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북도 치열한 싸움터였던 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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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2:37조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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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싸움터였던 중원
자동차와 기차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경상좌도에서는 죽령을 지나 충청도의 충주로 통하고, 경상우도에서는 조령을 지나 충주를 거쳐 갔다. 두 고개 모두 충주에 모여서 물길이나 육로로 한양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충주는 조선의 한복판이고,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지형이 중국의 형주(荊州) 또는 예주(豫州)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 중원이었다.
충주에서 서쪽으로 달천을 건너면 속리산이고, 이 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한 가지가 음성군 음성읍 동읍리 서편에 우뚝하게 솟아 할아비성 또는 할미성이라 불리는 가막산인데, 이 산은 음성읍의 부용산으로 이어졌다. 다시 그곳에서 뻗은 산줄기 하나가 지금은 중원군 가금면이 된 금천에서 그쳤고, 하나는 가흥으로 이어졌으며, 나머지 산기슭은 달천 서쪽으로 빙 돌아갔다. 당시의 땅은 오곡과 목화 가꾸기에 알맞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고추와 담배로 이름이 높으며 토질이 아주 기름지고 산골 사이에 마을이 펼쳐져 있다.
이곳 중원은 고구려 때는 국원성이라 불리다가 신라가 이곳을 빼앗은 다음 진흥왕 때는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귀족들과 6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한 다음 경덕왕 때 이 지역을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쳐 불렀다. 전설에 따르면, 남에서 오고 북에서 오던 두 스님이 강가에서 마주쳐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두 스님은 남쪽 끝과 북쪽 끝에서 한날한시에 떠났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곳이 이 나라의 한복판임을 알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 탑이 중앙탑이다. 중앙탑은 중원 문화의 상징이며 중원 문화권이라는 이름으로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원탑
남북국시대의 중앙부에 세워졌다고 하여 ‘중앙탑’이라고도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석탑 중 최대 규모이며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중원탑에서 장호원 쪽으로는 선돌마을이 들어앉아 있다. 비석이 서 있어서 선돌마을로 불리는 이곳에 국보 제205호로 지정된 중원고구려비가 있다. 이 비석은 1979년 2월 25일 이전까지는 그저 옛날부터 서 있던 입석에 불과했는데, 이 고장의 향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예성동호회원’들이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무래도 이 비석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동국대학교의 황수영 교수와 단국대학교의 정영호 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조사단이 찾아온 것은 그해 4월이었다. 조사단이 높이 135센티미터의 돌을 살펴보고 잔뜩 낀 이끼를 조심스럽게 벗겨내자 희미하게나마 수많은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글자들은 오랜 비바람에 시달려 거의 닳고 문드러져 있었다. 430자가 넘는, 고졸하게 음각한 예서체의 한자들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돌이 고구려시대의 비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때까지 밝혀진 고구려의 비석이라고는, 중국 땅이 되어 버린 만주의 통구에 있는 이른바 광개토대왕릉비 하나뿐이었다. 따라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이 돌은 나라 안에서 오직 하나뿐인 고구려 비석으로 남게 되었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광개토대왕릉비와 형태가 비슷한 이 비석을 조사한 학자들은 거기에 새겨진 글자를 읽음으로써 비가 세워진 해를 알 수 있었다.
조사단은 고구려가 남쪽으로 뻗어 내려왔던 시기와 그 범위를 확실히 단정할 수 있게 되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하고, “이런 게 남아 있었다는 것은 신의 가호”라고까지 말하였다.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고구려와 신라가 충돌하였으며 또 신라와 백제가 모의하여 고구려와 싸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역사의 숨결이 스며 있다’는 자세로 지역의 역사를 살폈던 사람들의 값진 결과가 고구려비의 발견이었다.
선돌마을에는 국보 제205호로 지정된 중원고구려비가 있다. 이전까지는 그저 단순한 입석에 불과했으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사 끝에 고구려시대의 비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전까지 밝혀진 고구려의 비석이라고는 만주의 통구에 있는 이른바 광개토대왕릉비 하나뿐이었다. 이후 이 돌은 나라 안에서 유일한 고구려 비석으로 남게 되었다. 규모는 조금 작지만 광개토대왕릉비와 형태가 비슷하며,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치열한 싸움터였던 중원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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