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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맥
길순이는 다시 두 손을 부채살처럼 쫙 펴고 손가락을 꼽아 나갔다
계산은 틀림이 없었다. 매달 하루도 거로는 일 없이 28일만에 있었으니까, 오늘로 나흘이 지난 것이다. 두 달째의 일이다. 그럼…… 길순이는 그만 볼을 감쌌다. 비릿한 피냄새가 엉킨 듯한 흐려진 의식을 헤집고 드러나는 두 개의 영상. 나흘 밤 겪었던 얼과 어머니의 모습과…… 길순이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왁 울음이 솟구쳤다. 두 팔로 꺾어세운 다리를 감아잡은 길순이는 몸을 바싹 조여뜨렸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비가 추적거리는 어둠을 가르며 가까워 오는 발자국 소리…… 갑자기 덮쳐오는 가위눌림을 헤어나려고 입술을 깨물며 파르르 떨었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쓰러진 날 밤, 건너마을의 삼촌을 부브러 여우고개를 넘다가 들은 부엉이 울음소리. 그런 무서움도 아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이모집 심부름을 가느라 도깨비 배밭의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목덜미를 감던 으스스한 챤바람, 그런 두려움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대낯인데도 상여움막을 지나칠 때면 전신에 끼쳐오던 차가운 소름, 그런 공포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임종을 못 지킨 여머니의 산소의 황토에 딩굴며 몸부림쳤던 서러움과 뒤범벅이 되어 울음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임신……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으려 해도 가위는 덮쳐왔고 밭은 어두운 구렁텅이로 한정도 없이 빠져 들어갔다
“아유 가려, 으응, 응….”
어깨를 들먹이며 울던 길순이는 언뜻 손으로 입을 가렸다. 봉자가 장딴지를 벅벅 긁어대며 잠꼬대를 한 것이다. 가지가지 염색물감에 절어 만성습진을 앓는 다리가 잠결에도 가려운 모양이었다. 길순이는 울음을 추스리며 숨을 죽였다 봉자가 돌아누우며 긁어대던 다리를 분옥이의 허리에다 걸쳤다. 순간 길순이의 가슴은 유리그릇을 놓쳐버린 때처럼 찡 얼어붙었다. 저 지경이 되면 유독 잠귀가 빠른 분옥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운 것을 들켜서는 안된다 길순이는 서둘러 누울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몸을 바로 하고서야 셋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비좁은 방, 봉자가 이미 멋대로 팔다리를 내뻗어버린 다음이라 쪼그리고라도 누울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참 사람 미치겠네.”
분옥이가 봉자의 다리를 떠다밀며 발딱 일어나 앉았다.
“……거, 누구니? 길순이구나?”
분옥이의 쏘아붙이는 목소리에는 너 또? 하는 말을 담고 있었다.
“……”
길순이는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목은 울음으로 채워진 채였다.
“얘, 언제까지 이럴래? 그런다고 죽어버린 엄마가 살아와?”
길순이는 분옥이 곁으로 다가앉았다. 분옥이의 다구진 말이 더 나오기 전에 달래고 빌어야 할 판이었다.
“다시는 안 그럴께. 그만 자자.”
“글쎄 사람 기분잡치게 하지 말란 말야. 한두 번이니, 한두 번?”
“그래, 잘못했어.”
길순이는 분옥이의 어깨를 잡아 눕히려 했다. 분옥이는 팔을 뿌리치며 더 몸을 사렸다
“진짜 언제까지 이럴꺼니?”
“다시는 안 그런다니까. 자 약속하자”
길순이는 억지로 웃어보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필요없어, 고런 양돼지 닮은 약속은.”
양돼지는 그들 직장인 염색공장 사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양돼지는 수차에 걸쳐 약속한 급료 인상을 벼라별 이유를 다 붙여 한번도 지킨 일이 없는 위인이었다.
“나도 서럽기로 친다면 너보다 곱은 돼. 아부지란 작자는 얼굴도 모르지, 열두 살에 엄마까지 사요나라 하고 이날 이때까지 혼자 굴러다니며 살았어. 너처럼 울자면 진작 눈깔이 썩어버렸을 거라구.”
“알어, 다 알어. 다시는 안 그러기로 정말 약속할께.”
길순이는 이제 몸이 달고 있었다 분옥이의 그런 지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결말은 뻔한 것이다. 이야기가 계속됨에 따라 목소리가 가라앉아 가다가는 울음이 터진다. 그럼 그 울음은 끝이 없었다.
“사람이 슬프면 당연히 울어야지. 그치만 우린 그럴 수도 없잖니. 잘 입는 건 숫제 바라지도 않지만 밀가루죽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꼬라지에 일은 또 얼마나 고되니. 근데 밤마다 울고 잠 못 자면 몸이 어떻게 견디니. 이러다가 덜컥 병에나 걸려봐. 일 못 나가 일당 깎이지, 모아둔 돈 없으니 약은 뒷전치고 당장 굶는 거야 병나고 굶고 어떻게 되는지 알지? 가는 거야 그대로 가는 거야 우리 같은 것들 가도 누구 하나 눈 한번 깜짝 안해. 우리도 사람인데 그런 꼬라지로 가버리기는 너무 억울하잖니. 결국 가난하고 배고픈 우리 같은 것들은 기쁠 일이야 애당초 없는 거고, 슬픈 일에도 슬퍼서는 안되게 돼 있어. 아니, 너?”
“알어, 내가 병신이지.”
길순이는 분옥이의 손을 꼭 잡았다.
“네가병신이 아니라 돈이 개새끼고 가난이 썅놈이야 이 기집앤 잠도 험하게는 자더라”
분옥이가 봉자를 벽쪽으로 몰아붙였다.
“그럴지도 몰라 그만 자자”
길순이는 분옥이와 봉자의 사이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은 대낮이었다. 정말 임신이라면……, 떼칠 수 없는 두렵고 무서운 올가미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다시 서울로 올라올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다시 봉자와 분옥이가 기거하는 판잦집 사글세 방으로 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순전히 공장에 묶여 있는 돈 때문이었다. 길순이는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잃어버린 슬픔으로 매일 밤을 울었다. 봉자와 분옥이는 위로하느라 여념이 없였다. 봉자의 신세타령도 분옥이의 기구한 지난 얘기도 몇 번씩 되풀이되었다. 그러다가 셋이는 함께 울기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면서부터 봉자와 분옥이가 위로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다 잊어버리라고 강요하듯 한 것이다. 둘이의 그런 억지가 자선을 위한 우애인 것을 길순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어버린 슬픔이나 삼촌댁에 맡겨두고 온 두 동생에 대한 안쓰러움은 조금도 가시지를 않았다. 그래도 봉자와 분옥이의 마음씀이 고맙고 미안하여 속으로 삭이느라고 애도 많이 썼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것이 없어 가슴을 조여오다가 오늘밤에는 기어코 약속횰 깨뜨리고 만 것이다. 분옥이에게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빌다시피 한 것도 빨리 재워 이 일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만일 임신이라면 봉자와 분욱이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임신을 알리게 되면 그 일이 전부 탄로가 나고 만다. 그럼…… 길순이로서는 봉자와 분옥이에게 버림받는다는 사실은 임신을 했다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이 막막하고 답답한 세상에서 유일한 의지고 바람벽이 봉자고 분옥이었다. 그래서 이런 경우 마음을 털어놓으면 무섭고 두려운 생각이 한결 덜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섭고 두려운 그림자는 더욱 짙고 끈덕지게 전신을 욱조여오는 것이다.
사채동결(私債凍結). 길순이는 물론 봉자나 분옥이도 그 어려운 말뜻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외에 광명(光明)직물염색공장의 2백여 여공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뜻은 곧 회사나 공장 등을 상대로 빚놀이하던 돈의 이자를 못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원금조차 묶어버린 새로 만들어진 법이라는 풀이가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터져나왔다 그때서야 비로소 2백여 여공들은 눈이 휘둥그래지고, 화들짝 놀라고, 입을 딱 벌리고, 얼굴이 사색이 되고, 털썩 주저앉고, 발을 동동 구르고, 엉엉 울고, 그래서 수돗물이 탕을 넘쳐 흐르고, 탕마다 헹궈내지 않은 옷감이 뒤헝클어지고, 오렌지색이 빨간색으로 둔갑을 하고, ‘시야게’감에 때가 묻어났다. 그리하여 반장이 소리지르고, 관리과 직원이 아우
성을 치고, 관리계장이 호랑이울음을 울고, 관리과장이 납시는 소동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변소길에 휴지로나 쓰고 어쩌다 연탄불을 지필 때 숯 밑에 놓는 붙쏘시게로나 찾던 신문을 손수 사들게 되었다. 그러나 깨알보다 작은 글씨를 아무리 읽어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길은 막연했다.
책임량을 완수하지 못하면 일당을 제하고 말겠다며 반장을 제쳐놓고 관리과 직원들이 작업감독을 했다.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일손들을 재게 놀리면서도 가슴마다에는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렸다.
그들 셋은 약속이나 한 듯이 다리를 내뻗고 등을 벽에 기대 몸을 부린 채 말이 없었다. 피곤에 지쳐 풀려버린 눈에는 물기에 젖은 절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
분옥이는 가슴을 와득와득 쥐어 뜯고 싶었다. 5만 5천원. 3년에 결쳐 모은 그 돈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떼어 먹혀? 그게, 그게 어떻게 번 돈인데, 차라리 식칼을 물고 엎어져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안된다.
만 5천원만 더 모으면 그 가슴 조이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7만원으로 6개월간 미용학원엘 다닌다. 그리고 어엿한 미용사가 된다. ‘시다’가 아닌 횐 가운을 입고 빨간 메니큐어 칠한 미용사 된다. 가지 가지 모양의 머리를 만들어내는 기술자가 되고 단골을 잡고 고정적인 월급에 후한 팁을 받아 차곡차곡 모아 독립을 한다.그때는 미장원 주인, 아니 미장원 마담. 여기에 이르면 분옥이는 그만 가슴이 펄럭이고 전신이 짜릿짜릿해지는 것이다 정신은 아물아물해지며 몸이 붕붕 뜨는 것이 타보지 못한 비행기 타는 맛이 이러랴 싶었다. 그런데 크 돈을¨…
봉자의 마음은 2년 전 새벽에 집을 도망쳐나오던 꼭 그런 허망한 기분이었다. 순심이의 편지만 믿고 서울 돈벌이를 작정한 나머지 겨울 새벽길을 더듬어 걸으며 왜 마음은 그리도 텅빈 들녘처럼 허망했을까. 생전 처음 부모곁을 떠나 말만 들은 서울로 가기 때문이거니 했지만 기차를 타고서도 그 허망한 기분은 가시어지질 않았다. 그때 되돌아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허망했던 기분은 서울역에서 내려서 두 눈을 뒤집고 찾아도 보이지 않던 순심이를 원망하면서 절망으로 변했다. 그 절망은 견딜 수 없는 향수였다. 그러나 그 짙은 향수는 돈벌이를 강요했다. 돈을 벌지 않고서는 얼굴을 들고 돌아갈 수 없는 집이었다. 집을 뛰쳐나온 변명의 구실이 없었다. 그동안 3만원을 모았다. 그걸 남들처럼 회사에 넣어 이자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이 그렇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8월 초순, 여름인데도 마음은 꼭 겨울 새벽의 텅빈 들녘처럼 허허할 뿐인 것이다. 누구누구처럼 별 계획도 없었다. 5만원만 모아지면 그걸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리라 했다.
길순이는 자꾸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홀로인 어머니 얼굴이 어른거렸다. 열일곱에 떠나온 고향 스물한 살이니까 어느덧 4년쌔가 되었다. 봉자나 분옥이보다 오래 되었으면서도 그네들과 같이 지옥탕(염색한 천을 헹궈내는 첫번째 탕을 그렇게들 불렀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도 다 돈 때문이었다. 세월을 따라 회사 규정대로 했다면 지금쯤은 신선놀이(건조된 직물을 손질하는 부서)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진종일 지옥탕에 무릎까지 담그고 서서 염색물감의 목에 살갗이 썩거나 습진으로 발가락 사이가 진물러도 우선 돈이 필요했다. 신선놀이를 하는 축들이나 분옥이 봉자보다 삼분지 일이 더 많은 수입을 떼쳐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분옥이 봉자보다도 장딴지 살갗이 험하게 부르트고 습진도 고질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 지옥탕에서 견디는 것도 금년뿐, 내년부터는 별수없이 신선놀이를 하게 되어 있었다 금년 초에 벌써 회사측에서는 신선놀이를 명령했었다. 인건비 낭비를 막기 위함이었다. 관리계장에게 사정사정해서 금년까지만이라는 허락을 겨우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늙고 두 동생은 어리고…… 한 달에 만 4천원 월급에서 자취비, 사글세 방값. 24개월 5만 원짜리 곗돈 등을 제하고 나면 회사에 맡긴 7만원에서 나오는 3부 5리의 이자를 합해도 집에 4천원을 송금하기에는 숨이 가빴다. 이자도 못받고 원금도 묶이고…… 길순이는 또 목젖이 아프도록 침을 삼켰다. 곧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것이다. 당장 다음달부터 어머니와 두 동생은…… 자꾸 눈시울이 매워져서 한사코 눈길을 천정으로 올렸다.
“그만 밥이나 한술 끓여먹고 자자”
봉자가 선하품을 했다.
“저건 그저 처먹는 것밖에 모르지. 아, 불고기도 토해질 판인데 깡보리 밥이 넘어가게 됐니?”
양철판에 콩을 쏟아붓는 것 같은 목소리로 분옥이가 대질렀다.
“좋아하네. 참 별난 속이다, 불고기가 토해지게. 내야 불고기 아니라 개고기라도 없어서 못 먹겠다.”
봉자는 사람좋게 히히거리고 웃었다.
“저 기집앤 쓸개도 없어. 난 아주 미치고 환장을 하겠는데. 아이구 잡것……
분옥이는 고쳐앉으며 가슴을 와드득 쥐어뜯는 몸짓을 했다.
“얼씨구, 고렇게 지랄한다고 일이 풀리냐? 다 운수소관이고, 애초에 팔잘 잘 타고 나야 해. 아무나 미용사 되고 미장원 차리는 줄 알아?”
“저 병신이 누굴 약올리고 지랄이지?”
분옥이가 파르르 일어섰다. 길순이는 얼른 분옥이를 붙들었다.
“둘 다 관둬라 우리끼리 다투고 속 썩히면 뭘하니. 더 두고 보기로 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밥이나 끓여먹자.”
길순이는 자리에서 얼어섰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밖에 마음만큼 무거운 더위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틀째 되는 날 염색공장 안에는 갑자기 화기가 돌았다. 여공들의 얼굴에는 높은 건조대에서 펄럭이는 오렌지빛 천마냥 밝은 웃음이 피었다 사방에서 웅성거리고, 더러는 얼싸안고, 몇몇은 손뼉을 치고 뛰고, 누군가는 눈물을 홀리기도 했다 50만원 이하의 사채를 논 사람들은 원하는 시기에 곧 되돌려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인 줄 알았다. 너나 없이 습진으로 진무른 발가락에 연고 한번 제대로 발라보지 못하고 모은 돈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딸라변을 놓을 수도 있고 일수놀이를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건 개 아가리에 고깃덩이를 던져넣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짓이었다. 6부나 7부 변놀이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가 개인인 이상 날 잡하먹어라 하고 버티는 철판 깐 심장 앞에서는 위험하기는 일수놀이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아쉽고 억울하긴 했지만 안전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3부 5리의 이자로 거의가 회사에 맡기고 있는 터였다. 회사에서도 자활책을 내세워 경리과장은 안전한 이자놀이를 권유하기도 했다.
“그럼 그렇지. 벼룩의 간을 내먹었음 내먹지 우리 같은 것들 돈을 설마…….”
“누가 아니래. 우리 같은 것들 돈 잘못 먹었단 3년 핏똥 싼다구.”
여공들은 신이 나서 이렇게 재잘거렸고 일손도 한결 가볍고 빨랐다.
그리고 돈을 찾을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여공들의 얼굴은 다시 파랑물감 빨간물감 노랑물감 초록물감으로 뒤섞인 지옥탕의 물만큼 탁하고 어둡게 변해버렸다. 그 절망과 낙담의 도는, 처음 이자는 말할 것도 없고 원금까지 받을 수 없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보다 몇 배나 크고 진했다.
그날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돈을 맡긴 대부분의 여공들은 경리과로 몰려갔다. 새 법으로 정한 사채 이자가 2부가 못되니 다른 방법으로 이자놀이를 하겠다는 계산으로 돈을 찾으려는 여공은 거의 없었다. 우선 재산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방어태세였다. 그러나 경리과에서는 태평세월이었다. 사무적으로 정리를 해야 되니까 며칠만 기다리라고 했다. 막연하게 며칠이면 언제냐고 딱 잘라 말하라고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자 한 사흘이라는 답이었다. 불안하고 걱정스러웠지만 물러서는 도리밖에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린 사흘째 되는 날 오후 날벼락은 떨어진 것이다 :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여러분들 각자가 회사에 맡긴 액수는 적고 사람수는 백칠십여 명에 달하여 개인당 서류를 꾸며 사장님께 결재를 맡게 되면 일이 번거롭고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손해가 지대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의 돈을 받아줄 수가 없게 됐어요. 그래서, 항시 여러분의 편에서 여러분을 돕고 여러분이 하루속히 자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신 우리 총무부장님께서 이 일의 해결을 위해 고심하시던 중 묘안을 내셨습니다. 그 묘안이란 뭐냐. 다름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돈을 총무부장님 한 분 이름으로 결재를 맡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리과에서는 여러분들의 개인 카드를 비치하고 매달 원금에 맞는 이자를 분배해 왔습니다. 에에,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여러분이 맡긴 1인당 원금을 평균 5만원으로 잡고 1백70명이면 5, 7에 30에 5요, 5, 1은 5니깐 도합 8백 50여 만원이 됐지요. 그 돈의 명의가 법적으로 총무부장님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이번 조처로 말미암아 5백만 원 이상이면 3년 거치 5년상환에 걸리게 되었어요. 그러니 법은 엄중하고 인정이 없는지라 법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앞으로 3년을 기다리며 사채 법정이자(法定利子)를 받고 4년째 뒤는 해부터 원금을 찾게 됩니다. 나 개인으로서는 무척 가슴 아프게 생각하나 법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여러분들의 넓은 이해를 바라는 바이올씁니다.”
경리과장의 그런 유식한 연설을 듣고나서도 여공들은 아무 동요가 없었다. 처음 사채동결의 소식을 들은 때와 마찬가지였다. 결국 작업총반장 허씨의 보충설명을 들은 다음에 와르르와르르 무너지는 가슴을 힘겨웁게 붙안아야 했다.
다음날부터 공장 안에서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어느 때 없이 염색물감 냄새가 역하게 속을 뒤집었다.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흘러 나오던 유행가 대신 긴 한숨이 꼬리를 물었다. 물속에 담긴 종아리가 못견디게 아리고 발가락 사이가 미치게 가려워 오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자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말이 퍼졌다. 그 전에 사장이 내놓은 이자는 4부 5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총무부장과 경리과장이 짜고 5리씩 해먹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런 사실을 사장은 뒤늦게 알았지만 다행히 모든 돈이 총무부장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당장 돌려주지 않고 장기간 이익을 볼 수 있게 되자 두 사람을 용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그날로 사채신고 해버린 것이었다.
회사에 돈이 물린 사람들 전부가 파업을 한 것은 열흘쯤 지나서였다.
모두 일손을 놓고 마당에 나앉았다. 법에 따라 사채를 돌려달라. 6개월 전에 약속한 임금을 인상하라. 그들이 내세운 요구조건이었다. 오후 1시쯤에 나타난 사장 양돼지는 이틀간의 여유를 주면 요구조건을 꼭 해결하겠노라 했다. 그때 해결이 안 되면 다시 데모를 하든 파업을 하든 하면 될게 아니냐고 구슬렀다. 그날은 저녁도 굶고 오전에 까먹은 만큼의 시간을 야근으로 채웠다.
그런데 다음날 작업총반장 허씨와 물감조정 책임자 박씨가 파면을 당해버렸다. 그리고 총무부장이 일장 훈시를 했다. 겁없이 설치지 말고 눈치껏 알아서 하라는 내용의 찬바람이었다. 총무부장의 얼음장 같은 말도 무섭긴 했지만 그 일의 주모자격인 허씨와 박씨가 없어지자 여공들은 한낱 모래알들에 지나지 않았다.
입이 부르틀 지경으로 온갖 상스러운 욕을 다투어 내갈겼다. 애꿎은 옷감만 쥐어뜯고 비비틀었다. 넝마 같은 신세타령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지치고 늘어져 버렸다. 그들이 아무리 욕을 퍼대도 양돼지의 살은 내리지 않았고, 그놈의 번쩍거리는 검은색 자가용은 잘도 굴러다녔다. 총무부장이나 경리과장의 기세도 예나 다름없이 당당했다.
“쌍놈에 신세 팍 죽어버릴까부다”
분옥이는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이런 말을 뱉었다
“내가 미친년이지. 못배운 촌년이 환장을 해서……”
맥이 빠져버린 봉자의 넋두리였다
길순이는 불볕이 쏟아지는 모래밭을 허덕이는 기분으로 나날을 넘기고 있었다. 법으로 정한 이자에서 세금까지 떼고 나면…… 당장 집에 보낼 돈이 막연해진다. 방세는 올랐으면 올랐지 내릴 가망은 없다. 그럼 국수나 풀떡으로 때우는 점심을 굶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두의 형편이 이처럼 옹색해지면 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만 잘못해도 계는… 계가 깨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전신의 피가 말라드는 일이었다. 17개월을 꼬박꼬박 냈고 앞으로 4개월만 있으면 타게 되어 있었다. 그 5만원을 타면…… 이 징그럽고 신물이 나는 염색공장을 벗어나리라 했다. 분옥이와 함께 미용기술을 배워도 좋고, 떳떳하게 보증금을 내걸고 화장품판매원으로 나서 당장 돈벌이를 할 수도 있었다. 제발 계만 깨지지 말기를 빌었다.
그렇게 아흐레가 지나서 이자를 받는 날이 되었다 전 달보다 반 가깝게 줄어버린 액수를 받아들고 길순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곤축이 되도록 얻어맞은 아픔이 이러랴 싶었다. 옷감을 상했다는 엉똥한 누명을 쓰고 한 달치 봉급을 몽땅 변상조치 당해버린 억울함이 이러랴 싶었다. 으례 그렬 줄 알았으면서도 막상 돈을 받아쥐고 보니 마음은 딴판이었다.
곗돈을 겨우 맞춰 냈을 뿐 집에 보낼 돈이 없었다. 천상 월급날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계주인 최씨 아줌마가 평소의 극성을 몇 배로 늘려부리는 품으로 보아 계는 깨질 염려가 없는 듯싶었다. 계가 끝날 때까지 계주의 몫이 ‘두 구찌’ 남아 있다는 사실을 며칠 후에 알게 된 길순이는 비로소 큰 시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보낸 나흘째 되는 날 길순이는 동생의 편지를 받았다. 동생은 어머니의 위급한 병환을 알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파서 헛소리를 하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무슨 병인지 알 수가 없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돈이 없다. 돈만 보내지 말고 누나가 내려와야갰다. 어머니는 두 달 전부터 아프기 시작했다는 것과 누나에게 걱정을 끼친다고 어머니가 알리지 못하게 해서 그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골자였다.
편지를 움켜쥔 길순이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간이 구겨지도록 눈을 꼭 감은 길순이의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는데, 습이 딱 멎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노란 어지러움증이 전신을 빙글빙글 돌렸다. 돌면서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쥐약을 먹은 개가 눈을 까뒤집고 몸부림치며 칠러대는 비명, 목에 칼을 받은 돼지가 피를 쏟으며 발악하는 아우성. 흡사 그러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피묻은 아픔의 외침. 그건 어머니의 목소리…… 돼지……, 개……, 아버지……, 어머니의…… 길순이는 귀를 틀어막으며 방바닥에 곤두박혔다.
봉자도 분옥이도 조바심치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이 일을 어쩜 좋으니, 어떡해 글쎄, 애를 태우다가 양돼지부터 훑어내려 총무부장 경리과장 욕을 육시(戮屍)해댔고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눈물을 찔찔짜거나 한숨을 토하며 신세타령이 고작이었다.
일수변을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집주인, 계주 십장 김씨, 차례로 꼽아나가던 그들은 난색이 되었다 잡는 물건 없이 돈을 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불을 해보도록 했다 경리과장 총부부장……, 그들은 또 울상이 되어 입술만 깨물었다. 밤이 깊도록 헛궁리만 하다가 분옥이와 봉자는 옷을 입은 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일수변 얻기에 실패했다. 서너 사람에게 차가운 거절을 당해버린 길순이의 가슴은 파삭 말라버린 나뭇잎이었다. 물속에 담근 다리가 후들거렸고, 천을 헹궈 짜는 팔이 탄력을 잃은 고무줄이었다. 일과가 끝나기를 기다려 경리과로 내달았다.
“돌았어? 일당 계산하는 주제에 가불은 무슨 놈에 가불야?”
입술에 마른침을 발라가며 사정 이야기를 하는 길순이의 말을 꺾고선 결론부터 말하라고 화를 터뜨리던 경리과장은 기어코 이렇게 대질렀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마지막 길이었다. 설마 저희도 사람인데…… 한가닥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위급해서 그럽니다. 가불이 아니라 지금까지 일당을 미리 좀……”
“아 거참 시끄럽다니까, 그게 그 소리 아닌가.”
“어떻게 특별히 좀……, 어머니가 너무 위급해서……”
“글쎄, 그건 우리 사정이 아니라니까 더 듣기 싫으니 나가!”
길순이는 저녁을 설쳤다. 점심까지 굶은 배에 몰린 허기는 감당하기가 어려웠지만 밥은 넘길 수가 없었다. 분옥이와 봉자는 다음 월급 때까지 맞춰 팔아다 둔 쌀과 보리를 내다 돈사자고 했다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아직도 열 이틀이나 남은 월급날까지 흙을 파먹고 살 것인가 설사 그런다 하더라도 그 돈우로는 내려갈 차비나 겨우 될 뿐이었다.
쪼그리고 앉은 채 설핏 잠이 들었다가 길순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흡뜨곤 했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을 기고 있었다. 어머니는 검붉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어 있었다. 그때마다 두 동생은 엄마와 누나를 질정없이 불러대고 있었다.
다음날드 길순이는 일수변을 얻기에 혈안이 되었다. 길순이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난 사람들은 혀까지 차가며 딱해 하는 듯하다가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나으면 금시 투명한 얼음벽을 둘러치고 말았다.
오후가 되자 길순이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타들어가는 입술에는 물집이 잡혔고 수척해친 얼굴은 퇴색한 창호지 색깔이었다.
변소를 다녀 나오다가 길순이는 멈칫 섰다. 저기 걸어가고 있는 여자. ‘시야게’ 실에서 십장노릇을 하는 땅벌 강씨 아줌마가 분명했다. 길순이의 마음은 환해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이내 적을 만난 고슴도치처럼 마음은 또아리를 틀었다. 그럴 수야……, 그러면서 길순이는 어머니의 자지러지는 비명을 들었다. 눈을 흡뜨고, 피를 토하고, 죽어버린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 꿈들은 고슴도치를 알몸뚱이로 만들었고, 또아리를 힘들이지 않고 풀어버렸다. 길순이는 뿌우연 안개가 끼어오는 눈을 쓸며 허청허청 작업장으로 돌아왔다.
무슨 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려고 해도 돈이 없다. 돈만 보내지 말고 누나가 내려와야겠다. 길순이는 끈적끈적하고 스물스물한 느낌으로 다리를 감고 있는 푸르딩딩한 것도 붉으죽죽한 것도 거무튀튀한 것도 아닌 탕 속의 물에 주저앉아버렸으면 싶었다. 그래서 가슴이 잠기고 목이 잠기고 끝내 머리까지 꼴깍 잠겨서 시궁창보다 더러운 물에 짓늘려 차라리 죽고 싶었다. 편지에 담긴 동생의 목소리가 자신을 덮치며 울부짖고 있었다. 병원에 갈려고 해도 돈이 없다. 돈이 없다. 누나가 내려와야겠다. 땅벌 강씨 아줌마, 그 징그러운 웃음. 다시 알몸뚱이가 되는 고슴도치. 어머니의 신음소리,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 "2월 전부터 아픈 어머니, 땅벌 강씨 아줌마¨'·
“얘, 뭘 하고 섰니?”
길순이는 정신을 되잡고는 들고 있던 옷감을 물속에 담갔다.
일과(日課)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길순이는 누구보다 먼저 탕을 뛰어나와 수도로 달려갔다. 수돗물을 틀어 다리를 대충 씻어냈다. 이미 마음을 작정했으면서도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금니를 꼭 물고 눈물을 삼켰다.
“어머 길순이 아냐? 우리 이쁜이가 어쩐 일이지? 얼굴이 좀 축났구먼. 앉어, 어서 앉어.”
땅벌 강씨 아줌마는 양철지봉에 소나기 쏟아지는 목소리로 흐들갑을 떨었다.
“아줌매 나 그 일 하겠어요.”
길순이는 돌덩이 같은 얼굴로 대뜸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뭐라구? 목소리가 너무 커.”
강씨 아줌마는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길순이의 팔을 잡아끌어 가까이 오게 했다.
“그게 증말야 길순이?”
“나 돈이 급해요 빨리 시작할수록 좋아요.”
길순이의 목소리는 쇠판에 부딪는 닉켈 핀셋트 소리처럼 싸늘했다.
“급한 돈 마련이야 십상이지. 급하다니까 당장 오늘밤부터 하도록 하자구.”
강씨 아줌마는 낮은 음성으로 빠르게 속삭였다.
“얼마씩 예요”
“응? 아 난 또……, 두(頭)당 천오백원. 길순이도 단수가 보통은 아니셔?"
땅벌 강씨 아줌마는 정말 땅벌이 나를 때 내는 것 같은 기묘한 웃음을 낄낄거렸다. :
"한 시간 뒤에 그 전파사 앞에서 기다릴께.”
강씨 아줌마의 다짐을 뒤로 하고 길순이는 돌아섰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돈계산을 해두는 수첩에서 종이 한장을 찢어내 간단히 적었다. 돈을 구해 내려간다. 공장에 말해달라. 못 보고 떠나 미안하다. 곧 올라오겠다. 팔이 후들거려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봉자나 분옥이를 만나게 되면 일은 낭패가 된다. 선반에서 가방을 내려가지고 방을 뛰쳐나왔다.
공장의 아는 얼굴들을 만날까봐 조바심하며 전파사가 건너다보이는 골목에서 강씨 아줌마를 기다렸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밭매기를 하면서 보았던 소나기 구름처럼 그렇게 몰려오고 있었다.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뒤엉켜 감기던 그 검은 구름. 그건 어쩌면 슬픔이 아니라 앞으로 치러야 될 일에 대한 간추릴 수 없는 공포인지도 몰랐다. 산수시험을 잘못 치러 불려나가 매를 맞던 때. 다른 애들이 맞는 것을 보며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몸살이 났던가 몸이 비비꼬이고 연신 오줌이 찔끔거려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막상 맞고보면 별 것이 아니었다. 이 일도 그러리라고 별 것이 아닐 거라고 길순이는 스스로를 애써 어루만졌다
“목욕부터 해 둬.”
낯설은 집의 마루에 앉자마자 강씨 아줌마가 일렀다.
목욕을 하면서 길순이는 새삼스럽게, 정말 새삼스럽게 자신의 살결이 희다는 것을 깨달았고 유방이 손아귀에 다 잡히지 않도록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처녀라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며 불두덩을 씻다가 그만 흑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들이 먹는 밥에 비하면 걸직한 저녁이었다. 그러나 길순이는 두어 숟갈 뜨다가 말았다. 그런 자신을 강씨 아줌마가 곁눈질하며 묘한 웃음을 흘리는 것을 길순이는 모르고 있었다.
“먼저 청한 일이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괜히 촌스럽게 굴지 말어.”
강씨 아줌마의 태도는 공장에서와는 달리 돌변해 있었다. 당당하고 위압적 이었다.
몇 달 전 강씨 아줌마는 점심을 먹고 오는 길순이를 불러 세웠다. 갈수록 함박꽃이 핀다느니, 일이 힘들지 않느냐는 등 한바탕 호들갑을 떨고나서,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 돈을 벌어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미끼를 던졌다. 이 공장 여공이면 누구나 마찬가지로 길순이도 그런 말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나 소개를 하는 게 아니고 길순이처럼 얼굴이 예쁘고 마음씨가 착해야 사람이 정이 가는 게 아니냐고” 아무리 뜯어봐도 이런 험한 일로 썩어가기는 아까워서 그런다며 수다를 피웠다. 길순이는 난데없는 소쿠리비행기까지 타고 이빨 사이에서 침이 스물거릴 지경으로 구미가 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직장 어떤 일인가고 대답을 답쳤고, 돈벌이만 좋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고 결의를 표했던 것이다. 강씨 아줌마는 정색을 하고 몇 번인가 다짐하고 길순이
는 그때마다 다구진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강씨 아줌마는 길순이의 귀에다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머머, 사람을 뭘로……, 아줌마 미치치 않았수?”
길순이는 불화로라도 잘못 안았던 것처럼 서너 결음 튕겨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길순이의 약간 질린 듯한 얼굴에는 싸늘한 독기가 서렸다.
“떠들지 말어!”
강씨 아줌마는 길순이를 노려보며 짧게 소리쳤다.˛
“평양감사두 제 싫으면 그만이지. 허나 아가리 함부로 나불대지 말어. 이 땅벌한테 쏘이고 나서 후회 말고.”
강씨 아줌마는 이빨을 뿌드득 갈아붙이고는 돌아섰다. 무슨 일에든 억척스럽다고 막연하게 알고 있는 땅벌이라는 여사 그 여자는 별명에 걸맞는 무서운 독침을 숨기고 다녔다. 무슨 이유에서든 길순이는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스름을 타고 강씨 아줌마를 따라 나섰다 몇 개의 골목을 돌아 어느 집에 이르렀다.
“생김은 삼삼하구먼.”
담배를 뿜어내며 여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라고 헛말 이룹디까?”
강씨 아줌마는 뻐기는 투로 말을 받았다.
“마침 빈 방이 있어. 얘, 일어나라 길순이랬지?”
길순이는 여자의 쉰 듯한 목소리의 이 말을 들으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옆구리가 뜨끔하는 아픔과 함께 정신을 가다듬었다.
“야 어서 일어나 촌스럽게 굴어서 기분 잡치게 해주지 말구.”
강씨 아줌마가 옆구리를 찔러 재촉을 하며 다시 주의를 시켰다. 길순이는 더디게 일어섰고 목에 줄이라도 감긴 듯 주인여자를 따라 방을 나섰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누운 길순이의 감긴 눈에서는 줄곧 눈물이 흘렀다. 정작 매를 맞을 때처럼 하래의 찢기는 아픔뿐 아무런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하얀 색깔이었다. 어쩌면 새까만 색깔인지도 몰랐다.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스쳤을 뿐이다
문 여닫는 소리가 나고 길순이가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술냄새 뿜던 사내는 없어진 뒤였다. 길순이는 후다닥 일어났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후다이불을 끌어다가 뒤집어썼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알몸뚱이가 드러났던 것이다. 이불을 뒤집어쓴 길순이는 그제서야 가늘게 느껴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옷을 끌어다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서둘러 입었다.
통금이 가까워서 다른 방으로 밀려들어갔다. 네 차례나 시달리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논에 들어가면 으례 거머리에 뜯기곤 했다. 그러나 찰거머리는 손바닥으로 몇 번씩 때려도 떨어지지 않았다. 눈이 툭 불거진 사내는 영락없이 찰거머리 그대로였다. 그 짓이 끝나고도 목을 휘감아 안고는 코를 골았다. 간신히 빠져나오면 언제 코를 골았느냐 싶게 잠이 깨서는 전신을 더듬어 내리다가 그 짓을 시작하곤 했다. 꼭 구렁이에 감긴 것 같은 욱조여드는 징그러움이었다. 꼭 털투성이의 왕송충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진저리를 치게 했다.
낮에는 강씨 아줌마 집에서 보냈다. 하는 일 없이 보내야 하는 하루는 너무 길었다. 마음은 이미 고향으로 가 있어서 진종일 초조와 조바심으로 애를 끓였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공장은 그대로 나가는 건데. 그러나 안될 말이었다. 이런 일을 봉자나 분옥이가 알게 되면…… 기왕 시작해버린 짓. 낮에도 계속해서 하루라도 빨리 내려갔으면 싶었다. 그러나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었다.
나흘 밤을 보낸 길순이는 만 4천 5백원을 계산했다. 날이 밝자 주인여자에게 오늘로 고향에 내려갈 뜻을 비쳤다. 곧 강씨 아줌마가 왔다.
아침을 먹은 다음 길순이는 돈을 받아들었다. 돈을 받아든 순간 울컥 울음이 솟구쳤다. 그대로 집어넣을까 하다가 혹시 모른다 싶어 돈을 세기 시작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만 2백원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5백원짜리를 한장씩 넘길 때마다 침을 발라가며 세었지만 역시 만 2백원이었다.
“아줌마 이게……”
“전부 만 4천 5백원이란 말이지? 거기서 열한 끼 밥값을 뗐다구. 계산이야 틀림없지.”
“예에……”
길순이는 땅벌 강씨 아줌마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래? 한 끼에 3백원씩, 일 삼은 삼 일 삼은 삼 밥값은 3천 3백원야”
길순이는 이빨을 앙다물었다. 저년, 저 땅벌을 와드득 쥐어뜯어주고 싶었다. 누가 제년더러 3백원짜리 밥을 먹여 달랬던가 미리 말만 했더라면 50원짜리 국수로 거뜬히 해결할 일이었다. 어떻게 번 돈인데 저년이, 저 땅벌 같은 년아…… 돈을 콱 움켜쥐고 일어서는 실순이의 손등에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집에 도착한 길순이는 마당이 붕 떠오르고 집이 기우뚱 하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어지러움에 떠밀려 까무러치고 말았다.
사림문을 들어서던 길순이는 이상한 냉기가 전신에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병환중이라는 선입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김이 매지지 않은 텃밭, 잡풀이 돋은 사립문 언저리 때문만도 아니었다. 두 동생은 툇마루에 멍청히 걸터앉아 있다.
“누나, 누나, 왜 인제 왔어.”
두 동생은 맨발로 쫓아와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마라 엄마 놀라겠다. 어서 들어가자.”
두 동생을 달래며 결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엄마 없어. 엄마 죽었단 말야.”
두 동생이 치마를 잡고 매달리며 소리쳐 울었고,
“뭐, 뭐…… 어, 어엄……”
길순이는 비틀비틀 하다가 허리가 휘청 꺾이며 쓰러졌다.
이미 장례를 치른 다음이었다. 길순이는 어머니의 묘, 황토를 박박 긁어대고 딩굴며 몸부림 쳤다.
삼촌 내외의 부축을 받으며 산을 내려오고 있는 길순이는 산 사람 같지가 않았다.
“나는 알고 내려온 줄 알았지. 그그저께 돌아가시자 곧 편지를 띄웠으니까.”
삼촌의 이말을 듣고 길순이는 또 마루바닥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했다.
두 동생이 아니더라도 다시 서울로 올라갈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서울은 헤어날 수 없는 시궁창이었다.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똥통이었다. 거기에 목까지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꼬라지가 다시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에 묶인 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삼촌과 상의한 끝에 집을 처분하기로 했다 자신이 자리가 잡히게 될 때까지 동생들을 삼촌이 맡고 매달 얼마씩의 돈을 보내기로 했다.
“사람이 늙으면 병나게 마련 아니냐”
삼촌은 너무 예사롭게 말하고 말았지만 그래서 길순이의 안타까운 설움은 봇물을 이루었다. 늙어서 생긴 대단찮은 병이었다면 일찍 손을 썼을 경우 나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두 달동안 단 한번도 병원에는 가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걱정을 끼친다고 알리지 못하게 한 어머니가 그토록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때만 알렸더라도 공장에 맡겼던 돈을 몽땅 찾아 치료를 했을 것이다. 그럼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설혹 그 돈을 치료비로 다 쓰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들 이처럼 원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우는 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열흘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봉자와 분옥이를 찾아 그 비좁은 방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웃목 구석벅에 세워져 있었다.
임신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집을 나서면서 길순이는 분옥이나 봉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비상금으로 두었던 5백원을 구겨 쥐었다.
점심때가 지나면서부터 길순이는 다소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임신이라면 다른 방법이 없다. 수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나자 공포증 대신 수술비 걱정이 밀어닥쳤다.
“먼저 들어가 고향친구한테서 연락이 와서 그래.”
“밥은?”
“곧 들어갈꺼야 ”
"시시하다, 얘. 고향친굴 만난다면서, 뱃창자에 고기맛이나 좀 봬줘라”
이렇게 봉자와 분옥이를 따돌렸다. 큰길로 나서서 몇 개의 산부인과를 지나쳤다. 건물도 의리의리해서 돈도 비쌀 것 같은데다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큰길을 버리고 사람의 발길이 드문 뒷길로 접어들어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해매다가 퇴색한 간판을 찾아냈다. 칠이 벗겨진 간판이나 낡은 건물이 우선 마음을 놓이게 했다. 그러나 선뜻 문을 열고 들어설 수는 없었다. 망설이다가 그대로 지나쳐 걸었다. 걷다보니 큰길이 나왔다. 놀라서 되돌아 걸었다. 다시 주춤거리다 지나치고 말았다. 또 큰길이 나타났다. 돌아섰다. 그냥 돌아가 버릴까. 그럴 수는 없다 기왕 내친 걸음이었다. 어차피 임신이라면 언제고 당해야 될 일이었다. 다시 병원 앞에 이르러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눈을 꼭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힘껏 문을 밀쳤다
“벌써 두달째라면 보나마납니다. 임신입니다. 어찔 셈이오?”
수염투성이인 의사는 거침이 없었다. 시원시원하다고 할까 상스럽다고 할까 하여튼 길순이로서는 다행이었다. 자신이 주저하는 이야기를 점이라도 치듯 미리 척척 알아맞춰 나갔다. 길순이는 고개만 끄덕이면 되었다.
“왜, 애인이 싫다고 합디까? 고얀 친구로군. 허나 고민할 건 없어요. 흔해빠진 일인걸.”
이 대목에서도 길순이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기왕 그리 된 일, 수술을 하셔야지. 수술은 빠를수록 좋아요,”
길순이는 그런 의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겁낼 것 없어요. B30분만 누웠다 일어나면 혼자 돌아갈 수 있는 간단한 거니까.”
들어올 때에 비하면 아주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길순이는 병원을 나섰다.
길목이나 건물 등을 눈에 익히면서 길순이는 집으로 잰걸음을 쳤다.
3천여 원의 수술비 마련이 당장 문제였다. 길순이는 자칫 쏟아지려는 마음을 받쳐 잡느라고 급급했다. 자신이 이런 궁지에 빠지게 된 것을 되씹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딴 생각에 매달리려 했다. 한번 그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살을 물어뜯어도 풀리지 않을 안타까움과 서러움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처량한 자신을 다시 주체하게 될 뿐이었다. 어서 빨리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남은 문제는 수술비를 구하는 일이었다. 몸서리쳐지고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 방법밖엔 없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길순이는 땅벌 강씨 아줌마를 찾아갔다
“그래? 길순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길순이도 이제 맛들렸나부지?”
강씨 아줌마가 여전한 호들갑을 떨며 손을 잡자 길순이는 홱 뿌리치고 돌아섰다.
"끝나는 대로 우리집으로 오라구.”
이런 말을 등뒤로 들으며 길순이는 콧등이 매워졌다.
분옥이와 봉자에게는 친구 어머니가 중태라서 같이 돌봐드려야 되겠다고 때워 넘겼다.
공장에는 나가면서 이틀 밤을 거기서 보냈다. 먹지도 않은 이틀 치 밥값을 물었다.
사흘째 되는 날 오후 길순이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난 낳기로 한 줄 알았는데 이제야 오셨군.”
의사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길순이는 의사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고, 곧 수술실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너훌너훌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가고, 동생들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커다란 개에게 쫓기고……, 그러다가 자신이 안개가 아니면 연기가 가득찬 네모난 통속에 갇혀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얼마가 지나 다시 눈을 뜬 길순이는 수술이 끝나고 자신이 살아났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방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 어두워진 모양이었다. 길순이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마음뿐, 머리만 약간 들렸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머, 인제 깨나셨군요, 얼마나 걱정을 했다구요,”
간호원이 서 있었다. 길순이는 다시 일어나려 했다. 소용이 없었다.
“더 눠 계세요 잠깐 나갔다 올께오.”
간호원이 나가고 나자 길순이는 곧 토해질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모래라도 한줌 털어넣은 듯한 꺼칠거리는 갈증을 느꼈다.
“깨났다고? 참 큰일날 아가씨였어. 뭘 먹고 살았기에 몸이 그처럼 약하지?”
간호원을 앞세우고 들어선 의사는 쩝찝 입맛을 다셨다.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길순이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한 시간 이상을 더 누웠다가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다시 수술하지 않도록 몸조심 하세오.”
간호원이 부축을 해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길순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 타고 가도록 하시오”
의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병원을 나섰다. 어둠이 훅 끼쳐왔다. 눈앞에 어릿어릿했다 의사의 말이 아니었어도 택시를 타고 싶었다. 도저히 걸어갈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수술비를 내고 남은 돈은 백원뿐이었다. 담에 의지해서 골목을 빠져나오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었다.
버스에서 떠밀려 내린 길순이는 곧 쓰려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간신히 몸을 가눈 길순이는 입을 딱 벌리며 아랫배를 눌렀다. 쇠꼬챙이로 사정없이 쑤셔버리는 것 같은 찢기는 아픔이 머리끝까지 솟더니 뭔가가 뭉클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길순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땅이 출렁거리고, 전봇대가 껑충껑충 뛰고, 건물들이 제각기 비틀거리고 불빛이 히히덕거리고,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고…… 길순이는 으깨지도록 주먹을 말아쥐고 한사코 눈을 부릅뜨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기고 있었다. 입술이 푸들거리는 창백한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집에 당도하게까지 몇 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분옥이를 불러놓고 길순이는 툇마루에 쓰러져버렸다.
“너 이게 웬일이니. 겉순아, 정신차려. 정신차리라니까.”
뛰어나온 분옥이와 봉자가 길순이를 일으켰다.
“괜찮하 잠을 못 자서 그래. 간호하다가 간호하다가 길순이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이 맹추야, 그러니까 자면서 눈치껏 했어야지.”
분옥이가 울상이 되어 쏘아붙였다.
“밥 먹었다니까. 자면 날 병이야 나 추위, 이불, 이불……”
길순이는 전신이 오그라드는 한기에 떨며 잠인지 혼수상태인지 모를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갔다.
분옥이와 봉자는 두어 시간을 지켜 앉았다가 겹쳐오는 졸음에 못이겨 자정이 가까와 잠이 들었다.
분옥이는 감감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뭉텅이로 밀려드는 잠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소리는 이어졌다. 잠결에 잘못 들은 소리가 야니었다. 분옥이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건 길순이의 신음소리였다. 분옥이는 전등을 컸다.
"어머!”
분옥이는 소리치며 주춤 물러섰다. 저 피. 검붉은 피는 요와 이불 그리고 길순이의 하반신에 맥질이 되어 있었다.
길순이는 거의 혼수상태였다. 분옥이는 물부터 떠다가 길순이의 이마를 축이고 입에다 떠넣었다.
"길순아, 정신차려라 나야, 나 이게 어찌된 일이냐!“
길순이가 간신히 눈을 떴다.
“나 수술, 수술했어.”
“무슨, 무슨……?”
“이, 임신……”
“뭐 임신?”
“나 죽으면 안, 안……”
“어떤 돌팔이 새끼가…… 야 봉자야, 썅 일어나.”
벌떡 일어선 분옥이는 봉자의 허벅지를 걷어차며 소리질렀다.
길순이를 병원에 옮긴 것은 먼동이 터오는 시간이었다.
은행이 문을 여는 시간까지만 참아 달라과 사람부터 살려얄게 아니냐고, 제발 딱 한번만 도와달라고, 분옥이와 봉자는 손바닥에서 닭똥냄새가 나도록 빌었다.
길순이가 수술실로 실려들어가는 것을 보고 둘이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분옥이는 속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곧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불쌍한 길순이, 딱한 길순이. 길순이가 그런 험한 꼴을 당하는 동안 그렇게 감쪽같이 몰랐다니. 알았다 한들 또 어떻게 할 수나 있었을 것인가.
“분옥아, 병원비는 어찔거니?”
봉자의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걱정말어, 내가 구해올 테니까.”
분옥이는 천천히 일어섰다.
“한두푼도 아닌 돈을 무슨 수로?”
“넌 그런 걱정 말고 길순이가 나오면 옆에 꼭 붙어 있어. 나 곧 갔다 올께.”
분옥이는 병원을 나섰다
주저할 것이 없었다. 방법은 그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왕 버린 것이었고 어차피 구겨진 것이었다. 열여섯 살때였으니까 벌써 3년이 지났다. 그 길은 어둡기도 했지만 민가가 없어서 어찔 도리가 없었다. 집들이 있었더라도 상대가 세 놈이었으니 또 어쩌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그놈들은 입부터 틀어막고 덮쳐왔었다. 길순이보다야 잘나지 못했지만 보는 남자마다 섹시하다는 인물이니까 땅벌 제년도 거절은 못하겠지.
한 2만원쯤 빌려야 되리라 생각하며 길을 건너던 분옥이는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차가 바로 코앞을 수치며 지나갔다.
“이 상놈에 새끼야!”
분옥이는 욕을 퍼부었다. 검정색 세단은 저만치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분옥이는 차를 향해 침을 내뱉다가 언뜻 양돼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차는 양돼지의 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저리도 거침없이 달리는 바퀴 밑에 길순이가 깔려버린 것이라는 순간적인 착각을 일으켰다. 그리고 봉자나 영숙이나 순자나 정심이는 방금 자신이 아슬아술하게 피한 것처럼 그렇게들 살고 있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이봐, 뒈지고 싶어? 왜 길 가운데서 어정거려?”
젊은 택시운전수가 상반신을 내밀어 소리치며 지나갔다.
“너나 뒈져래 병신아. 이런 꼴 면할 때까지 난 악착같이 살아야겠다.”
멀어져가는 차 꽁무니에 대고 이렇게 소리를 질러놓고 분옥이는 쓰게 웃었다. 갑자기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 생각을 떼치기라도 하듯 분옥이는 빠르게 길을 건너갔다. 그러면서, 자신은 틀림없이 섹시하게 생겼다고 스스로에게 강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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