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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수풀孝在
백운철 신부
남자의 감격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용한 모세의 계명을 두고 예수님의 해석에 시비를 걸고자 한 것이다.
당시 랍비들 가운데 엄격한 입장의 샴마이 학파에서는 아내가 불륜을 행한 경우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자유로운 힐렐 학파에서는 다양한 이혼 동기를 받아들였다.
예컨대 아내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늘어뜨린 채 외출하거나 팔과 어깨를 드러낸 모습으로 거리에 나왔을 때, 외간 남자와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을 때, 거리에서 먹고 마시고 아이에게 젖을 먹였을 때, 음식이 타도록 방치하였을 때, 남편은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랍비 아키바는 자기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을 때에도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이 같은 남자의 횡포에서 여자와 가정을 보호하시고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근거하여 모세의 율법을 수정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으니, 하느님이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선언하신 것이다. 창세기 1장27절에 의하면 하느님은 먼저 인간(아담)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단일성을 구성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담이라는 말은 고유명사이기에 앞서 그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는 아담-남자(ish)가 먼저 창조되어 그 갈빗대로부터 여자(ishah)가 창조된 것으로 나와 있다.
하느님은 남자의 몸을 이용하되 남자의 몸 밖에서, 남자가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여자를 만드셨다. 아담은 깊은 잠에 빠져 가장 근원적인 욕구로써 자신의 협력자를 소망하였고 하느님은 그의 늑골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보자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고 외치며 감격해하였다.
이처럼 여자는 남자에게 탄성을 일으키는 감격의 대상이었고 최초의 말을 가능케 하는 소통의 대상이었다. 하와는 아담의 꿈이었고 동시에 아담의 미래였다. 프랑스 시인 아라공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느님께서는 여자를 남자 다음에 창조하심으로서 여자는 남자가 만나야 할 대상, 곧 남자의 미래가 되게 하셨다. 둘의 결합은 그러기에 꿈이 현실이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되는 창조의 과정이다.
이기적인 동기에서 독신주의를 즐긴다면, 그것은 혼인을 통해 남녀의 결합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위배된다.
신랑과 신부의 상호 관계는 성적인 만족과 자손번식의 목적을 넘어서서 아가페적인 사랑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깊은 종교적 차원을 지닌다.
신랑과 신부는 구약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표현하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를 상징한다.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실하였듯이, 부부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교구 백운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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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하는 어느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진행자가 출연한 노부부들에게 퀴즈를 냈지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처럼 백발이 되도록 평생을 함께 사신 것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한 할머니가 요란하게 부저를 눌렀습니다.
네, 할머니가 누르셨습니다. 정답은 무엇일까요?
할머니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지요.
웬수!
순간 방청석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진행자도 다른 출연자들도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할머니, 그것말고 네 글자로 답해보세요.
진행자가 이렇게 힌트를 주자 할머니가 거침없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정답! 평생 웬수!
물론 원했던 답은 백년해로(百年偕老)였지요.
남녀가 결혼을 하여 일생을 함께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잠깐의 퀴즈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오랜 결혼 생활을 한 부부들에게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를 결혼 상대로 맞겠는가?
라는 질문을 했을 때 남자는 20%, 여자는 3%만이 긍정적인 답을 했다는 설문 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자란 배경과 과정이 다른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개인의 자유와 이기주의적인 사고가 팽배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익숙지 않은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정의 시련이 많은 시대이지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참된 부부 관계를 정립해 주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6-9)고 엄하게 말씀하고 계시지요.
이혼이 성행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보다 예수님 시대는 훨씬 더 이혼에 대해서 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불행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지요.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만 취급했으며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간단한 이혼장을 쓰는 것으로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24,1)
여기에서 수치스런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편파적이었지요. 아내가 요리를 망쳐버린다든지, 낯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든지, 남편이 듣는데서 남편의 친척을 경멸하는 말을 한다든지, 목소리가 이웃에까지 들리는 소동을 피운다든지 하는 경우에도 모두 해당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남자의 눈에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생겼을 경우에도 적용시켜 합당한 이유 없이 이혼을 당하기도 하였지요.
이러한 남자의 횡포에서 여자와 가정을 보호하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대단히 엄하게 금하셨습니다. 결혼은 남녀 두 사람만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신성한 사랑의 계약이며 소명입니다. 불완전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하느님의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2,22-23)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이 관계는 죽기까지 평생 깨질 수 없는 것임을 오늘 예수님께서 엄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물론 우리를 억압하거나 부자유스럽게 만들자는 의도가 아니라 우리의 가정을 보호하고 지켜 주시려는 뜻이지요.
여러 가지 어려움들 속에서 고충을 딛고 더욱 건강하고 풍요로운 가정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뜻 깊은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는 신자들은 가정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당신은 무엇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1. 좋은 부모가 되는 것 95%
2. 행복한 결혼 생활 90%
3. 좋은 친구를 갖는 것 83%
4. 자기 분야에서 정상이 되는 것 80%
5. 권력 또는 영향력을 소유하는 것 16%
6. 부자가 되는 것 12%
7. 명예를 얻는 것 8%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은 지금 무슨 일에 가장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있습니까?
였는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돈 버는 일에 95%
2. 명예를 얻기 위해 90%
3. 권력과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일에 83%
4. 행복한 결혼생활에 20%
5.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10%
6.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일에 7%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좋은 부부 관계와 행복한 가정을 원하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버는 일이나 명예나 출세를 위해서, 또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일에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그 결과 많은 가정이 해체되거나 파괴되고 그 불완전한 가정에서 마음 둘 곳 없이 자라난 아이들은 공동체 의식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극도의 이기적인 어른으로 성장하여 또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가고 있지요.
<월스트리트저널>이 조사한 대로 좋은 부모가 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유행처럼 이기적인 동기에서 독신주의를 즐긴다거나 부부가 자녀를 낳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혼한 부부가 많은 것이 현실인데 이혼한 남편과 아내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사랑을 쏟으며 관심을 가지셨던 사람들은 가정이 깨어져 어려움에 처한 과부이고 고아였습니다.
천주교회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새로운 삶을 위해 여러 가지 활로를 모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이혼한 가정의 이유가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경우마다 다르기에, 본당 사목자와의 개인적인 면담을 통해서 길을 찾으시기를 말씀드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대해서 엄하게 단죄하시지요. 하느님 안에서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가정이 주님의 성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우리 신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결국 사랑만이 영원하며 사랑만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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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신부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
요즘은 '변화' 의 계절이다. 시내에서까지 단풍을 보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높푸른 하늘과,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노랗게 또는 빨갛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과일들을 보면 가을인 것이 분명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와, 그토록 많은 피해를 주었던 태풍과 그 후의 어두운 날들도 어느덧 지나갔다. 이렇게 계절만이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전세계적인 경제적 불안 속에서 큰 변화를 겪으며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인간관계가 큰 아픔을 주며 깨어져 가고 있다. 경제 문제가 그 주요인이라고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오늘 주일의 복음말씀에서도 '인간관계'의 '깨어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게되는 인간관계들 중에서 가장 긴밀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부의 관계'의 '깨어짐', 곧 '이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몇몇이 예수님께 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라고 분명한 답을 주시지만, 그 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질문자들에게 반문을 하심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먼저 말하도록 유도하신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다"(참조: 신명 24, 1-4)고 본다. 그런데 신명기에 나오는 “이혼장을 써주라"는 조건은 본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이혼증서는 그 이혼증서를 갖고 있는 여성이 전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이제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된다는 것을 전남편이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즉 위의 신명기의 말씀은 이혼증서도 없이 쓰던 물건을 버리듯이 자의적으로 아내를 버리지 못하도록 한 조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연결시키시면서 하느님의 본래의 뜻에 따르려면 이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시며,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는 율법을 준 것은 “굳을 대로 굳어진 마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그 당시 아내마저도 소유물처럼 생각하여, 이혼장을 써주기만 하면 “아내를 버려도 되는 듯이" 쉽게 생각하던 율법해석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해석과 관련하여 '굳어진 마음'(참조:시편 95,8; 에제 36,26; 히브 3,7-11; 마르 3,5)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라 하더라도, 그것들을 통해서 본디 주어진 하느님의 뜻이 제 효력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이혼'의 전거로 삼는 모세의 율법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율법을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 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심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예수님을 공박하려던 반대자들의 주장을 피해가신다.
이번 주일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혼인미사 때 가장 자주 듣는 복음이다. 교우 부부들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그들의 일생에서 가장 엄숙한 자리에서 부모친지들 앞에서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서약했던 것을 회상시킬 것이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 또는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서약은 결코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즉 상대방이 건강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일 때에만, 또는 사회적으로 성공할 때에만, 또는 상대가 아름다울 때에만 유효한 조건부 서약이 아니었다.
혼인미사 때에 신랑과 신부는 각각 자신의 약점은 물론,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스스로의 미래는 물론 상대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실히 모르면서 “일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서약하였다.
그러기에 이 서약은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서약의 내용인 '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도 부부는 하느님께 함께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을 부부로 짝지어 주신 하느님께서 또한 당신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을 지켜 나갈 힘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 2장이 깊은 차원에서 말해 주듯이, 인간은 변화 무쌍한 이 세상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가정 안에서 볼 수 있는 '부부'의 관계와 '부모와 자식'의 관계 에서처럼 이해관계를 떠나 조건없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지속적 인간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가정에서마저 그런 지속적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많은 가정이 위기 속에 있다.
본디 가정은 인간이 인생의 첫 단계인 어린시절부터 사랑, 신뢰, 충실성 등과 같은 기본적 덕을 배우는 학교이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믿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인데, 오히려 정반대로 미움과 불신 그리고 경쟁을 먼저 배우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야 할 부모의 관계가 비극적으로 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형제자매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위기에 처한 가정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 곳에서는 '참 가정'을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뜻한 가정적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김영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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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불가해소성, 즉 결혼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이므로 인위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우리 사회는 점차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1년 7월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이혼율은 47%로 세계 3위라고 합니다. 통계의 허점이 있지만 아무튼 부부들의 이혼이 심각한 사회문제인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혼은 먼저 본인의 불행이요, 그 자녀의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혼은 온 가족에 크나큰 상처를 주고, 사회의 결집력 역시 무너뜨립니다. 이혼 사유가 매우 다양하고 더욱이 ‘오죽하면 이혼하겠는가.’라고 이해도 할 수 있겠지만 이혼하는 이유는 아마도 ‘인내’와 ‘화해’와 ‘용서’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에 올라있는 “부부생활의 6가지 법칙”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1. 산울림의 법칙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듯이 대접받고자 한다면 언제나 먼저 마음 쓰고 대접해야 합니다.
2. 실과 바늘의 법칙입니다. 부부란 실과 바늘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바늘이 너무 빨리 가면 실이 끊어지고 바늘이 너무 느리면 실은 엉키고 맙니다. 그렇다고 바늘대신 실을 잡아당기면 실과 바늘은 따로 놀게 됩니다. 더구나 실과 바늘은 자신의 역할을 바꿀 수도 없고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3. 수영의 법칙입니다. 땅에서 수영을 배워 물속에 뛰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결혼을 통해 사랑의 이치를 깨우쳐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피차 미숙함을 전제하고 살아갈 때 서로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4. 타이어의 법칙입니다. 사막의 모래에서 차가 빠져나오는 방법은 타이어의 바람을 빼는 일입니다. 부부가 갈등할 때 즉시 해야 할 일은 자존심과 자신의 고집이라는 바람을 빼는 일입니다.
5. 김치의 법칙입니다. 배추는 다섯 번 이상 죽어야 김치가 됩니다. 땅에서 뽑힐 때, 칼로 배추의 배를 가를 때, 소금에 절일 때, 매운 고추와 젓갈과 마늘의 양념에 버무려질 때, 그리고 입 안에서 씹힐 때, 그래서 입안에서 김치라는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행복이란 맛을 내기 위해 부부도 죽고 죽어야 합니다.
6. 고객의 법칙입니다. 고객에게는 절대 화를 낼 수 없습니다. 항상 미소로 맞이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재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배우자를 나의 마지막 고객이라 여기십시오. 거기에 부부 관계를 이어가는 해답이 있습니다.
사실 결혼생활은 끊임없이 서로를 재발견해나가는 과정, 서로 조율하고 양보하면서 적정 타협점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법칙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인내’와 ‘화해’와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서울대교구 고준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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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결혼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와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신약성서가 전해 주는 예수님의 언행에서 하느님과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아듣습니다.
오늘 두 개의 이야기가 모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오늘의 첫째 이야기는 모세가 허락한 대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으냐는 바리사이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모세가 남성들에게 준 특권이 아니라,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기에 그 사실을 감안해 모세가 그 법을 제정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법을 남성들에게 허락된 특권이라 생각하였고, 예수님은 그것이 남성들의 학대에서 여성들을 구출하는 수단으로 모세가 제정한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인류역사는 강자가 약자를 학대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인류역사가 여성의 인권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현대에도 여성을 학대하는 문화권은 아직 있습니다.
유엔이 발간한 세계 인권 현황을 보면, 세계 곳곳에서, 특히 중동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많은 여성이 여러 가지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에게 네 명까지의 아내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나 남편의 뜻을 거역한 여성은 잔인한 체벌을 감수해야 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바리사이가 거론하는 것은 신명기(24,1)가 전하는 법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눈 밖에 나면 남편은 이혼 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는 법입니다.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이고 시대였습니다. 여성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그 여성은 학대당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성을 남편의 학대에서 구출하기 위해, 아내를 집에서 내어보내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남성들은 그 법을 자기들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해석하였지만, 실제로 그 법은 그 시대 남성의 학대에서 여성을 해방시켜 살리는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창세기 2장의 창조 설화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아내를 버리게 하여 약자인 여성을 구해내는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하느님이 살아계셔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두 사람 사이에 살려내어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은 하느님이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갈비뼈는 심장을 보호하고 심장의 고동이 들리는 뼈입니다. 부부는 서로 심장의 고동을 들으면서 상대를 보호하고 위해주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는 또한 여성은 남성을 ‘거들어 줄 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들어 준다.’ 혹은 ‘돕는다.’는 말은 보조적 역할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서는 하느님도 인간을 거들어 주고 도와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거들고 도와서 상대를 살리는 노력을 하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고 살리는 일은 서로의 존재를 은혜롭게 생각하고 자비롭게 행동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짝지어주셨기에’ 하느님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 계시게 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 있으면,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자비롭고 선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짝지어주고, 함께 있어 행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완고하여 미워하고, 서로 갈라집니다.
오늘 복음의 둘째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이를 데려와 예수님이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을 청하였고, 제자들은 그들을 막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언짢아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받아 안고 축복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린이와 같이 겸손하라는 교훈으로 알아듣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어린이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작고 약합니다. 어린이는 자신감을 갖지 않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베풀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삽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남녀가 부부로 가정을 이루고 살 때, 두 사람 사이에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심장의 고동을 듣고, 상대를 거들어 주어 살리고 용서하면,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린이와 같이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고, 짓밟아서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함께 있는 배우자를 은혜로운 존재로 생각합니다.
가톨릭교회에는 ‘결혼의 불가해소(不可解消)법’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만든 법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헤어질 수 없다는 법입니다. 부부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면, 신앙생활에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 정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 마음이 완고한 것을 감안한 모세는 법을 만들어 남성의 학대에서 여성을 구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서로에게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의 불가해소법’은 부부가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에만 충실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라지면, 완고하고 모진 인간의 마음만 남습니다. 혼배 조당 법도 이 모진 인간 마음의 산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결혼했거나, 이혼했거나, 어른이거나 어린이거나 모두에게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분, 자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 자비하신 하느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상처를 받고 이혼한 사람, 그리고 새로운 배우자를 맞아 행복하게 살겠다는 사람에게도 자비하신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교회는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 안에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살아있게 도와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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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성 신부
나는 배우자에게 힐링(healing) or 킬링(killing)의 존재인가?
“가정 폭력으로 결혼 생활을 더 이상유지할 수 없는데, 이혼해도 됩니까?” “남편이 경제적으로 무능한데, 이혼해도 됩니까?” “배우자의 외도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성격 차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2011년 이혼 11만 4,300건, 부부 1,000쌍당 9.4 쌍이 이혼한 현실이 우리 가정의 자화상입니다. 혼인기간 4년 이하 부부의 이혼율(26.9%)이 가장 많고, 혼인 기간 2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사회의 법적·제도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혼인하기 전 혼인의 의미와 부부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준비교육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현 시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혼인과성, 출산에서 약자인 여성! 이혼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사상, 대중 매체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의 대화를 통해 혼인의 근원적인 차원을 묵상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을 당시 혼인율은 낮았고, 이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존중받지 못했고, 혼인법도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처럼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를 정당화해 주는 법이었습니다.
남자들은 독신으로 지내며 책임없는 삶을 즐겼고, 따라서 이혼 문제에서 여성들은 약자였고 피해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완고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계획안에서 바라보십니다.
“창조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을 이루니,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살아가지만, 그 구별은 일치를 지향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담처럼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한” 고독한 존재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한 여인을 얻고, 기뻐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임을 통해서 한 몸(일치)을 이룹니다. 교회는 혼인을 성사로 축성하였습니다. 혼인은 인간적인 사회제도의 차원으로 국한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때 혼인의 아름다움과 축복이 얼마나 위대한지 드러납니다.
부부가 서로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존중하는 가운데, 참된 협력자, 서로에게 삶의 힐링(healing)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교부테르 뚤리아누스는 말합니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소망, 하나의 신뢰, 하나의 봉사와 섬김으로 뭉친 두 신앙인의 유대는 얼마나 놀랍고 경탄스러운가? 그들은 둘 다 형제이고, 절친한 봉사자이다.
그들 사이에는 정신이나, 육체에서 더 이상 거리가 없다. 그들은 진실로 한 몸 안에 둘이고, 몸이 하나인 곳에 정신도 하나이다.”
수원교구 유주성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