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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8일
말씀 : 호12:5-6
제목 : 설명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
교회는 생명이 흘러야 합니다. 이 생명은 피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피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여야만 합니다. 다른 피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율법의 죄 사함을 위한 짐승의 피는 온전하지 않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의 피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영적인 것을 육적인 인체(人體)로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머리, 몸, 지체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암 진단을 받은 후 치료를 위해 가장 많이 한 의료행위 중 하나는 피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피를 수시로 뽑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말은 뽑은 것 같습니다. 피를 뽑는 이유는 피를 통해 건강 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는 구체적으로 점검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를 3통을 뽑으면 A4 용지 3장정도, 6통 뽑으면 6장 정도의 결과지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피를 통해 건강 정보를 거의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열이 나는지, 염증이 있는지, 적혈구와 백혈구가 어떤 상태인지, 암이 존재하는지 등, 몸의 전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피는 인간에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피에 문제가 있으면 몸에 질병이 발생하고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항암 치료할 때 적혈구가 모자라서 수혈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도 동일한 혈액형의 피를 사용해야 합니다. 혈액형이 맞지 않거나 짐승의 피는 절대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가 곧 생명의 피이며, 죄 없으신 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영혼에 흐를 때 비로소 우리의 생명은 소생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하는지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낸다는 것은 곧 생명의 피가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생명을 살리기 때문에 그 피가 교회에서 이웃으로 흐를 때 세상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생명이 소생하고 흐르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복음', 즉 가짜 복음, 희석된 복음입니다. 지난주 설교 본문에서도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가짜 복음의 근거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면서 그들의 삶의 중심을 '성전'에서 '사람'으로 옮긴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30:9-11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것이 바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옮긴 후 나타난 현상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지금 교회가 어려운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마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는 기도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꼭 기도해야 들어주시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기도 안 해도 다 들어주시는 분이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분명 희석된 복음입니다. 성경은 '구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구하지 않아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사귐과 교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목사님 말이 맞다면 기도는 언제 하는 것입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이는 결국 내 힘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알아서 주신다면 그분의 고난과 연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 이유는 생명, 즉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과 천국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더 기가 막힌 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한 여인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몸에 부은 사건을 기록한 두 군데의 말씀을 보면 요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여기서는 '유월절 엿새 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26: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여기서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이 다르지 않습니까? 새소망교회 한 모 목사님이 하나님의 교회의 목사와 성경 토론을 했는데 그때 하나님의 교회 목사가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성경이 틀리지 않느냐'라고 말하자 대답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준비 없이 갔다가 꼼짝없이 당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토론했으면 이길 수 있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확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다'라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3:16)’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마26:2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 때문에 시간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마태복음 26장에 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저자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후의 사건들을 기록하면서 6~13절에 이 이야기를 '삽입'했기 때문입니다. 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이 구절을 보면 연속적인 사건이 아니라 며칠 전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마태복음 26장에 이 사건을 삽입해서 기록하도록 하신 목적은 바로 뒤에 나오는 유월절 만찬과 연계시키기 위함일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과 향유를 부은 사건에서 동일하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말씀에 접근하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형광등은 무조건 빛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형광등이 빛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형광등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희석된 복음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포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교리에 성경을 끼워 맞춥니다. 인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으면 하나님을 설명하여 그것을 자기의 유익으로 삼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풀어내어 형상화한 것이 금송아지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설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케리그마', 즉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을 설명을 듣고 이해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설명하고 그려낸다는 것은 개미가 코끼리를 만지고 나서 그것을 설명하고 그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을 우리가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명제를 야곱을 통해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벧엘에서 잠든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을 계기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사실 시원찮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이유는 아브라함과의 약속 때문입니다. 조건과 자격을 묻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첫 수혜자가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한 복 주심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아셔야 합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아브라함의 차이는 없습니다.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차피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외삼촌 집에서 20년이나 고생을 시키셨을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면 하나님의 뜻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야곱을 떠나지 않으실 테니까 바로 벧엘로 올라오게 하셔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하시면 될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심으로써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북이스라엘은 산당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며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벧엘로 온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은 어차피 복을 받도록 네 인생을 설계했으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복은 '하나님을 아는 현실적 경험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분 없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십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비명을 지르거나, 당황하거나,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도, 하다하다 방법이 없어서 내 몸을 던질 때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체험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내 인생을 나 혼자 내 마음대로 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늘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몰라서 응축된 무언가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늘 옆에 계셨지만 인생을 맴돌면서 나만 하나님을 몰라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면 가슴을 쳐야 합니다.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슨 말씀인지 아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고 행하면서 살다가 내 일생을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거의 비슷한 야곱의 행동, 생각, 판단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앞이 캄캄한 극심한 고뇌 속에서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는 극적인 상황을 현실에서 맞닥뜨릴 때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랍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이중적이며, 반전이 있는 삶입니다. 개인이 느끼고 놀란 체험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앞뒤가 맞지 않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분명 그의 삶에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설명이나 은사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명을 지르며, 당황하며, 숨통이 끊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것을 암을 치료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곡소리 나는 우리의 실질적인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께 항복하며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호12:5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이스라엘이 누군지 야곱을 통해 녹여냈습니다. 그리고 6절입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돌아오면 용서해주신다는 것과 인애와 정의를 지키신다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못난 자였던 야곱이 자기가 한 짓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결과를 어떻게 받아낼 수 있었는지 그의 인생을 보면서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 때문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신앙은 보상이나 권리의 개념이 아닙니다. 보상이 성립되려면 하나님과 우리가 이해 관계로 묶여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내가 드리는 만큼, 내가 한 만큼 보상해 달라면서 환경과 조건을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과 타협합니다. 결국 인본주의 사상의 목적은 하나님을 나의 수단이나 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앗수르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비록 너희가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잡혀가지만 나는 너희를 포기하지 않았다. 너희를 내던지지 않고 그곳에서도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나를 바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야곱을 그냥 두시는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에 넘기시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곱과 이스라엘을 놓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좋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집이나 죄의 자리에 앉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그분과 우리는 이해관계가 아니며 그분의 우리의 권력이나 수단이 아니심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힘이나 보상과 상관없이 우리의 모든 상황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디서나 누릴 수 있다는 축복이 야곱의 피난살이와 이스라엘의 앗수르 포로살이를 통해 오늘 우리 현실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억울하십니까? 고통스러우십니까? 죽지도 않는 더러운 인생이라고 한탄하십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인애와 정의를 행하시는 일을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인애’의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긍휼, 자비, 친절, 선, 충성’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억울하거나 가장 비참할 때 인애와 정의를 드러내시며 함께하시는 그분의 약속을 체험하고 알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것은 생명이 소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를 내버려두시거나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중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인격과 성품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보상과 소유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막막함 속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마지막 분노와 원망을 드러내는 삶에서도, ‘하나님 고작 이런 것 가지고 그러십니까?’라는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격과 영혼의 하나님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되심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절대 방해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 속에 참여하시며 우리의 인격 속에 존재하고 계십니다.
술수, 사기, 강도와 같은 추악함을 일삼고 얍복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자기의 고집을 끝까지 꺾지 않았던 야곱은 ‘부여조(父與祖)의 축복보다 내 축복이 더 낫다’고 말하며 자녀들을 축복하는 데까지 성장합니다. 할아버지인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보다 더 많이 얻어맞았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설명해줘서 안 것이 아닙니다. 보상심리로 하나님과 타협해서 안 것이 아닙니다. 얻어터지고, 사기를 당하고, 위협을 느끼는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사고로는 절대로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신비함입니다. 신본주의에 바로 서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통해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가 나타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