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도록 녀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근히 초조해 진 나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9시. 슬슬
일어낼 때도 됐건만 녀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깨우면 간단하지만 이상하게 깨울 수가 없었
다. 너무 곤히 잠들어 있기도 했지만 잠들어 있는 모습이 너무 가련해 보이는 탓이었다. 세
상에 아무런 걱정도 없어 보이는 어린애의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외로움과 슬픔을 감추고 있
는 것 같은 얼굴…. 한없이 바보 같아 보이지만 잠들어 있는 얼굴에 어렴풋이 드러나 있는
고독감….
그것을 본 순간 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 아이 역시 나름대로 고민과 걱정이 있을 거라
고 생각하자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가 생각나면서 깨우는 게 망설여진 것이다. 이 아이
가 꿈속에서나마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면…, 당분간은 깨우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난 아무런 말없이 그 아이가 다 걷어차 버린 시트를 다시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침대 옆의
간이 의자에 앉았다. 뭐, 자는 시간은 10시니까 그때까지 양보한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겠
지.
"어머, 혜진아. 왜 거기 앉아있어?"
…양보의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진 않았군.
간호사 언니가 들어왔다. 늘상 나에게 수다를 떨어대곤 하는 그 간호사다.
"필운이가 자리 뺏은 거야? 에이, 나쁜 녀석."
간호사는 침대로 가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필운이를 가만히 흔들어 깨웠다. 깨우는 게 미안
해서 그런가? 아냐, 방금 말투는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럼…?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간호사가 깨우자마자 필운이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더니 마치 어린
아이가 악몽을 꾸고 놀란 것처럼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난 속으로 무척 놀랐다. 비록 안 지는 이틀 밖에 안 됐지만 그 아이가 보여주는 행동 하나
하나가 익숙해지기 힘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놀란 병실 환자들이 모두 필운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녀석의 행동은 익숙해지기 힘든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들은 필운이의 속사정
을 알고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련함과 측은함이 섞인 눈길로 그 아이를 바
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그래, 누나 옆에 있잖아. 괜찮아. 뚝."
간호사는 필운이를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울음을 그치게 만들었다. 정말 어린애 같군….
"언니, 얘 도대체 정신 연령이 몇이야?"
난 필운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간호사는 조금 마땅찮
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대답해 주었다.
"한 6∼7살 수준일거야. 점점 수치가 낮아지고 있어."
"점점 낮아져…?"
정신 연령이 점점 낮아진다구? 그건 또 처음 듣는 소린데.
간호사는 계속 말했다.
"얼마 전에는 8살 정도 였는 데 이번에 또 낮아졌어."
"그거…, 진찰이 잘못 돼서 그런 거 아냐?"
"아무렴 원장님이 자기 아들 진찰을 허술히 하실 까봐."
아, 맞아. 필운이는 이 병원 원장의 아들이랬지.
"그럼 필운이는 매일 진찰 받으려고 병원에 오는 거야?"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여 말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필운이를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
게 하고는 병실을 나가며 말했다.
"얘는 내가 데리고 나갈 테니까 넌 좀 누워서 쉬어. 알았지?"
"알았어."
난 침대에 올라가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
다. 맞아. 어린아이들은 이럴 때 이런 걸 주면 진정하곤 하지. 필운이는 어린애가 아니라 열
일곱 살 먹은 고등학생이지만 정신 연령은 어린애나 다름없으니까 이걸 주면….
난 재빨리 찬장을 열어 사탕과 과자 한 봉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간호사에게 주었다.
"언니, 이거 가면서 필운이한테 줘,"
"이거 줘도 괜찮겠어?"
간호사 언니는 받기가 좀 미안한지 그렇게 말했다. 뭐 그 정도가지고….
난 순수한 호읜데 말이야.
"나 다이어트 중이거든."
내 말에 간호사 언니는 입을 가리고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별로 뺄 필요는 없어 보이는 데…. 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살 찔 가능성이 많지? 알았
어. 가져갈 게."
병원에 있으면 살 찔 가능성이 많다…라…. 하긴 하는 일없이 하루종일 누워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지금의 나는?
"나 아직 살 안 쪘지?"
반은 장난스런 물음이었기에 간호사도 피식거리며 대꾸했다.
"응. 배가 좀 접히는 것만 빼면 아직 괜찮아."
"…아까랑 말이 다른데?"
"아깐 어땠는데?"
"별로 뺄 필요 없댔잖아."
"아아, 그래? 그럼 그건 농담."
"에이, 치사해."
간호사는 빙긋 웃고는 필운이를 데리고 나갔다. 병실 문이 닫히자 난 왠지 모를 고독감을
느끼며 시트를 뒤집어썼다. 그나마 필운이가 있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역시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중요한 건가? 단지 그런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허한 마음이 어느 정
도 덜어지니까 말이야. 같은 사람인데도 지금 병실 안의 환자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느껴지
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럴 지도 모른다. 지금껏 제대로 얘기를 나눠보지도 않았으
니까. 하긴 입원한지 일주일도 안됐으니 아직까지는 좀 어색하겠지.
…아냐. 내가 먼저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아서다. 그러고보니 난 누군가와 친해질 때 내가 먼
저 그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언제나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와 알게 된 사이
다. 채원이도, 학교 선배들도, 필운이도…. 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와 친한 사람의 전부이다. 이건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단 뜻이야. 그러
니까 이렇게 친한 사람의 수가 적은 거겠지.
난 시트를 뒤집어 쓴 채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잠이 올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지. 다음부
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접근해 볼까? 마냥 남이 나에게 다가와 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
고. 친화력? 그건 일단 뒤로 제껴둬.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얼마나 빨리 친해질 수 있느냐
는 문제가 안 돼. 그런 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까.
"원장실에?"
아침에 검진을 받던 난 간호사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원장실에 와 보라고? 무슨 일이길
래…. 혹시 병이 갑자기 커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 검진 끝나자마자 가봐."
"…왜?"
불안한 예감이 든 나는 몸을 움츠리며 그렇게 물었다. 간호사는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했다.
"보스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나봐."
하고 싶은 얘기? 그게 대체 뭐길래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야? 왜 그런지도 모르고 가려
니까 움직이기가 귀찮아지는 데.
검진이 끝나고 난 병실을 나왔다. 원장실은 2층에 있댔지? 그건 그렇고 참 웃기네. 원장을
보스라고 부르다니. 아무리 외모가 험악해도 그렇지. 그러고 보니 간호사 옆에 있던 젊은 의
사는 '보스`란 말에 웃음을 참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군. 흠. 도대체 어떤 외모이
기에….
난 계단 쪽으로 향했다. 바로 한 층만 내려가면 되니까 번거롭게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는
없겠지.
계단을 내려와 2층 복도로 들어섰다. 원장실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복도 모퉁이를
한 번 돌자 바로 나왔으니까.
자, 이제 들어가 볼까? 좀 긴장되는 걸. 난 심호흡을 한 뒤 노크를 하고 살짝 문을 열었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책상 앞에 앉아있는 풍채 좋은 중년 남자가 눈에 띄
었다. 책상 앞에 있는 테이블과 소파는 그리 비싸보이지 않는 수수한 것이었고, 원장실을 가
득 메우고 있는 책장에는 전문 서적으로 보이는 책들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벽시계를 걸
어놓을 여유공간은 없어 보이는 데? 좀 좁아보이는 건 책장 때문이었군. 음.
"전혜진 양인가?"
헉… 깜짝놀랐다…. 꼭 동굴에서 울리는 목소리 같잖아? 난 그제서야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왜 그가 '보스`라고 불리는 지 이유를 알아냈다. 짧게 깎은 머리, 입에 꼬나 문 담
배. 골초인지 책상에 놓여있는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고, 네모진 뿔테 안경,
듬성듬성 나 있는 수염. 면도를 잘 안 하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앉아있지만 예사롭지 않을
것 같은 덩치, 목에 나 있는 꿰멘 것 같아보이는 흉터 자국…. 흰 가운만 벗고 있으면 영락
없는 '조폭`이다. 혹시 몸에 문신 같은 건 하지 않았을까?
"혜진 양이냐고 물었는데."
앗, 이런. 딴 생각하느라 대답을 못했군. 윽, 예의 없는 아이라고 낙인이 찍혔음 어쩌지? 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분위기에 위압된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인사한 뒤 잠시 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쩔쩔
매기 시작했다. 앉아야 되나? 아니면 먼저 말을 걸어야 되나?
원장은 내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거기 소파에 앉지."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왜 그랬는진 모르지만) 바로 앞의 소파에 앉았다. 원장은
책상에서 일어나 내 맞은 편에 와 앉았다. 그런데 도대체 이 아저씨는 키가 몇일까? 대충
봐도 185cm는 넘어 보이는 데.
아냐. 지금은 딴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단 난 다소곳이 앉아 원장을 바라보았다.
"병원 생활은 어때? 지낼 만 하니?"
원장은 험악한 외모와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와는 상반되게도 말투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난 그 편안한 말투에 긴장이 어느 정도 덜어졌다.
"예."
원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자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였다.
"꼭 그럴 것 같지도 않은데. 무엇보다 병원이란 젊은이들이 오랫동안 있기엔 불편한 장소니
까."
무슨 말이지? 뜻은 알겠지만 뭔가 의미가 담겨 있는 말 같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짐작
할 수가 없었다. 난 이 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 지 모르고 마음의 준비도 안 하고 온 상
태니까. 불안하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계속 불안에 떨 것 같다.
"저…, 그럼 전 여기 오랫동안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물론 아무렇게나 생각한 지레짐작을 말한 것은 아니고 앞으
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말한 것이다.
원장은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고, 지내기에 불편한 점이 있을 것 같아 묻는 말이야."
불편한 점? 그야 있긴 하지만….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의도를 알 수가 없군.
"조금… 있는데요."
난 조그만 소리로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하지만 원장은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래. 그렇겠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가만히만 누워 있으면 심심
하겠지."
…뭔가 불안해 진다. 혹시 뭔가 불순한 동기가 있어서 날 부른 건…? 에이, 무슨 생각을…,
설마 그럴 리가….
난 약간 경계의 기색을 띄며 원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거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내 아들 녀석이 계속 네 병실에 찾아 간다길래…, 얘기나 한 번 해 보려고 부른 거야."
그는 여유 있게 말했다. 꼭…, 시아버지가 며느리 될 여자를 앞에 두고 보이는 여유 같다.
"내 아들 녀석이 폐를 많이 끼치고 있다던데…."
아들…? 아아, 필운이구나. 음, 까먹을 뻔 했다. 그는 나에게 묻듯이 말했고,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폐는 무슨…."
하지만 그는 뭔가 흐뭇한 기분인 것 같았다.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그
는 계속 말했다.
"내 아들 녀석이 머리가 좀 그렇다보니까…. 혹시나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해
서…. 그 녀석이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예…?"
난 약간 얼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다고?
그렇게 활발한 아이가?
그는 내 말에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그 아이는 사람을 무서워 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젊은이들을 무서워 한다는 게 맞겠군.
그래서 간호사들이나 젊은 의사들을 피하곤 하지. 그 녀석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
어."
"예? 왜요…?"
난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꽁초를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 아이는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왔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
교….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같은 학생들 중에서는 아무도 없었어. 알다시피 그
아이는 정신지체아야. 그런 부류의 사람을 동정해 줄 수는 있겠지만 모든 면에서 그의 편이
된다는 건 힘들지."
무슨 뜻인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러니까 그 아이, 필운이는 계속 반 친구들에게서 괴
롭힘을 당하며 살아왔다. 동정은 얻었겠지만 정말로 그 아이의 편이 되어준 사람이 없었다
는 건 곧 지금까지 혼자서 그 고독감과 외로움을 이겨내 왔다는 건…가? 그 아이가? 정신
연령이 예닐곱 살 수준의 아이가?
"아, 이런. 학생에겐 좀 난해한 말을 해버렸군, 그래. 하하…."
아뇨, 대충은 알 것 같아요. 말하긴 좀 그렇지만….
"쉽게 얘기하면…. 그 아이의 행동은 언제나 다른 학우들의 놀림감이 되었지. 너도 보아서
알겠지만 거의 유치원생 수준, 아니, 그보다 더 떨어지는 면을 보이고 있어. 그래서 많은 놀
림과 따돌림을 받았지."
"…."
"난 아버지인데도…. 그 아이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어. 그 아이가 학교에서 그런 아픔을
겪고 있는데도…. 난 그 아이를 위해 뭘 해야 할 지 몰랐지."
"…."
"그런데도 그 아이는 계속 학교에 나갔어. 가면 괴롭힘만 당하는 데도 말이야. 지금까지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지. 아마 '학교에 빠지는 건 나쁜 일`이란 말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는 거겠지."
순진한 녀석…. 알 것 같다. 어린아이들은 그런 말에 잘 따르는 편이지. 그리고 어릴 때 몸
에 익힌 습관이나 버릇은 평생을 가도 잊어먹거나 버리지 못 하니까. 아마 그 아이는 학교
에 빠지지 않고 나가는 것이 몸이 익은 것 같다.
"사람을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나갔어. 교복 입은 학생만 보면 무서워서 몸을 움츠리는 데
도 말이야."
그래서 채원이를 어색해 한 거구나. 난 단지 처음 만난 사람이라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어제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 좋아하는 누나가 생겼다고 말이야."
윽, 그거…, 설마 나…?
난 나도 모르게 철렁했다. 하지만 원장은 푸근해 보이는 미소를 계속 유지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이야. 그 아이가 같은 학생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래서 내가 받은 충격도 컸지."
확실하다. 나야. 아무래도 나는 녀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모양인데.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장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좋다고 한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하고 있지. 그 아이가 좋아할 만 하구만."
치, 칭찬이다. 무슨 의미의 칭찬인진 모르겠지만. 난 되도록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
해 조금씩 흥분해 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래서 부탁하는 것인데…."
어느새 원장은 정색을 하고 있었다. 난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말씀하세요."
뭐지? 내가 말한 건가? 으음, 입이 마음대로 열리다니 신기한 현상이군. 이 현상을 의학계에
보고해 볼까? 사람이 긴장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 음, 초라한 발견
이군….
내 말에 원장은 잠시 한숨을 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줄 수 있겠니?"
"…!"
예상외의 부탁이다. 난 좀 어려운 부탁인 줄 알았는데 이런 간단한 일이라니…. 그 정도야
부탁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말야.
"안 되겠니?"
원장은 약간 안타까운 기색이었다. 하긴 자기 아들이 10년도 넘게 대인 기피증을 보이는 데
다 간신히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놓쳐버린다면…. 안타깝기도 하겠지.
"…그런 일이라면 따로 부탁하실 것도 없어요. 이미 친해졌는 걸요."
난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원장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안타까움의 그림자는 사라
질 줄 몰랐다. 아마 필운이가 남의 동정은 얻었지만 사랑은 얻지 못한 때문이겠지.
"내 말은…. 세월이 많이 지나더라도 그 아이를 지금처럼 대해 줄 수 있겠느냐는건데…."
세월이 지나도…? 그럼 나이를 먹고 늙어가도 지금과 다를 바 없는 그 아이를 지금처럼 대
해 줄 수 있겠냐고…?
곤란한 질문이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난 그렇게 못 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렇
게 한다고 대답해 놓고 그 아이를 그냥 모른 척 해…? 모른 척…?
…모른 척? 난 그렇게 비열한 인간이었나? 내가 지금까지 그 아이에게 한 행동은 다 가식
의 껍데기였나? 겉으로는 그 아이를 위해주는 척하고, 속으로는 비웃는… 그런 종류의 인
간이었던가? 아냐. 그렇지 않아. 내가 그 아이에게 한 행동은 결코 그런 게 아니었어. 단순
한 동정심만이 아닌……, 좀 더 다른 무언가가 있었지.
"…예."
늦은 대답이지만 난 기운차게 대답했다. 자신이 왜 사는 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지내는
그 아이가 너무 가엾어서 이다. 누가 그런 아이한테 관심을 가져줄까. 그러니 나라도 해줘야
지. 삐뚤어진 위선에서 비롯된 뒤틀린 동정심일 지도 모르지만…, 난 해 줄 자신이 있어.
원장은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고맙다, 혜진아."
…아마도 그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필운이에게 있어 처음으로 생긴 친구일거다. 부모 된 사
람으로 기쁘지 않으면 이상한 거겠지.
그는 나에게 여러 번 고맙단 인사를 했다. 오히려 내가 그 인사에 부담이 갈 정도였다. 난
적당히 인사를 받은 뒤 병실로 돌아갔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장편 ]
노을[46]~[50]
포인트 겟터
추천 0
조회 74
04.05.04 01:15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