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를 수정하기 위해
가끔식 지난 글들을 읽습니다.
오타를 수정하여 읽는 성속은
글을 읽을 줄 아는 도량일 것입니다.
글을 쓴 사람은 생각을 읽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오타도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생각하면서 글을 쓰다보면
실타레처럼 헝클어진 의식이 정리가 됩니다.
나의 생각 노트는 수년 전부터 지금까지 온갖 생각들이
짧은 글로 메모되어 있습니다.
메모된 생각들이 글로 표현되는 순환을
독창적인 복음의 글로 쓰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여 쓴 글은
소중한 언약 신앙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전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단순히 마음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 열정을 가졌습니다.
말을 하듯 글을 쓰는 습관은
설교하던 버릇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설교대신 복음적인 글을 쓰면서
목사인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지난 글들을 읽어보면서
문득....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글의 대가들이 있지만
독창적인 복음의 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수 많은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인본주의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기독교 베스트 책들도
인본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가장 수준 낮은 책은 설교집이요,
대부분 설교문의 글은 바울의 복음 서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서재에 많은 책들 가운데
철없던 시절 배곯아가면서 사모았던 설교집부터 버리고 있습니다.
유명 목사님의 설교집도
쓰레기 봉투에 넣는데는 촌각의 말설임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생명의 샘을 성령의 감동으로 발견하는데
설교문으로는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단순히 설교를 하기 위해 쓰는 글이어서
성경의 중심을 모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요즘도 대형교회 유명세를 내세워 출판되는 설교집으로는
성경의 복음적인 이해를 전혀 할 수 없습니다.
얼마전 상생방송에서
"글의 멋"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상생방송 관계자와 기자들을 위한 강연이었지만
글의 멋을 위한 소중한 강연이었습니다.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상생방송에서 머무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개벽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서
개벽 사상이 허상이지만 역사와 종교 문화를 아우르는 독창성을 발견하였습니다.
독창성의 차이에서 개벽을 열강하고
또 수 많은 증산도의 신도들을 종교 집단화시켰습니다.
증산도의 열정은
다른 종교들과 비교해도 손색기 없었습니다.
평화 방송에서 천주교 신부나 수녀들의 성경 강의도 자주 듣는데
놀라운 것은 성경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분명하였습니다.
설교로 성경을 이해하는 기독교와는
그 수준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어떤 수녀님이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강의하는 것을 보았는데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흐름과 내용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일사천리로 하였습니다.
바울 서신을 단기간에 백 번 읽은 안목에 걸맞는 강의를
청산유수로 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짧은 본문으로 설교하는 CTS의 설교 방송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고
그 수준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가끔 동료 목사님이나 후배들을 만나면...
남북 이스라엘 왕조에 대해서 5분 안에 말해보라고 질문을 합니다.
거의 대부분....
눈알만 굴리며 빤히 쳐다봅니다.
설교한 내용도 설교하고 내려오면 금방 다 잊어 버리는데
어떻게 남북 왕조의 역사를 5분 안에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몸의 피가 흐르듯......
성경의 말씀이 마음의 새긴 글이 되어 복중유서하는 경지를 이루어야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지난 날 다산 교회 부교역자들이
저 떄문에 아주 곤경을 겪었습니다.
어느 날은 도피성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도피성 여섯개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단 동편에 르우벤 지파를 위한 므라리 자손의 베셀과,
갓 지파를 위한 므라리 자손의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게르손 자손의 바산 골란이 있고
요단 서편에는 유다 지파를 위한 그핫 자손의 헤브론과 에브라임 지파를 위한 그핫 자손의 세겜과
납달리 지파를 위한 게르손 자손의 갈릴리 게데스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1학년 1반의 기초적인 이해도 부족한데
무슨 설교를 하고 무슨 성경적인 문화를 생활 가운데서 만들어 갈 수 있겠느냐며
도전을 받고 매주마다 성경의 기초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공부하는 방식은 성경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일주일 동안 공부해서 다음 만나는 날에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지금 모르면 ....
영원히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야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교인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평생 설교하면서도 성경에 대한 기초가
뇌리일람표로 마음에 새겨져있지 않습니다.
실로 충격이요,
기독교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기초가 마음에 새겨져있지 않으면.....
성경에 대한 글을 복음적인 이해로 쓸 수 없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를 글로 쓸 수 있는 경지는
쉬운 것 같아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사고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짜집기 설교의 엉터리를 주일 강단의 설교로 도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편의 설교 안에
칼뱅의 개혁주의와 바르트의 실존신앙, 구속사와 알미니안과 기복과 무속의 인본주의 사상이
혼잡하게 섞여있습니다.
있어서도 있을 수 도 없는 일이
교회 성장과 구원의 메세지로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의 옷을 입고 선포되고 있습니다.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언서를 단기간에 백 번 읽어 보면......
여호와 경외하는 신앙이 생명의 샘이 되고 생명나무가 되어 잠언의 꿀물이 마음으로 흘러 넘칩니다.
바울 서신을 단기간에 백 번 읽어보면......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이 성령의 인치는 역사로 마음에 새겨져서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믿으지며 진실로 아멘하는 성령의 감동을 받습니다.
구약 성경을 다독하면......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는 말씀에 아멘하는
하나님 나라 참 언약의 백성으로 여호와의 산을 거룩한 성전의 영광으로 얻을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편지로 마음의 심비에 새겨지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원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거는 삶은
영생의 부활을 가진 구원을 얻은 하나님 나라 참된 성도입니다.
성경의 복음적인 이해로 복중유서하는 경지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비전이 아니라
구원의 실상을 이루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성경의 복음을 비전으로 설교하는 인본주의 이상가들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음의 살상으로 갖지 못한 거짓 증언자에 불과합니다.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는
구약 성경과 복음서의 내용을 뛰어넘는 생명의 복음, 그 자체입니다.
바울 서신을 애독하고 애독하면......
언젠가는 바울의 그리스도 이해로 장성한 경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복음적인 이해를 독창적인 글로 쓰는 것이
여수룬 언약문화 공동체의 사역입니다.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성장하여
시편 기자처럼 언약의 정수를 녹여낸 생명의 참된 기도를 하고.....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원의 말씀으로 온전히 담아내는 글을 쓰는 경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카페의 글은 말씀묵상의 흔적이요, 그 스캐치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그 깨달은 바 그 복음적인 글 한줄 쓰지 못한다면
불신자를 비롯하여 안티 기독교와 사이비와 이단과 다른 종교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