 차별이 난무해요. 은혜라곤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세상의 가치가 그대로 통용되고 있어요. 그러니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멸시를 당하는 겁니다.
야고보서의 말대로 돈 많고 잘사는 사람이 오면 환영하고 돈 없는 사람이 오면 천대하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는 돈에 가치로 교인들을 판단해요. 목사들은 교인을 돈으로 보아요. 소고기에 등급을 매기듯이 교인들도 등급을 매기고 있어요.
사회적인 지위나 헌금 순으로 등급이 매겨져요. 그러니 자칭 의사나 변호사나 사장이나 하는 “사”자 가진 교인들이 들어오면 좋은 고기 들어왔다고 좋아 하잖아요. 세상 가치로 판단해서 좋은 신자 나쁜 신자로 판단하잖아요.
얼마나 타락했으면 교단마다 세례교인 1인당 주일날이면 1만 원 이상씩 내야 한다고 하겠어요. 중세교회 면죄부나 이 시대 세례교인들에게 징수하는 인두세나 다를 바가 없어요. 교인의 머릿수는 곳 돈인 겁니다.
결국 교회의 바탕엔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돈이 깔려 있어요. 교회가 예수님의 피로 세워지지 않고 돈으로 세워졌어요.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용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돈 없으면 교회도 못 다니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솔로몬의 궁궐이나 이 시대 교회나 똑같아요. 인간들의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해요. 그래서 솔로몬이 그 더러운 곳에서 나와 냄새 나지 않는 몰약 산으로 같이 가자고 하는 겁니다. 거긴 인간 냄새가 없고 인간의 차별이 없는 곳이니 가자고 합니다. 몰약 산엔 검둥이라고 차별하고 노예라고 놀리는 사람이 없어요.
십자가라는 몰약 산엔 인간의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요. 더 이상 세상의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곳입니다. 몰약 산에 있는 성도는 모두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구원받은 자들만 모였기 때문에 인간 냄새가 없어요.
교회란 이런 곳이어야 해요. 어린 양과 사자가 함께 풀을 뜯고 놀며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노는 곳이라야 합니다. 오직 은혜만 넘쳐나야 해요. 인간들끼리의 차별이 없는 곳이 교회에요.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은 짐승처럼 힘의 논리로 다스려져 가고 있어요. 교회 안에 사자와 표범들이 우굴거리고 있어요. 목사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를 삼키고 있어요. 돈 되는 교인들은 VIP로 모시고 돈 없는 사람은 찬밥신세로 대해요.
돈 많고 권세 있는 교인들에겐 아첨을 하고 돈 없고 힘없는 교인은 무시해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선 돈 없는 사람들의 말은 신청되지 않아요. 장로나 권사가 되지 못해요. 장로나 권사의 기준이 믿음이 아니고 돈이고 세상 지위에요. 그러니 짐승인 겁니다. 이런 교회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십자가 도가 증거 되는 곳으로 오라고 합니다. 교회를 믿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기다립니다. 자기 신부들에게 십자가로 오라고 합니다.
십자가 안에는 게달의 장막과 같은 술람미도 아름다워요. 거기선 궁궐에서처럼 외모로 인하여 천대 받지 않아요. 십자가 안엔 죄인도 아무 흠이 없어요. 모두가 어여뻐요.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가 최고로 아름다웠어요. 술람미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솔로몬이 아름답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술람미 속에 자기 흔적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안 되어요.
그럼 술로몬이 술람미를 왜? 그토록 사랑하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아름다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이 세상엔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크면 커서 불만이고 작으면 작아서 불만을 해요. 가슴이 작은 사람은 작아서 불만이고 큰 사람은 커서 불만입니다. 마른 사람은 말라서 불만이고 살찐 사람은 살이 쪄서 불만이에요.
그래서 아름답게 하려고 가꿉니다. 어떤 연예인들을 보면 멀쩡한 얼굴에 성형을 해서 예전만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물론 제가 보기에 그렇습니다.
요즘 몸짱 만들기가 유행입니다. 남자들은 근육질 몸매를 만들고자 하고 여자들은 예뻐지고자 합니다. 남자 연예인들은 근육질의 몸매를 뽐내려고 웃통을 벗어젖히고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전신 성형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미국의 데미무어라는 영화배우는 2억 원을 들여서 전신 성형 수술을 하였다고 하더군요. 왜? 했는가 하면 애인에게 잘 보이려고 했답니다.
애인에게 왜? 잘 보이려고 합니까? 사랑 받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가 아름답고자 하는 것은 무죄라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남자가 돈을 버는 것은 예쁜 여자를 얻고자 함이고! 여자가 예뻐지고자 하는 것은 돈 많은 남자를 얻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이란? 곧 재물이고 권력이 됩니다.
이 시대 정서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은 여자의 외모는 돈을 버는 상품이 되었어요. 그래서 성형이라는 힘을 빌려서 아름답게 하여서 자기 상품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가 이혼 위자료를 1조원을 주었다고 합니다. 사상 최고액이라고 합니다. 우즈는 돈으로 모델 아내를 샀어요. 아내는 아름다움으로 우즈를 얻은 거구요.
돈을 바탕으로 맺어진 것이니 돈으로 결산 하는 겁니다. 우즈의 아내는 미모로 1조원을 번 겁니다. 우즈는 1조원을 가지고 데리고 산 거구요. 아름다움은 곧 돈이에요.
하지만 이런 아름다움도 모두가 타인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에 시선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가꾸지 않습니다. 여자들이 외출을 할 때는 화장을 하고 가꾸지만 집에 혼자 있으면 가꾸지 않아요. 집에선 축 늘어진 추리닝이나 몸빼 바지를 입고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지냅니다.
집에서 화장하고 있는 여자는 없어요. 정장 차림으로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집안에서든지 바깥에서든지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편하게 있어요.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타인을 통해서 증명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애 할 땐 그렇게 가꾸던 사람도 결혼하고 나면 육신이 편한대로 살아요. 육신이 편한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에요.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것은 결국엔 다 육신이 편하자고 하는 짓입니다.
그러니 결혼을 하고 나면 육신이 끄는 대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夫婦)로 살다보면 상대를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러워지는 겁니다. 가꾸지 않게 됩니다.
결혼 생활을 오래 할수록 환상이 깨어져요. 연애 할 땐 방귀도 가려서 뀌었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 보면 밥 먹다가도 붕붕 꿰요. 이러면 신비로움이 사라져요. 과거엔 속살이 조금만 보여도 마음이 떨리고 쿵쾅 거렸는데 오래 살면 훌러덩 벗고 다녀도 소 닭 보듯 하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늘 보게 되면 매력이 없어요.
아름다움이란 신비로움이에요.
신비로워야 해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신비로우면 매력이 있어요. 인간의 심리는 관음증을 통하여서 흥분을 해요. 관음증은 신비로움으로부터 비롯되어요.
그래서 신비로운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겁니다. 동양인들은 서양인을 보면 다 아름다워 보이고 서양인은 동양인을 보면 다 아름답게 보여요. 늘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비로운 겁니다. 눈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눈에 익어 보세요. 신비감이 퇴색되고 그러면 아름다움이 사라져요. 그럼 싫증이 나고 권태가 오는 겁니다. 여자가 신비로움을 잃어버리면 여자로서의 가치는 상실 되어요.
소명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에 이런 내용의 노랫말이 있어요. 어떤 친구가 미스코리아 뺨치는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땡 잡았다고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정작 예쁜 여자와 사는 당사자는 살아가면서 매너리즘에 빠져서 시큰둥합니다. 친구들이 예쁜 마누라와 살면서 왜?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살아봐! 살아봐! 그러면 알게 될꺼야! 라고 합니다. 그래 한 번 살아봐라!얼굴 뜯어 먹고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죽 했으면 얼굴이 예쁜 것이 여자가 아니고 마음이 고와야 여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남자고 여자고 아름다움은 육신 따라서 변합니다. 인간은 변하는 육신을 아름다움으로 붙잡아 두고자 애를 쓰지만 결국 붙잡지 못합니다. 데미무어가 2억 원을 들여서 전신 성형수술을 하여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또 살쩜이 늘어져요. 인간의 아름다움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이는 변한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아름다움을 사랑으로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랑은 반드시 변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육신을 따라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변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부패하는 겁니다. 진리란 변하지 않는 것이고 비 진리란 변하는 겁니다. 죄를 일컬어 비 진리라고 하는 것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것들은 다 변합니다. 내 마음이 영원하지 않듯이 타인의 마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변하고 미움도 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에 동지가 될 수 있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육신의 유익을 따라서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간사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첫 사랑을 그리워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라서 그래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항상 신비로움으로 남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비로운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결혼을 했으면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미련이 생기고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 때 그 사람과 결혼 했으면 행복했을 텐데! 놓친 고기가 항상 대어(大漁) 라고 생각하듯이 이루지 못한 사랑은 늘 아름다움으로 남습니다. 미련으로 남아요.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보면서 만약에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고 그 때 그 사람과 결혼을 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라고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지금보단 훨씬 좋았겠지! 라고 생각하지 지금 보다 못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첫 사랑하고 막상 결혼하고 나도 살아가면서 왜? 이 사람하고 했나 후회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가치 기준은 항상 주변의 환경을 따라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구를 충족 시켜 주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가게 되어 있어요.
첫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그래요. 연애는 전부 포장이고 위장술이에요. 연애 할 땐 자신이라는 상품을 최상으로 포장해서 상대방에게 내 보여요. 너나 할 것 없이 다 좋은 것만 내 보이고 나쁜 것은 감추어요. 그러므로 연애 할 땐 속엔 늑대가 우글거리면서 겉은 온화한 양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개그콘서트에 남보원이라는 코너를 보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자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어요. 남자들이 여자에게 잘 해주고는 뒤에서 욕을 하는 내용입니다. 성질대로 해 주면 여자가 도망 갈까봐서 꾹 참고 해 주고선 뒤에서 욕을 하고 있어요. 불평을 하고 나서도 괜히 했어! 괜히 했어! 라고 하잖아요.
왜?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해 주고 속으로 욕을 합니까? 해 주고 나서 뒤에서 불평 할 것을 왜? 앞에선 못합니까? 이는 상대를 낚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남자고 여자고 동일해요.
그러다가 낚아 보세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본색이 드러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죄인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해요.
그러면 서로가 놀라는 겁니다. 변했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변한게 아니고 잠시 위장한 겁니다.
그러니 결혼을 하고 나면 서로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면서 이루지 못한 첫 사랑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나에게 너무 잘 해 줬는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아!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아! 우울하다! 그래서 사람마다 일탈을 꿈꾸게 되는 겁니다.
우연이 라는 가수가 부른 우연히 라는 노랫말을 보면 어느 날 우연히 나이트클럽에서 첫사랑의 남자를 만났다고 합니다. 항상 마음속에 오매불망 그리며 살았던 첫사랑의 남자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겁니다. 그래서 함께 춤을 추면서 행복하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남자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물만 뚝! 뚝! 뚝! 흘리더라고 합니다.
왜? 눈물을 흘립니까? 그땐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면 행복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첫사랑의 애인을 버리고 장가를 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행복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첫사랑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첫사랑과 결혼했으면 행복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나 그건 착각이에요. 첫 사랑하고 살았어도 마찬가지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의 탐심은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간들이 하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어요. 인간들의 사랑에 대하여 알아야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어떻게 인간적으로 매력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여인을 흠이 없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느냐를 알 수가 있어져요. 어째서 예수님은 나같이 못난 죄인을 일향 미쁘시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어요.
인간은 변해요. 죄가 인간을 변하도록 만들어요. 그래서 늘 불평하면서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행복했을 텐데 라고!
탐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그 누구를 만나도 만족 할 수가 없어요. 주변에 행여 첫사랑과 결혼하고 사는 사람에게 행복하냐고 물어 보세요. 그것이 비록 행복하게 보여도 만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이는 인간 속에 탐욕이 항상 더 좋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라도 자기 몸 편하게 해 주면 좋다고 하고 불편하게 하면 싫다고 해요. 그래서 첨엔 없으면 죽고 못 살겠다고 하여서 결혼한 사람도 살다가 이혼을 하는 겁니다. 이혼을 하는 이유가 서로를 붙잡아 둘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사랑은 늘 변하는 겁니다.
그럼 이 세상엔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지요. 성경은 단호하게 인간에겐 없다고 합니다. 죄인에게선 변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을 없다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가(雅歌)서를 통해서 인간에게선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가 그 내용입니다.
아가(雅歌)서의 사랑은 인간은 흉내를 낼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흉내 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을 주셨구나! 를 아세요. 내가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보고 너무 너무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싫지 않아요. 뭐가 그리 예쁜지 벌린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극상의 칭찬을 합니다. 한마디로 싱글벙글하면서 어화둥둥 내 사랑이라고 하고 있어요.
어떻게 이런 사랑이 있을까요? 어째서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가 그렇게도 아름다울까요? 그 못난 여자가 어째서 솔로몬의 눈에는 천사처럼 아름답느냐 이 말입니다. 그 비밀이 오늘 벗겨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은 술람미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라고 부릅니다.
아 4:9-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술람미를 “누이” 라고 합니다. 누이란 동생이란 말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혈통으로는 분명하게 남남이에요. 솔로몬의 부모와 술람미의 부모가 엄연히 달라요. 솔로몬은 왕족 출신이고 술람미는 천출에 자식이에요.
그럼에도 솔로몬은 술람미를 “나의 누이” 라고 부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엄청난 비밀의 말입니다.
누이란?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란 말입니다. 피가 같다는 말입니다. 근본(根本) 즉 뿌리가 같다는 말입니다.
뿌리가 같다는 말은 한 몸이란 뜻입니다. 너와 나는 한 몸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너와 나는 한 형제이면서 신랑과 신부라고 합니다.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보세요.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하나에서 났다고 하지요. 하나에서 났다는 것은 한 형제란 말입니다. 한 형제란? 근본이 같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즉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한 몸이란 부부에요.
그렇다면 솔로몬이 술람미를 누이라고 하면서 나의 신부라고 하는 말이 맞지요. 성도는 예수님의 형제이면서 또한 예수님의 신부에요. 어떻게 형제이면서 부부가 될 수가 있습니까?
이건 피조물들에겐 신비에요.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 라고 하시는 말씀과 같아요. 이사야 선지자는 아들을 아버지라고 했어요.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한 아기와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어요. 어떻게 아들이면서 아버지가 됩니까?
이러한 것은 존재론적으로 접근해서 이해하고자 하면 이해가 안 되어요. 이는 본질적인 면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본질이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는 말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관계가 그래요. 이 두 사람을 있게 한 것은 창세전 언약에 의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창세전 언약으로 인하여 생겨난 자들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구조 안에서 보면 솔로몬과 술람미는 출생의 뿌리가 같아요. 언약이 솔로몬과 술람미를 있게 한 근거이니 언약은 곧 두 사람의 아버지와 같은 것입니다. 언약이 우리를 있게 한 근원이니까 편의상 언약을 아버지라고 합시다. 그러니 둘 다 한 아버지로부터 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전 언약이 구현되는 과정에선 예수님은 신랑이고 성도는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구원을 하는 위치에 있고 하나는 구원을 받는 위치에 있어요. 구원하는 자를 신랑이라고 하고 구원 받는 자를 신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의 형제이면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나의 누이야 라고 하는 말을 속된 말로 표현하면 우린 전생에 한 몸이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와 나는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는 한 몸에서 나온 짝이란 말입니다. 너는 영원한 내 짝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 예쁘다고 하는 겁니다. 내 눈엔 네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겁니다. 천상에서부터 맺어진 사랑이기에 어여쁜 겁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사이에요. 일단 만나면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는 사이에요. 이런 사랑을 흔히 하늘이 맺어준 사랑이라고 합니다. 성도와 예수님의 사랑도 그러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그러지요. 성도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지요. 서로가 하나이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누이는 끊어질 수도 없고 변할 수가 없는 관계에요. 솔로몬이 지금 술람미에게 너는 나의 누이라고 하는 것은 곧 너와 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깨어지지 않는 사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걸 신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아요. 두 사람은 찢어지지 않아요. 아니 찢어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태초부터 한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성도의 구원이에요. 이 사실이 믿어져야 두렵지가 않아요.
중요한 말입니다. 부부란? 원래 같은 몸이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원래 한 몸이었어요. 한 몸에서 나왔다가 다시 합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도 보여 주었어요.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 사라를 보고서 누이 라고 했어요. 그러니 사래가 바로에게 겁탈을 당하여도 데리고 사는 겁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는 장차 나타날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예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사라나, 솔로몬과 술람미나, 예수님과 성도나 모두가 동일한 영적 의미에서는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태초에 있었던 하늘에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뭐냐? 자기 짝 찾는 겁니다. 자기 근본을 찾아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짝 찾으러 왔어요. 자기 몸에서 나온 자기 몸을 찾으러 오셨어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예수님의 신부라고 합니다.
부부(夫婦)란? 한 몸이란 말입니다. 둘이면서 하나가 부부에요. 그래서 부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창세전 언약으로 인하여 생겨났어요.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을 위한 언약이므로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예수님 몸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아이를 뱃속에 품었다가 물과 피를 쏟고 낳았듯이 예수님이 물과 피를 쏟고 성도를 나았어요. 엄마와 아이는 탯줄로 연결이 되어 있어요. 한 몸이에요.
아담 속에서 하와가 나왔듯이 예수님 속에서 성도가 나왔어요. 예수님과 성도는 언약이라는 탯줄로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성도는 한 몸인 겁니다. 구원이란? 원래 한 몸이었던 것이 둘로 있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자기 신부 찾으러 오신 겁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척 알아보아요. 이상하게 끌려요.
우리 신앙으로 적용하면 한 성령 안에 있는 성도는 이상하게 끌려요. 이런 것을 흔히들 영(靈)이 같다고 합니다. 영(靈)이 같다는 말은 뿌리가 같다는 말입니다.
영(靈)이 다르면 거부감이 생겨요. 한 교회 안에 있어도 한 성령 안에 있지 않으면 싫어요. 왠지 싫어요. 싫고 좋음은 본능적으로 일어나요.
왜? 싫습니까? 라고 물으면 몰라요. 그냥 싫다고 합니다. 이건 끌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아니고 이질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에요. 일가친척이라 할지라도 영(靈)이 다르면 싫어요.
다른 말로 한 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끌리지 않는 겁니다. 서로 끌리는 것은 한 몸이기 때문이에요.
한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서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러니 창세 전에 있었던 한 몸을 만나면 사랑스러운 겁니다. 한 복음 안에 있는 성도는 이상하게 오랫동안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요. 가까이 하고 싶어요. 아름답게 보이고 사랑이 가요.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우리 한 핏줄이잖아 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지금 술람미는 타인(他人)으로 보지 않아요. 자신과 하나로 보고 있어요. 그래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 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제발 좀 이해되어야 할 텐데! 그리고 느끼셔야 합니다. 그래야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들려지게 됩니다.
성경이 나의 이야기로 들여져야지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주시여!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성경 속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바로 술람미여야 합니다. 그래야 아가(雅歌)서가 나의 사랑 노래가 됩니다.
암튼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너” 는 “나” 이고 “나” 는 “너” 라고 합니다. 우린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 도 아니고 “너” 도 아닌 “우리” 라는 신랑과 신부라는 한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란? 한 근원(根源)을 말합니다. 우리를 존재케 한 근원이 바로 창세전 언약입니다. 성령께서 솔로몬에게 창세전 언약으로 술람미를 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넌 나와 한 몸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나의 누이라고 부르게 한 것은 성령께서 하게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인간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를 나눈 누이는 사랑의 관계에요. 이 관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아요. 그 어떤 것으로도 피가 달라지지 않듯이 사랑도 달라지지 않아요. 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랑은 외부의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의 사랑은 순전하고 흠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순전하고 흠이 없다는 말은 이물질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산상수훈에선 청결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순전하고 흠이 없다고 하지요. 왜? 순전하고 흠이 없습니까? 자기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나면 편하고 예쁜 겁니다.
순전하고 흠이 없다는 말은 에베소서 1장 4절의 말씀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하셨지요. 그 피로 죄사함 곧 구속한다고 했지요. 이게 창세전 언약이잖아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를 창세전 언약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순전하고 흠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순전(純全)하다는 말은 섞임이 없고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불순물이 전혀 없어요. 한 몸에서 나왔으니 순전하지요.
사도요한은 이런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온전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조건에 의해서 취소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랑이 믿어진다면 두려움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사랑을 주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사랑은 딱 하나 있어요. 그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겁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영적으로 보면 한 피 받은 한 몸입니다.
솔로몬이 곧 술람미이고 술람미가 곧 솔로몬이에요. 서로가 자기 몸인 겁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사랑이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인간의 사랑은 변한다고 했지요. 변하는 것은 서로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결혼을 해도 너와 나 라는 다른 몸이에요. 죄는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러므로 죄인은 부부라고 하여도 서로가 타자(他者)에요.
부부도 남이에요. 자식도 남이에요. 자기 몸만 자기에요. 죄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니 부부간에 사랑일지라도 자기 육신을 챙기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인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이야기이기 때문에 창세전 언약이라는 근원적인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보았을 때 술람미는 자기 몸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겁니다. 자기 몸이기 때문에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선물을 준 것입니다. 신부를 아름답게 하려고 빙폐물을 준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아가(雅歌)서에선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각종 장신구를 준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이 준 것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것이기 때문에 술람미에게 자신의 것으로 치장을 해 두었어요. 술람미 역시 솔로몬의 것임을 알고 솔로몬이 치장해 준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걸 보고 반하는 겁니다.
어미가 자식을 보고 예뻐하듯이 솔로몬이 지금 술람미를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참으로 예쁘다고 탄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쏙 빼앗는다고 하잖아요. 얼마나 예뻤으면 마음을 홀라당 빼앗아 갔다고 하겠어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뭔 줄 아세요. 상대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린 마음을 빼앗겨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 마음은 그 사람을 빼앗고 누가 나를 사랑하면 난 그에게 빼앗깁니다. 이처럼 사랑은 빼앗기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압당하는 거예요. 마치 큐피트의 화살처럼 사랑을 받으면 온통 그에게로 쏠리게 되어 있어요.
누군가를 사랑하면 온통 그 마음속에 그 사람으로 가득차 있잖아요. 그 사람이 마음을 장악하잖아요. 연애하면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은 징징거려도 예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는 짓이 다 귀여워요.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은 늘 마음에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눈을 떠도 보이고 감아도 보여요. 가슴 속에 콱 박혀 있잖아요. 그러니 가까이 있어도 있고 떨어져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다 해 보아서 알잖아요.
자~ 그럼 솔로몬이 술람미의 무엇을 주었고 어떤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살펴봅시다.
아 4:9-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솔로몬이 지금 술람미가 자신을 한번 쳐다 본 것으로 마음이 빼앗겼다고 합니다. 직역하면 술로몬은 술람미의 눈짓 한번과 목걸이를 보고 마음을 빼앗겼어요.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이란 눈짓을 말해요. 눈짓이란 윙크에요.
그러니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윙크를 했어요. 눈 한번 찡끗 하니 뽕 간 겁니다. 아이쿠~ 내 사랑! 하면서 쓰러졌어요.
성경엔 두 가지 눈짓이 있어요. 홀기는 눈과 윙크하는 눈이 있어요. 홀기는 눈은 미움의 눈이고, 윙크하는 눈은 사랑의 눈이에요.
눈은 마음에 창(窓)이에요. 사랑은 눈으로 해요. 눈 속에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은 눈만 보아도 알아요.
그러므로 솔로몬은 술람미의 눈짓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겁니다. 윙크는 사랑의 표현이에요. 아무에게나 윙크하지 않잖아요.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윙크하잖아요.
윙크하는 것은 내 마음은 당신께 빼앗겼어요!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솔로몬도 술람미에게 마음이 빼앗기고 만 겁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바라보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이었어요. 어휴~ 저 귀여운 것 하면서 사랑에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를 향한 사랑은 포도주보다도 달콤하다고 합니다. 사랑은 기분 좋게 취하게 해요. 사랑은 달콤한 향기처럼 온 몸을 적셔요.
사랑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 사랑하는 사람의 눈짓 하나는 모두가 포도주보다 더 향긋하게 취하에 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향기로운 냄새에요.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의 행동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장신구 하나 하나를 칭찬하는 겁니다.
이번엔 술람미의 목걸이를 칭찬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가 한 목걸이를 보고선 또 흥분합니다. 술람미의 목에 구슬꿰미를 보고 마음을 빼앗겨 버렸어요. 아니 목걸이가 대체 뭐길래 솔로몬의 마음이 빼앗깁니까?
알다시피 술람미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노예에요. 치장할 장신구가 없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인들은 장신구로 아름다움을 뽐냈어요. 그래서 여인들의 장신구는 모두가 귀한 고가품이에요. 고관대작 집 규수들이 아니고서는 치장 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노예인 술람미가 구슬목걸이를 걸고 있는 겁니다. 이는 누군가가 주었다는 겁니다. 맞아요.
지난번에 어떤 여자 연예인이 애인을 자랑하는 것을 보았어요. 진행자가 그 애인이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자 연예인이 남자 친구가 길거리를 가다가 예쁜 머리핀이나 악세사리를 사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이는 악세사리가 아름답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솔로몬도 술람미에게 악세사리를 주었어요. 그러자 술람미는 솔로몬이 준 구슬꿰미로 목을 장식을 하였어요. 솔로몬이 준 것으로 치장하고 있다는 것은 솔로몬의 말만 듣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솔로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목을 자아가 살아 있는 고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인을 일컬어 목이 곧다고 합니다. 뱀이 목을 빳빳이 쳐들고 다니잖아요.
목이 곧다는 말은 불순종의 표현이에요. 자기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목을 치라는 것은 저 놈을 죽여라 라는 말입니다.
목에 구슬꿰미를 했다는 것은 자기 고집을 꺾었다는 뜻이에요. 술람미가 만약 자기가 살아 있으면 밋밋한 목으로 자기 고집대로 했을 겁니다. 솔로몬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요. 그런데 술람미는 솔로몬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가 목에 솔로몬이 준 목걸이를 했다는 것은 자신을 솔로몬이 주관하고 있다는 표시인 겁니다. 목걸이의 주인에게 순종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목걸이는 멍에를 상징해요. 개 목줄과 같아요. 주인이 끄는 대로 다닌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장을 봅시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쉬게 해 주시겠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쉼을 주는가 하면 예수님의 멍에를 메게 해서 쉬게 해 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면 마음에 쉼을 얻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죄와 사망입니다. 우리 인생이 힘들고 지치는 것은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 받아 죽어야 할 죄의 몸으로 죽지 않고자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죽으면 편한데 죽음이라는 놈이 잔뜩 공포를 주어서 공갈을 치니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죄인에겐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인 겁니다.
이런 죽음에 두려움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어요. 우리의 죄와 사망이라는 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을 해 주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게 믿어지면 쉼을 얻어요. 마음에 안식을 누립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해서 죄가 사해지지 않아요.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일은 예수님이 담당하실 몫이에요. 우리 죄는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사해질 수가 있어요.
그럼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뭔가요? 이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마음에 쉼을 얻습니다. 마귀의 참소로부터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믿을 때 사단의 참소로부터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말은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되면 마음에 쉼은 자연히 얻어집니다.
술람미가 목걸이를 한 것은 곧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솔로몬은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술람미를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은 왕의 체통을 버리고 황실의 법도를 무시하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한 노예인 술람미를 왕비로 맞이하였어요. 이는 솔로몬이 왕이라는 직임을 걸고 사랑한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천하디 천한 죄인을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성령께서 이 사랑을 믿게 하세요.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았어요. 이 사랑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어요. 예수님의 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셨다는 약속을 받았어요.
우린 이 약속을 믿고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죄 가운데서도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엔 두려움이 없어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우린 온전한 사랑을 받았어요.
예수님이 너는 내 누이고 내 신부라고 합니다. 너는 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세요.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오늘은 참으로 중요한 공부를 했습니다. 누이이면서 신부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누이가 되고! 한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신부가 됩니다. 이런 누이이면서 신부 관계는 하나님이 짝을 지워주셨기 때문에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앉고 일어서게 하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게 하려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우린 모두가 이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어떤 환경이든지 어떤 모습이든지 우리 자신의 어떠함을 보지 말고 약속을 믿고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누이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부르심을 입은 이 사실이 우리에게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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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
첫댓글 아멘...와 진짜 최고네요^^
그렇지요 우리 예수님 최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