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망원동 브라더스』
출처-<나무옆의자>
내 옥탑방에 사는 네 남자
원래는 500에 30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200에 30이다. 밀린 월세를 보증금에서 깠기 때문이다. 망원 2동의 내 보금자리, 8평짜리 옥탑방 이야기이다. 내 옥탑방의 집주인은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인물이다. 그가 누구냐. 동네 슈퍼마켓 사장이자 복덕방 영감이며, 내 옥탑방이 있는 건물 전체의 주인인 김판곤 할아버지다. 나는 그가 나를 쫓아내지 않은 것에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옥탑에서는 멀리 한강과 성산대교가 보인다. 주변이 온통 빌라들이기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가까운 곳에는 값싸기로 소문난 망원 시장이 있고, 좀 더 나가면 바지인지 팬티인지 모를 하의, 그것조차 실종될 정도로 짧게 입은 각선미녀들이 우글대는 홍대가 있는 나름 힙한 곳이다.
홍대 거리
오영준. 내 이름이다. 만화 잡지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정식으로 데뷔한 만화가. 내 직업이다. 하지만 그 등단작이 내 마지막 만화가 되었다. 잡지 만화는 사라지고 웹툰과 학습 만화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요 몇 년간 나는 제대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가끔씩 아르바이트로 일러스트 작업을 해 주고 받는 푼돈이 내 수입의 전부이다. 그나마 약속한 돈을 제때 받지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자기 개발서를 읽는 건 자기를 주도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읽고 있으면 면죄부가 생기는 느낌. 자본주의 사회의 성경이 바로 이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기 개발서대로 살진 않는다.」
마포평생학습관에서 공짜 에어컨과 참한 처자들의 모습에 감사하며 구직 사이트를 뒤진다. 자기 개발서 따위는 읽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부자가 아니다. 그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된다. 결혼이나 2세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박한 것조차 참으로 이루기가 힘들다. 마지막 여자 친구가 떠난 지는 4년이 되었다. 세상에 차는 고사하고 월세 30도 버거워하는 백수 찌질이를 만나줄 여자는 없다. 아참, 나는 35세이다.
그런 월세 30짜리 옥탑방에서 우연찮게 남자 네 명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정확히는 한 명의 숙주와 두 명의 숙식 빈대 그리고 한 명의 출퇴근 빈대이다. 물론 숙주는 나다. 제길, 세 명의 빈대가 누구냐고?
세 명의 빈대들
「곧 코를 골 기세로 숨을 몰아쉬며 배를 내밀어댄다. 그 배에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듯하다. 그의 무게, 그의 허세, 그의 욕망, 그의 불안, 그의 안쓰러움...... 이번 달 가족에게 부쳐줘야 한다던 돈은 오늘 금목걸이로 해결됐을까.」
빈대 셋 중 하나는 40대 김 부장이다.
출처-연극 '망원동 브라더스'
그는 오늘 자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두툼한 금목걸이를 팔아 안주와 술을 사고 텐트를 샀다. 그리고 그 텐트 속에서 곧 잠이 들려 하고 있다. 나는 언젠가 가 본 그의 구리시 아파트를 떠 올렸다. 그때 김 부장은 나에게 대출이자가 엄청나다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화장실이 두 개라는 자랑을 잊지 않았다. 김 부장의 아내, 형수는 캐나다에 로망이 있었다. 결국 김 부장은 아파트를 팔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형수, 그리고 딸과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 그리고 3개월 만에 김 부장 홀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기러기 아빠가 된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맹인 안내견 한 마리 반은 족히 들어갈 거대한 트렁크를 들고, 소금기와 땀 냄새가 배어 있는 알 수 없는 상표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채 내 집을 찾아온 이유이다. 김 부장은 내 만화에 우수상을 준 잡지사의 영업부장이었다. 그는 내 만화를 인정해 준 나의 유일한 우군이었으며 내 만화를 어떻게든 팔아보려고 진심 어린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마치 참이슬이 맺힌 것 같은 눈망울로 나를 보며 오바이트를 해대는 모습에 나는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
두 번째 빈대는 누구냐고? 사실 빈대란 표현이 매우 죄송스러운 분이다. 그는 나의 ‘싸부’이다. 10년 전 나에게 만화를 가르쳐주신 분이다. 당시 최고의 만화 스토리 작가였으며 내게 만화뿐 아니라 인생까지 가르쳐주신 분이다. 꼿꼿하며 자존심 강하다. 그리고... 가부장적이다. 이것이 그의 치명적 약점이다.
「10년의 인연. 한물간 싸부와 못 나가는 제자. 다시 만나도 여전히 우리는 한물간 이, 못 나가는 놈이다.」
좋은 날은 갔지만, 그의 가부장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한때야 대기업 부장 월급의 두 배 정도를 벌었지만 50대가 된 지금은 그냥 무능력한 가장일 뿐이다. 집안 살림은 미장원을 운영하는 사모님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그런데도 싸부는 늘 군림하려 했다. 결국 사모님은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당한 싸부는 노숙자의 모습으로 잔뜩 취해 어느 날 내 옥탑방을 찾아왔다.
「내가 부축하려고 하자 괜찮다고 손짓한 뒤 마저 걸어 방으로 들어간 싸부는, 그대로 내 침대를 향해 쓰레기 봉투를 투척하듯 자기 몸을 던져버렸다. 윽, 씻고 주무시지......」
김 부장과 마찬가지로 나는 도저히 싸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이런 연유로 내 8평 옥탑방에서 세 명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나는 퀸사이즈 내 침대에 누워있는 싸부를 볼 때마다, 옥탑 마당 텐트에서 김부장의 코고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운명을 저주했다. 그러나 어쩌랴,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지.
마지막 빈대가 있다. 항상 ‘척’ 한다고 해서 삼척동자, 줄여서 ‘삼동’이라 부르는 스물아홉의 유재완이다. 내 대학 동아리 후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녀석은 숙식 빈대가 아니고 출퇴근 빈대라는 것이다. 망원동의 ‘정진고시원’이 그의 거처다. 9급 공무원을 준비한다는 녀석을 우연히 동네 ‘가야마트’에서 만났다. 그날 이후 녀석은 내 옥탑방으로 출퇴근한다. 그리고는 아저씨들과 어울리며 자기가 가져다 놓은 TV를 보고 술을 마신다. 도대체 공부는 언제 하는지. 모두 돈이 없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삼겹살이 나오고 참이슬이 나왔다.
「어느새 백수들의 놀이터가 된 나의 옥탑방.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 더 이상 고요한 옥탑의 아침은 사라지고 없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점령된 뒤 겪은 식민지 백성의 슬픔이 이러했을 터. 실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학습 만화라도 그려 이 놀이터를 유지해야 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김 부장과 싸부, 그리고 삼동이가 내 원고 마감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야속한 내 팔자여.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너티 걸’에서 만난 그녀가 꿈꾸는 것
어느 날, 슈퍼 사장 김판곤 할아버지의 호랑이 같은 호통이 옥탑방을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마치 바퀴벌레 박멸을 위해 출장 온 세스코 직원처럼 옥탑방에 있던 세 사람을 몰고 나갔다. 9만 원짜리 일당 일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었다. 간만에 모두 주머니가 두둑해진 그날 밤, 망원역 사거리에서 합정동 방면으로 올라가다 만나는 골목길 안 ‘마산 못난이 아구찜’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모두가 취했을 때 싸부가 나를 데려간 곳이 ‘너티 걸’이었다. 4년 동안 원치 않는 수도승으로 살아 온 나에게 여자 분냄새라도 맡으라는 싸부의 배려였다. 자신의 후배가 운영하는 ‘바’라고 했다. 그곳에서 ‘주연’이를 만났다. 놀라운 사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나처럼 싸부의 스토리 작법 강의를 들은 제자였으며 언론홍보대학원생이자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끔찍하다. 예쁜 여자만 마주하면 헛소리가 튀어 나온다.」
숏커트가 어울리는 그녀는 현직 만화가라는 나에게 기분 좋은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내 가슴은 뛰었다. 무려 4년 만에 해보는 예쁜 여성과의 대화는 어색했고,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그녀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그린 만화를 꼭 보여달라는 말로 배려했다. 그녀가 따라준 데낄라의 맛은 황홀했다.
이게 진짜 데낄라에요~
출처-<게티이미지>
그날 이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감이 나의 하루하루에 햇살을 비췄다. 만화를 핑계로 만남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그녀가 나를 자신의 모임에 초대했을 때는 그 행복감이 절정을 이뤘다. 자신이 다니는 언론홍보대학원의 최고령자이자 대부분의 회식비를 전담한다는 느끼한 40대 아저씨가 책을 냈다고 한다. 출판 기념회에 나를 초대한 것이다. 언론홍보대학원이란 곳이 사실은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인맥을 쌓는 곳이라고 했다. IMF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끔찍한 가난을 경험해 본 자기 역시 그 목적으로 다닌다고 말하며 주연이는 내 팔짱을 꼈다.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의 고급 양복을 입은 세련된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주연이는 반색하며 반기더니 나에게 그 남자가 ‘엔젤’이라고 했다. 그 남자가 내민 명함에는 금박으로 ‘박정훈, Angel’이라는 말과 핸드폰 번호만이 적혀 있었다. 질 수 없었다. 나도 그에게 명함을 건넷다. 두꺼운 마분지에 내 캐리커처가 그려진 꽤나 키치한 명함이었다. 박정훈, 그의 직업은 ‘엔젤 투자자’였다. 요즘 그가 투자한 모바일 게임 하나가 꽤나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엔젤이 우리에게 뒤풀이에 참여할 것을 권했고, 주연이는 그 앞에서 다시 내 팔짱을 끼며 그를 따라갔다.
술잔이 오가고 주연이와 내가 일어서자, 엔젤이 따라 나왔다. 그는 주연에게 5만 원을 내밀며 꼭 대리를 부르라고 했다. 아마도 그녀가 나를 태우고 온 경차를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못 이기는 척 그 돈을 받았다. 알 수 없는 자격지심이 나를 괴롭혔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는 그녀의 고집에 우리 둘은 홍대 앞 ‘올드 앤 와이즈’로 갔다.
출처-<올드 앤 와이즈 페이스북>
LP판을 틀어주는 고즈넉한 곳이다. 크랜베리스의 ‘좀비(Zombie)’를 신청했고 곧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조용히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자격지심과 음악과 맥주와 담배, 그리고 그녀의 야망이 내 머리를 맑게 했다.
「“엔젤한테 마음이 있는 거죠? 그래서 난 들러리로 데려간 거고.”」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겪은 IMF에 대해 말했다. 평생 단 한 번 경험해 본 가난에 대해. 그리고 엔젤이 자신을 계속 꼬시는데 안 넘어가려고, 더 패를 올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속물이며 바에서 일을 해서라도 박사가 되고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릴 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만화가 P처럼 대박 작가가 되면 그땐 날 택할 수도 있나요?”
그녀가 약간 취해 풀린 눈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그게 언제쯤이죠? 나, 내년이면 서른인데.”
“정확히 언제쯤 상류층이 될 계획인데요?”」
순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피커에서 제니스 조플린의 ‘썸머타임’이 흘러나왔다. 나는 휘파람으로 따라 불렀다. 그녀는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백을 들고 가게를 나가버렸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참으로 더러운 기분이다.
숙주 탈출 계획과 수유리 반지하녀
정들었지만 망원동을 떠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주연과 있었던 일이 나를 각성시켰다. 도대체 그 더웠던 지난 여름을 이 좁아터진 곳에서 그들과 어떻게 보냈던 거지? 내가 짐승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여기는 빈대들에게 넘기고 난 새집을 찾는다. 결심이 섰다. 300에 30만 원! 목표를 세우고 집 구하기 직거래 사이트를 뒤졌다.
「그녀는 대학생이거나 막 대학을 졸업한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트레이닝복에 질끈 묶은 머리가 영심이나 하니 같은 명랑만화 속 여주인공을 떠올리게 했다.」
작은, 정말 작은 여자가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수유리 반지하 방의 세입자였고, 그 방은 내가 낼 수 있는 돈의 한도 내에서 최고의 선택지였다. 실제로 본 집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와의 대화도 즐거웠다. 그녀는 자취의 고수였고, 자취에 대해 조잘대는 그녀의 말들이 첫 만남의 서먹함을 없애 주었다. 내가 이 방을 쓰겠다고 하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자기가 이사할 방을 구하는 즉시 연락하겠노라 말했다.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수유녀’라는 이름으로 폰에 저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방을 쉽게 구하지 못했고 자주 나에게 미안하고 양해를 구한다는 카톡을 보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한 느낌이 들었고 지난 4개월의 시간 동안 함께 했던 김부장과 싸부, 그리고 삼척동자 모두에게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나의 소중한 지인들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수유녀와 주고받는 카톡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유녀가 가급적 방을 늦게 구했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괜찮습니다. 근데 올해 안엔 되는 거죠? ㅎㅎ"
"그게...... 그게...... 정 안 되면 제가 서울역에 가는 한이 있어도 올해 안엔 꼭 비워드릴게요. ㅋㅋ"」
망원동을 방문한 수유리 반지하녀
그녀는 홍대 주변의 가급적 큰 원룸을 찾는다고 했다. 예산은 1000에 30 아니면 500에 40 전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 망원동이 제격 아닌가. 그렇다. 그녀가 망원동으로 오고 내가 수유리로 가는 것이다. 더구나 집주인이 복덕방 영감 아닌가. 나는 그녀를 망원동으로 초대했다. 세 개 정도의 집을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추천받았다고 말하며.
「집을 보면서는 답답한 표정이던 그녀는 망원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연신 화사한 표정을 터뜨리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역시 망원동의 노른자, 망원동의 식스팩, 망원동의 얼굴마담인 망원시장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망원시장
출처-<한국관광공사>
그녀 마음에 드는 집은 없었으나 다행히 망원시장이 그녀를 만족시켰다. 그녀는 싸다고 말하며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이것저것으로 가득 채웠다. 시장 끝 분식집의 튀김과 꼬마김밥, 그리고 떡볶이도 그녀를 만족시켰다. 그녀가 계산했기에 나는 캔맥주를 샀다. 망원동에 왔으면 한강을 봐야 한다며 그녀를 데리고 한강 둔치로 갔다. 10월 중순의 한강은 제법 쌀쌀했다. 어색했지만 맥주가 용기를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홍대로 가 한 잔 더하자고 제안했다. 멋진 음악이 있다고 설득했다. 그녀는 한 번 튕기는 듯하더니 수락했다. 순간 그녀의 작은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포커를 쳐서는 안 될 여자다.
「‘올드 앤 와이즈’. 지난번 주연과 왔던 기억은 올드 팝 몇 곡 흐르자 금세 쓸려나갔다. 지금 내 앞에는 작고 붉은 이마를 가진 부지런쟁이 여자가 있다.」
작고 수수한 그녀다. 그녀는 스물아홉, 삼동이와 같은 나이였고 자신을 ‘알바의 신’이라고 말했다. 안 해 본 알바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연년생인 남동생이 대학생이 되자, 휴학을 했고 군대에 가자, 복학을 했다. 동생이 다시 제대하자 또 휴학했다. 이름난 대학도 아니었고 빼어난 미모도 아니었다. 빵빵한 집안도 아니었다. 그녀의 20대 반은 빚을 내 공부했고, 나머지 반은 빚을 갚는 데 쓰고 있었다. 알바만 하다 서른이 되는 그녀였지만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생을 도운 것,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나온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맥주의 강이 흐르는 가운데 음악의 물결이 설렁거렸으며 이야기라는 배가 그녀와 나 사이를 둥둥 뜬 채 오갔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싶어졌다.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좀 더 술이 오갔다. 그녀는 자신의 수유리 방에 친구 하나가 빌붙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자기가 일만 나가면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온다는 것이었다. 집 청소하다 보면 발견되는 남자의 흔적들에 울화통이 터졌다고 말했다.
내 집인데, 나는 2년째 혼잔데...... 어느날 친구에게 할 거면 모텔 가서 하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것이 이사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 둘은 박장대소했다. 나의 빈대들이 떠올랐고 수유녀에게 그들 이야기를 열심히 해댔다. 점점 술기운이 올랐다. ‘만화가 아저씨 괜찮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 ‘나 아저씨 아닌데’라고 웅얼대다 나는 그만 필름이 끊겼다.
이루어진 꿈, 내 집에서 섹스해 보기
결국 나는 탈출을 포기했다. 빈대들이었지만 정이 들대로 들은 빈대였다. 무엇보다 수유녀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재미있고 좋은 사람들 같으니 버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들을 보고 싶으니, 자신을 한번 초대해 달라고 했다. 정말이지 이 인간들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수유녀와 연애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는 평생 숙주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그녀는 방을 구했고, 수유리 집도 나갔다. 망원동에서는 끝내 구하지 못하고 성산동 경의선 철길 건널목 근처의 2층이 그녀의 새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녀는 반지하를 탈출했다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이삿날 나는 그녀를 돕기 위해 아침 일찍 떡볶이를 싸 들고 갔다.
이사 도와주러 왔어요... (쑥스)
출처-<뉴스엔>
포장이사가 비싸서 용달만 부른 그녀였고, 그것이 무리였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반겨 맞이했다.
「스물아홉이 믿기지 않는 동안에 앳되다 못해 애기 같은 목소리, 유난히 작은 키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녀에게 푹 빠져 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일까?」
일하는 도중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질끈 동여맨 머리가 찰랑거렸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나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뺀질대는 알바생을 갈구는 점장의 표정으로 돌변했고, 나는 다시 이삿짐 싸는 일에 열중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까치발을 해 까치가 감을 쪼아먹듯 내 볼에 콕 입술을 갖다 댔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을 내 입으로 막았다. 두 입술이 포개졌고 혀가 오갔다.
내 빈대들이 쓸모가 있었듯이 그녀에게 빌붙었던 친구도 쓸모가 있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그녀의 친구인지 그녀 친구의 남친인지가 남긴 콘돔 하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콘돔은 고급 일제 초박형이었다.
「“여기 3년 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떤 생각을 했는데요?”
“이 집에서 한 번쯤은 누군가와 섹스를 하겠지?”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BIBA! 망원동 브라더스!
일요일 저녁이었다. 김부장의 코골이를 저주하면서 마감을 끝낸 저녁이었다. 싸부가 싱싱한 횟감을 잔뜩 들고 왔다. 나는 수유녀, 아니 선화에게 전화를 했다. 마중 나온 나에게 선화가 와인 두 병을 내밀었다. 마트 1+1 행사 때 산 것이겠지만 살짝 감동한 나는 그녀의 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가 질겁하며 피한 뒤 내 팔짱을 끼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인사했고 싸부와 김부장, 삼동이가 차례로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여자가 참석하니 칙칙한 남자들 술자리가 화사해졌다.
우리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을까요~?
그녀가 특유의 친화력으로 ‘자연산이네요’, ‘이걸 진짜 직접 뜨셨어요?’ 등의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하회탈이 되었다.
「“영준이 이 녀석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손바닥만 한 옥탑에 남자 넷이 모여 산다고 솔직히 말하던가요?”
“다들 사연들이 많으시다고만....... 남자 넷이 옥탑방 하나에 모여 산다니 궁금하잖아요.”」
그 순간 모두가 부정했다. 김부장은 자신의 마누라와 애가 캐나다에 있으며 곧 한국에 돌아와 합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옥탑방은 자기에게 일종의 게스트하우스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삼동이야말로 당당하게 자신의 집은 요 앞 고시원이며 그냥 가끔 놀러 오는 것뿐이라 했고, 싸부는 점잖게 자신은 잠시 기거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가만, 옥탑방은 좀 뻔하네요. 여기가 망원동이니까...... 망원동 브라더스, 어때요?”」
그렇다. 내가 형제들처럼 재워줬고 먹여주기도 했으니, 브라더스가 맞다. 싸부는 내가 자신과 브라더 먹을 짬밥은 아니라며 투덜댔지만 결국은 모두 동의했다.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선화가 가져온 와인까지 바닥이 났다. 우리 모두는 잔을 들었다. 웃음꽃이 피어났다. 우리는 모두 가난했지만, 그것은 느긋한 가난이었다. BIBA, BIBA 망원동 브라더스다.
인생도 가끔 마감이 필요하다
「아버지가 부자이거나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면 성인이 되고 자기 꿈을 꾸며 살기엔 너무나 힘든 세상이다. 그래, 루저의 푸념이다. 하지만 루저가 너무 많다. 나도, 옆의 김부장도,」
옥탑방 월세 30만 원조차 힘에 겨워 보증금에서 감해 나가는 루저, 무명 만화가의 푸념처럼 많은 사람들이 넉넉지 못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넉넉지 못한 살림이라도 유지하려고 경주마처럼 달립니다. 피곤한 날도 쉬지 못하고 일합니다. 카드 연체만 해도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니 인생 연체는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인생이 연체될까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 것, 그것이 가난입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가난 앞에 굴복하게 합니다.
하지만 ‘대응’과 ‘굴복’은 다른 차원의 말들입니다. 그것은 ‘지는 것’과 ‘기권하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가난해서 매일 지지만, 지면서도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대응이고 가난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사는 것이 굴복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대응’입니다. ‘영준’이 작가의 꿈을 잠시 접고 학습 만화를 그리면서 옥탑방과 그곳을 피난처로 찾아온 사람들을 끌고 나가는 모습, ‘선화’가 20대의 절반은 빚을 내고 나머지 절반은 그 빚을 갚으며 서른 살을 맞이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밝게 웃을 수 있는 것, 이것들이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반드시 작가만 마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직장인에겐 퇴직해야 할 때가 있고, 자영업자에겐 영업을 접을 때가 있고, 연인에게는 이별의 때가 있고, 군인에게는 제대가 있다. 그게 마감이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스스로 묶어야 하는 매듭 같은 거.」
연극 ‘망원동 브라더스’ 포스터
그래서 인생도 가끔 마감이 필요합니다. ‘굴복’이 아닌 ‘대응’을 위해서. 비록 오늘 졌을지라도 내일은 다시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느 순간 한번 되돌아볼 성찰의 시간을 위해서, 마감이 필요합니다. 간신히 막은 이번 달 카드 값, 어찌어찌해서 융통한 월세, 사랑하는 이와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이별이 아프지만 다시 출근하는 내 모습. 이런 것들 모두 충분히 훌륭한 마감입니다. 그러니 잠시라도 마음 편히 소주 한 잔이나 가까운 교외로 나가 바람 쐬는 것 정도는 해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마감을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中 -
일제강점기 춥고 바람 부는 어느 날, 가족을 건사하기는커녕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은 가난 속에서 화자는 남신의주 유동의 목수, 박시봉 씨 댁 허름한 골방 하나를 간신히 구합니다. 그리고 자책하고 성찰하고 그 행위들을 되새김질하듯이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찾습니다.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中 -
‘영준’과 ‘선화’가 끝까지 둘의 사랑을 지켜 내고 결혼까지 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혼한다면 깨끗한 신혼 방 하나를 장만할 수 있을지, 아니면 영준의 옥탑방에서 신혼을 시작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둘은 훌륭하게 인생의 한고비를 마감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결말로 둘의 인연이 마무리될지라도 그 마감을 통해서 굳세고도 깨끗하다는 둘만의 ‘갈매나무’ 한 그루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마흔여섯 번째 인생 탐구로 누군가에게는 ‘찌질이’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가난하면서 유쾌한 사람들, 오늘 졌으면서도 내일을 기대하는 낙천적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거창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훌륭하게 인생의 한고비를 마감한 서른다섯 살의 망원동 옥탑방 세입자 ‘오영준’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언제고 망원동에서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마음을 털어놓으며 글을 마칩니다.
/ 딴지일보 인빅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