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shall I do? / 어느 경비원의 회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카드 빚 우편물에 가슴이 철렁하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 26년여 살던 집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의정부로 떠나던 날,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삶이 미워 뜨거운 눈물 가슴에 묻고, 24층 맨 꼭대기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 24층 창 너머 땅을 내려다 보며 이 생각 저 생각하고 하루하루 보내다가, 살아야 한다기에 택한 직업이 경비원이었습니다.
2005년 12월 6일 시작하여 2011년 10월 31일 그만 두었으니 하루에도 몇 번씩 날아가는 목숨 모질게도 이어왔지요.
누가 그러던데. "경비원 하려면 간도 쓸개도 다 떼어 놓고 살아야 한다" 고요. 간 떼고 쓸개 버리고는 살 수 없어 가지고 살았기에 그 삶이 그렇게 힘들었었나 봅니다. 첫 면접 때 면접관 왈 "나이가 많으셔서 규정상 안 됩니다"하고 불합격을 통보였으니 그 때 내 나이 68세였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한 마디 "면접관 님, 사실 저 대학 나왔습니다, 합격만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던진 것이 머리에 남았던지 합격자가 하루 만에 그만 두는 바람에 대신 차고 들어간 자리 경비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처절한 삶이 시작되었지요. 그 6년 사이 심장 수술을 세 번이나 받으면서도 그 삶을 살았으니 내 별명처럼 쇠뭉치니까 살았나 싶습니다.
회고컨데 아득하군요. 우리 부모 노년에 경비할 줄 모르셨기에 목숨 달랑 하나 만드셨을 건데 6년이니 1100 개도 모자랄 목숨 단 한 개로 용케도 버텨온 삶의 이야기 입니다.
경비원! 세상에 이 보다 더 천한 직업이 있을까요? 주민은 모두 사장 님이요, 사모 님이요, 아이들 마저 다 도련 님. 잠시 졸기만 해도 졸았다고 그만 두어야 하는 자리. 누가 주는 봉급으로 사는데 불친절 하느냐고 큰 소리치는 인간 관계의 밑바닥 인생...
살아온 삶 잠시 되돌아 보자. 경비원 생활 첫 날. 같이 근무할 짝에게 불 켜는 방법 물었다가 "이러시면 안 되지요" 하며 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일부터 시작,
한 열흘쯤 지났는데 술에 잔뜩 취한 어느 주민 초소에 들어와 "이 사람 경비 잘못 서는구만"하면서 반말찌거리에 횡설수설 그 때는 멋모르고 각목 들고 두어 번 후려치고 "야 이 새끼야 나가"하면서 내 쫓던 내가 그것이 정말 모가지 감이었음을 몰랐네요.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분리 수거 날도 아닌데 재활용품을 버렸기에 주민 집 찾아 갖다 놓았더니 주민 씩씩거리며 와서, "내가 경비 잡아 먹는 귀신'인데 하며 당장 목을 자르겠다 하데요. 허허 주민이 하는 것은 만사가 법이요,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목숨 걸기라는 것을 얼마나 지나고야 알았던가요.
경비원 생활 첫 해 왜 그리 눈은 많이 내렸던가? 쓸고 나면 또 쌓이고 쓸고 나면 또 쌓이고 눈 쓸다가 꼬박 밤 새운 적이 몇 번이던가요.
몸이 지쳐갔습니다. 일 주일쯤 지나자 아침 밥을 먹는데 코피가 주룩 흐릅니다. 초등학교 3 학년 때 친구와 싸우고 코 터진 후 처음이었지요. 몇 개월 지나자 가슴이 조여 왔습니다. 혈관이 막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영 술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러고도 모가지가 끊어질까 봐 나가서 근무해야 했습니다. 허지만 두 번째 수술 하고는 하루 걸러 일하는 직업인데 미안해서 스스로 그만 두었습니다.
한 열흘쯤 쉬고 나서 두 번째 자리를 구했습니다. 거기라고 목숨이 온전 하겠겠습니까? 더구나 42평 아파트 단지에 근무하고 있다가 48평, 52평짜리로 옮겼는 걸요.
남자 주민 동대표에서 여자 주민이 동대표가 되던 날, 점심 한 끼 대접 한다고 자장면 한 그릇씩 돌리고 나서는 100분 가량 떠드는데 이런 분은 그만 두시라는 이야기를 20 여 번 들었습니다. 내 생애 그보다 더 지독한 밥 맛이 있었을까요? 허허 파리 목숨이 짧다더니 경비 원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더 못했슴을 처음 알았습니다.
에어컨 켜놓고 잠깐 자리 비웠다고 "호강에 초 쳤구만"하시던 63 세의 모진 206호 할머니 겨우 방문자 방문증 끊어주는 1분이었는데...
아주머니라고 호칭했다가 "아주머니라니? 사모 님이라고 해요" 하시며 호통치던 여인. 에라 못된 것들 치마 만 두르면 다 사모 님이냐? 인격은 다 무엇인고.
경고 장 붙였다고 손자 뻘도 안 되는 녀석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육두 문자 내뱉으며 당장 모가지 자르겠다고 큰 소리치던 호로자식 놈. "우리 딸 차인데 경고 장을 붙여? 당장에 떼요" 아니 어느 경비 원이 주민 딸 차인 것까지 식별할 줄 아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을까요?
택배 가져 가시라고 몇 번 연락 했더니 "아이 10할 나이만 안 쳐먹었으면"하면서 손을 들어 올리던 그 새 신랑.
"불친절 불친절 당장에 모가지 잘라 버려" 하루에도 얼마나 듣던 그 소리였던가요?
그러나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얼마나 인간적이고 고마우셨던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몰아 치던 날 차가운 손 움켜 쥐고 분리 수거 하면서 덜덜 떨고 있던 날 따뜻한 커피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간식을 들고 오셔서 "추우신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시며 놓고 가시던 1901호 장 여사 님!
조용히 밤이 깊어갈 무렵 노 부부님이 작은 봉투 하나 들고 오셔 "수고하십니다, 저녁에 야식이나 하세요"하시며 손에 쥐어 주시고 가시던 206호 그 할아버지 할머니.
순찰 돌다가 차 내에 실내 등이 켜져 있어 전화를 드렸더니 "세세한 데 까지 신경 써 주셔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메시지 보내 주신 1103호 그 새댁.
관상 동맥 우회 술을 받고 도저히 근무할 수 없는 데도 나갔더니 "아저씨, 며칠 더 쉬고 나오세요" 하시며 배려해 주신 관리 소장 변 소장 님! 정말 당신들이 있었기에 그 힘든 삶 6년이나 견디고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간도 쓸개도 다 떼어 놓고 살아야 한다는 그 경비 원 생활 결국 목이 짧아 그만 두고 나오던 날 내 반쪽이라는 동반자 왈 " 그간 수고하셨어요," 인사 대신 "당신은 그 성질 때문에...둥글게 살지 못하고" 하며 넋두리로 인사하던 아내. 돌아보니 허무할 뿐입니다.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이제 무엇 하면서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가요? 세상에 올 때 내 맘대로 온 것 아니기에 갈 때도 내 맘대로 못간당가요? 아, 정말 어쩌야 합니까? 영어로 이런 때 'WHAT SALL I DO?" 한다지요. 가을은 깊어가고, 가을이 남기고 가는 발 자취 낙엽도 긴긴 겨울 보낼 것 염려하여 등 붙일 곳 있으면 거기에 머무네요. 나는 어디에 머물러야 할 까요? 회고 하니 6년, 참으로 힘들었네요. 74년 생애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6년을 보태고 견뎠습니다.
어느 가수의 말 대로 남은 인생이나 잘해 봐야 할 텐데.... 가슴이 답답하니 어느 선술 집에라도 들려 쓰디 쓴 약주나 막걸리 한 잔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옮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