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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묵상글 (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 생명, 그리고 빛.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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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명, 그리고 빛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한 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려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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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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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2022년을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다보며, 오늘을 가져다 준 지난날들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낼 수 없었던 한해를 보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의 날’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한 처음’의 놀라운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것으로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하고,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오셨고, 사람이 되시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과 ‘그분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함께 거주하고 사신다.’는 믿음은 초기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가 인용한 초대교회의 찬미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 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엄청난 사랑을 말해줍니다. 교부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까닭은 인간이 하느님 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변모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변모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변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 있고, 그와 ‘같아지는’ 일이 있고, ‘하나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본받는’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도 깊은 신비적 차원을 일이 벌어집니다. 곧 베드로가 표현한대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2,4) 되는 일이 있고, 바오로가 표현한대로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1코린 15,49), “그리스도를 입고”(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 “같은 모습이 되는”(로마 8,29)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 내어주어, 그로 하여금 당신께서 누리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타자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그의 자리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어주는 것은 곧 들어가는 일이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고 나아가 상대에게 들어가기에, 동시에 자신의 그 빈자리에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를 취하고 상대를 받아들여 상대와 같아지고,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서 전해져 오는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직 같아지는 것만이 구원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비우는’ 행위의 종착지는 ‘같아지는’ 것이요,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것은 또 다시 당신에게로의 변형을 가져옵니다. 곧 이러한 변화는 변화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또 다른 차원의 변화로 끌고 갑니다. 그것은 당신이 오시어, 우리와 같이 사시는 까닭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같아짐’을 통해 사랑이신 당신은 우리와 같아질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와 자리를 바꾸는 지점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까지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본질 자체로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은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를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바로 그 길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곧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그저 자기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 안에 머물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전부’가 되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제 발길이 당신을 향하여 있는지,
제 마음에는 당신의 평화가 들어와 있는지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으셨으니
이제는 죽음의 어둠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제가 당신 생명으로 새로워지고,
세상에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온 세상이 생명의 빛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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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2년 12월 31일입니다. 2022년을 돌아보면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게 건강을 주셨고, 무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고 참혹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에 올랐습니다. 이태원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망하는 슬픈 사고도 있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2022년을 보내면서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립니다. 오늘이 지나면 2023년입니다. 내년은 ‘계묘년(癸卯年)’입니다. 토끼띠의 해입니다. 저는 토끼띠입니다. 내년에 저는 환갑입니다. 예전에는 환갑잔치를 했는데, 요즘은 환갑이라고 해도 젊은 나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육체의 나이는 한 바퀴 돌았는데 마음의 나이는 아직 반 바퀴도 안 돌은 것 같습니다. 공자는 60이라는 나이를 ‘이순(耳順)’이라고 했습니다. 이순은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思慮)와 판단(判斷)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이.’라고 하는데 저는 아직도 사려와 판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2023년에도 감사할 일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아쉬움과 부족함은 모두 털어버리고 감사와 찬미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지친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나의 멍에는 가볍고, 나의 짐은 편합니다. 모두들 나에게 와서 쉬십시오. 하느님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고, 아픈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주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고난을 이겨냈고,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배는 초대 교회의 신앙 공동체에 의해서 거친 세상을 힘차게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표징으로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023년에는 이제 우리가 제2의 그리스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행동에서 위로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서 희망을 보면 좋겠습니다.
신앙 안에서 다가오는 2023년을 드러내는 사자성어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동상동몽(同床同夢)’으로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어른이 되고,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꿈을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나의 삶과 같아야 합니다. 이제 곧 2023년이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동상동몽(同床同夢)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2023년을 기다리며, 지난 1년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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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40년대 말, 심리학자 버트럼 포러는 학생들에게 새로 제작된 성격 검사라며 검사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검사 결과지를 나눠주었지요. 결과지에는 각자의 성격이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포러는 타인의 검사 결과는 보지 못하게 한 후, 검사 결과와 실제 자신의 성격과의 일치도를 0점(전혀 정확하지 않음)에서 5점(매우 정확함)까지 매기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학생이 매긴 점수는 평균 4.26점으로, 대부분 학생이 실제 자기 성격과 일치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결과지의 내용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럼에도 학생 모두 결과지 내용이 자기 성격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같았던 결과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거나 존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당신은 장점으로 살리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약점도 있지만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때때로 당신은 옳은 결정을 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한다. 당신은 변화와 다양성을 선호하지만 한계에 부딪힐 때면 만족하지 못한다. 당신은 자신이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사람들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이하 생략)
자세히 읽어보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당연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성격을 정확하게 찍어낸 것처럼 착각합니다.
인간은 서로 너무 다른 것 같지만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르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만 다르다고 할 뿐입니다.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아닌 공통점을 찾아 나갈 때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2022년 12월 31일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2023년 1월 1일입니다. 단 하루 차인데도 엄청난 시간적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연도가 바뀌어서 한 살 더 먹는다 해도 내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한 살 더 먹었다고 서운해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 살 먹어서 어른이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2022년을 마무리하며 내 마음도 다시 깨끗하게 정리해보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마음을 모두 털어버리고, 대신 사랑의 마음으로 그 자리를 채웠으면 합니다.
2022년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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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다음 3가지를 갖추고 있다. 첫째는 과거에 감사하고, 둘째는 미래의 꿈을 꾸고, 셋째는 현재를 설레며 산다(모치즈키 도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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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찬가, 말씀예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매해 마지막날은 감개무량(感慨無量)하지만 올해는 더욱 그러합니다. 말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2022년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해는 12월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로 끝내고, 내일 2023년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 시작인 첫날 1월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주님 성탄의 축복이 한해를 마무리 지으며 새해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성탄 축제가 계속되기에 끝도 좋고 새로운 시작도 좋습니다. 매해 마지막날 오늘 복음은 언제나 요한복음 서두 말씀인 로고스(말씀) 찬미가입니다.
무궁한 깊이의 말씀 찬미가는 하느님, 그리스도 예수님, 인간, 우주만물, 즉 모두의 신비를 알려 줍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절절히 깨닫게 하는 말씀 찬미가입니다. 본격적 말씀 찬미가의 자랑에 앞서 몇가지 기분 상쾌한 예화를 나눕니다.
1. 만93세 영원한 현역의 예전 안동교구장 두봉주교님(1929-)의 공동휴게실 게시판에 붙은 투박한 친필 성탄 축하 카드가 반가웠습니다.
“최원장님과 공동체!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성탄되시고 그리고
멋진 새해 되십시오.”
‘멋지다’라는 말마디가 참 좋은 우리말입니다. 영어로 번역한다면 ‘grace(우아함, 자비, 친절, 호의, 은혜)’가 좋을 듯 하다는 진토마스 신부님의 의견도 생각납니다.
2. 역시 70대 초반의 영원한 현역, 화순수도원 분원장인 김종필 뽈리카르포 신부의 장문의 성탄 카드도 신부님의 순수와 열정을 만날 수 있어 기뻤습니다.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성경통독 8일 피정은 올해 12월 말로 제110차가 진행될 계획입니다. 아무쪼록 육화하신 주님 사랑으로 청안하신 중에 2022년을 잘 마무리하시고, 계묘년, 2023년을 새 희망과 복으로 맞이하길 기도합니다.”
3. 요즘 제 고백성사중 보소 처방전 말씀은 동일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필리4,4).
써드리고 “웃어요!”란 붉은색 스탬프를 찍은 다음 조언입니다.
“연말연시 몇일동안 집중적으로 화내지 말고, 기쁨, 감사, 평화중에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보속입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축복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웃으며 명심하는 분위기가 됩니다.
4. 불세출의 가톨릭교회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노와 쌍벽을 이루는 불세출의 신학자 성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성 토마스의 지혜와 사랑>이라는 신간 소책자를 구입했습니다. 다음 엮은이의 머리말 부분에서 웃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자층이 너무 얇아 겨우 300명 팔리는 것도 보장받지 못하오니, 가능하다면 원고는 무료로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료로 허락받아 출간된 책이며, 다음 애제자 수련수사에게 준 권고 말씀이 좋아 나눕니다. 잠시 나누기 전, 전에도 나눴던 감동적인 성인의 일화를 나눕니다. 세상 떠나기 얼마 전 경당에서 성인과 십자가에 못 박힌 분과의 대화를 동료 수사가 엿들었습니다.
-예수님;“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서 참 잘 말했다.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
토마스가 주님께 드린 답변은 예수님의 친구들이자 제자들인 우리 역시 언제나 그분께 말하고 싶은 그런 답변이었습니다.
-토마스;“당신 아닌 어떤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Nothing but youself, Lord!)”-
얼마나 멋진 답변입니까! 아마 우리 모두의 답변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얼마나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의 삶을 열망했는지 깨닫습니다. 다음은 토마스 성인께서 사랑한 수련수사에게 준 충고입니다.
- 수련자 요한에게
1.대담하게 바다로 나가려 들지 말고 오히려 실개천을 통해 이르려고 해야 한다. 즉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2.더디 말하기 바라고, 저녁 늦게 대화방 같은 데를 드나들지마라.
3.양심의 순수성을 언제나 소중히 여겨라.
4.기도에 중단없이 전념하라.
5.지혜의 향연에 참여하고 싶거든, 독서실에 수집되어 있는 현인들의 저술을 사랑하라.
6.모든 이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라.
7.남들의 일에는 깊이 끼어들지 마라.
8.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말지니, 그것은 경멸을 낳기 쉽고, 또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9.결코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그런 담화에 끼어들지 마라.
10.무엇보다 할 일 없이 배회하지 마라.
11.성인들과 훌륭한 사람들의 모범을 본받는 일을 건너뛰지 마라.
12.말하는 이가 누구든 개의치 말고, 들은 바 좋은 내용을 마음속에 새겨 두어라.
13.읽고 듣는 내용을 이해하도록 힘써라.
14.의심스러운 일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두어라.
15.그릇을 채우듯 ‘정신의 서가(書架)’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정리해 두어라.
16.네 힘에 겨운 문제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마라.
이런 방향을 정하고서 네 평생을 두고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에서 유익한 결실들을 내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바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형제 토마스 수사가.-
얼마나 겸손하고 친절하고 자상하고 성실한 ‘말씀의 사람’인지 참으로 감동적인 가르침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서두는 요한복음을 요약하는 “말씀찬미가”입니다. 요한공동체에서 찬가로 불렀을 이 은혜로운 내용을 우리도 찬가로 불렀으면 참 좋겠습니다. 참으로 인간으로 태어났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니라,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랑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오늘 말씀 찬가가 말씀 예찬이 너무 은혜롭습니다. 말씀은 명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사입니다.
1.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2.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셨습니다.
3.세상 모든 것이 말씀이신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4.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생명의 빛입니다.
5.진리의 증언자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는 말씀의 빛을 반사는 반사체일뿐 결코 발광체가 아닙니다.
6.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7.말씀이신 그분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영광을 지니신 분입니다.
8.말씀이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9.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천명합니다. 말씀과의 일치를 통해 날로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 과제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평생 과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를 통해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날로 말씀이신 주님을 닮아갈 때 자유롭고 부유하고 행복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인간의 불치병과도 같은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본적 처방도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말씀 공부가 참사람이 되는데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의 말씀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마지막 때입니다. 안팎으로 그리스도의 적들의 공격입니다. 가면을 쓰고 공격하기에 분별의 지혜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날로 진리 말씀이신 그분과 날로 깊어지는 앎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늘 진리의 말씀이신 그분과의 일치를 깊이하는 것이 적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처방입니다. 진리의 연인, 진리의 협력자, 말씀의 사람으로 시종여일,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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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저 사람이었음에>
사람으로 났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보이는 겉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도
오롯한 사람 말입니다
사람이지만
사람 아닌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 아닌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지만
사람일 수 없는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일 수 없는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지만
사람이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이고 싶지 않은 때도
그저 사람이고자
애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사람이고
그래서 다시 사람이고
그래서 새로 사람입니다
아직은 사람이게 하신
다시 사람이게 하신
새로 사람이게 하신
하느님과 벗님들과 나에게
정성스럽게 마음 모아
한해 마무리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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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전투기 추락에서 배운 신앙의 교훈
굿뉴스 게시판 – 강만연. 2022. 12. 31. 02:51 ㅣNo.159855
신문에서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기사 내용은 12년 전 빠뜨린 ‘너트 하나’가 원인이 돼 전투기가 추락했다는 기사입니다. 이런 내용은 실제 미 항공우주국 나사에서도 일어난 일입니다. 이번에 본 기사에서는 좀 더 색다른 걸 느꼈습니다. 기사를 읽고서 이 기사를 신앙에 접목해봤습니다. 추락한 전투기는 420억 짜리 전투기였습니다. 너트 하나가 420억 짜리 전투기를 추락시킨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 노후가 돼 문제점이 노출이 될 수 있겠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너트가 체결되는 정비공의 실수가 큰 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트가 체결되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연료가 공급되긴 됐지만, 그게 정상적인 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문제는 안고 있었지만 그 문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비정상적인 연료공급이 누적이 돼 결국에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데 따른 결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많은 기계장비에는 너트가 많이 들어갑니다. 문제는 이 너트가 어떤 부분의 너트냐가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바로 전투기의 엔진에 연료를 공급하는 핵심 부분에 있어야 하는 너트였습니다. 가령 단순한 부분에 있는 너트의 결합이 문제가 됐다면 그 부분만 나중에 문제점이 발생했다면 다시 점검 후에 원인을 해결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 크게 문제가 될 소지는 없는 것입니다. 사고 전투기의 너트는 전투기의 심장부와 같은 엔진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구동축과 관련된 너트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며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 너트가 우리 신앙인에게는 무엇과도 같은 것이며 이 기사가 신앙인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제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너트의 결합인 체결입니다. 체결이라는 단어를 잘 묵상하고 싶습니다. 전투기에는 하나의 볼트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볼트와 너트가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렇게 다 완전하게 체결이 잘 돼야 전투기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전투기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우리가 말하는 신앙생활에 비유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볼트와 너트가 체결된 전투기처럼 우리도 체결돼야 할 게 많습니다. 가령 기도와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자로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지켜야 하는 의무 등 갖가지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사고가 난 전투기에서 너트처럼 우리 신앙의 핵심과도 같은 마치 전투기 엔진에 연료공급장치 부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너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신앙인에게 기도와 사랑이 없다면 12년간 비행 후 2년간 휴지 시간을 가지며 600시간을 비행하면서도 문제가 한동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문제는 그게 누적돼서 더 이상은 그 문제가 단순히 보완되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갔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결과는 추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기도와 사랑실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당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사랑실천은 하느님과 결합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입니다. 지금은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전투기가 마치 12년을 비행해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느낄 수 없지만 언젠가는 하느님과 결합되고 합일이 이루어지는 이런 신앙의 기초를 소홀히 하게 되면 전투기가 추락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지금은 순항을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추락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단 하나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비행을 하는 중입니다. 이 비행을 잘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뭔가 문제점이 있는지 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검을 게을리하게 되면 바로 이 전투기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은 자명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사랑실천은 너무나 다 잘 알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와 관련해서 기도를 한번 잠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흔히들 잘못 이해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 하면 우리는 정해진 어떤 고정정인 형식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손을 하고 조용히 어떤 기도 공간에서 한다든지 하는 그런 형식을 취해야만이 기도생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게 기도생활의 전형이라면 아마도 돈보스코 성인은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돈보스코성인이 성인이 되는 조건을 심사할 때 부정적인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제기한 문제는 바로 성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전형적인 기도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돈보스코성인은 절대 성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는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돈보스코성인의 기도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도도 물론 하셨겠지만 그분은 그런 기도도 기도지만 삶으로, 행동으로, 사랑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몸으로 행동으로 기도를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도는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중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율법이라는 틀에 매여 정작 율법이 강조하는 사랑을 도외시하는 그런 행동 말입니다. 전형적인 기도를 기도라고 정의를 한다면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특정한 사람들 외에는 예를 들면 수도자와 성직자와 같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또 일부 열심한 신자를 제외하고는 신앙인의 가장 기본이라고 하는 이 기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어쩌면 무늬만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전형적인 기도생활만 기도로만 간주한다면 말입니다. 그와 같은 기도는 물론 신앙인으로 더없이 좋은 기도라 그런 기도도 해야 하지만 그런 기도 외에도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늘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그걸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작은 행동이 오늘날 같은 시대에는 또 하나의 훌륭한 기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이게 추락한 전투기 속의 너트와 같은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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