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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 쓰기 / 이양우 |
1-1. 현대시란 무엇인가?
시(詩), 말씀언(諺) 곁에 절사(寺)자를 결합한 결합문자, 이가 글시자(字) 인데, 하필 이 글자를 시라는 형용의 말머리로 쓰이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아마도 짐작키에는 이럴 것 같다.
시란 언어 매체를 통해서 고요 속에 몰입하는 형태문학이라는 뜻 일 것 같다.
정막함의 길은 바로 시이다. 시란 그러므로 깨우침의 무한한 연상 작용에서 일어나는 도량인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없이 논의되어 온 것이다.
진리란 하나라고 하지만 그 의미를 헤아리기란 깨알만한 존재 하나라도 수많은 갈래로 이어지고 결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언어적 의미적 추적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궁 국적으로 인간의 고뇌의 한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시란 무엇이냐고 토의를 한다 해도 이것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 본분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 한다 손 쳐도 계속해서 추리해야만 옳은 것이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속성을 추적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측면을 설명해 주는 이해의 역할 성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시의 길은 등불처럼 밝아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까다롭고, 황당하기도 한 도정이다.
어쩌거나 시의 근원은 우주자연의 본바탕위에 있고 그 본질은 자연 존재의 생명에 있는 것이다. 이 시적 인간적 생명 카테고리라는 것은 자로 재거나 저울로 달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판을 놓고 따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로 생각으로 설명하고 구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해명불가한 분석 불가한 존재라는 것일 따름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의 정의(定義)를 내린다는 것은 소경이 코키리 코를 만지고 이렇더라 하는 격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시를 말한다는 것은 오류의 오의에 이른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어트도 다음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해나 <달과 같이 저렇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자체를 말하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이라고,> 그렇다고 이 자체를 방치해 놓고 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원래 시(Poetry)라고 하는 것은 영어의 희랍어에 행(行)을 만든다. 라는 뜻이고 만든다.-창조한다. 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독일어에서는 시(Dichtung)응축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같이 시란 의미상의 응축과 언어상의 음율을 가미한 하모니라는 점이다.
시란 말 자체가 어렵다는데서 부터 철학성의 고집을 강조하거니와 시속에는 음율적 템토리즘의 암시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시의 정의는 그만큼 어렵다고 할 것이다.
1-2. 현대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시라고 하는 뜻은 그 의미상으로 고찰 할 때 서구에서는 포엠(Poem)이라고 한다든지 포에트리(Poetry) 또는 포에지(Poesie)라 지칭하는 두 갈래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흔히 읽는 시의 형식을 말하는 것인 반면 포에트리라고 하는 형식어는 시 이전에 시적 감정을 포유(包有)하고 있는 상태, 즉 마음속으로 시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포에트리는 형식이전의 산물이라는 것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포엠은 이미 시로서 승화되어 형식미를 갖춘 형태인 것에 반하여 포에트리는 얼굴없는 시의 소재. 영상. 환상. 생각. 가시적 현상. 의미의 내재. 영감적 사유. 상상적 사상 등을 일컷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엠은 외형상의 형식을 다 갖춘 상태라는 정의를 내린다면 될 것이라고 본다.
포엠과 포에트리는 유형의 시와 시가 아닌 무형의 대립관계인 구별인 것이다.
우선 엣세이컬한 것과 포에틱 과의 대조적인 관계를 놓고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산문과 시의 특정한 형식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시는 단축 응축의 산물로서 탄생하여 형식을 갖춘바 라면 산문은 이를 설명하는 문장구의 형태를 이룩한다.
일종의 시를 해설하는 설명문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산문의 위치는 시 그 자체를 직설하는 부분이 아니라 시를 해설 분석 의향 등을 자세하게 이해시키려는 문장으로서 가능해지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간혹 산문시라고 하는 장르가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산문시가 시를 해설하는 역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고, 시 자체로서의 입장에 엄연히 서야 하는 것이 산문과 산문시와의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긴 산문을 행만을 바꾸어서 단락단락 토막 내어 시라고 한다면 그건 아이러니 일 것이다.
예로서 긴 대나무를 잘라서 토막토막 리드미컬하게 음용(吟用)하기 알맞게 배열하고 그것을 연뿌리를 잘라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로서의 형식면에서는 시의 속성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 면에서는 말도 안 되는 터이다.
아래는 시인 박정온(朴定溫)의 시에 형식과 본질에 대하여 설명한 문구이다.
도저히 시라고 생각 할 수 없는 잠언(箴言), 성서나 경서의 경구(警句), 어느 광고문구의 시적 형태, 이런 것들은 형식면에서는 시의 속성을 본 딴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시적 본질이라고는 간주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억(金億)의 봄바람과 空超 오상순(吳相淳)의 <한잔 술>을 상고해 보면, 이 두 시인의 글 속에 형태는 뚜렷하다.
김억의 <봄바람>의 경우 7.5.7조의 정형시, 공초의 <한 잔술>에서는 7.5조의 음수율이다.
-봄바람이 휘몰아/꽃이 필 때면/다시 곰곰 옛 생각/이하생략 - 김억의 시이고 아래는 공초의 시인데...-
-나그네 주인이어 평안하시고/곁에 앉힌 술 단지 그럴 듯하네/한잔 가득 부어서 이리 보내게/이하생략 - 음수율과 정형시를 구분하여 보아도 이해가 될 것이다.
시란 산문과 구별되는 점이 이런 것이고, 서구적 의미 시, 즉 무형식의 시라 할지라도 그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운율적 템포, 리드미컬성은 동일하다는 점이다. 다만 정형과 음수율과 일반적 자유 시적 유희 시는 음악성의 주안점이 아니라 의미성의 형태를 가진 유희의 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위의 두 작품은 음악적 공통점 외에는 읽는 이에게 주는 감동이란 게 별로 없다. 그렇다고 특수한 이미지도 안겨주지 못한다. 단지 감정의 어떤 형태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어체시 형태, 즉 음악적 형태 시, 그런 멋에만 치중된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시의 초기형태의 양상이요 약점인 것이다.
시적인 본질이 부족한 시로는 현대시라고 하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허다한 것이다.
요즈음 문학지나 인터넷에 올려지고 있는 시들의 대부분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시의 원활과 폭넓은 과정을 배제하고 좁은 경지에서 낙후성을 면치 못한다는 안타까움인 것이다.
그러한 약점을 아래에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아래의 시는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1-3. 현대시란 무엇인가?
주요한(朱耀翰)의 시 <불놀이>를 살펴보면-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에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들이 어느새 피었더라마는, 사람의 봄은 또 다시 안돌아오는가,/이하생략*주요한의 <불놀이> 이 시는 감정표현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시라기 보다는 감정표현의 산문화에 가까운 시이다.
애초부터 자기감정의 설명문에 지나지 않는다. 시의 중요한 속성이라고 하는 부분을 망각한 것이다. 시의 중심 속성이 메타포어야 하는 데 반하여 엣세이적 호소에 지나지 않는다. 다분히 직설적 표현방법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국외의 독일시를 한번 살펴보자, 독일의 시인 칼.크로로우(1940-대 후반 시인들)은 독일의 서정 시인으로 명성이 있는 시인이다.
그의 작품<1950년 송가> - 앞연생략--그러나 생존이라는/굼뜬 폭력 앞에서/이모저모로 꾀를 쓰면서 푹 쉴 수밖에/달리 무슨 길이 남아 있을까,/가폿한 신발을 신고/우화의 모습을 찾아 달아난다./-중략-그러기에 또 심연이야기를 하자는 말인가? ---- 아니야. 심연이란 없는 걸세. 오히려 시련이 낫지./이의 시에서는 느릿느릿한 연과 행을 바꿔가면서 시적 메타포어를 충실히 이어간다. 이러한 작시법은 충실하고 깔끔한 방식이다. 긴 여운을 남기면서 압축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는 독일 시에서 가장 전통이 있는 시맥을 이어가는 굳은 줄기이다.
이른바 자연시의 대표적 원로 오스카. 뢰르게(Oskar Loerke=1884-1941). 그리고 빌헬름. 레만(Wilhelm Lehmann=1882-)의 영향을 받은 시인이다.
이의 시는 다공성(多孔性) 즉 메타포어의 함축성을 내세운 시인이다.
초기에는 순수 자연 시와 풍경시를 썼는데 배후에는 당연한 의미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은유(隱喩=Metapher)는 <시의 살이기도 하지만 감각중추이기도 하다>고 주장한 시인이다.
나중에는 은유를 벗어나 슈르적인 성향으로 넘어 서기도 하였으나 하여튼 이 시인의 주장 역시 메타포어는 시의 근육질이라고 할 정도로 시에 있어서의 비유적 배경의식을 중요시한 것이다.
물론 위의 주요한 님 등의 이 시인들의 정서나 문학사적 위치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나 이미지를 형성하는 메타포어적 시작에는 미숙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점에 대하여는 오늘의 우리 시인들에게 있어서도 깊이 반성해 볼 만한 문제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나라의 시인 정지용(鄭芝溶) 님의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시는 아래 지적해 보면 상당히 이미지스트의 결정체 메타포어를 구사하는데 충실하였다. 그 시가<백록담에서>인데 아래와 같이 설명해 보기로 한다.
그러면 정지용(鄭芝溶)의 시적 흐름을 살펴보자,
시인들의 정서(情抒)나 시적방식이 각기 다른 것은 어쩔 도리 없다. 그러나 시란 해박한 지식이나 폭넓은 사고를 장항하게 나열해 내는 장문(長文)이 아니라. 단축되고 미려 화된 언어의 숙고된 감성의 세공품이라 할 수 있다.
시가 산문 식으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다 설피 한다고 한다면 이는 시적 산문일 뿐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사상사유의 함축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지용의 시, <백록담에서>를 보면 /가재도 기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 온 실구름 一沫에도 白鹿潭은 흐리운다./나의 얼굴에 하나절 포긴 白鹿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禱조차 잊었느니라./
다음에는 오일도(吳一島)의 시이다. 제목은 가을은/가을은 /낙엽과 슬픔을/또 한 아름/내 가슴에 안아다 주고/등을 넘는다.//잎잎/비에 젖어/서늘한 地殼위에/이제 나는 누웠나니./세월이여!/어느 새 날/예까지/끌어왔느뇨?/................/............../가을은 낙엽과 슬픔을/또 한 아름/내 가슴에 안아다 주고/등을 넘는다./위의 시 중에서 정지용의 시는 산문 식으로 되어 있다. 정서나 의식이 비유를 통해서 그가 뜻 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뚜렷하다.
또한 오일도의 시 역시 단축된 메타포어를 통해 가을을 소재로 한 산문형식이 아닌 운율적 형식을 띄었다.
각기 다른 형식을 취했음에도 이들 두 편의 시는 메타포의 착시(着視)를 정확히 한 작품들이다.
극히 시적이라는 뚜렷함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더 깊숙이 유의해야 할 점은 어떠한 형식만으로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시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역시 시적 구조성 내용성 정신의 맥락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포에트리(poetry)는 포엠(poem)에 의해서 시적 가치로 접근된다.
여기까지 도달되어질 때 말의 뜻이 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적인 것이 시를 전달하는 과정이고, 시에 시적 내용을 포함 시켜주는 것이 포에트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명확히 말하자면 시의 내용과 형식의 일치 화를 기해야 한다는 점인데, 시에 도달하려는 극치 점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시적심리현상(詩的心理現狀)에 이르는 시정신적 주체가 시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이지 주체가 없는 외형상태의 껍질이 시로 형성되거나 성립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일정한 틀에다가 내용물을 맞추어 넣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우선 전제로 한 외형적 형식을 체색으로 조화를 입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시적 정신이 우선 존재하는 가운데 그 겉에 형식을 구성하는 외피질이 존재 한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시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기에 갖가지 구구한 해설을 안고 있는가, 참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난삽(難澁)스럽다. 그런데 먼저 내가 정의 하고자 하는 바는 시란 인간의 영험적(靈驗的) 미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그러나 미래 현재 과거를 분류해서 시를 해석한다면 진리적이 라기 보다는 과거적인 면에서는 반성적, 현재적인 면에서는 실재성, 미래적인 면에서는 가시성, 시의 의식추구 면서의 세 가지로 분류해 두면 어떨까 한다. 이렇게 분류해 보아도 역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나의 견해 일 따름이고, 그간에 많은 시인들께서 시론을 언급한바가 많으니 이를 열거 소개 해 봄이 옳을 것 같다.
(1) 공자는 고전주의적 시관(詩觀)을 말하였는데 시를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 관점에서 그 효용적 가치 내지 기능면을 강조한 바를 볼 수 있다.
시삼백일언폐지왈사무사(詩三百一言蔽之曰思無邪)라 일렀으니 시 삼백수를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에 사(邪)함이 없느니라. 하였다. 공평무사하고 진실전달에 아무런 흠점이 없도록 읊은 것이라는 뜻도 된다. 다분히 철학적 의식을 안고 한 표현이다.
(2) 엘리어트는 시에 대하여 상당히 자기만족적 표현을 금치 않았다.
그가 말하기는 시는 <고급적인 산물, 창조적인 향취, 흥취의 오락>등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3) 또한 코올리지가 보는 시의 존재가치의 해설은 시를 쾌락적 전유물로 보았다. 그렇지만 이후로 낭만주의 시인들의 견해는 다분히 진지한 의식과 정서면 감정적 의식세계라는 면에서 시를 더욱 성찰의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시의 내용을 정서라는 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 했다.
<시는 최선의 정신의 가장 행복이고, 최선의 가치적 찰나의 기록이다.>
(4) 워즈워드는 시란 숭고한 미적 정신에서 울어 나오는 인간 본질의 열망 이다.라고 했다,
(5) 쉘리는 <시란 용광로처럼 넘쳐흐르는 뜨거운 정감의 발로라고 하였다.>
(6) 보들레르는 미적 운율적 창조물이라고 했다.
(7) E A포우도 시란 미적 가치를 중시하였으며 선한 정서에서 축출한 액기스라고 보았다.
(8) 또한 E .고스는 시란 지적 창조의 순수물, 즉 최고의 지적 가치의 창조물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밖에도 시에 대한 정의는 수 없이 많다. 시인 각자가 생각하고 내리는 정의란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를 형식적 구성적 면만으로 정의하려는 미국 뉴욕 크리티시즘의 정체도 현대시 전체를 설명하는 명 해석은 못 된다
할 것이다.
어째든 우아하고 심미적인 시란 시인 스스로가 참다운 경지에 들어가서 파낸 시추 물이어야 한다.
형식면이든 제재면(題材面)이든 관념과 철학적 의식이든 신비와 환상을 조합한 것이든 수많은 양상을 태어나게 하는 시적 탐색정신 가운데 각자가 자기의 시적 세계를 달견 하는 정서감정에서 이룩된다는 말을 곁들이고 싶다.
<나는 시인이 되어서 마음이 더 고와졌다.
비단을 짜는 직녀 같아라.
시인은 죽어서도 시로 말하고
그 영혼은 멀리 죽은 후에도
만인의 가슴속에 빛으로 날아다닌다.>
시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에게는 감성적 에너지원인 것이다.
어떻게 쓰는 시가 아름다운 시인가? 어떻게 쓴 시가 좋은 시인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해 봤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시 해설은 주마간산 격이다.
하지만 시를 쓰는 기교에 있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상식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은 시 쓰기를 게을리 하는 격이나 마찬가지이다.
시를 이해하는데 이런 문제를 제기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맹목적인 시를 쓴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의식으로서 여러 가지 思惱와 사유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생각을 많이 할수록 생각의 심도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는 법이다.
그러면서 시를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많이 쓸려면 많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은 생각 속에서 새로운 사유물이 탄생케 되는 것이다. 좋은 시란 그러면 무엇일까? 과연 그런 시가 있는 것일까? 나쁜 시는 어느 것일 까? 좋고 나쁘다. 라는 개념은 시인의 견지에서는 납득이 안 가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독자의 각기 다른 취향에 따라서는 좋은 시가 존재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견해는 시인으로서의 통념상에 이치이다. 한편의 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소재(이미지), 비유(메타포어), 운율(리드미컬), 그런 것들이 가로놓여 있다. 이 가로 놓인 상태에 시를 쓰는 작자는 혼을 불어 넣는다. 이 혼이란 시인의 시정신이요. 영혼적 소산일지라. 이것을 보는 눈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시인 자신도 시를 보는 눈의 독자도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지고 느끼게 될 것이다. 시인은 시인대로의 독자적 감성에 산물이고, 독자는 독자대로 그 산물에 대한 感情偏入이다. 일치화가 될 수 없기에 그 느낌은 다를 수가 있다.
일정한 주제에 대하여 공감 할 수도 있고, 공감치 못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고 느끼는 시야에 따라서 마음에 들을 수도 있고 안들 수도 있다.
작자로서의 입장에서 보면 창작의도의 기교나 방법에 결과 문제이며, 독자로서는 간접체험으로서 생소한 상상력을 체험하게 된다는데 상이점이 있을 수 있다.
시인의 생각이 정위치 라면 독자의 생각은 정반대 일 수도 있다.
시란 이처럼 다양성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상상력도 각자의 의식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좋은 시란 일정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항시 가변적이다. 이를테면 <미당>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용>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의 시적 성격 시인적 아류를 싫커나 선호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순수시를 좋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참여시를 좋아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슈르적인 성향을 좋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전위적, 포스트 모던이즘을 선호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요는 시를 이해하려는 독자의 생각이 중요한 관건이다.
우리는 한편의 시를 대 할 때 그 시를 놓고 자기의 생각과 대조하려 한다. 여기서 시의 진실을 얻고자 한다거나 마음을 안식하고자 한다거나 좋은 시를 만남으로서 자신의 의식을 지탱하려는 이지적 가치로 추구하려한다.
마음에도 없는 시를 찬양 할 바는 없다. 반면에 시인은 마음에도 없는 시어를 나열해서 쓴다고 할 때 그 시는 다른 이의 공감대에도 전입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잠깐 작고 선배 시인들의 작품을 두 편 놓고 생각해 보자, <招魂>서럽다. 건망증이 든 都會야!/어제부터 살기조차 다----두엇대도/몇 백 년 전 내 몸이 생기면 옛 꿈이나마나/마지막으로 한 번은 생각코나 말아라./서울아, 반역이 낳은 都會야!/-尙火-의 시이다.*
<序詩>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아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의 시*/위의 시에서 두 시인의 작품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질적 수준이나 가치를 제외한 독작의 일반적 선호도는 여실히 분별되어 진다.
물론 상화의 유명한 시<나의 침실로>등이 있지만 그런 작품을 두고도 전연 생소하게 익히지 못하고 있는 작품들도 있는 것이다.
위의 <초혼> 역시 소월의 <초혼>에 비하여 독자는 <소월>시 만큼은 익숙하지 못하고 있다.
<지용>의 <서시>는 얼마나 많은 독자층을 외워 싸고 있는 가? 한 사람의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많은 親疏의 차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용>의 작품도 마찬가지고 <소월>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미당. 다형. 석정. 용운> 그 밖에 많은 시인들의 시에서도 가까이 접해지지 않는 작품들이 있게 마련이고, 낯 설은 시로서 영원히 남는 것들도 있는 것이다.
2.현대시의 가능성과 미래상?
시인이 시를 쓰고 독자가 시를 읽는다. 당연한 논리이기는 하나, 요즘 세상에는 시인이 시를 쓰기는 하나 시를 읽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는 시를 읽는가? 라는 질문에 확연한 답은 나오지 않는 형편이다.
시를 기호하는 층은 시인이고 시를 탐독하는 대상이 독자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독자가 시인일 수 있고 시인이 독자 일 수가 있다.
그 인구가 급격히 많이 늘어난다는 것이 현대 시단의 기류이다.
이것이 좋은 현상이기도 하고 나쁜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나, 저러나 같은 맥락의 해설이기도 하다. 하나마나 한 소리를 왜 하는가? 굳이 설명을 부연한다면 시를 읽고 느낀다든가 생각한다든가 하는 인구수에 따라서 시의 복합적 기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시 작업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청중이 많으면 연사의 설파력이 강해진다는 이치와 맞먹는 얘기로서 시인이 독자가 많으면 시를 쓰는 주체나 시를 읽는 대상이 다 신바람이 난다는 뜻에서 이다.
이상은 사실 글쓰기와는 상관없는 객설이다. 시인의 시 쓰기에 열성을 올리는 것이 그리 중요하다는 뜻일까, 그렇다. 남몰래 인고하고 고독하며 참을 성 있게 시를 탐색하고 신혈을 뚫어서 광맥을 찾는다.
이것이 시인의 단련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간다. 그 길을 가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때론 실성한 사람이 아닐까, 무엇이 보인다고 중얼 중얼거리는 것일까? 하기야 무엇인가 보이기는 보이니까 중얼 중얼거리는 것이겠지, 시인의 작업은 바로 이렇게 고단한 역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시의 가치를 발견한다. 뼈를 깎는 산고 없이는 희열의 순간을 맛 볼 수 없으리라. 나는 한마디로 좋은 시가 갖추고 있는 조건은 반드시 이런 데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현대시, 즉 한국현대시는 미래지향적으로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 진다. 미래가 훤히 열리는 단계라고 보아진다.
우리시의 역사가 비록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길은 것이다. 약 100년을 미달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이 기간 동안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해방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단의 많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작품 몰두에 정진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단히 발전 가능성이 있는 희망적 단계에 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최근에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인터넷 문학의 성행으로 가일층 문학의 패턴이 고조되고 있다. 다방면으로 폭넓은 문학사조가 확장되어지고 있는 터이다.
각 신문사 방송국 문화단체에서 문학 강좌가 성행되어지고 있으며, 각 급 학교에서도 문예교육이 번창하고 있다. 이런 조류는 21세기 최고의 인간생활의 향기를 드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테면 인간 정서의 함양에 좋은 터 잡이가 될 것이라는 견해와 징조인 것이다.
이른바 문예대중화 물결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개화와 열기가 넘쳐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요즘의 시들은 대개가 구송(口誦)시의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이런 추세는 곧바로 시낭송 모임을 만들 계기로 이전되었다. 요즘 각기 동아리를 만들어 시낭송의 붐을 이루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보여 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한 가지 경계해야 할 부분은 시를 취미영역 정도로 하려는 층들이 많다. 전문문학으로서의 단계가 아쉬운 터이다.
문학의 심오한 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시대적 갈망과 고통을 해소하는 문학적 사명이 절실한 바로서, 문학이 단순한 취미영역 정도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문학은 인간을 깨우치고 정서감정을 혁신하는데도 중요하거니와 시대변화를 앞질러 나아가는 선두 깃발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아래, 참다운 시인이란 혼 불을 지펴 인간의 본질적 사고와 희망을 깨우쳐주는 역할 자가 되어야 한다.
시의 난해성을 탈피하고 시로서의 정 위치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척후병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시를 쓰려는가?
3.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시를 난해하다고들 하지만 그 시의 난해성을 파괴하고 깊숙이 파들어 가서 보면 실제는 난해 한 것이 아니다. 시를 쓰는 작자가 난해를 극복 하느냐 가 문제 일 것이다.
여기에 시인의 과제는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시를 전달하는 언어는 일상 언어에 비하여 대단히 불완전하고 난해하다. 언어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고착된 존재가 아니고 유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성 소멸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다. 생성하면서 발전도 하고 때로는 후퇴하면서 사멸(死滅)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쓰는 상용어를 시로서 모두 장식된다면 시어의 의미는 아주 협소한 위치에 서게 되고 말 것이다.
시어의 존재는 무한가변성이어야 함이지, 좁은 한계에 부닥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
시대나 위치에 따라서 가변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말이란 자체가 놓여진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기에, 그 말이 설혹 정확하다고 치더라도 어떤 실재상태 보다는 불완전 할 수가 있음으로서 "왜 시를 쓰는가,"의 문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가시성, 그것을 사실 이상의 내면에서 가령 꽃의 표정, 나무의 의식, 실로 나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서 추구해 내는 의지, 즉 상상력에 의한 메타포어를 통하여 관조세계를 읽고 걸러내어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임이 시의식의 언어인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수한 세계에 도달하는 감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한 경우, 천연현상에 대하여 은밀한 상상력, 말보다는 사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현상, 사실 보다는 진실에 도달하려는 의식세계를 동경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시의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정신의 상태를 <발레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낙조(落照), 월영(月影), 숲(森林), 바다 같은 수많은 풍경과 환경들은 인간을 감동시키고, 사랑의 고뇌, 죽음의 환기 등도 마음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간접, 직접의 원인 된다. 이러한 감동은 일반적 감동과 다른 차원에서 엄연히 구별된다.>라 하였고, 그는 이런 반향은 어데서 오느냐 하면 우주적 감각이라는 것과 결합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시에서는 우주적 감각을 관계하여 음악적 소통에 의한 공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시적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시적 감흥이라고 한다면 이는 꿈의 상태와 같은 것이되 실제의 꿈은 아니고 우연한 착상, 동기적인 영감, 불규칙하고 비항구적이며, 비의지적인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시적 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적 욕구는 하나는 무목적(無目的), 사회적 표현(社會的表現)으로 대별 할 수가 있다.
전자는 생명 근원적 가치의 영원과 순수성에 지향함이고, 후자는 역사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시대적 정신이야말로 시정신의 형성본질이 되는 것이다.
어째든 시를 쓰는 이유는 각기 다를 것이다. 의향 되는 대로 자기 취향에 맞는 방향을 설정 할 것이고, 목표도 다를 것이며, 생각의 지향하는 바가 각기 다른 만큼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 할 것이나, 시로서 말하고자 하는 표현세계, 즉 그 자신의 내면세계의 의식이라는 존재는 결국 시에 대하 애착이 있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된다는 결론이며, 이것이야 말로 인간 영혼의 본질적인 정념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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