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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겨울은 2월에 와있는 듯합니다. 이제 마무리지어야 할 때인데 말입니다. 입춘대길 대신에 입춘한파를 지내며 한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 후에는 겨울도 보따리 싸야할 때가 옵니다. 다 자기 때가 있는 법이지요. 기다리면 됩니다. 서두른다고 해서 오늘이 내일 될 리도 없고 두들긴다 해서 오늘이 어제로 돌아갈 리도 없습니다. 그저 순리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인생들이 아우성칠 뿐 자연은 자기 갈 길 가고 있습니다. 다만 인생들이 하는 짓은 그 시간을 자꾸 빗겨가게 만들려는 것이지요. 이 조그만 땅덩이 안에서 서로 못 잡아먹어 아우성입니다. 왜요? 자기 배 조금 더 불리려고 말입니다. 거참!!
요즘 하늘을 보면 참 요란하다 싶습니다. 하루에도 해 났다가 눈 내렸다, 왔다리 갔다리 할 짓 다합니다. 마치 견디기 힘들어 몸부림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 지구촌 살아남기 힘들지 싶습니다. ㅋㅋ 이런 식으로 여름을 맞으면 어찌 될까 지레 걱정도 됩니다. 먼지 속에 살다가 어느 새 물난리 겪을 것이고, 폭우 지나 태풍으로 풍비박산 나는 거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드니 말입니다. 그야 그 때 가서 걱정할 일이라고 넘겨야 하겠지만 대비해두는 것도 지혜입니다. 세상이 트럼프 식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두려워집니다. 그래도 오늘 살아있으니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꿔야지요. 돈 드는 일도 아닌데. 하기야 이루려면 돈이 들기는 하겠지요. ㅋㅋ
춥기는 해도 주말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
2025년 2월 8일 김종우 목사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욥기 42 : 15)
<서브스턴스>
사람이 추구하는 세 가지 이상을 진,선,미라고 합니다.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 다른 것보다 아름다움은 특히 외적인 영향이 크게 보입니다. 참됨이나 선함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내적인 부분, 마음이나 정신적인 면을 이야기하는데 반해 아름다움은 물론 내적인 면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쓰레기장을 구경하기보다는 멋진 풍경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왕이면 보기 좋은 것을 보면서 살고 싶습니다. 풍경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습니다. 사람이야 특히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일단은 남녀를 불문하고 예쁘고 멋진 사람을 선호합니다. 소위 눈이 즐겁지요. 요즘이야 남자도 화장을 하고 예쁜 사람이 많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일반 감정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아름답기를 원하고 추구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이 번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예뻐지려 합니다. 무엇이나 그렇지만 과도하면 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불행을 안게된 경우도 있습니다. 타고난 미인이라면 말 그대로 복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예뻐지려고 자신을 학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흔히 아름다움에 어긋나는 언행을 보며 실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모습의 아름다움은 시간의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나이먹게 되어있고 나이가 들어가며 아무래도 시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자연이 그렇고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세상이 좋아지고 여러 방면에서 변화 발전하니 그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결코 세월을 빗겨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차츰 피부는 노화를 진행하고 곳곳에 주름이 생깁니다. 한탄만 할 것이 아닙니다. 익숙해지고 적응을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진작부터 해야 하지만 무엇이든 늦은 것은 없습니다. 깨달은 순간부터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가꾸는 것이지요. 어쩌면 더 넓고 깊은 아름다움을 지니게 됩니다. 외면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일 수는 있지만 존경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아름다움은 사랑과 더불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더 오래 지속됩니다.
배우로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명예의 거리까지 입성한 대스타였지만 지금은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활동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자신이 있습니다. 몸도 탄탄하다 싶고 인기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도 프로듀서의 통화내용을 듣게 됩니다. 50대가 됐으니 한물 갔다는 것입니다. 빨리 대체인물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자신의 멋진 모습이 담긴 대형간판이 찢겨져 내려오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렇게 끝이라고? ‘엘리자베스’는 놀라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몸의 이상보다는 마음의 충격이 훨씬 더 큽니다. 그렇게 병상에서 일어나 나오려는데 유심히 쳐다보던 간호사가 쪽지 하나를 건넵니다.
‘더 나은 당신을 꿈꿔본 적 있는가?’ 문구와 함께 소개된 약이 있습니다. ‘서브스턴스’ 한번 주사로 새로운 자신이 태어납니다.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방법입니다. 조건만 잘 지킨다면 이 젊음과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생각 또 생각해봅니다. 어때, 도전해볼 만하지 않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전화 연락을 합니다. 지정된 장소를 찾아가서 조그만 상자를 가지고 돌아옵니다. 드디어 약 주입을 시도합니다. 잠시 후 온몸에 뒤집어질 듯한 혼란이 오고는 쓰러집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장면, 자기 몸을 가르고 또 다른 자기가 기어나옵니다. 준비되어 있던 도구를 사용하여 찢어진 등줄기를 바느질합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 - 엘리자베스와 새로 태어난(?) ‘수’는 각각 7일을 주기로 바꾸어야 합니다. 약은 그렇게 지정되어 배달됩니다. 지정된 장소로. 본인 외에 다른 누구도 모릅니다. 수는 엘리자베스가 쫓겨난 바로 그 자리로 취업하여 들어갑니다. 그리고 인기몰이를 합니다. 과연 옛 명성을 되찾습니다. 수는 어느 날 자기 아름다움에 취하여 시간을 조금 지체합니다. 결과 엘리자베스 몸에 조그만 이상이 생깁니다. 몸의 지극히 일부니까 일단 숨기며 지나갑니다. 카페에서 이상한 남자의 관심을 받습니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충격을 이해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경고해주지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원칙은 엘리자베스와 수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수가 자꾸 시간을 어기더니 결국 엘리자베스의 진을 다 빼갑니다. 엘리자베스가 구매자에게 연락합니다. 불평합니다. 취소하려 합니다. 그러나 불평이 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가지고 이루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가 죽어가는 것은 곧 수가 죽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대단한 행사를 앞두고 괴물이 되어버린 수가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피를 뿜어냅니다. 마치 이게 다 너희들 몫이다, 하는 상징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영화 ‘서브스턴스’(The Substance)를 보았습니다.
때가 돼야 압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 같은 사건인 듯한데 다르게 말하고 있는 부분을 가끔 봅니다. 때로는 그것을 가지고 성경이 오류가 있다고 트집 잡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습니다. 오래도록 하나님 백성이 이 말씀으로 은혜 받고 이 말씀으로 신앙하며 이 말씀에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전해주시려는지 그것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를 보면 창조에 대한 기사가 두 번 나오지요. 1장과 2장이 내용이 좀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는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야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두 가지 내용이 모두 필요해서 우리에게 주신 줄 믿습니다. 저는 그렇게 이야기해드렸습니다. 1장에서는 창조 전반에 대해서 말씀하고 2장에서는 인간 창조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기록을 하였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 하시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지요. 사실 누가 기록을 하였든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자리싸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마 20 : 20 - 21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누가 예수님께 구합니까? 두 아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막 10 : 35 - 37을 보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누가 구하지요? 그 두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이 구합니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따질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미나 아들이나 원하는 마음은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는 모두가 겸손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무화과나무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도 비슷한 내용이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그런데 조금 다릅니다. 일단 마태복음을 먼저 봅니다. 마 21 : 19 - 20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치 그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합니다. 막 11 : 12 - 14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리고 20 - 21절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분명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에 일어난 일이냐 이틀에 일어난 일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기록하며 예수님이 원하신 바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막 11 : 22 -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믿고 기도하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제 마태복음 봅니다. 21 : 20 - 22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역시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건은 무화과나무가 말랐다는 것이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신 것은 기도입니다. 여기서 하루냐 이틀이냐,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태에게는 이렇게 지시하시고 마가에게는 저렇게 지시하실 수 있습니다. 저자가 이 사람에게는 코끼리의 등짝을 보여주시고 저 사람에게는 코를 보여주실 수 있지요?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아멘으로 받기 바랍니다. 결론은 똑같습니다. 그렇지요? 뭡니까?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해도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이 비슷한 말씀 들은 적 있습니다. 기억나나요? 마 17 :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역시 산을 옮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산 옮기는 이야기가 한 번만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분명 무슨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산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이 어떻게 바다에 들어갑니까? 우리 예수님이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분명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다는 또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동안 도무지 생각 없이 읽은 성경이 얼마나 됩니까? 이제 좀 똑똑해지면 좋겠습니다. 10년을 다녀도 20년을 다녀도 평생 교회를 다녀도 그 성경이 그 성경입니다. 그랬습니까, 아닙니까? 엡 4 :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제는 아는 것으로 발전해갑시다. 그리하여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장성해지자 그겁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만큼 자라지 않겠습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매양 어린아이가 되어서 언제 시집갑니까? 아니 우리 주님이 장가가려고 오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기다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기다리셨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이 바라시는 어른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나 아빠하고 결혼할 거야!’하는 아이에게 와서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나저나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그야 아쉬우니까 기도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면 구할 것도 없습니다. 뭔가 아쉬우니까 기도합니다. 기도하기 쉽습니까? 여기 나와서 대표기도 한 번만 하면 쉬운지 어려운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물론 하나님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은 어찌 하신답니까?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요. 시간 들여 공들여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듣지 않으신다, 그러면 뭐하려고 기도합니까? 쇼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십니다. 자식이 아빠에게 용돈을 달라고 합니다. 왜 달라고 합니까? 달라고 하면 줄 것을 믿고 알기 때문에 달라고 하지요. 우리 하나님도 말씀하십니다. 렘 29 : 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예수님도 약속하셨습니다. 마 7 : 7 - 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요 15 :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00% 기도응답의 법칙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는 말씀, 모르는 말씀? 그렇다면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된다? 배웁시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성전을 지키는 지도자들이 자존심이 상하지요. 그래서 따집니다. 마 21 :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한 마디로 ‘네가 뭔데 이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서 함부로 떠드느냐, 그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조건을 댑니다.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예수님의 질문이 그들을 당황시킵니다. 저들은 지금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보여주었고 그런가 하면 그들이 깨닫지 못하던 말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자기네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들이고 예수님은 별볼일없는 볼품없는 애송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도무지 자존심 상해서 예수를 상대하기 불편합니다. 그냥 없어져주면 좋겠다는 식이지요. 이미 세례 요한에게도 그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과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선지자로 알고 믿고 따라다녔습니다. 한 마디로 기분 상하는 일이지요. 자기네가 받아야 할 존경과 대접을 거지같은 젊은 녀석이 다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정을 잘 아십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듯이 이미 세례 요한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은 길 예비 사자이고 예수님은 언약의 사자입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된 바로 그것을 지적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답을 합니까? 보겠습니다. 25 - 27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대답인즉 인정하기 싫다, 그 뜻입니다. 답은 확실한데 인정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똑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을 누가 대적합니까?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다시 오실 때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대적할 사람들은 그냥 일반 신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과거를 보면 미래도 보입니다. 왜 역사가 기록되었다고요? 지금 우리에게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되라는 것입니다.(고전 10 : 11) 단순히 흘러간 옛이야기가 아니란 뜻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다고요? 그 말은 세례 요한이 누구의 명을 받고 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 곧 목자라는 뜻입니다. 말 3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여기 두 사자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길을 예비하는 사자’입니다. 그 다음에 ‘언약의 사자’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 아비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도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눅 1 :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76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그러니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언약대로 온 하나님의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받지 않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약속한 목자로 예수님이 오셨지만 역시 버림받습니다. 누구에게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에게서 버림받습니다. 다시 오실 때도 누구에게 버림받을까요? 하나님 백성, 오늘날 누구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그 목자들이 앞장서 반대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실 때 누구를 심판한다고요? 이방인들,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여기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입니까? 그들은 초림 때 이미 심판받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백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심판받는 겁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비롯된 열두 지파인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예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마 21 : 28 - 30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맏아들은 뭔가 특권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먼저 된 자입니다. 일반 백성과 다른 특권층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을 뜻하기도 한 것입니다. 뒤에 예수님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이룬 사람은 누구입니까? 맏아들입니까, 둘째 아들입니까? 31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답은 압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기네를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일반 백성은 갖고 있기 어려운 때입니다. 그것을 누가 가지고 있었습니까? 특권층이지요. 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들 곧 백성을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갑니까? 자기 권위만 내세우고 백성들의 존경만 받기를 원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뜻은 따르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겉으로는 꼴 같지 않아 보여도 하나님 보내신 선지자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33절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 누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다? 너희들이 무시하고 짓밟는 저 하찮은 백성들이 먼저 들어갈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목자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를 않고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처음 오셨을 때 그랬습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사자를 알아보아야 했는데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다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사자를 알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계 22 : 16 “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 말씀하시지요. 교회들을 위해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신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자를 알아보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단순히 초림 복음만 붙잡고 다된 것마냥 살고 있습니다. 신앙이 그리 단순하고 간단하다면 구태여 좁은 길이라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애써 배우며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이 알고 신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생도 단순히 믿어서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옛날이나 초림 때나 그리고 지금 우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기본이고 그 기본 위에서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믿어야 출발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본 적도 없는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그 말씀을 알려고 할 것입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그 말씀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실 하나님은 보아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믿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말씀하여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통하여 배워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때 그랬고 다시 오실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이나 별차가 없다는 말입니다. 특히 일반 백성이나 성도가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들 곧 목자들이 그렇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말씀을 모른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예언의 말씀은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사건이 터져야 아는 일 아니겠습니까.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압니까? 그런데 일어나고 나니 그 때는 또 안 믿겠다는 것이지요. 기막힐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예언을 왜 하셨답니까? 요 14 :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이룰 때 믿으라고요.
예수님 다시 오실 때의 일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바로 ‘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 다시 오시는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시거나 말거나 지금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 어떻게 언제 어디에 오시는지 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과연 어찌 해야 우리가 그렇게 바라고 소망하는 천국과 영생을 얻게 되는지 제대로 알고 신앙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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