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에서 만남의 광장으로 가는 길 중간 오른 편 길옆,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 선생 유허비(遺墟碑).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艮齋(간재)田先生(전선생)遺墟碑(유허비)
先生(선생)의 諱(휘)는 愚(우)요 字(자)는 子明(자명)이요 號(호)는 艮齋(간재) 또는 臼山(구산)
이며 潭陽(담양) 田氏(전씨) 이시니 聽天(청천) 翁(옹) 在聖(재성)과 南原(남원) 梁氏(양씨)는
그 考妣(고비) 이시다. 憲宗(헌종) 七年(칠년) 辛丑(신축) 八月(팔월) 十三日(십삼일) 卯時(묘시)
에 全州(전주) 靑石洞(청석동)에서 誕生(탄생)하시어 八十二(팔십이)歲(세)인 壬戌(임술) 七月
(칠월) 四日(사일) 酉時(유시)에 扶安(부안) 界火島(계화도) 繼華齋(계화재)에서 逝去(서거)
하시니 遺命(유명)에 따라 艮齋田處事之柩(간재전처사지구)란 銘旌(명정)으로 益山(익산)
玄洞(현동) 後麓(후록)에 安葬(안장)하니 加麻(가마)한 門人(문인)이 二千餘名(이천여명)에
達(달)하다. 先生(선생)은 天資(천자)가 淸粹(청수)하시고 氣宇(기우)가 莊重(장중)하시며
七八歲(칠팔세)에 文理(문리)가 驟進(취진)하여 九歲(구세)에 梅花詩(매화시)의 驚人句(경인구)
를 지으셨고 十五歲(십오세)에 四書(사서)와 五經(오경)을 遍讀(편독)하시고 弱冠時(약관시)에
이미 筆法(필법)과 文章(문장)으로 名聲(명성)이 國中(국중)에 떨치셨으며 全齋(전재) 任憲晦
(임헌회) 先生(선생)에게 師事(사사)하심으로부터 性理學(성리학)에 더욱 精通(정통)하시다.
當時(당시) 朝廷(조정)에서는 甲午(갑오)에 司憲府(사헌부) 掌令(장령)을 除授(제수)하고 同年
(동년) 六月(유월)에 順興府使(순흥부사)를 除授(제수)하고 甲辰(갑진)에 通政大夫(통정대부)
秘書院丞(비서원승) 等(등)을 除授(제수)하였으되 모두 不就(불취)하시고 오로지 學問(학문)에
만 힘쓰셨다. 乙巳(을사) 僞約(위약)이 締結(체결)되자 先生(선생)께서는 五賊(오적)의 무리를
斬戮(참육)하여 社稷(사직)을 붙들고 國紀(국기)를 바로잡을 것을 再三(재삼) 上疏(상소)하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亡國(망국)의 恥辱(치욕)을 當(당)하니 先生(선생)께서는 泣血
(읍혈) 痛憤(통분)하시어 寢食(침식)을 잃으시다. 罔僕(망복)의 大義(대의)를 지켜 西海(서해)의
暀登島(왕등도) 群山島(군산도) 界火島(계화도) 等地(등지)에 隱居(은거)하시면서 世道(세도)를
挽回(만회)코저 後學(후학)을 育成(육성)하여 抗日精神(항일정신)을 鼓吹(고취)하고 民族正氣
(민족정기)를 振作(진작)하셨으며 性師心弟(성사심제) 等(등) 發前未發(발전미발)의 學說(학설)을 담은 百餘卷(백여권)의 尨大(방대)한 著書(저서)를 남기시어 近世(근세) 儒學(유학)의 宗匠
(종장)으로 百世(백세) 淸風(청풍)을 이루시다. 이에 先生(선생)의 道學(도학)과 節義(절의)를
길이 追慕(추모)하고자 儒道會(유도회) 全羅北道本部(전라북도본부)에서는 同志諸賢(동지
제현)의 協助(협조)를 얻어 先生(선생)께서 誕生(탄생)하신 이고장에 碑(비)를 세우다. 이 事業
(사업)의 盛擧(성거)에 敬賀(경하)하며 여러분들의 請(청)에 따라 삼가 執筆(집필)하다.
孔夫子(공부자) 誕降(탄강) 二千五百二十七年(이천오백이십칠년) 丙辰(병진) 四月(사월) 日(일)
全羅北道(전라북도) 知事(지사) 黃仁性(황인성) 謹撰(근찬)
儒道會 全羅北道本部 委員長(유도회 전라북도본부 위원장) 宋成鏞(송성용) 謹書(근서)
---------------------------------------------------------------
덕진공원은 1978년 4월, 4만5천 평의 규모로 조성된 도시공원이다.
외지에서 오는 사람은 전주IC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팔달로(八達路) 변에 위치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곳 덕진 연못의 역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나는데 전주 땅의 완산부
(完山府)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쌓은 것으로, 전주가 삼면(三面)이 둘러싸인
분지이나 북쪽만 열려 있어 땅의 기운이 낮아 제방(堤防)으로 이를 막아 지맥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만들었다.
전주 동쪽의 건지산(乾止山)과 서쪽의 가련산(可連山)사이가 허(虛)하여 이를 잇는 곳에다
풍수지리를 따라 덕진제(德津堤)라는 둑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공원은 둑이 있다 보니 고려시대당시 만들어진 자연호수로 전체 공원면적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의 연못의 형태는 연못 중앙에 위치한 연화교(蓮花橋)를 중심으로 보트장과 연꽃으로
동서를 가르고 있으며 연못의 주위에는 수양버들과 벚꽃나무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덕진 연못의 풍광(風光) 중에서 압권(壓卷)은 무엇보다도 연꽃이라 할 수 있다.
전주에서는 예로부터 ‘부성삼화(府城三花)’하는 말이 전해 온다.
말 그대로 예전에 전주가 전주부성(全州府城)이었던 시절에 아름다운 꽃으로 유명하였던
세 곳을 말하는데 동고산(東古山=僧岩山)의 진달래, 다가산(多佳山)의 입하화(立夏花=여름의
시작 무렵 피는 이팝나무)와 함께 덕진 연못의 연화(蓮花)를 말한다.
덕진공원의 연꽃은 매년 7~8월경 절정을 이루는데 연화정(蓮花亭)과 연화교가 어우러져
전주 팔경(八景)의 하나인 ‘덕진채련(德津採蓮)’이라고 하여 아름다운 정경을 만들어 낸다.
‘덕진채련(德津採蓮)’은 완산(完山) 팔경의 하나로서, “풍월정(風月亭)에 앉아 저녁노을과
달빛을 끼고 뜸부기 우는 호면(湖面)의 피리 소리 실은 어화(漁火)에 젖은 채 맞은 편
승금정을 내려다보는 덕진 연못의 풍경”을 말한다.
덕진공원에 가면 호수와 푸른 잎사귀들과 크고 작은 연꽃들을 머금고 있는 바람을 만날 수
있다. 어느 계절에 찾아도 운치 있는 곳이지만 봄부터 여름까지 유독 빼어난 경치를 자랑
한다. 어둠이 내린 덕진공원은 더욱 낭만적으로 변신한다. 분수 퍼포먼스와 영상에 음악이
더해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음악분수쇼’가 열린다. 음악이 흐르면 오색조명을 받은
분수가 꽃처럼 피어나는 분수쇼는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해 사랑 고백이나 생일 축하 등을
할 수 있는 ‘이벤트데이’행사도 진행한다.
예전부터 전주사람들은 단오(端午)때가 되면 이곳에 모여들어 창포물에다 머리감기,
그네뛰기 등 단오풍습을 즐기었는데 지금도 덕진공원에서는 연인(戀人), 가족을 비롯한
시민들이 함께 만나 평안과 건강, 나아가 이번 해에도 풍요롭기를 기원하는 다양한 민속행사
단오축제마당이 펼쳐진다.
매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약 50만 명 이상에 이를 정도로 이곳은 전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