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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____
이몽異夢
전예숙
광수 씨는 새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컴퓨터 게임만 해서였다. 이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광수 씨의 눈은 다시 바둑알 위에서 커서가 껌벅이는 화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게임 상대자는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광수 씨는 다시 게임 대상을 찾았다. 그는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는 게임이 좋았다. 낮시간이라 그런지 게임 상대가 마땅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광수 씨는 아내가 나간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날마다 공원에 갔다. 분이 풀리지 않을 때도 가고, 걱정이 있을 때도 가고, 무슨 일이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갔다. 물론 기분 좋은 날도 빠지지 않았다. 이유는 아내에게 찾아온 당뇨 때문이었다.
광수 씨는 아내가 앞서간 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는 아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아내의 뒤를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어제 저녁에도 그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를 눈여겨보았다. 뱃살이 나오기는 했지만 뒷모습만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는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저녁상을 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된장찌개의 뜨거운 국물을 수저로 맛보며 고개를 끄덕일 때는 참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아내에게 다가가기가 겁이 났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그는 아내가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음식을 만들 때 아래쪽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밀대로 거실 청소를 할 때 그는 아내를 뒤에서 끌어안곤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물가물하게만 느껴졌다. 지금은 아내가 막 샤워를 하고 비누냄새를 풍기며 알몸으로 서 있다고 하더라고 안아줄 수가 없었다. 몸을 감쌀 크기의 수건을 가지고 아내의 몸을 덮어줄 망정.
어젯밤 아내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딸 미래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아내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미래 데리고 올 거야.”
그는 아내가 진심으로 젊은 애인을 만나러 가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미래가 학원에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오지 않는다며 투정부리는 전화를 걸어왔으면. 그렇다면 아내를 향한 자신조차 모르고 있는 감정이 드러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내는 쉽게 낚이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수저를 흰 바둑알 삼아 식탁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베란다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데, 오늘도 남편 광수 씨는 컴퓨터 앞에 붙어 있었다. 인터넷 바둑 게임에 몰두해 있는 남편을 보는 아내 지영은 속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런 말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명예퇴직을 결정한 남편은 50세가 되자마자 실업자가 되었다. 남편은 특별한 재주가 없었다. 지나치게 평범한 것이 도리어 재주였다. 남편 말대로 ‘밑에서 치고 들어와서 승진하는 후배들을 보는 것도 고욕’이고 하는 넋두리를 그녀는 지나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처자식이 있는데 20여 년 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려 할까. 그녀는 그 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로 남편을 진심으로 위로했었다. 남편은 몸이 아파도 출근을 했고 지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귀가 시간도 일정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손톱만큼도 하기 싫어했고 신호위반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 때문에 직장 생활이 더 힘들었을 터였다. 거기다 미리 들어둔 연금저축이 50세부터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물론 월급보다 턱없이 부족한 돈이지만 퇴직금과 연금으로 밥만 먹고 살지 뭐, 하는 심정이었다. 직장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부부와 딸 미래가 아옹다옹하며 살 집이라도 있으니 그것으로 버텨보자 다짐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개월 아니 몇 년이 지나면 남편이 다시 취직을 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가졌다. 그러나 실업을 한 지 석 달이 지나고서야 상황은 그녀가 의도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름을 깨달았다. 미대를 목표로 하고 있는 고등학교 2학년 딸의 학원비는 남편이 매달 받는 연금을 웃돌고도 남았다. 밥만 먹자던 자신의 다짐이 얼마나 황망한 것인지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남편에게 쉬라고 한 것이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고, 구인 광고에 신경이 날카롭게 서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지난주부터 동네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오전에만 계산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마트의 사장은 어느 정도 적응만 되면 전일제로 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오늘도 그녀는 공원으로 나왔다. 일찍 시작된 더위가 사람들을 공원으로 오게 한 걸까. 공원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걷고 있었다. 그녀도 운동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합류했다.
광수 씨는 딸 미래가 학교에 가는 것도 모르고 늦잠을 잤다. 그는 안구가 건조해져 눈조차 뜰 수 없을 때까지 바둑 게임을 하다 새벽녘에야 침대로 갔다. 오늘도 연거푸 하품을 하고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오전 11시가 넘어서였다.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안방을 나와서야 집에 자신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핸드폰에는 스팸문자 하나 남겨져 있지 않았다. 집은 그가 내쉬는 숨소리만 들렸다. 광수 씨는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아서 좋았다. 소파에 앉아 잡음 하나 들리지 않은 공간을 눈으로 훑다가 소파에 길게 누웠다. 쉰다는 것은 이런 여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다 갑자기 <순희>가 생각났다. 그는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마트에 가서 오전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 남편은 일어나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매일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련만 광수 씨는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남편은 명예퇴직과 함께 가정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함구했다. 대신 그녀가 집을 나간 사이에 세탁을 하거나 청소기를 밀면서 청소를 했다. 집이 얼마나 크면 청소기를 미냐던 기억 따위는 깨끗이 잊은 듯했다. 그는 청소기 미는 소리가 아파트의 위층과 아래층에는 소음이 되니 웬만하면 비질을 하고 젖은 걸레로 방이며 거실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청소기를 가지고 집안 구석구석의 먼지를 빨아들였다. 그런 다음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몇 시간이고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그는 산 속에 박혀있는 바위덩이 같았다.
그녀는 불편한 마음을 눌러 참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다녀올까?”
그녀는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딸 미래의 학원문제나 자신이 마트에서 일하게 된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의 얼굴도 보지 않고 말했다.
“이 판만 끝내고.”
이번 상대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다리를 떠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밀리고 있는 게임이 아니면 힘겨운 싸움이라는 것을 말함이었다. 그녀는 컴퓨터 화면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남편을 향해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코드 확 뽑는다!”
그것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외치는 사람인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게임 중 예의 없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녀는 경고조차 없이 전기 차단기를 내릴 수도 있지만 극단적인 방법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광수 씨는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컴퓨터에 연결된 인터넷 선을 팽팽하게 잡았다.
“언제까지 할 건데?”
그녀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남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녀는 초등학생 아이와 입씨름 하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편이 게임에 매달리는 것이 한심해 보였고, 말리는 자신은 초라해져만 갔다. 남편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파란빛이 일었다. 그녀는 인터넷 줄을 뽑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는 남편이 하는 대로 그냥 둘까도 했다. 20년간의 노동 뒤에 찾아온 자유시간인데 무감각하게 살아도 될 법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지. 그녀의 눈에서도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요즈음 남편의 얼굴만 보면 화가 났다. 무심결에 갱년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지난주에 그녀는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산부인과에도 들렀다. 그 때 그녀는 의사에게서 생리도 이제 끝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모습은 여자지만 여성성은 상실했다는 뜻이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자의 고유 영역에서 제외되면서 여자라고 우쭐거릴 무엇도 없다는 말이었다. 목소리도 점점 더 굵어지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호해져가는 존재. 그녀는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노란 고무줄로 질끈 동여맸다.
“나, 산책 갈 거야!”
남편이 듣거나 말거나 그녀는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산책이라면 공원에 다녀오는 것을 말하니 남편이 알아들었다면 뒤쫓아 올 것이고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다. 붉으락푸르락되었을 남편도 자신의 표정을 관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바로 뒤쫓아 오지 않는다고 화날 관계는 이미 아니었다.
아내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걷다가 허리를 숙이고 네잎클로버를 찾아내는 솜씨는 누구도 아내를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다. 아내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그렇게 네잎클로버를 따겠다고 허리를 숙였을 때 살짝 보였던 아내의 가슴골 때문이었다. 아내의 보여줄 듯 말 듯 한 자세는 침을 꼴깍 하고 넘어가게 했다. 목이 멘 것처럼 목울대가 답답해 왔다. 무릎 위의 10센티미터의 스커트 길이가 그랬고 아내의 짧은 입맞춤이 그랬고, 단발머리 속으로 숨은 목선이 그랬다. 아내가 보내는 호출이 때로는 숨을 가쁘게 했었다. 게다가 아내는 얼굴보다 예쁜 두 가슴을 가졌다.
이제 아내의 비밀 따위는 없어졌다.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잡채, 가장 잘하는 음식은 잡채밥, 아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내 나이가 어때서’고, 아내는 홈쇼핑 프로그램에 혼이 빠져있다. 아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돈이다. 그것은 이제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되었고, 아내는 그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광수 씨는 명예퇴직 전까지는 바둑게임을 구경도 하지 않았다. 흰색과 검은색 돌로 이리저리 칸을 메워가는 게임은 무척이나 지루하고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무료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 무료 게임 사이트에서 만난 바둑 게임. 그 바둑게임은 사람을 화나게 만들었다가 뿌듯하게 했다가 무릎을 탁 치게도 만들었다. 검은색과 흰색의 돌들, 무늬조차 없는 것들이 말이다. 오목도 두지 않았던 그가 바둑 게임에 빠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실 그는 무엇인가에 몰입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긴장하고 앞으로만 달려왔다. 아내를 두고 외도라고 명명할 연애사건도 없었다. 물론 아내를 만나기 전에 여러 명의 여자들과 데이트를 해봤지만 사랑이었다고 단정할 사건은 없었다. 그것이 억울하다 생각한 적은 없지만 한눈팔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아내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닉네임 <순희>는 광수 씨처럼 바둑게임에서는 왕초보였다. 그는 미리 프로그램된 컴퓨터와 게임할 수 있지만 번번이 지기만 해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과 게임을 할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았다. 비록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더라도 인간미는 느낄 수 있었다.
식물 단계에 있는 <순희>와 그는 게임방에 들어오면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서로를 초대했다.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갔나요?’ 하고 물으면 그는 ‘갈 길을 생각 중입니다’하며 답을 보내왔다. 그는 천천히 길을 가는 <순희>가 마음에 들었다. 어투로 봐서 자신과 같은 처지가 아닐지 짐작은 해보지만 한 번도 속내를 알고자 하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뿐더러 알아준다고 자신의 처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저쪽에서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질문을 해오지 않았다. <순희>는 그에게 바둑 이외의 질문을 한 번했다. <미래>는 무슨 뜻인가요? 하고 말이다. 그는 딸 이름이라고 말해줄까 하다 ‘미래’가 없답니다, 하고 답한 적이 있을 뿐이다. 그 대답에 상대는 흔한 이모티콘 하나 보내오지 않았다. 그는 그런 대꾸 없음이 좋았다. 그와 바둑을 두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간을 용돈처럼 소비해 버리는 그 기분이 좋았고, 재촉하지 않아서 좋았고 간섭받지 않아서 좋았다. 바둑 게임에 목숨 걸 것도 아니어서 상대가 이만 잡시다, 하면 그도 잠들 시간이었다. 눈이 건조해져서 더 이상 화면을 볼 수 없을 그 시점에서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햇볕은 생각보다 따가웠다. 선글라스라도 쓰고 올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잔디광장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경쾌하게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광장을 따라 걸었다. 하늘에는 솜털 같은 구름이 가볍게 떠 있고 바람이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은행나무의 어린잎들이 바람에 수줍은 듯 살랑이고 명자나무의 진홍색 꽃잎도 함께 나부꼈다. 곧 산딸나무에서 흰 꽃이 피어나고, 모감주나무에서도 노란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날 것이다.
그녀는 걸으며 자연스럽게 남편을 떠올렸다. 무엇이 남편을 집 안으로만 가두게 하는지 궁금했다. 퇴직기념으로 남쪽에 있는 섬으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온 뒤 며칠 동안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때만 해도 남편을 이해했다. 양복을 안 입어도 되니 참 좋네, 하며 농담을 건넬 때 그녀는 와이셔츠를 다리지 않아서 좋다는 말로 남편의 농담을 거들었다. 그런데 게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다니. 그러고 보니 남편은 지금껏 무엇인가에 몰입한 적도 없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고 좋아하는 운동도 없고 취미생활도 없었다. 주말에는 가끔 등산을 하거나 낚시하러 간 적은 있지만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해외로 가족 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여겼지만 남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잔디광장 둘레를 두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한 시간을 산책하는 것이다. 그녀가 매일 숙제를 하듯 운동하는 이유는 몇 년 전 찾아온 당뇨병 때문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당뇨병은 우연하게 건강검진을 받고서야 알았다. 치료법이란 운동과 음식조절이라지만 한겨울 다음에 찾아오는 봄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게 병을 받아들였다. 운동하기 싫었는데 몸이 운동을 하라고 보내는 신호라고. 그런 다음 그녀는 하루에 한 차례씩 공원으로 나와 잔디광장을 걷고 있었다.
남편은 늦은 시간에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맞이 했었다. 아이의 운동화를 솔질해서 빨아놓는 사람도 남편이었다. 이제 남편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나 의무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지금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낯설고도 화가 났다.
걷다보니 잔디광장을 다섯 바퀴쯤 돈 모양이었다. 그 동안 남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현관문을 나서면서 남편이 자신의 뒤를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했다. 그녀는 모감주나무 아래 그늘로 가서 땅바닥에 앉았다. 결혼 전에는 남편과 잔디밭에 앉아 김밥을 안주 삼아 캔맥주를 나눠마시며 데이트를 하곤 했었다. 그런 시절이 다 흘러가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깊은 속에서 묵직한 무엇이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광수 씨는 아내의 뒤를 눈치채지 못하게 따라갔다. 아내의 어깨는 조금 처져있지만 규칙적으로 팔을 흔들며 걸어가는 모습은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왜 자신이 아내에게 가까이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런 감정은 어제 오늘만이 아니었고, 퇴직 전에도 느끼던 감정이었다. 천천히 구름이 하늘을 점령하듯이 아내와의 사이에도 시나브로 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때로는 아내의 눈빛만 봐도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상은 부부의 습관을 오롯이 담고 있어서 때로는 말보다 정확하기도 했다. 청소기를 돌린 다음에는 스팀청소기로 거실바닥을 한 번 더 밀어주는 이치 같았다.
어젯밤에는 게임방의 대화창으로 갑자기 <순희>에게서 질문이 들어왔다. 빨강색이 나을까요? 검정색이 좋을까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그는 당황했다. 그것은 <순희>가 그에게 두 번째로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뭘 사려는지, 단순히 성향을 물어보는지 알 수 없었다. 깜박이는 커서를 보면서 생각 중일 때 그의 글이 올라왔다. 아내에게 속옷 한 벌 사주려고요. 또 다시 커서가 깜박이는 중이었다. 둘 다 사주면 되죠, 하고 답을 보내고 실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의 대답이 빠르게 올라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의 대답을 읽은 다음 광수 씨는 씁쓸했다. 자신은 지금껏 아내에게 속옷선물은커녕 화장품 하나 사준 적이 없어서였다. 아내의 가슴이 예쁘고 탐스럽다는 생각만 했지 사이즈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아내의 속옷이 무슨 색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는 꽃다발 대신 돈다발을 좋아했다. 삼계탕이라도 먹으러 가자고 하면 아내는 곧바로 받아쳤다. 그 돈 나 줘. 내가 생닭 몇 마리 사다 고면 되지. 그게 훨씬 싸고 맛있어.
<순희>가 게임을 끝내자는 말에 광수 씨도 게임방에서 나왔다. 컴퓨터의 전원을 무심코 끄려하자 <순희>의 질문이 바둑알처럼 효과음을 내며 떠올랐다. 빨강색? 검정색? 아내는 무슨 색을 좋아할까? 그도 아내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었다. 자신이 고른 속옷을 아내에게 입혀 주고 싶었다. 그는 불현듯 쇼핑몰을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컴퓨터 화면만 보며 일을 했기 때문에 인터넷상으로 주식의 동향을 확인해 본 적도 없고 집 근처에 어떤 영화관이 어디에 있는지 검색조차 않았던 그였다.
아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도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모감주나무 그늘을 찾아 주저앉았다. 허벅지에서부터 힘이 빠져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저혈당 증세였다. 그녀는 점퍼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사탕을 입에 넣고는 자신의 발을 가두고 있던 운동화를 벗었다. 양말을 벗고 두 손으로 발가락을 주물러보았다. 양말과 운동화 속에 속박되어 살았을 두 발. 자꾸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미풍이 볼을 건드리고 잔디밭에 그대로 드러눕고도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그녀의 고개는 자꾸만 잔디밭으로 숙여졌다. 그녀는 파릇하게 피어나는 잔디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남편과는 왜 싸움이 되는지…. 퇴직 전에는 그냥 넘겼던 일들이 왜 다툼이 되고 화를 내게 되는지 그녀는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남편이 낮에 집에 있으면 어색하고 불편했다.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녀의 어머니 덕에 아버지는 퇴직을 하고도 70세가 넘도록 밖으로 도셨다. 집에서 쉬셔야 할 나이인데도 아침을 드신 다음에는 어김없이 집 근처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다가 퇴근 시간이 될 즈음에 돌아오시곤 했다. 주말에도 그녀의 어머니와 높지 않은 산을 다니셨다. 마트에 갈 때는 운전기사 역할을 끝까지 감당했다. 그녀 어머니의 강력한 주문,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 된다는 그 신념 때문에. 그런데 자신의 남편은 집안에만 있다. 그것도 게임만 하면서. 그 때문에 남편에게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는가?
그녀는 다시 발가락을 손으로 주무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남편과의 사이가 왜 갈수록 멀어만 지는지.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조차 남편의 퇴직을 말하지 못했다. 거기에 시간제로 마트에서 일한다는 말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잠자리를 언제 했는지도 떠올려 봤다. 가물가물했다. 같은 침대를 쓴다고 하지만 그녀가 먼저 잠자리에 들고 먼저 일어났다. 남편이 파자마 바람으로 식탁에 앉아있고, 눈곱도 떼지 않은 상태에서 수저로 밥을 뜨는 모습에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남편도 아내가 미운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이 여성성을 상실한 만큼이나 심각한 것이다.
이제는 저혈당 증세도 가셨다. 그녀는 벗어놓은 양말을 발에 끼우고, 운동화를 다시 신었다. 잔디밭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녀는 집을 향해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남편은 집에 없었다. 어디에 갔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아내가 앉았다 일어난 자리에 잔디가 눌려져 있었다. 잔디에서 아내의 온기가 전해졌다.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딸 대학에 보내고 결혼시키는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멀리 여행이라도 가려는 계획을 세운 것일까. 그러고 보니 아내는 꽃을 좋아했다. 봄철에는 프리지아를 좋아하고, 가을에는 황금국을 좋아했다. 봄날 애기똥풀이라는 노란 꽃을 만났을 때 아내가 그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꽃을 감상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어쩜 꽃잎이 이렇게도 여리게 생겼을까, 여보. 이 색깔, 이거 봐, 이거! 아내는 아예 땅바닥에 주저앉을 태세였다. 지나가다 보랏빛 쑥부쟁이 꽃을 만나기라도 하면 허리를 숙이고 그 여린 꽃잎을 세기 일쑤였다. 그런 아내의 감성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아내가 앉았던 잔디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아내처럼 그 자리에 앉아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었다. 하얗게 드러난 두 발을 그도 아내처럼 주물러 보았다.
눈물샘이 말라 눈 속으로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까슬까슬하게 느껴졌을 때, 그가 침대로 가면 아내는 입을 헤 벌리고 코를 심하게 골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아내 자신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광수 씨가 아내의 베개를 바로 베 주고 이불을 목 밑까지 덮어주어도 아내는 눈치 채지 못하고 여전히 코를 골았다. 그런 아내 곁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아내가 아침준비를 하러 침대에서 내려갈 즈음에야 그는 비로소 잠이 들었다.
지영은 남편이 컴퓨터의 전원을 끈 것을 확인하고는 저녁 준비를 했다. 조금 있으면 학교에서 돌아올 미래에게 저녁밥을 서둘러 먹여 다시 학원으로 보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남편도 식사를 할 것이다. 가족을 위해서 밥을 짓고 그 밥을 맛있게 먹어주면 그녀는 행복했다. 그래서 직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기분 좋게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불린 고사리에 들깨가루를 듬뿍 넣어 볶음을 만들고, 새우젓을 넣은 호박 나물을 만들어 저녁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남편이 들어온 것은 오후 7시쯤이었다. 어깨가 처지고 힘이 없어 보였다. 비를 맨몸으로 맞은 모습이 저럴까 할 정도로 후줄근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을 보며 눈으로 말했다.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남편은 피곤한 얼굴과 구부정한 자세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어 샤워기 부스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들도 우울증이 있어요. 여자들은 드러낼 수 있지만 남자들은 속으로 삼키고 표현을 하지 않으니 더 심각합니다. 가족들과의 대화가 중요하지요. 쓸데없다고 생각되더라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셔야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불현듯 남편도 말 못할 고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게임에 빠져있는 거지? 우울 증세와 게임과는 어쩐지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새콤달콤한 부추무침을 접시에 담았다. 그것은 남편이 즐겨먹는 반찬이었다.
“잔디밭에 앉아서 뭐했어?”
남편은 식탁의 의자를 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남편에게서 비누냄새가 풍겼다. 그는 그녀가 만든 호박 나물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봤어?”
“응.”
“근데 왜 알은체 안했는데?”
“그냥.”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피씩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발가락을 주무르던 모습을 봤다면, 그것도 다른 여자가 아닌 자신의 아내가 그러고 있었다면 당연히 찾아왔어야 했다. 그런데도 알은 체를 안 했다니. 남편과의 거리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살인이 나도 모른 척 하겠네!”
그에게 아내가 투정을 부렸다. 본전도 못 찾은 격이 되어버린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내의 말이 맞기는 했지만, 딱히 아내에게 가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였다. 아내 옆에 주저앉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는 아내가 앉아있는 모습이 평온해 보이기도 했고 다소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다. 아내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아내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아내를 혼자있게 두자는 생각에서 건너편 벤치에 앉아 지켜본 것뿐이었다. 그는 썰렁한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빨강색이 좋아? 검정색이 좋아?”
그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할 말이 그렇게도 없지!”
아내의 타박이 상대가 두는 바둑알처럼 탁,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선의의 거짓말 따위도 하지 않았다. 아내가 만든 음식을 먹을 때도 맛있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미용실에 다녀와서 예쁘냐고 물었을 때는 난감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눈치채지 못해서였다. 평생 식언을 하지 않았으되 남을 즐겁게 해주는 말 또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황한 것을 안 아내는 풀죽은 소리를 내었다.
“그냥 한 소리야.”
그는 혼잣소리처럼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노란색하고 보라색을 좋아했었지.”
“내가 언제?”
아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부엌 천장으로 날아갔다.
“애기똥풀 좋아하고 쑥부쟁이꽃 좋아 했잖어”
“그건 꽃이지!”
“그만하자.”
광수 씨는 아내에게서 또 다른 벽을 보았다. 대화다운 대화가 되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그는 퇴직한 후 죽은 듯이 살고 싶었다. 온갖 사고 소식이 밖에서 들려도 스스로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뉴스 시간대에 국회의원이 뇌물을 먹었다 드러나서 카메라 빛이 터지거나 말거나, 아동을 학대하다 못해 때려죽인 부부가 점퍼를 뒤집어쓰고 화면 속으로 사라지거나 말거나, 어떤 기업이 부도가 나서 소액주주들이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메웠더라도 눈을 감기로 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굴속 같은 곳으로 가서 사지를 오므리고 잠이나 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다했다. 윗사람에게 아부는 하지 못했지만 원리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했다. 직장에서는 긴장을 풀어본 적이 없고, 안일하게 대처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승진철만 되면 자신의 이름이 번번이 누락이 되었다. 그는 불합리한 벽을 자신의 성실함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것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철벽을 허물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을 때 그는 직장을 그만 두었다. 그렇게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자 비로소 홀가분했다.
그는 익명으로 게임을 하는 시간을 즐겼다. 아무리 모든 것이 까발려지고 있는 세상이라고 해도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살자. 기고 날고뛰어도 제자리걸음인데 왜 그렇게 배고픈 개처럼 게걸스럽게 접시까지 핥아야 했던지 후회가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꺼내준 것은 아내였다. 아내에게 두고두고 고마워해야 하는데 그는 아직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진심으로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다소 흥분되어 빨강색과 검정색을 두고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 아내는 노란색과 보라색은 아니라고 했으니 둘 중에 하나를 고르면 되는 것이다. 요즈음 아내의 기분이 처져있으니 빨강색으로 끌어올려주고 싶었다. 그는 빨강을 결정하고는 아내의 속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이 주는 선물로 인해 조금이라도 마음이 달뜨기를 원했고, 예전처럼 아내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면 했다.
요즈음 아내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볼 때면 팔뚝에 난 털들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우르르 일어섰다. 아내가 부드럽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가시가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아내와의 관계가 모래를 손바닥에 두고 비비는 것처럼 서걱거렸다. 언제부터인지 아내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집에만 있어서인가? 그렇지만 그는 집에 있는 것이 가장 편안했다. 무엇보다 파자마 차림으로 늦잠을 오래도록 잘 수 있었다. 동료들의 매운 눈빛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었다.
아내는 자신에게 갱년기 증상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내가 벤 베개가 젖은 것도 모르고, 갑자기 덥다고 창문을 열었다가도 춥다며 문을 닫는 자신의 행동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불을 얼굴 위로 덮고 자다가 발로 그것을 차대기 일쑤였다. 아내가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자던 모습을 보았을 때, 아내에 대한 신비감은 아내가 푸 하고 내쉬는 숨 속으로 사라졌다. 어젯밤에는 아내의 코고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오늘도 새벽녘에 아내는 거친 숨소리를 뿜어대었다. 아내의 긴장 풀린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그는 매번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는 땀에 젖은 몸을 닦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고 아내의 코고는 소리 역시 잦아들지 않았다. 광수 씨는 언젠가 마시다 만 와인병을 들고 수면제 삼아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와인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흰색과 검정의 바둑알이 선들을 타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영상이 차오르고 있었다. 광수 씨는 바둑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그럴수록 와인은 입속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금세 와인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빨강 속옷을 입은 아내를 상상하며 아내의 곁에 누웠다.
아내의 손이 자신의 사타구니 속으로 거칠게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자신의 배 위로 아내의 묵직한 다리가 올라오는 것도 같았다. 그 순간 광수 씨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아내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기자는 뜻이었다. 아내의 손놀림이 빠르게 자신의 그것을 만지지만 아내의 욕심을 채우지 못했다. 아내는 순간 당황한 눈치였다.
“언제부터였어?”
아내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것은 자신도 알고 싶은 일이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회복을 원했고 밀착된 교감이 필요했다. 되지 않는 대화보다 서로의 몸을 느껴보고 싶었다. 남편이 말해주는 몸의 언어를 떠올린 것이 잘못이었나. 남편의 무반응에 그녀는 당혹스러웠다. 오랫동안 다른 곳을 헤매다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최근 몇 년 동안 자신의 몸을 탐하지 않았고 자신 역시도 그랬다. 그녀는 허망스러웠다. 자신의 여성성을 상실했다는 의사의 말보다 더 실감나지 않았고, 남편의 정년퇴직만큼이나 현실성도 없었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방안의 어둠을 지켜보았다. 남편의 입에서는 여린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남편은 미동도 없이 시체처럼 누워 고른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것은 시체였다. 나머지 삶도 그렇게 시체처럼 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그때서야 그녀는 자신의 처진 가슴과 늘어진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남편의 것만큼이나 생기가 없었다. 그녀는 침대 밑으로 떨어진 속옷을 찾아 입고 방을 나왔다. 소파는 그녀의 지친 몸을 포용했다.
아침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왔다. 미래의 아침을 차려주고, 아이가 아침을 먹는 동안 간식을 준비하고, 학교 앞까지 미래를 차에 태워 등교시켰다. 남편은 아직도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녀는 마트로 향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갔다.
그녀가 마트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남편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심코 식탁 위에 있는 큰 박스에 눈을 돌렸다. 그녀 앞으로 온 택배였다. 그녀의 호기심은 상자의 밀봉 테이프를 길게 잡아당기게 했다. 그녀는 비닐봉지마다 빨간 브래지어와 팬티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그녀의 새된 목소리가 광수 씨를 불렀다. 여보, 당신이 시켰어? 당신이야?
아내의 목소리에 광수 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즉흥적으로 아내를 돌아보았지만 아내의 목소리가 너무 큰 바람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아내가 무척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초간의 정전 같은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광수 씨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내는 빨간 브래지어를 가슴에 대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모르면 물어봤어야지? 분명 몸에 맞지 않다는 뜻인데 사줘서 고맙다는 뜻인지, 평소대로 돈으로 달라는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광수 씨에게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아내는 또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하나도 아니고 도대체 몇 개씩이야. 내가 붉은 악마야, 공산당이야? 맨날 빨간색만 입어? 광수 씨는 1 플러스 1인 것을 본 것이 기억이 났다. 속옷 한 세트를 사면 한 세트를 더 준다는 말에 10개를 클릭했었다. 몇 년은 속옷 걱정 안하게 해주려던 생각이 잘못되었나? 그는 아내에게 줄 코르셋을 주문한 기억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내에게 줄 원피스도 골랐었다. 모두가 빨강이었다.
그는 아내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하다 이내 체념했다. 그것은 바둑의 식물 단계를 뛰어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할 작정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에게 화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아내의 말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뒤죽박죽되더니 소용돌이치며 용오름이 되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온통 아내의 빨간 속옷이었다.
/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소설, 1996년 시)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포대능선」과 시집 『비보호좌회전』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