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자... 흥영군 이우왕자>
※이우왕자. 의친왕의 아들로 고종황제의 손자이고 순종의 조카로 태어나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맞아 숨지신 영화같은 인생을 살다가신 풍운의 주인공입니다.
왕실의 권위가 일제에 의해 하락하고 왕이 공작으로 강등되어 후엔 이우공으로 불렸지만, 우리는 이우공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분은 엄연한 왕자님이십니다.
그리고 일본 제복을 입고 계시는 사진을 보고 친일파라는 소리를 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친일파는 이우왕자가 아니라 이우의 이복형인 이건입니다. 이건은 이우와 달리 일본인에게 교육을 받아 일본 문화를 따르고 결혼도 일본여자랑 하고. 그리고 그 후엔 일본으로 귀화 했습니다.
그리고 이우가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대한제국)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우 : 고종 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으로 1912년에 태어났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조카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관심을 받게 된 조선 마지막 황가의 '이우 왕자'는 세계 왕실의 왕자와 공주들 중 상위권에 드는 미모를 지닌 '미남'이었는데, 타고난 외모 뿐 아니라 의기 또한 대단했던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우는 흥선 대원군의 첫째 아들인 흥친왕의 아들 이준용이 후사 없이 별세하자, 고종의 명에 따라 대원군의 증손자로 입적되어 운현궁 살림을 이어받게 된다.(흥선 대원군의 첫째 아들-흥친왕/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고종) 그는 황실의 여동생들로부터 '운현궁 오빠'라 불렸다 한다.


이우왕자는 일본 고위관에게 '호랑이같은 조선의 황조의 핵심' 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매우 용맹했다고 한다.
여기 이우왕자마마의 용맹함을 알려주는 일화가 하나있다.
[대한 제국 황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이우는 일본 내에서도 '일본말' 대신 의도적으로 '한국(조선)말'을 사용하며,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게는 "호랑이 같은 조선 황족의 핵심"이라 일컬어지며 사납고 난폭한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조선 동포에게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 되었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전라도 지방의 농부들이 몰려와 일본군이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작전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채고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며 호소하였다.이에 이우는 즉시 용산의 일본군 사령관로 달려가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구하였다. 물론 당연히도 일본인 담당자가 딱 한마디로 잘라 거절하자 이우는 권총을 빼내 담당자의 머리에 겨누며 말했다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라고 위협함으로써 결국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한다.]
일본인 동기생 아사카 타카하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떄문에 이우공은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없이 무엇이든 앞서려고 노력했다","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불렀는데 일본노래도 했고 조선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 라고 말했다.
또한 운현궁의 가정교사였던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고 증언했으며
당시 이우 왕자를 간호하였던 한 일본인 간호사는 "그 분은 매우 큰 분이셨다. 아마도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라며 그를 회상했다

이우왕자는 신부를 택 할때 일본에서 권유한 장래가 보장된 일본여자를 마다하고 조선인인 박찬주를 신주로 택하여 고종에게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정혼자는 고종황제가 가장 아끼던 유동철 장군의 딸 유정순 여사였지만 일본과 친일파 박영효의 압박으로 인해 박찬주 여사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시대에 대부분의 황족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비록 친일파의 여식이더라도 조선인과 결혼을 고집한 것 만 으로도 굉장하다고 생각이 된다.

이우의 독립운동은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것이 알려지기도 전에 히로시마에서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다. 오로지 주변 증언으로 종합하여 보면, 이우는 근무지 근처에서 태항산 유격대의 조직확장에 은밀이 간여하였다고 한다.
이우 왕자는 정보참모로 있으면서 판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 판단되면 이 태항산의 유격대와 주변 백두산 근방의 독립군들, 일본군내의 한국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의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대한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수도 있었을 만큼 실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 왕자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버렸다. 이에 왕자는 이제껏 쌓아놓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곧장 운현궁으로 들어가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한국에 배속 시켜 달라는 청원을 넣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어린아들 청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간호를 위해 늦게 간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우는 장장 6개월을 버티며 히로시마의 배속을 늦추고자 전출을 거부하였다.
그 사이 왕자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키워놓은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계속 태항산과 연락을 취하였다
결국 설득 끝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일본국 제 2총군 참모 본부로 말을 타고 출근하는 도중 (이우는 자동차가 있었지만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후꾸야 백화점 부근(폭심지에서 710m)에서 원자 폭탄에 피복되었다. 그날 저녁 혼가와 아이오이바시 밑에서 흙투성이로 변한채 발견되었고 즉시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지만 다음날 8월 7일 새벽 갑작스레 상태가 악화되어 고열로 신음하다가 사망한다. 그 해 왕자의 나이는 34세였다.
(이우 왕자를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이 왕자의 부상을 틈타 독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의 아들 이청씨의 회고록에 보면 이우왕자는 일본에 위험인물이라는 판단하에 독살을 했다는 일본장교의 자백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음.)
이우의 일본인 수행무관 요시나리 히로시 중좌는 당일 엉덩이에 부스럼이 생겨 이우를 대신하여 차를 타고 사령부에 미리 출근하였기 때문에 피폭을 면했다.
그러나 부관으로 이우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으로 시신을 운구한 날 밤에 할복하여 자살하였다.
(요시나리 히로시는 일본정부가 이우왕자에게 붙여준 '감시원'이었는데 그는 이우의 인품에 반해 왕자를 존경하고 심복하게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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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와 그의 아들 이청
이후, 왕자의 시신은 1945년 8월 8일 경성부로 조용히 운구되어 의무관들에 의해 방부 처리됐다. 장례식은 1945년 8월 15일 12시에 열리기로 예정되어있었으나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으로 인해 연기되어 오후 3시경 경성운동장(동대문 운동장)에서 조선신궁의 궁사가 제주로 동원된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으로 거행되었다. 안타깝게도 이우는 그토록 열망하였던 조국의 해방을 죽어서야 맞이하게 되었다.
이우왕자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흥선대원군 묘역에 묻혔고 사후 육군 대좌로 진급 추서되었다.
펌해온 자의 글
1945년 8월 6일 폴 티비츠대령이 비29폭격기 에놀라게이로 히로시마 상공에서 구름사이로 리틀보이를 떨어뜨리고 곧바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이 비행기를 쫓아오는 듯한 긴박한 상황에서 급하게 도피하고 있었던 반면,, 지상에서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였네요 ㅜ.ㅜ
노르망디에 조선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지만 원폭의 피해자는 대부분 일본인 이었을 거하고 생각했었는데..그 끔찍한 아비규환의 현장에 그것도 조선의 왕자님이 계셨다는 정말 슬픈 사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